2008년 8월 21일 목요일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지난 글에서는 이박사의 허풍 실력을 다뤘습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서는 이박사에 대한 괴이한 이야기들을 짤막하게 몇 번 다룬바 있습니다. 하나 같이 상식을 벗어난 희한한 이야기들이다 보니 반응도 제법 좋더군요.


그런데 40년대 후반의 조선은 매우 어수선한 곳 이었던지라 이박사가 아니더라도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인물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경 임정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 되시겠습니다.

1947년 9월에 이청천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한국 정부 수립 이후의 국군 창설에 대해 자신의 구상을 담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은 조금 긴 편인데 주한미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주간보고서에 실린 덕에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청천은 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대동청년단을 주축으로 30만명 규모의 한국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차피 구상이니 병력 규모가 좀 많은 것은 봐 줄 만 합니다.

표1. 이청천이 주한미군정에 제안한 미래의 한국군 규모

보병연대
차량화연대
항공연대
부대 숫자
15
2
1
장교
10,200
1,200
1,560
부사관/사병
240,000
30,000
10,200
총계
250,200
31,200
11,760
[표 출처 : “Letter from General Lee ChawngChun to General Hodge”(1947. 9. 18), 『在朝鮮 미군 사령부 주간보고서 – 4(G-2 Weekly Summary, HQ. USAFIK)』, 일월서각, 1986, 87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편지에 포함된 이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장비 목록입니다. 이청천이 제시한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군사장비의 수량은 대략 이랬다고 합니다.

표2. 이청천이 주한미군정에 제안한 미래의 한국군 장비 내역

보병연대
차량화연대
항공연대
소총
173,000
15,000
0
자동소총
58,000
1,000
0
권총
62,500
0
3,500
경기관총
1,700
950
0
중기관총
2,000
200
0
12.7mm 기관총
1,150
130
0
60mm 박격포
1,100
80
0
81mm 박격포
550
50
0
57mm 대전차포
400
130
0
75mm 대전차포
130
20
0
75mm 야포
0
40
0
105mm 야포
420
100
0
155mm 야포
210
30
0
경전차
1,600
220
0
중형전차
270
40
0
차량
30,000
6,000
6,000
정찰기/연락기
60
10
200
전투기
0
0
380
공격기
0
0
230
폭격기
0
0
140
[표 출처 : “Letter from General Lee ChawngChun to General Hodge”(1947. 9. 18), 『在朝鮮 미군 사령부 주간보고서 – 4(G-2 Weekly Summary, HQ. USAFIK)』, 일월서각, 1986, 87쪽
]

다른 것은 둘째치고 30만 규모의 군대에 전차는 2,000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게다가 공군력의 규모도 장난이 아니지요. 그리고 군 편제도 매우 요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병연대와 차량화연대, 그리고 항공연대의 편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름만 연대고 실제로는 사단 급 편제입니다. 항공연대의 규모도 굉장히 커서 1개 연대에 저 많은 항공기를 몰아넣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번역상의 실수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저런 요청을 하면 미국이 순순히 저 막대한 양의 장비를 원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거창한 편지를 보낸건지 궁금하더군요.

이청천이 무슨 생각에서 저런 거창한 제안을 한 것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청천은 정규적인 군사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국가정책 단위의 군사적 식견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저런 무리한 발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강대국의 위협이라는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 예전에 한번 언급했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편제도 이것과 비슷한 어딘가 엉성한 면을 보여주고 있죠. 아무래도 독립운동한 양반들은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2008년 8월 20일 수요일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 - Gerald Gliddon

글을 쓰는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고르는 것은 꽤 위험한 행위 입니다. 유명한 만큼 기존에 명성을 날리는 수많은 저작들이 있고 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경쟁자들이 즐비하니 만큼 상당한 수준이 아닌 이상 쉽게 주목 받지 못하고 묻힐 가능성이 많지요. 이런 점은 군사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2차대전사에 있어서 노르망디 전역이나 벌지 전투를 다루는 서적은 무수히 많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독창적인 책은 상대적으로 적고 종이나 낭비하는 지루하고 개성 없는 저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차 대전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경우를 들라면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솜(Somme) 전투일 것 입니다. 이 전투는 영국군 수뇌부의 어리석은 지휘로 인한 가공할 규모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전차가 최초로 실전 투입된 전투로도, 그리고 이후 수개월간 이어진 처절한 격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 대해서는 영어권과 독일어권에서 많은 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요즘도 꾸준히 관련 서적들이 새로 출간되거나 재발간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평이한 서술방식으로는 주목을 받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7년에 처음 발간 된 이 책,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는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솜 전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2000년 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연대기순의 평이한 기술을 피하고 대신 전투가 벌어진 각 지역을 단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저자인 Gerald Gliddon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좋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첫 발간 당시의 서평은 많이 읽어 보지 못 했지만 저자가 취하고 있는 참신한 접근 방식은 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저작은 솜 전투에 대해 개괄 이상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꽤 유용한 참고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의 서술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 위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amel 항목을 보면 Hamel이라는 지역에 대해 지리적인 개괄을 한 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연대기 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공간 중심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양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점도 좋습니다. 또 책의 뒷 부분에는 솜 전투의 경과를 시기별로 요약해 놓았는데 이것도 꽤 유용합니다. 매일의 기상상태와 온도가 적혀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부록으로는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는데 평범하지만 정리가 잘 돼서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반대로 단점이기도 합니다. 공간 위주의 서술을 하다 보니 내용을 지명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솜 전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읽는 다면 내용 정리가 제대로 되기 어렵지요. 즉 솜 전투에 대한 개설서로는 부적합 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서술이 철저히 영국군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저자는 각각의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놓았지만 독일 측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많은 책이라 1차대전 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2008년 8월 19일 화요일

이박사의 허풍실력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 인데다 꽤 괴상한 감각을 가진 도박꾼이었습니다. 보통 선수들끼리 한판 벌인다면 상대방이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건드려서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이박사는 그런 상식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일화는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박사 : 반대로, 우리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남한의 국민들 뿐 만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의 생명도 책임지고 있소. 최근 25만에서 30만 사이의 잘 무장된 공산군이 공격 준비를 마쳤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공산군은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4문의 아주 큰 대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오.

로버츠 준장 : (해주에서 서울까지는) 44마일이나 됩니다! 저는 그런 대포가 있다는 이야길 처음 듣습니다.

President : On the other hand, from the Korean point of view, we are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the Korean people in the south as well as in the North. We are informed that some red army from 250,000 to 300,000 well equipped, are ready to attack. They have four big gun that when they are fire them from Haiju the shells will land in Seoul.

Gen Roberts : That is 44 miles! I have not heard of this.

「Conference at Capitol, August 12, 1949」, 『RG 338,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 1949~53 Box 12』

이승만은 1950년 이전 군사원조를 요청할 때는 제정신과 광기를 오락가락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 경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 받는 로버츠가 이승만의 저런 허풍에 속아넘어갈 리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게다가 70km나 날아가는 장거리포(!)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승만의 이런 황당한 허풍은 종종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을 혐오하게 되는 역효과도 동반하긴 했습니다만.

가끔 이박사의 이런 황당한 측면을 패러디 해서 한국판 뮨하우젠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2008년 8월 15일 금요일

빈 - 첫째날

간만에 여행 이야길 올립니다. 이번엔 좀 짧습니다.

잘츠부르크와 린츠 구경을 마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유레일도 만료되었고 귀국하기 전 까지 빈에서 삐대기로 결심했습니다. 원래는 빈에 이틀만 머무른 뒤 뮌헨으로 돌아가 뮌헨의 박물관 구경을 하려 했는데 막상 오랫만에 빈에 도착하니 이 매력적인 도시를 그냥 떠날 수 가 없더군요. 참고로 5년전 빈에 갔을 때는 이 근사한 도시에 일주일간 머물렀습니다.

간만에 도착한 빈의 인상은 좀 썰렁하다... 였습니다. 역시 막차를 타고 도착해서 그런지 서부역은 썰렁하더군요.



대충 역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빈에서의 첫째날이 시작이군요.

대략 8시 정도에 일어나 다시 서부역으로 돌아가 3일뒤 탑승할 뮌헨행 야간 열차표를 예약한 뒤 다시 Wien Karte를 한 장 샀습니다. 고맙게도 이 카드의 유효기간은 3일 이더군요.

8시 부터 10시까지는 어슬렁 거리며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사실 5년 전에 일주일간 머무르긴 했지만 구경 못한 박물관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서 3일 동안 어딜 구경하고 어딜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되더군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은 5년전에 구경했었는데 한 번 더 구경할 까 하다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어시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딜 갈 것인지 정했습니다. Albertina 미술관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마침 아래와 같은 전시도 하고 있겠다 구미가 당겼습니다.


점심 먹는 것은 포기하고 부지런히 Albertina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Albertina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왜 빈 첫째날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냐면 바로 이 Albertina 미술관 때문이었습니다. 대략 10시 30분에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되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군요. 전시물이 방대해서 하루를 다 털어넣어야 했습니다. 특히 특별전시인 바틀리너 컬렉션의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 했습니다. 바틀리너 컬렉션을 구경하고 나니 사실상 다른 전시물을 구경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 멋진 그림이 많았는데 당연히 사진 촬영은 허가가 되지 않아 찍지를 못했으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도록을 구매하고 싶었는데 이제 예산이 달랑달랑 한지라 엄두도 못 내겠더군요.

결국 하루 일정은 이렇게 간단히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점 한 곳을 들렀습니다. 바로 5년 전에 들렀던 발터 클뤼겔 선생의 헌책방입니다.


오랫만에 다시 이곳에 들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 서점은 군사서적을 비교적 많이 갖춰놓고 있는데다 가격도 저렴하게 책정해 놓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Das Reich 사단사의 경우 전부 다 해서 100유로 밖에 안하더군요. 가격표를 본 뒤 제가 저것들을 낱권으로 구하는데 쏟아넣은 돈을 생각하고 속이 쓰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5년전 여름에 처음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성능이 구린 스캐너로 스캔해서 그런지 그림이 좀 그렇군요.


물론 주인장이신 클뤼겔 선생도 정정하셔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 한장 찍기를 청하니 마지 못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너무 반갑긴 했지만 노인분을 괴롭힌 것 같아 양심에 찔리더군요.


음. 그러고 보니 이번은 내용이 좀 부족한 것 같군요. 약간 썰렁한 감이 없잖으니 저녁 식사 사진으로 부족분을 보충하겠습니다.


2008년 8월 13일 수요일

간만의 짐바브웨 이야기

그루지야 사태는 정말 정신없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휴전에 동의했다더니 몇 시간 안돼서 러시아군이 츠빌리시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는군요.

카프카즈쪽 이야긴 정신이 없으니 간만에 짐바브웨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이쪽도 꽤 질질끌고 있습니다만 그루지야 보다는 상황 파악이 조금 되는 것 같습니다.

Mugabe hopes to cling to power by agreeing coalition deal with breakaway MDC faction

Reports of Side Deal in Zimbabwe

Robert Mugabe 'strikes deal to exclude Morgan Tsvangirai'

그루지야 사태가 터져서 짐바브웨에 대한 관심은 약간 덜해진 것 같습니다. 역시나 무가베는 독재자들이 잘 써먹는 야당 분열공작을 펼치고 있습니다. 야당을 분열시켜 가지고 노는 것은 남조선에서도 익히 봐오던 것이라 조금 반갑기까지 하군요. 최근의 언론보도를 보면 무탐바라(Arthur Mutambara)가 무가베에 붙어서 창기라이(Morgan Tsvangirai)를 고립시키려는 형국입니다. 아주 전형적이고 흔해빠졌지만 꽤 효과가 있는 수법이죠. 물론 창기라이를 지지하는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창기라이에게 권력을 넘기도록 무가베를 압박하고 있긴 합니다만 인간의 권력욕이란 무한하니 무가베가 어디까지 나갈지 궁금합니다.

짐바브웨 사태는 평소 개인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 그 추이가 흥미롭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잡설을 하나 풀어볼까 합니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2008년 8월 10일 일요일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

다크나이트에 대한 감상

지난주에 올 여름 최고의 화제작인 ‘다크 나이트’를 봤습니다. 격찬을 받은 영화여서 그만큼 호기심이 더 했는데 다행히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근사한 영화였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기야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점을 먼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이미 ‘배트맨 비긴즈’에서 보여줬지만 놀란 감독의 배트맨 세계관은 팀 버튼의 세계관과는 달라서 현실적인 요소가 제법 강합니다. 특히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는 배트맨이 해외 출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이 고담시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과는 반대로 ‘다크 나이트’에는 홍콩이라는 실제 공간이 고담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병존하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공간묘사에 걸맞게 등장하는 배트맨의 적들도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초반부 은행 습격장면이나 영화 중반의 추격 장면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담시 SWAT팀의 존재는 마이클 만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약간 불만인 점도 있긴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액션 장면의 연출이 영화의 전반적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지만 중반의 추격 장면에서는 공간의 이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처리되어 마치 편집을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액션 장면의 연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다크 나이트’에서도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중요 등장인물인 하비 덴트의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매우 정상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하비 덴트는 약혼자의 죽음을 계기로 범죄자로 돌변하는데 삼류 신파극이 아닌 이상에야 이것은 한 인간을 극단적으로 변화시키는 동기로는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투 페이스도 꽤 매력적인 캐릭터여서 조금 더 잘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조커’입니다. 이미 많은 매체에서 조커 연기에 대해 히스 레저 최고의 연기 등으로 격찬을 했는데 훌륭한 연기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격찬이 어울리는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미친놈(!) 연기는 기본만 해도 그럴싸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 히스 레저의 연기도 기본 이상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판타지적 색채가 강한 팀 버튼의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소화했던 조커가 히스 레저의 조커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됩니다. 히스 레저의 연기에 대한 격찬은 그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덧 씌워진 후광효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네. 물론 히스 레저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여성 분들 중에는 극장을 나가는 분들도 조금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여성 보다는 남성들의 호응도가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2008년 8월 7일 목요일

Street of Fire도 속편이 나올까?

가끔 들르는 영화 블로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Albert Pyun Takes on 'Streets of Fire' Sequel?

예전에 비디오로 여러번 봤던 영화인데 과연 속편이 만들어 질지 궁금하군요. 미국 영화계 소식을 보면 유별나게 리메이크나 속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나오다 나오다 이런 영화도 속편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이 영화는 당시 거물이었던 월터 힐 감독이 야심차게 만들었으나 하필이면 그 해 혜성처럼 나타난 터미네이터의 그늘에 가려버린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구조는 엄청나게 단순해서 어린양 같은 아둔한 사람에게 딱 맞는 영화이기도 하죠. 줄거리라고 해봐야 폭주족이 예쁜 여가수를 납치해가니 그 여자의 전 애인인 주인공이 샷건 한자루 챙겨들고 가서 구출해 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왜 이런 단순한 영화를 여러번 봤느냐?

여주인공이 전성기의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었거든요. 요즘은 나카마 유키에(仲間由紀恵) 빠돌이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다이안 레인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속편이 나오더라도 다이안 레인은 나오지 않을테니 볼 일은 없겠군요.

럼즈펠드의 쪼잔함.

럼즈펠드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예를 들면, 럼즈펠드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유리그릇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했다. 럼즈펠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만약 자신이 누군가를 칭찬한다면 그때마다 사무실의 유리그릇에 동전을 하나 넣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유리그릇을 채우지 않기 위해 골몰했다.

Dale R. Herspring, Rumsfeld’s Wars : The Arrogance of Powe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47

아우. 쪼잔한 변태색휘...

2008년 8월 5일 화요일

Same Shit, Different Asshole

얼마전에 읽은 책에 꽤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그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다구치에 이어 일본민족기원론자로 알려진 인물은 잡지 '일본주의'에서 기독교를 공격했던 기무라 타카다로우(木村應太郞)였다. '일본주의'가 구미문화배격과 일본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쓰보이에게 황색인종은 열등하지 않다는 기사를 쓰게 하거나 일본인의 뇌가 크다는 미국 학자의 연구를 신나게 소개했던 것은 3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기무라가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를 발표한 것은 일한병합 다음해인 1911년이었다. 서문에서 거론했던 다음 문장은 내용과 집필동기를 잘 이야기 하고 있다.

"옛날 신무천황을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했다가 재난을 당한 학자가 있었지만 지금 대학의 많은 학자들은 그보다도 못하게 일본인의 기원을 남양원주민이라고 하거나 혹은 만주나 몽고의 미개한 야만인으로 기원을 삼거나 혹은 조선에서 도래한 인종이라고 하여 일본인종 열등기원론을 말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일본민족은 아시아나 남양의 '열등기원'이 아니라고 기무라는 말한다. 그는 제국대학 같은 곳은 '일본인종열등주의자' 및 '저능학자의 소굴'이라고 하면서 그에 비해 오히려 서양인의 일본인종관에는 “일본인을 아리안족이라고 하여 일본인의 우월성을 인정하는”경우가 있다고 칭찬한다.

기무라의 설은 성서나 그리스신화와 기기신화, 그리고 그리스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들어 그리스·아리안 민족이 동천(東遷)하여 일본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것 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자나기가 저승국에 간 것은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것이고, 가타카나의 'ナ'는 한자의 '十', 로마 숫자 'X'는 불교의 '卍',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고, 유태교나 기독교의 사상은 일본사상의 표절이다. 나아가 '다카아마노하라는 아르메니아'이고 오호누시노미코토는 구약성서의 요셉이고 신공황후는 조선반도가 아니라 이탈리아반도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무라에 따르면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상이나 포부가 비굴해져 일청·일로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이 지닌 역량을 지각한 듯하나 아직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민족의 태고사는 실로 세계 태고사거나 중심사"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 이었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조현설 역,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소명출판, 2003, 235~237쪽

※쓰보이 쇼우고로우(坪井正五郞)는 도쿄제국대학교수와 도쿄인류학회회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쓰보이 쇼우고로우의 학문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하십시오.

과연. 20세기 초 일본 우익들이 좀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졌다면 친일파들이 환단고기 따위를 만들어 정박아들을 현혹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인류학자들에 대한 기무라의 공격을 보자니 환빠들이 멀쩡한 역사학자들을 공격하는 걸 보는 듯해 쓴웃음이 날 정도입니다.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라는 부분은 한민족이 반도에 갇혀 대륙의 기상을 잃었다는 환빠들의 망발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죠.

집단적인 열등감을 이따위로 표출하는 걸 보면 일본의 저질우익이나 남조선의 환빠의 관계는 가히 Same Shit, Different Asshole인 것 같습니다.

미육군항공대의 공세에 대한 독일공군의 대응 : 1945년 2월 부터 5월 까지

보덴플라테Bodenplatte 작전으로 독일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사실상 붕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건 근성(???)의 독일공군은 끝까지 싸움을 계속합니다. 이 글에서는 보덴플라테 작전 이후 대충 정비를 마친 독일공군 주간전투기 부대가 항복까지 서부전선에서 미육군항공대의 주간 전략폭격에 맞선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945년 2월 1일, 독일본토방공을 담당한 제국항공군Luftflotte Reich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제1전투기사단1. Jagddivision 예하에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부대명
기 종
Stab./JG 7
Me 262
I./JG 7
Me 262
III./JG 7
Me 262
JGr 10
Fw 190
II./ZG 76
Me 410
Stab./JG 300
Fw 190
I./JG 300
Bf 109
II.(Sturm)/JG 300
Fw 190
III./JG 300
Bf 109
IV./JG 300
Bf 109
IV./JG 54
Fw 190
Stab./JG 301
Fw 190
I./JG 301
Fw 190
II./JG 301
Fw 190
III./JG 301
Ta 152
II./JG 3
Bf 109
Stab./JG 400
Me 163
I./JG 400
Me 163
II./JG 400
Me 163


편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상당수의 주간전투기 부대들이 보덴플라테 작전 수행을 위해서 제2전투기군단II . Jagdkorps으 로 이동한 뒤 심각한 장비와 인력의 손실을 입어 2월 초의 시점에서는 재편성 중이었기 때문에 제1전투기사단에는 저 정도의 전력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는 주저앉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덴플라테 작전도 심각한 손실을 내고 종결되었는데 승리의(!) 미국은 빌빌거리는 독일공군이 숨돌릴 새도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그나마 가용 가능한 전투기 부대들이 동부전선(이라고 해 봐야 독일 동부)로 몰려가는 통에 미군 전략폭격기 부대를 저지할 전력은 태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방공의 중핵인 대공포 부대도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전에 돌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독일공군은 지상부대 지원을 위해 110개 중대공포 포대와 58개 중형/경대공포 포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진전이 있었다면 JG 7과 KG(J) 54 두 비행단이 Me 262를 편제에 가깝게 보충 받았다는 정도였지만 전체적으로 우울한 상황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개선이었습니다. 2월 9일 미 제8공군은 1,296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합성석유공장과 주요 철도시설을 타격했는데 독일공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67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숫자 미상의 Me 262를 발진시켰습니다. 70대도 안되는 프로펠러전투기들은 미군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지 못했고 Me 262의 전과도 매우 신통 찮았습니다. 독일측은 제트기들이 8대의 B-17과 1대의 P-51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반대로 미군의 호위 전투기에 의해서 6대의 262를 잃었습니다. 이 손실은 모두 폭격기 부대를 개편한 KG(J) 54에서 나왔는데 이 비행단의 조종사들은 전투기 전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해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있었던 드레스덴 주간 공습에서도 독일공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 했습니다. 2월 14일 제 8공군은 1, 2, 3 항공사단 소속의 중폭격기 1,377대를 출격시켜 드레스덴과 켐니츠Chemnitz를 공격했습니다. 독일공군은 이에 대항해 JG 300과 301소속의 프로펠러전투기 146대와 수 미상의 Me 262를 출격시켰지만 B-17 한대를 격추하는데 그쳤고 손실은 20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1대의 Me 262였습니다. 2월 9일의 경우도 그랬지만 보덴플라테 작전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독일공군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두터운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2월 22일, 미 육군항공대는 클라리온CLARION 작전을 발동, 23일까지 독일 본토의 철도시설에 대한 집중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공격은 미 육군항공대가 1944년 10월 이래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전으로 일거에 독일의 교통체계를 붕괴시켜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날 독일공군은 이륙해봐야 일방적으로 학살당할것이 뻔한 프로펠러 전투기들은 아예 출격시키지 않고 JG 7의 Me 262 32대를 출격시켰습니다. 32대의 제트기는 2대의 B-17과 4대의 P-51을 격추시켰지만 피해도 커서 32대 중 6대가 격추됐습니다. 독일공군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철도청Reichsbahn은 폭격당한 철도망을 기적적으로 복구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전쟁의 결과에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못 했지만 말입니다. 25일의 공격에는 독일공군이 가용한 전투기부대를 모두 동원했지만 역시 성과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는 2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매일 1,000대 이상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고 독일공군의 저항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3월 2일에는 합성석유 공장에 대한 폭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I./KG(J)의 Me 262 14대와 JG 301, JG 302의 Fw 190, Bf 109, Ta 152 198대가 출격했는데 전과는 폭격기 3대와 전투기 5대 격추에 불과했고 오히려 Me 262 2대와 프로펠러 전투기 43대를 잃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2월~3월의 절망적인 전투 이후 미군의 호위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없는 프로펠러 전투기 부대의 출격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유일하게 이를 돌파할 수 있는 ME 262를 장비한 부대와 대공포대만이 꾸준히 미군을 상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공군의 전력 증강은 공군중장이 지휘하는 특이한 제트기 부대 하나가 새로 창설된 것 과 R4M 공대공 로켓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독일 공군의 제트기 운용 전술은 3월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3월 18일, 미 제8공군은 약 1,300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바이센베르거Weisenberger 소령이 지휘한 JG 7의 ME 262들은 R4M 공대공로켓을 대량으로 사용해 미군측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날 출격한 제트기들은 1대만 격추되었고 그 대신 6대의 B-17을 격추시켰으며 이 외에도 수십대의 폭격기에 치명적인 파손을 입혔습니다. 이날 전투는 미군측의 주목을 끌었고 3월 21일 둘리틀은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독일 공군의 제트기 부대가 위협적인 신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 군은 다음날부터 21일 까지 제트기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전투로 2~3월간 꾸준히 싸워온 JG 300과 301은 더 이상 대규모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특히 JG 301은 이 전투의 결과 2개 비행대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또 3월 22일과 23일에 걸친 비행장 공습작전으로 재편성 중이던 III./JG 54도 사실상 괴멸되어 더 이상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24일에는 JG 300의 돌격비행대대인 II.(Sturm)/JG 300과 III./KG(J) 54가 미군의 비행장 공습으로 괴멸됩니다. 특히 후자는 단 한차례의 공습으로 50대의 ME 262를 잃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서부전선의 독일 전투기 부대는 막대한 수의 항공기 뿐만 아니라 31명의 조종사가 전사 또는 실종되는 타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군도 비행장 공격에서 전투기부대를 중심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붕괴직전의 독일공군과 비교한다면 미약한 손실이었습니다.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독일의 기상상태가 악화되어 미 육군항공대의 주간출격은 제한되었지만 이미 붕괴된 독일공군에게는 숨돌릴 시간도 되지 못 했습니다. 미군은 30일과 31일 다시 주간폭격을 재개했고 31일에는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중폭격기 469대가 가세했습니다. 이날은 JG 7이 최대의 전과를 올린 날이었는데 Me 262들은 호위전투기 없이 비행하던 캐나다 공군의 폭격기들을 요격해 한대의 손실도 없이 11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독일공군의 상황은 전형적인 붕괴직전의 혼란 상태였습니다. 4월 9일 제국항공군 소속 전투기 부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부대
기종
보유/가동
부대
기종
보유/가동
I./JG 2
Fw 190
5 / 3
III./JG 26
Fw 190
35 / 15
II./JG 2
Fw 190
8 / 4
I./JG 27
Bf 109
29 / 13
III./JG 2
Fw 190
12 / 9
II./JG 27
Bf 109
48 / 27
Stab./JG 4
Fw 190
6 / 4
III./JG 27
Bf 109
19 / 15
II./JG 4
Fw 190
50 / 34
I./KG(J) 54
Me 262
37 / 21
III./JG 4
Bf 109
61 / 56
Stab./JG 301
Ta 152
3 / 2
Stab./JG 7
Me 262
5 / 4
I./JG 301
Fw 190
35 / 24
I./JG 7
Me 262
41 / 26
II./JG 301
Fw 190
32 / 15
II./JG 7
Me 262
30 / 23
II./JG 400
Me 163
38 / 22
Stab./JG 26
Fw 190
4 / 3
JGr.10
Fw 190
15 / 9
I./JG 26
Fw 190
44 / 16
JV 44
Me 262
30 / 15
II./JG 26
Fw 190
57 / 29
[표 출처 : Alfred Price, The Last Year of the Luftwaffe : May 1944 to May 1945, (Greenhill Books, 2001), pp.152~153]

4월의 전투에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거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이지 못 했습니다. 오직 제트기를 장비한 부대만이 최후까지 조직적인 저항을 했을 뿐 이것 조차도 미육군항공대의 호위 전투기 부대에 압도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4월 10일 미 제8공군이 1,315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을 때 독일측은 63대의 ME 262를 출격시켜 10대의 폭격기를 격추시켰지만 905대에 달하는 호위 전투기들은 착륙을 시도하는 제트기들을 공격해 27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독일 공군은 남은 전력을 남부독일과 체코로 이동시켜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 무렵 JG 1이 He 162로 장비를 교체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4월 19일의 전투는 ME 262 부대가 미 제8공군의 중폭격기를 마지막으로 격추한 전투가 되었습니다. 이날 제490폭격비행단은 6대의 B-17을 잃었는데 이들은 독일 공군의 제트기에 의해 마지막으로 격추된 미군의 중폭격기였습니다. 4월 25일 미 제8공군은 589대의 B-17과 B-24를 출격시켰는데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의 저항은 없었으며 6대의 폭격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습니다. 이것은 제8공군의 마지막 전략폭격 임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공군의 저항은 끝났습니다. 1945년 2월부터 5월까지 서부전선의 주간공중전은 미군이 독일 공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미군의 손실도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기간 중 미 제8공군을 중심으로 북서유럽에서 작전한 미 육군항공대의 항공기 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중폭격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14
63
72
1
대공포
157
164
77
4
기 타
25
39
41
2
총 계
196
266
190
7


2. 중형폭격기/경폭격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4
5
11
0
대공포
68
52
18
0
기 타
13
32
17
0
총 계
85
89
46
0


3. 전투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38
76
36
5
대공포
208
244
207
16
기 타
53
99
100
15
총 계
299
419
343
36


4. 손실 총계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56
144
119
6
대공포
433
460
302
20
기 타
91
170
158
17
총 계
580
774
579
43
[표 출처 :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Appendix 23]

여기에 지중해전역으로 구분되는 15공군등의 손실을 더하면 상당한 규모가 됩니다. 1945년 2월 시점에서 독일의 방공망은 붕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측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던 것 입니다.



참고서적
Donald Caldwell and Richard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Greenhill Books, 2007)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Roger Freeman, The Mighty Eight : A History of the Units, Men and Machines of the US 8th Air Force, (Cassell, 2000)
Werner Girbig, Start im Morgengrauen : Eine Chronik vom Untergang der deutschen Jagdwaffe im Westen 1944/1945, (Motorbuch Verlag, 1975)
Alfred Price, The Last Year of the Luftwaffe : May 1944 to May 1945, (Greenhill Books, 2000)
Edward B. Westermann, FLAK : German Anti-Aircraft Defenses, 1914~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