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31일 수요일

투표율이 제법 높게 나온 것 같다.

오전 일찍 투표를 했다.

솔직히 내일 아침 신문 머릿기사가 매우 궁금하다.

아니, 당장 오늘 저녁 뉴스부터가 궁금하다. 하필 이럴때 TV를 치워 버리다니!

신문들은 투표율이 낮다고 툴툴거리던데 주민 소환제만 도입되더라도 투표율은 올라갈 걸로 보인다.

뽑을 권리와 모가지 날릴 권리를 다 주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Ivan's War - Catherine Merridale

개인적으로 “러시아”라고 하면 풍기는 이미지는 뭔가 있어 보이는 나라, 문학과 예술의나라, 또는 이젠 망해버린 사회주의의 심장 등 무거운 것들이다.(사람에 따라 “헐값에 건드릴 수 있는 러시아 여자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볼 때 국내에서는 아직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냉전기간 동안 북한을 지원한 “악의 제국”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일 듯 싶다.
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다 보니 러시아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미국에 비해 극히 적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에서도 소련, 러시아의 희생과 기여는 평가 절하 돼 왔는데 수년 전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된 훌륭한 독소전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해 이런 인식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러시아 인’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책들은 국내에 제대로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도 2차 대전사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정작 소련에 대해 읽은 책들은 거의 대부분 거시적인 정책, 사회구조, 혹은 특정 전투를 다룬 딱딱한 것 들 뿐 이었고 그 전쟁을 치룬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

Catherine Merridale의 Ivan’s War는 이런 점에서 매우 반가운 서적이다.
Ivan’s War는 책의 제목인 이반(동성애자가 아니다!!!)으로 대표되는 소련인들이 전쟁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풀어 쓰고 있다.
Merridale은 수많은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 하고 기밀 해제된 문서 보관소의 일차사료들을 뒤지면서 쉽고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책을 써 냈다.

그리 긴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전투, 부상, 죽음, 전장의 일상, 귀환 그리고 사랑 등 인간이 전쟁에서 겪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거의 다루고 있다.

책에 나오는 소련인들(대부분 러시아인들 이지만 간혹 소수민족의 이야기도 있다)의 이야기는 전쟁 이후 공식화된 소련식의 ‘영웅’ 또는 독일이나 미국이 그리는 ‘잔혹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다.
소련인들 역시 다른 나라의 인간들 처럼 전투마다 공포를 느끼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전쟁과 군대라는 거대한 바퀴에 깔려 으스러질 뿐이다.
소련이 붕괴되기 까지는 결코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도 없었던 죄수부대 이야기나 소련 정부에 반항하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의 농민들, 조국을 위해 희생했지만 반역자로 낙인 찍힌 전쟁포로들, 승리한 조국에서 한몫 챙겨보고자 갑자기 애국자로 돌변하는 1943년의 빨치산 등 ‘정말로 인간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흔히 “러시아인의 야만성”이 원인으로 설명되는 1945년 독일의 대학살에 대한 러시아 인들의 입장도 흥미롭다.
많은 병사들이 독일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경외하던 독일에 대한 승리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러시아, 소련인들이 민족주의와 소련 정부의 선전과 함께 확대 재생산 됐는데 독일문화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퇴폐적인 문화로, 소련은 사회주의로 건강한 정신을 가지게 된 사회라는 인식을 가진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영국이나 벨기에가 아프리카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학살대상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가졌기 때문에 학살이 가능했던 것 처럼 소련인들도 승리를 거듭하면서 가지게 된 독일에 대한 우월감이 학살의 동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전쟁이 끝난 다음의 삶을 한 장을 할애해 다루고 있다.
1945년에 귀국한 병사들은 승리한 영웅들로 환영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귀국한 병사들은 아무런 환영 없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적을 무찌르고 승리했지만 고향에 돌아와 남은 것이 집조차 없어 구덩이를 파고 생활하는 아내와 자식들 이라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상이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안전을 해친다는 이유로 강제로 도시에서 추방된 사람이라면 과연 그 누가 승리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를 덮친 1946년의 대기근이 수많은 아사자를 냈다는 대목에서는 제 3자의 입장에서도 뭐라 말 할 수 없는 비참함이 느껴질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시아인들에 대해 단순한 감정(혐오감, 경외감 등등)을 느끼기 보다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거창한 ‘국가 전략’을 논하는 멍청이들이나 주석궁으로 탱크를 몰고 가자는 정신병자들을 볼 때 마다 이런 책들이 많이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책 마지막 부분을 치열한 격전에 펼쳐진 프로호로브카의 박물관을 방문했던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 있다.
매우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인용해 본다.

나는 러시아의 격전지였던 프로호로브카 박물관의 큐레이터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참전용사들이 박물관을 찿으면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들은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떨 땐 그냥 서 있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지요.”

2006년 5월 29일 월요일

솜(Somme) 전투와 영국 육군의 불운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

인간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다.
전쟁질도 인간이 하는 짓이라 그런지 패전, 또는 실패한 작전에서 더 많은 교훈이 얻어지는 모양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군에겐 솜(Somme) 전투가 거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꽤 유명한 군사사가인 하우스(Jonathan M. House)는 1차대전 직전의 영국군에 대해서 “신무기로 무장했지만 무기를 다룰 교리는 가지지 못한”군대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1차 대전 중반기 까지 영국군 장군들의 “무시무시”한 지휘를 보면 하우스의 지적이 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례로 1914년 8월 26일에 벌어진 르 샤토(Le Cateau)전투에서 영국군 포병은 보병을 근접 지원하기 위해서 전선 가까이에 포진했다. 유감스럽게도 영국 포병은 독일군이 관측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후방에 있던 독일군의 중포는 영국 포병을 일방적으로 학살해 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영국 포병들은 야포 42문중 25문을 내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영국군 대규모 육군을 유지해 본 경험이 전무했으므로(심지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1차대전과 같은 전쟁은 국가적으로 생소한 경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피스(Paddy Griffith)는 영국육군이 1915년 까지도 제대로 된 공격교리가 없어 프랑스군의 교리를 도입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차 대전 발발 이전 영국육군에서는 “현대전에서 화력의 증대로 밀집대형의 제파공격은 비효율적이다”라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그러면 어떤 공격전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1915년부터 영국 원정군은 집단군 규모로 증강됐고 항공기, 유무선 통신, 기관총 등 다양한 신기술을 써먹을 기회도 늘어나 자체적인 전술교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영국육군의 공격전술은 적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공격에서 보병중대의 소총화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느린 변화는 솜 전투의 끔찍한 피해로 이어졌다.
솜 전투의 참상은 여러 서적과 매체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공격 첫날 29보병사단의 랭카셔 수발총 연대가 공격 선봉에 내세운 2개 중대는 공격개시선에서 불과 50미터도 전진하지 못 한 채 거의 전멸 당하는 등 수많은 공격부대가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했다.
공격부대의 중앙에 배치된 3군단 역시 소름끼치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전 전통을 자랑하는 정규연대들을 다수 가진 8사단의 경우 연대 당 손실이 최저 50%에서 최고 93%에 달했다. 제 2 미들섹스 연대는 공격 개시 수시간만에 연대병력의 93%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역시 솜 전투에서 유명한 일화라면 독일군의 기관총 1정이 영국군 1개 대대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 일텐데 당시 삼각대에 얹은 중기관총 1정은 양호한 시계만 확보되면 정면 2500야드(대충 2.3km 정도?) 정도의 범위를 방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독일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말-1915년 초에 기관총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술을 확립하고 있었고 영국육군 역시 1915년의 Loos전투에서 독일군의 기관총 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솜 전투이전까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전술이 나타나지 못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육군은 솜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 전사자 2만을 포함해 5만7천의 사상자를 냈고 11월에 백해무익한 대공세가 끝날 무렵에는 43만2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솜 전투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는 영국군에 큰 충격을 줬고 이후의 공격전술을 크게 변화 시켰다.

먼저 포병과 보병의 유기적인 협동이 강조됐다.
2차대전 당시의 영국군도 마찬가지 혹평을 들었지만 1916년 이전 영국군은 병종간 협동작전이 매우 서툴렀으며 이것은 솜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포병은 유동적으로 변하는 전선의 상황에 따라 보병에 화력지원을 제공하지 못 했고 독일군의 거점을 제압하는데도 비효율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또한 소규모 보병전술에서는 소총분대의 지원을 받는 수류탄 돌격조가 선봉에 서고 총류탄 발사기의 지원을 받는 루이스 경기관총이 소대화력의 중심이 되는 공격 전술로 변화했다.

※여단급 3인치 박격포는 공격부대가 운용하기엔 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 좀 센 펀치가 필요할 땐 총류탄 발사기가 유용하게 사용됐다고 한다.

또 화력 운용의 융통성과 함께 독일군의 거점을 마주치면 우회공격으로 제압하는 등 뼈저린 손실로 배운 교훈을 잘 살리게 됐다고 한다.

쓰라린 교훈을 얻기 전에 좋은 방법을 찿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 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이 잘 풀리는 사례가 별로 없는 듯 싶다.
영국육군 역시 솜 전투에서 아주 쓰디쓴 교훈을 얻었고 그 결과 1917년 이후에는 독일군에 대해 전술적으로 대응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게 됐다.
수십만명의 희생을 대가로 교훈을 얻은 셈이다.


참고로, 솜 전투당시 영국육군의 사단별 손실은 다음과 같았다.

(자료 : Robin Rrior and Trevor Wilson, The Somme, Yale University Press, 300-301p)

30보병사단 : 17374명
18보병사단 : 13323명
21보병사단 : 13044명
5보병사단 : 12667명
17보병사단 : 12613명
56보병사단 : 12333명
34보병사단 : 11239명
25보병사단 : 11239명
12보병사단 : 11089명
33보병사단 : 10787명
9보병사단 : 10538명
4보병사단 : 10496명
1보병사단 : 10451명
3보병사단 : 10377명
7보병사단 : 10237명
19보병사단 : 9830명
뉴질랜드사단 : 9408명
8보병사단 : 8969명
11보병사단 : 8954명
49보병사단 : 8461명
오스트레일리아 2사단 : 8113명
50보병사단 : 7902명
14보병사단 : 7643명
55보병사단 : 7624명
47보병사단 : 7560명
오스트레일리아 4사단 : 7248명
39보병사단 : 7215명
근위사단 : 7204명
6보병사단 : 6966명
캐나다 2사단 : 6876명
20보병사단 : 6854명
캐나다 1사단 : 6555명
23보병사단 : 6282명
51보병사단 : 6202명
24보병사단 : 6119명
48보병사단 : 6115명
41보병사단 : 5928명
31보병사단 : 5902명
36보병사단 : 5482명
32보병사단 : 5272명
15보병사단 : 4877명
35보병사단 : 4663명
16보병사단 : 4330명
캐나다 4사단 : 4311명
오스트레일리아 1사단 : 7883명
2보병사단 : 7856명
29보병사단 : 7703명
캐나다 1사단 : 7469명
63보병사단 : 4075명
38보병사단 : 3876명
46보병사단 : 2648명
37보병사단 : 2000명

솜 전투당시 영국군 보병사단들의 규모는 10,000-12,000명 수준이었다.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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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

2006년 5월 12일 금요일

[美利堅史] 권43 광종 조지 W 부시 本紀

광종(狂宗) 조지 W 부시 주니어 황제는 41대 황제 조지 H. W. 부시 황제의 장남이다.
본시 미리견은 백성들이 덕있는 사람을 천자로 추대하는데 부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자를 하니 이로서 조지 부시 주니어의 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부시 주니어 황제는 트루먼 2년 코네티컷에서 출생했다.

장성하니 가문의 전통을 이어 예일 학당에서 학업을 쌓았다.

존슨 6년, 남만을 토벌하는 싸움이 수년간 계속되고 홍건적의 준동이 심하니 정예로운 군사는 모두 외방에 나가 미리견을 지킬 군사가 부족했다.

부시 황제는 나라를 지킬 군사가 모자람을 염려하여 스스로 민병(National Guard)이 되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남만으로 나가니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리오?”

군역을 마치고 다시 하버드 학당에서 학업을 쌓아 MBA를 취득하니 이것은 미리견 황제 중에서 최초이다.

부시 황제는 일찍이 도(道)를 갈구하여 얻지 못하니 크게 실망하여 음주가무에 빠지게 되었다.

레이건 5년, 조지 부시 주니어가 곡주에 취해 비몽사몽간을 헤메다가 마침내 취기에 상제를 영접하니 비로서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 모든 도(道)가 자유(Freedom) 앞에서는 덧없는 것 이로다!”

그리고 다시 말하였다.

“이제 도를 깨우쳤으니 더 이상 술은 필요 없다.”

소인배들이 말하길 부시 황제가 득도한 것이 빌리 그래엄(Billy Graham) 이라는 도인을 만난 때문이라 하는데 모두가 허황된 낭설이라 할 것이다.

클린턴 2년, 텍사스 백성들이 부시 주니어 황제의 덕을 흠모하여 텍사스 공으로 추대했다. 부시 주니어 황제가 4년간 텍사스를 자유로서 다스리니 모든 백성들이 자유의 감화를 받았다.
부시 주니어 황제가 텍사스 공을 그만두려 하매 백성들이 다시금 텍사스 공으로 추대했다.

“공께서 지금 우리를 버리시면 누가 자유로서 텍사스를 교화하겠습니까?”

부시가 다시금 자유로서 텍사스를 교화하니 그의 덕이 미리견 전체에 퍼졌다.

이때 클린턴 황제는 성품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는데 뜻있는 신료들은 이를 심히 우려했다.

마침내 모든 백성들이 부시 주니어를 황제로 추대하니 자유의 덕화가 천지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부시 주니어 황제는 등극한 뒤 백성의 삶을 돌보는데 힘을 쏟았다.

하루는 황제가 시장에 나가니 한 대장장이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노인장은 누구신데 이렇게 한숨을 쉬시오?”

“소인은 휴즈(Hughes)라는 대장장이인데 손도끼(Tomahawk) 만드는 일을 합니다. 레이건 황제 때만 해도 장사가 잘 됐는데 클린턴 황제 이후 이렇게 어려워 졌습니다”

부시 주니어 황제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게 다 짐의 부덕함이다. 천하에 어찌 손도끼 쓸 곳이 없으리오?”

부시 주니어 황제가 노인에게서 손도끼(Tomahawk)를 모두 사 들인 뒤 오랑캐들이 난동을 부릴 때 마다 손도끼를 하사했다.
이렇게 해서 손도끼를 하사 받는 모든 오랑캐들이 감화되었다.

다만 김정일과 아마디네자드 등은 손도끼를 하사받기를 원했으나 부시 황제가 노인에게서 사들인 손도끼가 떨어져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유한 장사치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도록 했다.

“장사치들은 돈 버는 것이 낙이거늘 어찌 백성의 어버이가 되어 백성의 낙을 빼앗겠는가?”

이에 빌 게이츠 등 여러 장사치들이 감동하여 외쳤다.

“천자께서 이리도 백성들을 위하시니 어찌 백성된 도리를 게을리 하겠나이까?”

빌 게이츠 등 여러 장사치들이 감격하여 더 많은 세금을 냈다.

부시 주니어 3년, 태위 럼즈펠드가 상소를 올려 후세인 치는 군사를 일으킬 것을 간하였다.

“삼가 신이 아뢰건데 태조 황제께서 나라의 기틀을 쌓으실 때 자유(Freedom)을 모든 도의 근본으로 삼으라 하시니 이후 선황제들께서 자유로서 모든 오랑캐를 교화 시키셨나이다.
지금 의랍극 국왕 후세인이 난폭하여 그 백성을 핍박하니 백성들은 마음껏 포를 쏠 자유조차 없사옵니다.”

부시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의랍극 백성들이 포를 쏘고 싶어도 쏠 자유(Freedom)가 없으니 짐이 천자된 몸으로서 어찌 아니 슬프리오?”

이에 럼스펠드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후세인을 치는 군사를 일으켰다.

천병이 한번 싸움에 후세인을 잡아 포박하고 그 백성들에게 포를 쏠 자유를 주니 의랍극 사람 모두가 천자의 은혜를 찬양하며 외쳤다.

“천자께서 우리에게 포를 쏠 자유를 주셨으니 어찌 아까운 탄환을 허공에만 낭비하리오?”

이리하여 의랍극인들은 천병을 보면 반가이 총포를 쏘고 천병들도 이를 받아 쏘니 서로간에 포화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풍속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중국 대륙을 점령한 호랑이?

현재 근무 중 농땡이 치는 중.

이런게 왜 화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뭔가 억지로 끼워 맞춘 티가 팍팍나는 호랑이 그림 하나.

'중국대륙 점령한 한반도 호랑이 그림 눈길'

대한민국은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이런 그림을 그린다고 뭐라고 하긴 그렇다.

하지만 정작 웃기는 건 이 그림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저게 현실이 되면 좋겠어용~"

이럴 때 이성적으로 한마디 해 줘야 한다.

"그냥 꿈이나 꿔라."

이런걸 기사로 올리는 기자도 한심하고 반응을 보인다는 네티즌도 문제다.

내 개인적으로 볼때는 심심할 때 마다 호랑이를 들먹거리는건 우리의 심리 깊숙한 곳에 내재된 열등감을 표출하는 한 유형에 불과하다.
땅덩어리가 호랑이 같이 생겼다는 괴이한 망상은 도데체 어디서 생긴것인지...

옛날 옛적 광활한 영토를 가졌다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만주에 땅투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만주와 대륙타령을 하는 바보들을 보면 마치 어떤 똥강아지가 예전에 묻어 뒀던 개뼈를 잃어 버려 낑낑거리는 걸 보는 듯 하다.

한마디로 추하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샤먼의 코트(재탕)

예전에 아마존에 실린 독자들의 서평을 보고 한번 사 봐야지 하다가 귀차니즘 발동과 지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통에 사보질 못 했는데 2주 전쯤 지하철역에서 번역판을 5,000원에 사게 됐다. 이것과 함께 만화 한국전쟁도 있었는데 탄약이 부족해 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책의 번역은 재미있게 잘 된 것 같다. 물론 원판을 아예 못 읽어 봤으니 단정하긴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와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A History of Pagan Europe 과 유사하다. A History of Pagan Europe이 기독교가 동진하면서 붕괴된 유럽의 전통 문화를 차례대로 보여줬다면 "샤먼의 코트"는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기독교화된 유럽이 동진하면서 붕괴된 시베리아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외래 문화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리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6세기 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이다.
러시아인들은 동진하면서 요새도시를 세워 주변지역을 러시아화 하고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면서 전통 사회를 파괴하고 덤으로 환경도 파괴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했으나 대포와 총, 그리고 각종 전염병으로 무장한 러시아인들 앞에 처절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공격중에 최악의 공격은 "사회주의"에 의한 것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종교를 강요했고 스탈린 체제는 사상의 강요 보다 학살을 택했다. 스탈린 보다 온건한 편 이었던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전통사회를 붕괴시킨건 마찬가지였고 소련이 붕괴될 무렵에는 더이상 말살할 만한 전통 문화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됐다.
스탈린 시기의 전통문화 말살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강제 기독교화와 비교하더라도 그 야만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 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의 적들을 박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에서 샤먼을 집어 던지고 총살하고 강제 노역으로 혹사시켜 죽이고...

결국 현재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박제화된 과거의 흔적 뿐이다.

책의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베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은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해 준다.

전반적으로 슬픈 이야기로 일관된 슬픈 책이다. 우울할 때 읽으면 쥐약이고 기분이 들떠 있을때 읽으면 좋을 듯...

아주 멋진 책이다.

그리고 덤으로..

1. 이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

2.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비드야 단다론"이라는 부랴트족 불교 승려는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도 다른 라마교 승려들과 수도하면서 포교도 했다고 한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장 자크 아노가 이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제법 재미있을 듯.

독일 육군의 장교집단과 사회계층 1900-1925 (재탕!)

19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몇 개 꼽는다면 시민 계층의 성장을 그 중 하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가장 후진적이라는 러시아도 농노제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민계층의 성장은 서유럽에서는 좀 보수적인 축에 끼는 독일에서도 활발했고 보수의 아성인 군대까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미 독일 통일 전인 1860년의 통계를 보더라도 프로이센 군 장교단의 35%는 귀족이 아닌 시민 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

Mission Impossible 3 관람 결과

돈내고 보긴 아까운 물건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겠으나.

쉴새없이 액션으로 몰아치는 건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빈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템포가 빠르다고해서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영화 후반부에는 하품이 나와 난감할 정도였다.

영화 마지막 부분은 명랑한(?) 가족영화로 돌아서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떻게 아내를 IMF 본부에 데려갈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시나리오 쓴 녀석의 두뇌구조가 새삼 궁금해 졌다.

또. 배신자의 정체 역시 뭔가 허전했다. 너무 쉽게 정체를 드러낸 것도 그렇고 도데체 뭘 어쩌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악당 캐릭터 구축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물론 오우삼 감독의 2편에 비하면 양반인 듯 싶으나...

물론. 나만 재미가 없었고 다른 관객들은 즐거워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요즘 헐리우드 영화들은 맥빠진 졸작들이 너무 많아 난감하다. 아마. 이런 지루한 영화들만 수입된다면 스크린 쿼터를 폐지해도 극장이 헐리우드영화를 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재미 없었다. 돈 아깝다.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A History of Pagan Europe - by Prudence Jones & Nigel Pennick

피상적으로 떠오르는 켈틱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March of the Celt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엔야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히 켈트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렇게 해서 지금은 유럽의 전통신앙, 흔히 말하는 "이교도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 이와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접했던 책이 바로 이 책 "A History of Pagan Europe"이다.

이책은 전형적인 개설서로 구성은 고대 그리스 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이교도 신앙"까지를 연대 순으로 다루고 있다. 구성상 이 책은 거꾸로 뒤집어 본 기독교 발전사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 후기 이후 부터의 내용은 기독교의 교세가 성장해 가면서 각 지역의 토착 신앙을 말살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8세기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을 위한 대량 학살은 읽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한다. 아마도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이야말로 최초의 종교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저자들은 계속 유럽의 동쪽으로 무대를 옮겨 가면서 토착 종교들이 소멸되는 과정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0장과 11장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전통 재발견 차원에서 고대의 신앙들이 조금씩 재발견되어 가는 과정이 나온다.

책 후반부에는 짤막하게 Neo-paganism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히틀러 시기의 오딘 숭배주의자들은 독일 카톨릭계의 지지를 얻기 위한 히틀러의 조직적 박해로 괴멸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통 신앙들은 완전히 말살 되지는 않고 기독교적 전통과 조금씩 융합되어 오늘날 까지도 그 잔재가 조금씩 남아 있기도 하다.이 책은 매우 슬픈, 사라진 전통들에 대한 잘 정리된 글이다. 아직 절판 되진 않았으니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