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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2일 수요일

포린 폴리시에 북한 정권의 향후 행보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포린 폴리시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빅터 차의 글이 한편 올라왔습니다. 제목은 "Kim Jong Un Is No Reformer"인데 제목에서 알수 있듯 김정은 정권이 향후 온건한 노선을 취할 것이라는데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언론에서 비중있게 다루었네요.

제 개인적으로도 빅터 차가 내놓고 있는 몇몇 전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빅터 차는 12월의 한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더라도  북한 정권이 한국 길들이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합니다. 과거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당시 우리가 당한 망신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전망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물론 현재 야당의 주류를 이루는 친노집단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또한 새누리당이 승리한다면 박근혜가 북한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초반에는 강하게 나갈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현재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초대형 도발을 연달아 했는데 평화 운운하며 고개숙이고 들어가는건 국제적인 비웃음거리에 불과하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북쪽에서 신중한 노선을 취하기를 바라는데 김정은이 애비 밑에서 배워먹은걸 생각한다면 영 찝찝하기 짝이 없습니다.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북한 공식 문헌의 자료적 가치에 대한 잡담

북한의 공식문헌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보니 진지한 북한 연구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연구자에 따라 북한 자료들을 대하는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북한 연구자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비판하고 있지요. 특히 시기가 내려올 수록 자료적으로 문제가 많아진다는 것은 공통적인 견해로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유일체제가 확립되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이후의 문헌들이 심각하다는데 견해가 일치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읽어본 약간의 북한 문헌을 생각해 보면 동의할 만한 듯 싶습니다.

몇년전 사망한 서동만 교수는 북한의 공식문헌의 자료적 가치에 대해 이렇게 평한바 있습니다.

“빨치산혁명 전통이 이른바 혁명적 군중노선과 결합하면서 북한 사회주의는 대중적 성격을 강화해가지만 내용적으로는 비속화ㆍ통속화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고도의 이론적 모색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지도부 내의 군사적 성격의 강화는 전반적인 지적 불모화의 경향을 촉진했다. 6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글들은 북한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력을 거의 잃은 슬로건 차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때부터 북한의 인문ㆍ사회과학 관련문헌에서는 구체적 사실을 담은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외부의 북한연구에서 북한의 공식문헌이 갖는 자료적 가치는 이때부터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지루한 김일성 교시의 나열과 그에 대한 동어반복적 해설로 가득 채워진 북한의 공식문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북한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란 무엇보다도 이들 문헌을 읽어낼 수 있는 무한한 인내심이었다. 70년대 이후를 대상으로 한 외부의 북한 연구가 주로 이데올로기 분석으로 시종하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 남한을 포함해서 외부의 북한연구가 낙후된 중요이유는 무엇보다도 냉전상황에 있었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북한 내 지적 불모화 경향이야 말로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이유라 할 것이다.
서동만저작집간행위원회 엮음, 『북조선 연구 : 서동만 저작집』, (창비, 2010), 73~74쪽.

얼마전에 읽었던 일본의 소련학자 시모토마이 노부오의 평은 약간 더 신랄한 듯 싶습니다. 인용을 해보죠.

“북한을 둘러싼 정치ㆍ정치사 연구, 그 중에서도 특히 국내정치나 국제관계에 대해 북한 측이 정보를 비밀로 하는 체질로 인해 사료나 문헌 부족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공식 출판물을 이용하더라도 진상해명은 불충분하다. 그 결과 지역연구를 행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불리하다. 사실 『김일성 저작집』과 같은 대부분의 문헌을 보아도, 이 책이 논문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1956년 중반 8월종파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학이 본질적으로 학문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시모토마이 노부오 지음/이종국 옮김, 『모스크바와 김일성 : 냉전기의 북한 1945~1961』, (논형, 2012) , 9쪽.

언어장벽의 문제도 약간 작용하고 있긴 하지만, 북한 문헌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 때문에 해외의 북한 연구자들은 냉전 종식이후 공개되기 시작한 동유럽 사료를 활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소련과 동독의 외교문서가 상당히 수집되어 있지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도 북한 공식문헌 보다는 소련이나 동유럽 문헌이 훨씬 신뢰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연구자별로 편차가 있어서 김광운 같은 경우는 북한 건국과정을 거의 북한문헌만 활용하여 재구성하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 伸夫가 그런 경우겠습니다. 그리고 시모토마이 노부오보다 먼저 1950년대의 북한을 연구한 발라즈 샬론타이Balazs Szalontai도 거의 대부분 소련과 동유럽 사료를 바탕으로 서술을 했지요.(발라즈 샬론타이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는 제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북한 연구서입니다.)

결국 진지한 연구가 1960년대 이후로 확장되려면 그 시기의 소련과 동유럽, 혹은 중국 자료를 활용할 수 있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해당 시기의 북한 문헌을 읽어보면 그럴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시기가 내려갈 수록 북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북한의 폐쇄성도 강화되는데 외국 문헌이 어느 정도의 정보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동독 자료의 경우 전후 복구시기에는 동독의 기술인력이 대거 파견되거 지방 곳곳에 배치되기 때문에 꽤 심도깊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50년대 이후의 동독 자료는 저도 아직 읽어본게 하나도 없어서 함부로 이야기 하는게 무리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인력이 감소하는 것 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련과 동유럽 자료를 대거 활용하고 있는 해외의 북한 연구자들이 주목할 만한 연구를 내주길 바랄 뿐입니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땅크節'

1946년, 소련은 2차대전에서 기갑병과가 세운 혁혁한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1일을 이른바 '전차병의 날(День танкиста)'로 정합니다. 병종도 아니라 육군의 특정 병과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일이 제정된 것은 꽤 이례적인 일 입니다. 물론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이 전차병의 날도 스탈린의 우상화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차병의 날이 오면 소련의 기갑장교들은 스탈린이 어떻게 기갑부대 발전을 위한 교시를 했으며 기갑전술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찬양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고 하지요.

어쨌든 이 '전차병의 날'은 제법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북한은 이날이 올때마다 기사를 한꼭지 할애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День танкиста의 번역어로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땅크節'


땅크절이라니! 뭔가 초월번역의 느낌을 팍팍 풍기지 않습니까! 입에 착착 달라붙는게 엄청난 중독성이 있습니다. 전통명절과 같은 느낌이 들지요.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북핵 문제에 대한 안드레이 란코프의 최근 글 한편

재미있는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이해찬 "현정부 남북대결구도로 대북성과 사라져"

이해찬도 웃기지만 이종석이 북핵문제가 남북관계에서 분리시켜 다룰 수 있는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건 단지 북한 핵문제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최대의 약점이기 때문에 억지로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게다가 이종석은 당시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지난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정나미가 더 떨어집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노무현 정부 당시 이종석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했었죠.

사실 현 시점에서 북한 핵문제는 굉장히 손 쓰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매우 불편한데 뭔가 뾰족한 대책은 없어 보이는군요. 손을 쓸 수 있었지도 모르는 시기에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은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군요.

이런 관점에서 살짝 불편한 글 한편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안드레이 란코프가 지난 3월 7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 “Let North Korea Keep Its Nukes”입니다. 간단히 결론을 이야기하면 지금은 마땅히 취할 수단이 없으니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자는 내용입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도록 내버려 두자(Let North Korea Keep Its Nukes)
안드레이 란코프

미국과 북한간의 가장 최근의 협상이 2월 29일 끝났다. 북한측은 미국이 식량 원조를 하는 대가로 자국의 우라늄 농축 계획을 동결하고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데 동의했다.

서방 언론들은 예상했던 대로 핵 문제에 대한 회담이 재개될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고(물론 제한적이고 조건적이긴 했다), 미국 국무부는 협상을 “작은 첫 걸음(modest fist step)”으로 설명했다.

그렇다. 이 협상은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간에 전개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보이는 핵협상에 있어서 첫 번째 걸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도데체 무엇을 위한 걸음이란 말인가?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다. 미국이 천명하고 있는 목표는 북한의 핵무장을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그리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해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지난 20여년간 변함 없었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플루토늄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고 (물론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 했지만) 수 차례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실행했으며, 그리고 상당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늘날 까지도 비핵화는 요원하다.

이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미국의 정책은 구제불능이라 할 만큼 비현실적이니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북한 정권은 힘들여 획득한 핵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왜 그래야 하는가?

북한의 핵 능력은 평양의 지도층이 사담 후세인이나 무암마르 카다피와 같은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 억지력을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평양의 지도층은 후세인과 카다피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면 여전히 팔팔하게 권력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때 서방의 외교관들은 북한의 당국자들과 소통하면서 카다피가 진행 중에 있던 핵 계획을 포기한 것을 본받아야 할 훌륭한 사례로 들고는 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들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입장에서 핵무기는 엄청난 투자였다. 핵무기는 북한이 국제 사회로 부터 후하고 거의 무조건적인 원조를 받아낼 수 있는 핵심 수단이며, 내부적인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제기능을 할 수 없는 북한 경제를 개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의 생존에 중요하다.

북한의 핵공갈은 아주 잘 먹혀왔다. 최근의 협상만 봐도 된다. 북한은 핵 개발을 늦추는데 합의하는 대가로 조건없는 대규모의 원조를 얻어냈다. 북한은 핵 무장 능력을 갖추고 있는 덕에 협상을 해서 원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비핵화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당근만 쓸모가 없는게 아니다. 채찍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의 압박과 국제 제재는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만들지 못했다. 김씨 정권이 끝난 이후에나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생각된다면 정권 교체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작전에 필요한 인적, 물적 대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클 수도 있다.

중국이 제제 체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제도 실패할 것이다. 중국이 성실하게 협조한다 하더라도 주로 희생될 것은 북한인들인데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제재조치는 북한 정권의 정책 변경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단지 수많은 북한 농민들의 죽음만 가져올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압박이 혁명을 불러올 수 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백만에서 2백만명이 굶주림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만약 압박이 가해진다면 북한 정권은 비핵화 조치를 취하는 척 하면서 또 다시 원조를 얻어내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들에게 제재조치란 유권자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재조치는 완전히 실패했으며 아마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유일한 실질적인 해결책은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정권이 내재된 무능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북한 외교관들은 그들의 현재 목표가 핵무기를 제한하는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북한은 현재 확보하고 있는 플루토늄과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계속 유지하는 대신 핵 계획을 동결하고,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투발 수단을 개량하는 것을 멈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은 그 댓가로 정기적인 식량원조와 2기의 경수로라는 당근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해결책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핵비확산조약에서 탈퇴하여 성공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길로 나간 유일한 국가이다. 만약 북한이 처벌을 받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불량 국가들도 이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북한이 이런 작은 조치를 취하는 것에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에 극단적인 불쾌감을 느끼진 않더라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기생충 같은 공갈꾼(parasitic blackmailer)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란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두개의 나쁜 것 중에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핵 문제에 대한 타협이 실제로 덜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미국이 무얼 하던지 간에, 북한의 핵 계획은 최소한 김씨 왕조가 북한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북한의 핵 계획은 갈수록 발전하고 위험해 질 것이다. 지난 수년간 북한의 핵 기술자들은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라늄 계획은 통제하고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서 미국에게 더 높은 가격에 흥정을 할 수가 있으므로 개발에 나섰을 것이다.(실제로 우라늄 계획은 시작 단계에서 부터 가치를 빨리 높일 수 있는 수출 품목으로서, 궁극적으로 미국의 원조와 교환하기 위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만을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으로 고집해 나가다면 우리는 북한의 핵 계획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북한이 시리아와 미얀마에서 벌인 모험에서 드러난 것 처럼 확산될 위험도 존재한다.

조만간에 미국은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은 포기하지 않은 채로 핵 계획을 동결할 뜻을 보이는데 대해서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정상적인 “보상”을 해 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공식 발표에서는 궁극적인 비핵화에 대한 공약이 요란하게 강조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거래가 금방 이루어 지지는 않겠지만, 만약 김씨 일가가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이상 북한의 권좌에 남아있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타협을 마지 못해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핵 협상은 여기에 참여한 미국측 관계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작은 첫 걸음”이 될 것이다.

2011년 3월 6일 일요일

Made in Germany

한국 전쟁 중 북한의 어떤 병원에 입원했던 양반의 이야깁니다. Made in Germany*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까;;;;

팔다리가 잘리고 다친 부상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들은 소련과 동구 여러 나라에서 보내 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동독, 체코, 헝가리, 소련 순으로 약이 많이 들어왔다. 소련의 약은 포장이라든지 생김새가 싸구려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에 동독 것은 아주 매끈했다.

이를 보고 나는 동독의 과학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다. 동독에 대해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1980년대 말, 동독이 붕괴되었을 때 나는 너무나도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훌륭한 기술을 갖고서도 나라 하나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심지연 편,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소나무, 2001), 228~229쪽

*정확히 말하면 Made in DDR인데 농담이니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 위에서 인용한 책은 간첩으로 남파 됐다가 22년간 감옥생활을 한 이구영의 회고록입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남쪽 출신이긴 했는데 박헌영 계열은 아니라서 숙청 과정에서도 무사했던 양반입니다. 회고록에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책 자체도 별로 비싸지 않으니 흥미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십시오.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갈등하는 동맹』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대한 서술

2010년 봄에 역사비평사에서 낸 『갈등하는 동맹 - 한미관계 60년』을 읽는 중 입니다. 책이 나왔을 때 한번 읽어보라는 이야길 듣고 사놓긴 했는데 달력이 완전히 넘어가고 나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역사비평』에 연재된 글들을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의 한미관계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학계가 한미관계에 대해 가진 시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까운 현재를 보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건영과 정욱식이고 노무현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선원인데 특히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애시당초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인물들을 필자로 선정한 셈이지요.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관계의 갈등은 물론 북핵위기의 원인을 모두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집단에 돌리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성과 전략적 오판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습니다만 작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모든 책임을 부시행정부와 네오콘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 같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제2차 북핵위기에 대한 정욱식과 박선원의 서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정욱식과 박선원은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이 북한의 우라늄 계획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압박을 가해 북핵위기를 고조시켰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2010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북한의 우라늄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된 것 입니다. 특히 박선원의 글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더 불편합니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변명과 책임전가처럼 불편한 것은 없지요.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술을 제외하면 개설서로 무난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What I Found in North Korea

며칠 전 언급했던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을 번역해 봤습니다. 이미 언론에도 많이 언급이 되어 뒷북인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 일단 저는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헤커 박사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들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별도로 붉은 색 표시를 했습니다.

지난 11월 12일, 내가 마지막으로 영변 핵 시설을 방문했을 때 북한 과학자들은 나와 나의 동료, 루이스(John W. Lewis)와 칼린(Robert Carlin)에게 작은규모의, 최근에 완성된 산업수준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건설중인 실험용 경수로를 보여줬다.

나는 두 곳의 케스케이드(cascade) 실에 2,000개의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것과 최신의 통제실이 갖춰진 것에 놀랐다. 그리고 먼길을 거쳐 평양으로 귀환한 뒤 이 발견의 정치적 의미가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의 핵 개발을 제한하는 것과 한반도의 조용한 긴장상태가 지금보다 중요한 적은 없었다. 특히 지난달 하순 남북한이 서해에서 충돌한 사건을 고려한다면 특히 더 그러하다.

비록 나와 다른 비확산 전문가들은 오래전 부터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한 근거에 의거해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십수개의 1세대 원심분리기가 아니라 완전한 가동상태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는 최신형 원심분리기들이 셀수 없이 줄지어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북한측은 우리에게 원심분리기 시설은 2009년 4월 부터 건설을 시작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특수한 원자재와 부속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원활하게 가동되는 원심분리실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한의 주장은 신뢰할 수가 없다. 북한이 이러한 물자들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는가는 국제적인 핵 비확산 체제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북한이 자체적으로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이나 강철합금, 고리자석, 베어링, 진공밸브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이러한 설비들이 오래 전 부터 다른 장소에서 건설되어 가동에 들어갔으며 새로운 시설로 옮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이다. 원심분리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품목들은 파키스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조달 체계를 통해서 조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파키스탄의 전직 대통령 무샤라프(Pervez Musharraf)는 그의 회고에서  파키스탄 과학자 칸(A. Q. Khan)이 2000년 즈음에 원심분리기 24대 분에 해당하는 농축 시작용 부품(enrichment starter kit)을 조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칸이 2004년 체포되기 전에도 북한 과학자들이 칸의 연구소와 밀접하게 협력했으며 칸의 연구소는 원심분리설비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실시했다. 또 2001년 말에는 CIA가 의회 보고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위해서 러시아와 독일로 부터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물자들을 획득하려 한다는 정보를 밝혔다. 그리고 최소한 몇몇 부품은 북한이 독자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북한과 이란이 미사일 기술에 대해 밀접한 교류를 시작한 이래로 두 국가의 협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북한의 원심분리 시설은 이란이 국제 사찰단에 공개한 것 보다 훨씬 정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란이 차세대 원심분리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북한은 우라늄 처리와 원자로 기술에 있어 이란 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것을 이란에 제공하는 것도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우라늄 원심분리 계획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설에 대한 사소한 흔적과 징후들은 평가를 골치 아프게 한다. 북한이 현재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표는 북한이 다른 나라, 이 경우에는 파키스탄으로 부터 물자를 조달하려는 활동과 기술협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2002년, CIA는 이러한 징후들을 가지고 북한이 2000년대 중반 부터는 연간 두 개의 고농축 우라늄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바 있다. 2002년 10월,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 증거를 가지고 북한과 대립했고 이로써 비핵화를 조건으로 궁극적인 관계 정상화로 나가려 했던 1994년의 합의 체제는 끝을 보게 되었다. 합의가 파탄나자 북한은 이를 구실로 핵비확산조약을 탈퇴하고 폐연료봉으로 폭탄을 생산하기 위한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첫 번째 핵폭탄을 만들었다.

이 때를 되돌아 보면 2002년 10월의 대립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원인은 정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합의 체제를 무너뜨린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정치적 결단에 있다. 영변에서 북한측은 우리에게 나중에는 보다 큰 원자로를 만들 것이며 원자로 기술과 연료 문제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우리를 안내한 북한 외무성 관리는 북한이 과거 경수로를 만들고 자체적인 농축시설을 만들겠다고 위협했지만 “헤커 박사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북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미국의 행동이 그들을 이 길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북한에 경수로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1985년 소련과 두 개의 경수로를 제공받는 협정을 체결한 이래로 진지하게 경수로를 추진했다. 합의체제는 핵무기 제조에 유리하지만 원자력 발전에는 불리한 흑연감속로를 대체하려는 것 이었다. 반면 경수로는 폭탄 제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전력 생산에는 매우 좋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고 예상대로 UN의 규탄이 나오자 북한 정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는 주체적인 원료와 기술에 기반해 100퍼센트 작동하는 경수로를 개발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제 북한은 호언했던대로 25~3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소형의 실험용 경수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북한이 진짜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경수로가 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도 쓰일 수 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경수로에서 만들어낸 플루토늄은 기존의 흑연감속로에서 생산한 플루토늄 처럼 폭탄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사실 북한이 플루토늄 폭탄에 필요한 연료를 더 필요로 한다면 경수로를 만드는 대신 기존의 흑연감속로를 재가동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원자로의 건설은 몇 가지의 정책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경수로는 농축 우라늄을 필요로 하는데 만약 원자로 연료로 사용할 농축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북한은 이것을 쉽게 고농축우라늄 폭탄의 원료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이란의 핵 계획에 대해 우려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 시설들을 공개하면서 미국의 정책 입안가들에게 진지하게 고려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경우 시설 공개는 핵 계획이 외교 정세에서 북한에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미국의 대선 일정에 맞춰 사전에 조율된 계획의 일부일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국제 사회가 2009년 4월의 로켓 발사를 비난한 뒤 공식적으로 6자 회담에서 탈퇴하고 국내 정치용으로, 그리고 국제 사회에 북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핵 기폭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게 위해 2차 핵실험을 실행했다.

동시에 북한은 소형 경수로를 설계하고 영변의 연료봉생산시설의 일부를 전환하고 원심분리기를 설치하여 농축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우리의 방문 일정을 그들이 계획을 완료한 시점에 맞추었다. 북한은 이를 통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전력 생산용 경수로에 대한 야심에 한발짝 다가서면서 우라늄 농축 계획의 필요성을 정당화 하려 했다.

진실은 북한이 처음 부터 핵무기와 전력 생산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플루토늄과 우라늄 계획을 함께 진행해 왔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초반 핵무기와 전력 생산 때문에 플루토늄 계획을 선호했었으나 동시에 1994년 합의 체제의 일환으로 미국이 전력 생산을 위한 경수로를 제공한다면 플루토늄 폭탄 계획은 맞바꿀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칸 박사와 접촉하고 합의 체제가 매우 느리게 이행되면서 1990년대 후반 폭탄 생산을 위해 우라늄 계획을 다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무렵에는 많은 정보 보고서가 보여주었 듯 북한은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을 본격적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2002년 10월의 외교적 대립은 북한이 2003년 플루토늄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고 그 뒤의 핵실험을 통해 폭탄 개발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려 했다.

북한이 이번에 우리게에 보여준 현대화된 원심분리시설은 북한이 결코 폭탄 생산을 위한 우라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충분한 원자재와 부품을 획득하였고 이것들을 가공하고 조립해서 작동되는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은폐된 시설에 설치해 가동에 들어간 뒤 다시 영변으로 그것들을 재빨리 옮겨서 설치했다. 우리가 목격한 원심 분리 시설은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의 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핵무기 생산시설을) 과거 한 차례 사찰을 받았던 장소에 설치해 놓고 외국인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위한 시설도 현재 북한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제는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이다. 우리가 추정하기로는 북한은 이미 네개에서 여덟개의 초보적인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양의 고농축우라늄을 보유한다고 해도 북한의 위협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고농축 우라늄으로 폭탄을 만드는 것은 더 쉽지만 보다 복잡하고 소형의 폭탄을 만드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북한이 현재의 폭탄 보유량을 유지하거나 폭탄을 조금 더 생산할 생각이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재가동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북한이 핵무기 보유량을 본격적으로 늘릴 생각이라면 현재의 농축시설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거나 별도의 비밀 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당장 원심분리기를 늘릴 수는 없을 것이다. 원심분리기를 늘리는 것은 중요한 재료와 부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북한의 광범위한 불법 조달 경로를 봉쇄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늘리는 것 보다 더 골치아픈 것은 북한이 핵물질이나 핵물질 생산 시설, 특히 원심분리기 기술과 같은 것을 수출할 가능성이다. 게다가 북한은 경수로와 농축 시설을 공개함으로써 사실상 비핵화의 개념을 재정립했고 외교적 방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가까운 시일 내에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을뿐만 아니라 경수로 계획과 원심분리시설도 계속해서 추진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플루토늄 계획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거의 성공할 수 있었지만 우라늄 계획은 그와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라늄 계획은 플로토늄 만큼이나 골치 아프지만 플루토늄 계획 보다 훨씬 그럴싸하게 평화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외무성의 관료는 북한이 2005년 6자 회담 공동성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계속해서 지지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시발점으로 미국이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 성명을 재확인 해 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장기간의 외교적 과정의 최고점이었던 이 문서는 양국 정부가 상대국에 대해 적대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과거의 적대 관계에서 자유로운 새 관계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확인하는 것 이었다.

이제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핵 문제에 국한시키지 말고 전반적으로 재검토 해야 할 시점에 왔다. 근본적이고 항속적인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미국 정부는 내가 “세가지 No”에 대한 답으로 하나의 Yes 라고 부른 것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 (세 가지 No는) 더 이상의 핵폭탄 생산을 하지 않을 것, 핵폭탄의 개량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핵 물질의 수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and no exports) (한 가지 Yes는) 미국이 북한의 근본적인 안보적 불안을 공동 성명의 취지 내에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외무성의 안내인에게 북한이 세가지 No와 하나의 Yes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명확하게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도 이에 대답할 것 입니다.”

북한이 원심분리시설을 공개한 것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그 어느 때 보다도 어려우면서 시급하게 하고 있다.

엉성한 날림 번역 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인 요지를 전달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듯 싶습니다;;;;

일단 저는 북한이 핵 무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헤커 박사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특히 제 마음에 가장 걸리는 헤커 박사의 제안 입니다. 더 이상의 핵폭탄 생산을 하지 않을 것, 핵폭탄의 개량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핵 물질의 수출을 하지 않을 것(no more bombs, no better bombs, and no exports)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긴 합니다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지 의문입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이 핵확산 방지를 위해 북한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핵 무기를 묵인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이 깜깜합니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글

며칠전 포린 어페어즈 웹사이트에 북한의 우라늄 시설을 방문한 시그프리드 헤커(Siegfried S. Hecker) 박사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조금전 RSS피드를 확인하다가 읽었는데 꽤 흥미로운 글이니 다른 분들도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지금 조금 바빠서 전문을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시기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북한이 2009년 부터 시설을 건설한 것이 맞으며 이명박 정부의 '강경책(?)'에 책임이 있다는 근거로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헤커 박사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2009년 4월 부터 건설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That is not credible)'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야권과 야권 편향적 언론들은 2009년 부터 건설을 시작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이 글은 한번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커 박사는 자신이 시찰한 시설의 설비들이 이미 훨씬 오래전에 만들어져 최근에 옮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략 한번 훑어봤는데 골치아픈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젊은 날의 황장엽

얼마전 사망한 황장엽의 예우 문제를 두고 며칠 간 꽤 시끄러웠지요. 김일성의 충실한 이데올로그였던 인물이 팔자에도 없는 북한 민주화의 화신이 되었으니 확실히 황당하긴 했습니다.

물론 저는 황장엽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고 그저 세간에 알려진 그와 관련된 글을 몇 편 주워 읽은 수준이긴 합니다만 그 양반을 둘러싼 논의를 보다가 그 양반이 젊은 시절 썼던 글 한편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복사해 둔 것을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그 글을 찾았는데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더군요.

잘 알려진 장안파 공산주의자인 이청원은 월북 이후 연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지금이야 북한의 역사학 수준이 눈뜨고는 못 볼 수준으로 퇴보했지만 사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역사학계는 꽤 흥미로운 성과를 많이 거두었지요. 1950년대 중반부터 숙청의 바람이 몰아치기 전 까지는.

이청원은 1955년에 사회주의 운동사를 정리한 『조선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저작은 바로 황장엽과 같은 신진 학자들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1957 12, 황장엽은 김후선과 함께 집필한 「리청원 저 조선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에 관하여」라는 글을 『근로자』에 기고합니다. 황장엽은 이 글에서 이청원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황장엽의 이 글은 매우 노골적으로 김일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청원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김일성의 역할을 올바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것 들이죠. 이 글의 일부분만 인용해 보지요.

저자의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는 우리 나라 로동 운동이 30년대에 와서 무장 투쟁의 형태를 취하게 된 리유를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로동 운동에서의 주관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에 관한 이..쓰딸린의 명제 (쓰딸린 저작집 5로씨야 공산주의자들의 전략과 전술에 관하여참조)들을 거의 그대로 인용부 없이 서술하고 30년대의 로동 운동이 무장 투쟁 형태를 띠게 된 객관적 조건은 일제의 가혹한 파쑈적 탄압, 주관적 요인은 우리 로동 계급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장성 성숙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적 명제로서는 우리 나라 로동 운동의 질적 비약성의 설명될 수 없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만 가지고는 로동 운동이 폭동적 형식을 취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어도 무장 투쟁의 형태를 취하게 될 필연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만 가지고는 절대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이 진행한 항일 무장 투쟁이 우리 혁명 운동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열어 놓았다는 것이 설명될 수 없다. 즉 이것으로서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출현 없이도 무장 투쟁이 가능하였다는 결론 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첫째로 우리 로동 계급이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맑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돌르 받게 되었다는 것. 둘째로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적 핵심의 출현은 종래 각종 종파 단체들에서 떠돌던 비속화 되고 실천과 유리된 공론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진정한 맑스-레닌주의가 위대한 쏘련 및 중국을 통하여 우리 로동 계급에게 전파되었으며 대중 투쟁의 무기로 되기 시작하게 된 결과라는 것(후략)
100~101.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일성 동지는 일제기 국제당과의 긴밀한 관계하에서 조선에서의 새로운 형의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 사업을 빛나게 수행해 나갔다. 즉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일국 일당의 원칙에 립각하여 당 조직을 체계적으로 조직 확장하였으며 당 생활을 강화하였으며 당성을 단련시키며 당적 지도를 강화하여 왔던 것이다.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당 조직을 가지였으며 또 통일적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을 위한 사상적, 조직적 및 전술 전략적 기초를 구축하는 투쟁 없이 조선의 로동 계급의 헤게모니는 절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프로레타리아트 헤게모니 실현의 문제를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당 창건의 투쟁과 분리하여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101

항일 무장 투쟁 시기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민족 해방 운동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 헤게모니를 위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보여 줌에 있어서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성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항일 무장 투쟁 단계에로의 민족 해방 운동 발전의 력사적 필연성과 그의 합법칙성을 론증하면서 김일성 동지를 비롯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해결된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전략 전술의 확립, 조선 혁명 수행에 대한 정확한 정치 로선과 정책들의 강구 실시, 혁명 운동의 대중적 지반의 확대 강화를 위한 실천적 투쟁 등을 통하여 새형의 맑스-레린주의 당 창건을 위한 사상 조직적 준비 과정을 론증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20년대의 종파의 극악한 해독성을 청산하기 위해서와 혁명 운동에 대한 온갖 좌유경 기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프로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진실로 조선 혁명의 령도적 계급으로 단련되게끔 한 견실한 조선 공산주의 력량의 장성과 그 집결 과정, 그의 실천적 활동을 규명하는데 돌려야 할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항일 무장 투쟁 시기의 지도적 핵심인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활동을 불충분 하게 취급하였으며 소홀히 하였다.
105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일성 동지와 그의 전우들을 선두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활동의 실천적 투쟁을 통하여 온갖 종파적 경향과 기회주의와의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공산주의 진영 내의 통일과 단결을 위하여 헌신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온갖 비속화의 경향과 수정주의를 반대하여 조선 혁명의 구체적 실천에 맑스주의 리론을 결부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과 투쟁을 통하여 민족 해방 운동의 최고 형태인 항일 무장 투쟁 단계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구체적 활동에 대한 분석은 없이 일제와 파쑈 폭압과 국내 운동의 폭동등의 조건들을 가지고 투쟁 형태의 이행 문제를 형식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은 매우 불충분하며 본질적인 점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옳게 해명해야만 김일성 동지와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을 위한 투쟁 방침이 명확히 천명되는 바 저자는 이와 같은 설명이 없이 20년대 정세가 당 창건을 요구하였다는 것으로서만(동서 213페지) 문제를 끌어 가고 있을 뿐이다.
106

 이와 같이 김일성 동지와 그 전우들의 지도하에서 민족 해방 운동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의 요구가 실현되어 나갔는 바 그 실현은 혁명적 당 창건을 위한 사상 조직적 준비 투쟁과의 심오한 결부가 없이는 도저히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항일 무장 투쟁의 전 행정은 공산주의적 핵심의 집결 단련 과정이었으며 대중과의 련계의 부단한 강화 과정이었으며 유일한 규률로 결속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의 강화 발전 과정이었다. 빨찌산 투쟁 형태를 통하여 로동 운동, 농민 운동을 그에 결합시키면서 조선 혁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 이 영광스러운 행로는 아직 통일된 맑스-레닌주의 당은 조직된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상조직적 및 전술적 준비는 구축된 것으로써 바로 여기에 우리 당의 혁명적 전통을 밝혀 주는 관건이 있다고 보며 이것을 떠나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 문제의 론의는 형식적이라고 본다.
107

 인용된 부분을 보고 있으면 수령님에게 제발 저 좀 예쁘게 봐 주세요하고 알랑거리는 젊은날의 황장엽 동지가 떠오릅니다. 사실 젊고 정치적으로 야심있는 학자가 학계의 쟁쟁한 선배들을 합법적으로제거할 기회가 왔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황장엽의 이 글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이라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합니다. 어쨌든 젊은날의 황장엽은 학문적 정치투쟁을 통해 권력과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이청원 등의 선배들이 몰락했을 때 황장엽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물론 이 글을 쓸 때는 자신이 남반부 괴뢰정권에 쿵짝하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요. 하지만 글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보고 있자니 노년의 황장엽도 딱히 상상못할 존재는 아니라는 느낌도 듭니다. 대부분의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천수를 누리다 갔으니 나름 인생의 승리자라고나 할까요.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어떤 예측

1958년, 북한 정부는 전후복구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원조가 밑바탕에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견지한 '당의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 이지요.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혼란을 겪고 있는 남한에 대해 우월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러한 경향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쏘베트 군대의 결정적 역할에 의하여 한날 한시에 해방된 공화국 남반부에 기여든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일제를 대신하여 그 보다도 더욱 악랄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8.15 해방후 우리나라 남반부에서는 어떠한 민주주의적 사회-경제 개혁도 실시되지 않았다. 우리 인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으며 8.15 해방 직후 일제의 패잔 무리들과의 결사적 투쟁에서 우리의 로동자들이 확보하였던 공장과 광산들은 미제 독점 자본에 의하여 횡탈되였거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의 수중에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남반부 공업은 미제의 식민지 략탈 정책에 의하여 파탄과 파멸의 구렁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늘 남조선에서는 풍부한 전략 자원의 략탈과 관련되는 일부 공업 부문들, 례컨데 중석, 흑연, 동광과 기타 일부 섬유 제품의 생산이 극이 파동적인 곡선을 그리면서 그 생산을 풍전 등화의 운명으로 간신히 지속할 뿐 기계 제작, 야금, 화학 공업 및 기타 중요 공업 생산 부문은 전면적으로 파탄되고 있다.

8.15 해방전에 남조선에 집중되였던 일제의 식민지적 기계 제작공업 마저도 완전히 파괴되였다. 뿐만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계 수입조차 억제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남조선 경제는 기계에 대한 초보적인 수요조차 충족시킬 수 업는 형편에 처하였다.

제철 공업에서 본다면 그의 대표적인 기업체들인 '대한 중공업' '삼화 제철'에서 생산되던 극소량의 선철류조차 국내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생산비 이하의 렴가로써 일본에 공급되였었는데 최근에는 이것마자 증가되는 적자에 못이겨 조업을 중단하고 있다.

남조선 전체 공장수의 33%, 종업원 수의 38.8%를 점하고 있는 방적 공업에서는 1956년 8월 현재로 '대한방적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면방직 공장의 조업률이 62%에 불과하며 특히 중소 직물공장에서의 조업중단률은 95%이고 전체 기업체의 82%가 조업 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다.

1955년에 남조선 제조 공업 총생산액 중에서 36%, 기업체 수의 22%를 차지한 식료품 공업은 그 대부분이 미제의 잉여 생산물인 소맥과 당밀을 원료로 하는 밀가루 제조 공업과 제탕 공업, 미국의 수입 원료로써 그들의 리윤 찌끼를 얻어 먹는 예속 자본가를 육성하는 부문으로 되고 있다.

오늘 남조선의 공업은 이와 같이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의 일로를 걷고 있으며 다시 소생할 아무런 전망도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미제국주의자들의 소위 '원조'의 '혜택'이며 그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김정일,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 『우리 나라의 인민 경제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58), 139-140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이 북한 공업은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묘하지요.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 북한측이 비판한 남한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이 전후복구시기 기초적인 자본을 축적하여 1960년대 공업화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예속 자본가'들의 후계자들 중 몇몇을 '민족 자본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지요.

북한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중공업화는 자체적인 자본 축적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까닭에 지속적인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고착화 시켰고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단초가 됩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식의 중공업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남북간의 경제가 역전된 1970년대 까지도 남한 경제의 붕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부럽지 않은 낯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4월 5일 일요일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까요?

오늘 북한이 인공위성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고 하지요. 현재 미국과 우리나라의 소식통들은 '광명성 1호'에 이어 '광명성 2호' 또한 궤도 진입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뭐, 그러나 '광명성 1호' 때에도 그랬던 것 처럼 평양에서만은 '광명성 2호'의 신호가 포착될 것 입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광명성 1호'는 지구 궤도를 돌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를 송신했다고 합니다. 북한 말고는 '광명성 1호'가 송신하는 노래를 들은 곳이 없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 예정이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일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 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물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약간 불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쟁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식민지시기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 진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구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 와 아베 게이지(安部桂司)는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로 인한 유산이 그대로 북한에 남겨져 1953년 이후까지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식민지시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북한 지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의 공업화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호리 가즈오(堀和生)의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같이 재미있게 잘 씌여진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와 아베는 북한지역의 공업화를 설명하면서 거시적인 공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각 기업체와 공장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언제 어느 지역에 어떤 투자를 해서 무엇을 생산했는가. 저자들은 본문에서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1945년 이전 북한 지역의 일본 기업활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 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개별 기업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1945~50년 시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저자들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소련 점령군과 북한인들이 일본 기업을 인수해 산업을 복구하는 과정과 1950~51년 사이에 기초적인 군수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저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유산과의 단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상당수의 기업들이 혼란기에 파괴를 면하고 그대로 북한의 공업 기반이 되었음을 개별 공장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렇게 북한에 승계된 공업기반이 북한의 전쟁 준비에 동원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저자들은 일본이 남긴 공업화의 유산이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증명함으로서 북한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식민지 유산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식민지의 유산이 1953년 이후의 공업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유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부록에서 해방이전 일본이 건설한 공장들이 오늘날 북한의 어떤 공장으로 승계되었는가를 정리한 표를 실어 놓았지만 이것 이외에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서술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공업이 해방 이후의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2009년 1월 7일 수요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룡인시에 사는 어린양입네다

오늘 도착한 책 한 권.


헉. 이 어린양이 졸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거주하는 태양민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냥 Korea라고 표기해서 오는 경우는 봤는데 North Korea로 찍혀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에 주문한 책 중에서 이놈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점이죠.(4일만에 날아와서 놀랐습니다.)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북한, 수입차 관세율을 30%에서 100%로 인상

마이니치 신문에 재미있는 소식이 하나 실렸습니다.

北朝鮮:輸入車関税100%に 市民の車所有はほぼ絶望的

북한이 수입차에 대한 관세를 100%로 인상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북한 내에도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는 자동차 수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합작으로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것을 보고 과연 저것을 북한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아무래도 그 보다는 상황이 좋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올해 10월 이전에는 수입차에 대한 관세율이 30%였다는데 이것도 상당히 높았군요.

짤막한 단신 기사이지만 꽤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장군님의 협상술

지난 7월에 sonnet님과 漁夫님이 공산주의 국가의 협상술에 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How Communists Negotiate - sonnet

지도국 발표 담화 - sonnet

북한식 협상술의 한 예 - 漁夫

이쪽 동네의 상식으로는 황당한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최근 남베트남 붕괴 당시 북베트남에 포로가 되어 고생했던 이대용 공사의 회고록에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먼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78년 7월 24일부터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 인도 베트남 대사관이 소유하고 있는 부속건물인 허름한 독립가옥에서, 한국∙북한∙베트남의 3개국 외교 대표단들이 모여 호치민 시 치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국 외교관들의 석방 문제에 대해 비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중략)

북한측 대표단은 조명일이 수석대표였다. 조명일은 당시 대남비서 김중린 밑에서 사실상 남북대화를 총괄해 온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대표로는 노동당 3호 청사 통일전선부의 박영수, 김완수 등이었다.
그들은 나를 압박하여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 망명서를 받아내는 것과 그대로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는 양면시나리오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석방할 때 남한에서 복역중인 남파간첩과 한국 외교관은 교환비율은 뉴델리 3자 회담의 진전을 봐 가며 조절하기로 정하고 있었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에 대남비서 김중린은 이들 대표단을 데리고 당 중앙이며 조직비서인 김정일의 지시를 받기 위해 찾아갔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김정일은, “남조선에 갇혀 있는 남조선 혁명가(남파간첩)가 현재 얼마나 되느냐?”고 김중린에게 물었다. “400명 될 겁니다만…” 김중린이 대답하자, 김정일은 대뜸, “으음…. 그러면 1명당 150명으로 바꾸자고 그래…”라고 명령했다.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더라도 나머지 한국 외교관 두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고, 또 나를 서울로 보낼 때에는 한국 외교관 세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는 수치는 이렇게 김정일의 한 마디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너무도 엄청난 편차가 있는 교환비율에 김중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정일은 한마디 덧붙였다.

“왜 그러는가? 많아서 그런가? 회담에 임할 사람들이 그렇게 졸장부 여서야 되겠느냐. 회담이든 뭐든 처음부터 판을 크게 치고 내밀어야지… 그러면 얼마로 하려 했는가?”

김정일의 말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신(神)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중린 이하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이대용, 『최후의 월남공사 李大鎔은 말한다 –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 경학사, 2000, 130~131쪽

물론 이것은 이대용 공사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제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 이지만 요즘 북한의 해괴한 협상 행태를 보면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 입니다. 북한이 외교협상에서 황당무계한 발언을 일삼은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정책의 최고결정권자들이 저렇게 해괴한 발상을 탑재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쉽게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2008년 9월 3일 수요일

이놈들이 거짓말이라니 진짜 같다...

北조평통 "여간첩 사건은 날조 모략극"(종합)

넵. 북조선에서 간첩사건에 대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북조선에서 날조극이라고 하니 오히려 사실 같습니다.

아우. 언제까지 이 거지새끼들을 상대해 줘야 하는건지.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후야오방의 북한에 대한 평가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나카소네 대담록을 읽는 중인데 북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하나 있더군요. 나카소네가 1984년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을 만났을 때 후야오방이 했던 이야기라는데 그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사토 : 이야기가 약간 뒤로 돌아갑니다만, 1984년 3월에 중국에 가셨지요?

나카소네 : 네. 최초의 공식방문이었지요. 그때까지는 호요방 씨가 아직 건재하였으므로 대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학에서 강연까지 했고 그것이 중국 전체에 TV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다음 학생들이 이것저것 의견을 듣고 싶다기에 30명 정도 학생들과 간담을 했는데 일문일답하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 전단도 뿌리고 데모도 하면서 나카소네 반대운동을 했어요.(웃음)

사토 : 중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나카소네 : 그때까지 남북한간의 화합에 대해서는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과 북이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교전국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은 제외시키고 3자회담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호요방 씨에게 “그런 불합리한 억지주장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이 4자회담에 응하도록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로부터 “당신은 미국과 친하고 중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건냈던 것 입니다. 그랬더니 – 이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 호요방 씨가 “북한은 심리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여서 중국도 다루기 힘들다. 그러한 북한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느낌이 그 당시부터 있었어요. 아마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해서 포커게임을 하고 있듯이 중국과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토 : 알만합니다.

나카소네 : 그러므로 중국으로서도 북한문제는 귀찮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토 다카시, 사토 세이사부로, 성완종 번역,『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한송, 1998, 384~385쪽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북한은 확실히 ‘자율성’이 강한 국가입니다. 사실 자폐적이라고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긴 합니다만…. 소련으로부터 복구원조를 받아먹던 50년대 중반에도 소련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천리마운동 이후로는 그야말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지요. 지루한 핵 협상과정을 통해 잘 나타났듯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80년대 초반에는 인용한 글에서 후야오방이 밝혔듯 중국이나 소련의 말이 더욱 더 먹히지 않았을 것 입니다.
북한의 자율성(또는 자폐증)은 북한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처럼 북한과 그럭 저럭 말이 통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높아졌으니 정치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는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또 50년대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겠지만 어떤 때는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종이전화기에 달린 실 밖에 안되는 것 처럼 보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