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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재활용

얼마전에 읽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논문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유사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전에서 어느 한 쪽이 인력자원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쪽이 인력자원을 얻을 가능성을 뜻했다. 국민파는 공화파의 포로나 투항자 중 절반 정도가 국민군에 복무해도 될 정도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재활용’은 국민군이 새로운 병력을 얻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재활용한’ 병력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모로코 용병들과 함께 국민군이 징병해야 할 인력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국민군은 진격할 때 마다 편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공화군 포로를 잡아들여 여분의 인력자원을 꾸준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37년 9월, 국민군 총참모부는 병력과 저렴한 노동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포로수용소장 마르틴 피닐로스(Martin Pinillos) 대령에게 “신규 노동대대의 편성을 시작하기 위해 포로의 신속한 등급분류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분류는 다음과 같이 문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민파의 대의에 충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A, ‘(국민파의 대의에) 적대적이고 반대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간주되면 B, ‘유죄’이며 법적 처리를 받아야 하는 포로들의 경우 범죄가 ‘경미할’ 경우에는 C, ‘심각할’ 경우에는 D로 분류되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으면서 그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의심스러운 A’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분류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는데 공화파 포로 중 무려 50퍼센트가 A, 20퍼센트가 ‘의심스러운 A’, 20퍼센트가 B에 해당됐다. C와 D는 합쳐서 전체 포로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민군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공화군의 포로를 자기 편으로 ‘재활용’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의심스러운 A와 B로 분류된 포로는 노동대대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 통계는 공화군 병사의 상당수가 자신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는 편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성심이 약했다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 스페인 내전 전시기의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민군은 1937년 말 까지 107,000명의 공화군 포로를 잡았다. (이 중에서) 거의 59,000명이 곧바로 국민군에 입대했으며 약 30,000명은 노동대대에, 거의 12,000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머지 6,000명은 이 보고서가 작성될 때 까지 아직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1937년 가을, 아스투리아스(Asturias) 전역이 끝나갈 무렵 국민파는 다음과 같은 선전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많은 공화군 포로들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10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아스투리아스 점령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거의 7만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수일 내로 우리의 군인이 될 것이다.”

데 라 시에르바(De la Cierva)는 이중에서 대략 2/3이 1938년에 국민군으로 싸웠다고 추정했으며 인민군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보았다.

개별 모병소(Cajas de Recluta)의 보고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향이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1937년 10월에서야 북쪽에 있던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이 국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북부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함락된 산탄데르(Santander)의 모병소는 이미 9월 10일 부터 업무를 시작해 얼마전 까지 공화군에 있던 병사들을 국민군 일선 부대로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38년 5월의 보고서를 보면 부르고스(Burgos) 한 곳 에서만 15,000명을 ‘재활용’ 했다고 한다. 1938년 7월 14일 부터 20일 까지 단 일 주일간 사라고사 한 곳에서만 ‘적군 소속이었던’ 345명을 국민군에 입대시켰다. 마찬가지로, 바야돌리드(Valladolid) 에서는 같은해 7월, 단 10일 동안 246명을 모집했다.

공화군 병사로서 국민군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A로 분류될 경우 아주 빠르게 편을 바꿀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바스티다(Luis Bastida)는 공화파 북부군에 복무하다가 1937년 말 국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바스티다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민군 제35 ‘메리다’ 연대에 입대해 갈리시아(Galicia)의 비고(Vigo)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상을 바꾸지 않고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진영, 군대, 군복, 군가, 그리고 깃발을 바꾸었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바스티다는 국민군 소속으로 공화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아이러니하다는 듯이 기록했다.

“나는 회색 상의와 카키색 바지의 국민군 군복이 우리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일부 병사들은 너무 빨리 편을 바꾸는 통에 황색과 적색의 왕당파 깃발에 충성을 서약할 시간도 없었다.

James Matthews, “'Our Red Soldiers': The Nationalist Army's Management of its Left-Wing Conscripts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9”,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45 No 2(2010), pp.354~356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단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골치 아파집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나의 국민으로 편입될 존재들이기 때문에 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주 애매해 지지요. 물론 독소전쟁의 경우 처럼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도 ‘재활용’이 이루어 지는 경우 많긴 합니다만 내전 처럼 간단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지요. 어찌 보면 사상적 균열이 꽤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같은 사회구성원간의 내전에서는 의외로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집단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그 사람이 빨갱이인지 파시스트인지 구분하기란 꽤 어렵지 않겠습니까?(반대로 독일과 소련이라면 그 문제는 훨씬 쉽겠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하던 북한은 한국군 포로를 대규모로 인민군에 편입시켰지요. 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 직전 13,094명의 한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이중 6,430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박진홍 교수의 회고록을 보면 포로 송환 당시 한국군에서 인민군에 편입된 포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2)

어쨌든 동일한 사회적 집단, 특히 민족이라는 집단의 테두리 내에서는 균열을 완전히 봉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당히 은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친인척이 과거 ‘빨갱이’나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스페인 내전 당시 상대방의 포로를 전향시키는 과정을 보고 우리의 과거가 겹쳐지는 것 같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 션즈화/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2010), 413~414쪽
2) 박진홍, 『돌아온 패자 : 북한 포로수용소, 그 긴 전장을 가로지른 33개월의 증언』(역사비평사, 2001), 177~178쪽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어떤 영국식 농담

어떤 영국식 농담.

엔트함머(Joseph Enthammer)는 독일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영국군 상병과 친해졌다. 엔트함머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런던 출신의 학생이며 유머 감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군 상병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당신네 독일군이 승무원이 1천명이나 되는 신형 전차를 개발했다더군요.”

엔트함머는 반박했다.

“말도 안돼!”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정말이에요. 한 명은 조종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지휘를 하고 사수는 사격을 하죠. 그리고 나머지 997명이 전차를 뒤에서 민다고 합니다.”

Robert J. Kershaw, It Never Snows in September : The German View of MARKET-GARDEN and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1944(Ian Allan, 2004), p.176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군인들

한국전쟁은 여러모로 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게는. 근대화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커녕 제대로 된 군대조차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한국에게 전쟁은 대재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전쟁이 터졌으니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싸워야지요.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군대를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절 한국의 처지는 그야말로 딱해서 군인들을 먹이는 것 조차 똑바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군인들을 배불리 먹일 능력이 없었으니 전쟁이 터지고 군대가 늘어난 상황에서는 안봐도 뻔한 상황이 연출 될 수 밖에요. 1948년 9월 26일의 미군사고문단 기록을 보면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국회에 사병의 급식 개선을 위해 추가 예산 편성을 요청하면서 병사 한 명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이 육군의 기준치인 3,162칼로리에 못 미치는 2,322칼로리에 불과하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4200~4500칼로리 정도였으니 창군 초기의 한국군의 급양  수준은 미군의 절반 수준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습니다.2) 사실 식단의 질로 따지면 더 형편 없었겠지요. 예전에 썼던 ‘한국군 5사단의 일일 식량 지급’ 이 라는 글에서  한번 다루었지만 전쟁 초기 한국군 전투부대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대략 3100칼로리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식단을 보면 영양소의 대부분을 밥에 의존하는 형편이지요. 보급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훈련소 같은 곳에서는 3600칼로리 수준이었던것 같습니다.3)

먹는게 형편없으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긴 어려웠을 겁니다. 전쟁 당시 한국군의 비전투 장비손실 중 상당수가 춥고 배고픈 병사들이 장비를 팔아 먹을것이나 땔감을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많은 한국군 병사들이 음식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소총까지 팔아 치웠으며 자신의 소총을 팔아버린 뒤에는 다른 사람의 소총을 훔쳐 채워넣는 사고가 꽤 많았다고 합니다.4) 가난한 한국군 병사들이 배를 곯는 동안 돈 많은  미군들은 전투식량이 맛이 없어 내다버리고 있었다죠.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포로수용소를 가 보니 포로들이 한국군 보다 더 잘 먹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죠.5) 1953년 5월 12일에 의무병과 선임고문관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군병원에 입원한 한국군 병사 중 7.6%가 영양실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질병인 결핵환자도 포함하면 이 수치는 조금 더 높아집니다. 여기에 11.9%의 결핵환자까지 합하면 거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6) 게다가 이 외에도 많은 질병이 영양실조가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니 꽤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이것도 그나마 보급체계가 정비되고 미국의 원조가 꽤 들어온 1953년 5월의 상황이니 1950~1951년 경에는 더 심각했을 것 입니다.

병사들에게 밥도 제대로 못주는 형편이었으니 봉급도 제대로 챙겨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한국군의 비참한 상황은 미국도 우려하는 문제였습니다. 전쟁 통이라 군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줘야 할 판인데 줄게 없을 정도로 엉망이니;;;;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한국군의 비참한 실정 때문에 미국측에서 한국군이 각종 부대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묵인해 줄 정도였지요.

1953년 기준으로 한국군의 급여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7)

1953년도 기준 한국군의 급여
계급
급여(원화)
실질급여
급여(달러환산)
대장
90,000
85,400
14.23
중장
72,000
68,000
11.35
소장
66,000
62,500
10.41
준장
60,000
56,800
9.46
대령
56,100
53,400
8.90
중령
51,300
48,835
8.14
소령
46,500
44,275
7.38
대위
38,100
36,457
6.07
중위
35,700
34,126
5.68
소위
33,300
31,801
5.30
준위
32,300
30,937
5.15
일등상사
26,100
25,012
4.17
이등상사
24,300
23,171
3.86
일등중사
7,200
7,200
1.20
이등중사
6,000
6,000
1.00
하사
4,500
4,500
0.75
일병
3,600
3,600
0.60
이병
3,000
3,000
0.50

대한민국 육군 대장의 급여가 14달러 밖에 안되는 것도 안습입니디만 이것은 그나마 공정환율인 1달러당 6,000원으로 계산한 것 입니다. 1953년 초 암시장 환율은 1달러당 21,000~25,000원이었으니 이 환율을 적용하면 한국군 대장의 한달 급여가 3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 육군 이등병은 한달 50센트에 목숨을 걸어야 하니 정말 비참하지요.

글자 그대로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당장 붕괴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위한 대규모 동원을 해야 했으니 국가는 물론이고 동원되는 국민으로서도 난감할 수 밖에요. 국민방위군 같은 대규모 동원계획이 참사로 끝난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이 한 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자체가 그러한 대규모 동원을 할 역량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Supplemental Budget - FY 1948/1949’(1948. 9. 29), RG 338, PMAG 1948-49/KMAG 1948-53 Box 1
2)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3)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4) ‘Individual Rifles for ROK Army Soldiers’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장비가 부족했던 국립경찰이 병사들의 소총을 강제로 빼앗은 사례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5) 백선엽, 『군과 나』(서울, 시대정신, 2009) 299~300쪽
6) ‘Alleged Undernourishment of ROK Army Patients’(1953. 5. 1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7) ’Pay of ROK Army’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기묘한 인생역정

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서부전선으로의 차출에 반대한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들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면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들은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명령을 자신들의 부대에 대한 처벌행위로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바깥에 "플랑드르에서 도축할 소떼"나 "동부에서 온 죄수들" 같은 낙서를 했다. 약삭빠른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미 1917년 중반 부터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병력의 10% 가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소규모 수송부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것, 수상한 병사들을 체포하는 것, 병사들을 무장해제해서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기차안에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열차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는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렸다. 1918년, 드빈스크에서는 5천명의 병사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거부해 처벌 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하리코프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2천명의 병사가 폭동을 일으켰다. 예비병력을 필요로 하던 최고사령부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병사들이 한참 뒤에 신뢰하기 어려운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볼셰비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 까지는 이들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제 동부전선에는 나이 많은 예비역이나 향토방위대,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알자스 출신이나 폴란드계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13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어떤 포로의 편지

1943년 4월 5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이것을 도쿄에 있는 독일 대사관 무관 크레치머(Alfred Kretschmer) 소장에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친애하는 크레치머!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제6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네. 나는 지금 겨우 내 한몸을 챙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부탁을 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구만.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보내줄 수 있겠나?

1. 긴 팔 스웨터 한벌, 될 수 있다면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내 키는 자네도 대략 알고 있을 걸세.(파울루스의 키는 187cm)
2. 긴 양말(Wadenstrümpfe) 한 짝, 치수는 11½,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3. 양말 세 짝, 치수는 11½, 색은 자네가 편한 대로 해 주게.
4. 비단 셔츠 두 벌, 목 둘레는 38, 카라 치수는 39, 소매는 긴 것으로 해 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셔츠와 같은 색(특히 어두운 녹색)의 넥타이도 하나 부탁하네.
5. 멜빵 하나.
6. 종이 한 통과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이것도 보내줄 수 있겠나?

7. 초콜렛과 쿠키(Kekse).
8. 잼(Marmelade) 한통.
9. 커피와 차.
10. 담배와 시거.
11. 향수(Eau de Cologne)
12. 화장품.

그리고 자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년 전 부터 위와 장에 문제가 있었네. 위에 적은 목록 중 7번과 8번에 적은 기호품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도움이 된다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7번에서 12번까지의 물품은 매달 한 번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100루블 정도 송금해 주었으면 좋겠네.
지출되는 비용은 나중에 정산할 때 까지 당분간 자네가 부담해 줄 수 있겠나?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2000, ss.47~48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파울루스가 보낸 편지는 독일 대사관 쪽에서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파울루스의 편지는 이래저래 재미있는데 특히 포로가 된 고급장교를 우대하는 유럽 전쟁문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고급장교는 사병들과는 달리 꽤 근사한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장교처럼 팔자좋은 인생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파울루스가 병사들 걱정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이 영양실조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마당에 초콜렛 타령을 하고 있는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점은 잘 느끼고 있었겠지요.

2010년 1월 7일 목요일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

넵. 많은 분들이 눈치 채셨겠지만 불법날림번역 땜빵포스팅입니다. 그래도 살짝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인 '안방전선'의 이야기 이지요.

독일과 영국 여성들의 생활은 두 나라의 전세가 점차 변화해가면서 총력전의 다섯가지 요소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대규모의 전시 동원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남성들이 군대나 공장에 징집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잠시 남성들과 떨어져 지내거나, 또는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독일과 영국 모두 자국의 군인이나 외국군인, 전쟁포로, (독일의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남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민간인을 목표로 한 폭격으로 대규모의 구호업무와 소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경제적인 총력전으로 물자의 부족과 배급, 그리고 암시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섯번째는 남성들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민간 업무나 군대의 보조적인 업무에 투입되거나 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여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라마다 달랐으며 또한 개인의 환경별로도 달랐다. 특히 독일의 경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처우는 "인종적인 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독일의 "가치있는" 여성들이 총력전으로 부터 받은 영향은 비슷한 면이 많았으며 또한 다른 점도 많았다. 현지 여성들과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점이 많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들을 동원한 지역에서는 다른 점 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일의 경우 남성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점령지역에 배치되어 가정을 비우는 경우가 영국 보다 많았고 그 기간도 더 길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숫자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 남성 중 300만명이 전사한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독일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독일은 영국보다 과부,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딸, 형제를 잃은 여성, 애인을 잃은 여성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남성들의 사망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941년 11월 부터 약혼한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가 전사했을 때 "영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태어나게 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도록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에서는 전사자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전쟁포로와 실종자도 영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는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독신을 택했다. 자신의 남자가 북아프리카나 중동, 극동 전선에 배치된 영국 여성들의 경우 불안감이 심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군대에 징집된 영국 남성의 상당수는 영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루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장기간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 떨어지게 되면서 가정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익숙하지 않은 책임을 떠맏아야 했다. 여성들은 상점이라던가 독일에서는 작은 농장(여성들은 전쟁전에는 남편의 지도하에 가끔씩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과 같은 가업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재주껏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어머니가 노동을 하는 경우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포이커트(Deltlev J. K. Peukert)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반체제 청소년 조직이었던 에델바이스 해적단(Edelweißpiraten)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전사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부부나 연인들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평화시에는 안정적이었던 관계들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의 남성들이 군대나 산업계에 동원된 상태에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남성들이 쏟아져 들어온 곳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영국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외국 군대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독일도 1944년 말 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 기간 중 군부대의 이동이 빈번했으며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 징집된 신병들이 자국 내의 군부대로 입소했다. 영국은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군, 네덜란드군, 폴란드 군 등 약 50만명 정도의 외국군대가 주둔했으며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그 숫자가 거의 150만명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을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종 이들로 부터 성병을 옮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성행위를 매개로 한 질병이 1941년 부터 1942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는 1942년에 질병에 걸린 여성의 3분의 2가 군인들로 부터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한 여성들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이곳의 군인들과 접촉했으며 정부는 10대 소녀들이 군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기차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 출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포명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많은 독일 여성들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생과부로 지내는 기간이 늘어났으며 군인들이 독일 본토나 외국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비슷한 쾌락을 즐기려 했다. 독일 정부는 여성들의 문란한 행위에 대해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42년에는 "전선의 병사들에 대한 모욕죄"를 도입한 데 이어 다시 간통한 여성은 가족수당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고 1943년 3월에는 전사한 군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연금 지금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을 합법화 했다.

한편 영국과 독일은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다.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Christabel Bielenberg)는 독일에서 만난 미군 조종사의 "건강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며 또한 풍요로운"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성들은 미군의 "멋진 군복과 .... 많은 돈, 그리고 자잘한 사치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독일 여성들의 곤경은 심각했으며 독일의 공공시설들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 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점령군인 연합군, 특히 미군과 관계를 가지면서 초콜렛이나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구했으며 이것들을 직접 쓰거나 식량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하일브론(Heilbronn)에 진주한 미군들은 "얼마 안가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피난온 문란한 여자나 초콜렛으로 유혹한 슈바벤(Schwaben) 여자들을 자신의 여자친구로 삼았다." 영국에서도 물자 부족은 심각했다. "우리는 자크마(Jacqmar) 스카프나 나일론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그 여자들이 (미군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국 군인들을 사귀고 싶어하는 젊은 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나일론 스타킹, 그리고 초콜렛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외국 군인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그리고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크랭(J. A. Crang)은 "멋진데다 돈 많은 캐나다군과 미군이 (영국 본토에) 주둔하게 되면서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잘 서술했다. 영국군은 이 문제에 크게 신경썼으며 공무원들을 동원해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하도록 했다. 외국군대가 떠나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 아이를 가진 채 남겨진 많은 독신여성들은 외국 군인들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원망했다."

당당하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외국군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여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 성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군 전쟁포로들은 공식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접촉했으며 음식이나 다른 물품들을 얻기도 했다. 또한 영국 여자와 전쟁 포로간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부터 영국으로 이송된 전쟁 포로가 급증했으며 이중 일부는 농가에 배치되어 일을 거들었지만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게다가 연합군, 특히 미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은 1939년 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많았으며 이 숫자는 1944년에 7백만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 많은 포로들이, 특히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포로들이 독일의 농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은 가족 농장에 함께 살았는데 전쟁 후반기에는 가정의 유일한 남성 노동력인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영국에 비해 여성들이 노동력을 의존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동기(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거나 도는 농장일을 돕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거나)와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치욕적이게도 이탈리아 포로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녀들은 매우 심한 도덕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는데 그쳤으나 독일에서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인" 여성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독일에서는 지역의 나치당 간부들이 여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공개적으로 삭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전쟁포로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성적 도덕의 문제였으나 독일에서는 정권의 과도한 인종적 정책으로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Jill Stephenson, "The Home Front in "Total War" : Women in Germany and Britain in the Second World War",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13~217

인용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총력전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서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2차대전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총력전 체제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데다 패전으로 인해 수백만의 외국군대가 쏟아져들어오는 사상초유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여성의 역할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인용한 글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이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특히나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강구한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여성역할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겨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이미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도덕이 위태위태해진 독일 사회에 미국이라는 재미있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콩가루로 변해갑니다. 윌러비(John Willoughby)는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라 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점령 초기 미군 당국이 독일 민간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이 인기가 많다보니 점령초기 부터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남자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마치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수적 성향의 남자들이 여성들의 허영심이나 성적인 방종을 비난하는 것 처럼 점령초기의 독일에서도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약간 더 골때리는 것은 미국쪽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독일 여자들이 순진한 미군 병사들을 사냥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점은 한국전쟁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춘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인 비난이 꽤 심했다고 하지요.(한국전쟁기 매춘과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전쟁포로가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는 경우입니다. 연합군에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보다 독일군에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가 이 점에서 유리했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물론 전쟁초기 소련군 포로의 경우는 독일의 농장에 배치받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갈 확률이 더 높긴 했습니다만. 토마스 크레취만이 주연으로 나온 독일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마누라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포로 중에서도 현지 여성을 꼬셔서 눌러 앉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크놉(Guido Knopp)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게오르그 게르트너(George Gärtner)가 있을 겁니다. 이 양반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다죠;;;; 하지만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 여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풍족한 양키들이 있었던 까닭에 독일군 포로들은 여자 문제에서는 독일 본토의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보다 더 못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이태준의 스탈린그라드 기행기

이태준(李泰俊)은 식민지 시기의 문인 중 가장 유명한 편인데 해방 이후 월북해버려 노태우 정권하에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 까지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네. 물론 이 어린양도 문학쪽에는 관심이 없지만 북한 현대사에는 관심이 있다 보니 이태준의 글들을 조금 읽은 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것이 논픽션인 『소련기행』입니다.

『소련기행』은 이태준이 1946년 8월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글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강하긴 해도 종전 직후 소련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를 다룬 부분은 매우 재미있는데 이 중 마마예프 쿠르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9월 19일.

일찍부터 전적(戰跡) 구경을 나섰다. 먼저 옆에 있는 전사광장, 여기는 이번 싸움(독소전쟁)보다 10월 혁명 때 혁명군 54명이 사형받은 광장으로 기념되는데 광장 중앙에는 공원처럼 된 그들의 묘가 화원과 화환과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주위는 모다 속은 타버린 거죽만 5, 6층의 대건물들로 둘리웠는데 그 독군사령관(파울루스)이 잡힌 백화점, 혁명 때 '혁명군'이란 신문이 발간되던 집, 이런 유서 깊은 집들이 지하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처럼 잔해들과 침묵으로 둘려 있었다.

다음으로는 강변에 가까이 있는 침입하는 독군을 향해 최초의 공격을 개시한 '5월 9일광장' 그리고 바로 그 옆인 '빠블로브 군조관(дом павлова)'을 구경하였다. 과히 크지 않은 벽돌 4층의 건물인데 독군에게 포위되어 우군과 연락이 끊어진 곳에서 하졸 8명을 다리고 빠블로브(Якоб Павлов) 군조가 57일간 싸워 네 명은 죽고 군조와 다른 네 명은 지하도를 뚫고 생환하여 영웅 빠블로브는 지금 독일 점령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주택으로 쓰고 있으나 이 집을 기념키 위해 먼저 나선 것이 '첼까쓰운동'의 주인공 알렉산드라 첼까쓰 여사로서 가장 맹렬한 사격을 받어 허물어진 한편을 서툴은 솜씨로나마 고쳐 쌓어서 집 면목을 유지시킨 것이 이 여사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자들도 벽돌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에서 '첼까쓰운동'이 일어난 것이니 이 집에서 영웅 두 사람이 난 것이였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용케 무너지지 않었고 벽돌 한 장 한 장 성한 장이 별로 없다. 창마다 문마다에는 더욱 사격이 집중되어 창틀, 문틀은 모두 새로 고쳐 쌓었다.

여기서부터 10리나 되게 공장지대만을 지나보는데, 공장이 무너지고 불타고 한 것은 철근의 난마(亂麻) 무데기요, 큰 빌딩만큼한 석유탱크, 까쓰탱크가 무수한데 모두 불에 녹아 바람 빠진 고무주머니가 되어 어떤 것은 아주 주저앉어버렸다. 이런 공장지대엔 큰 건물들이 벌써 많이 새로 서있었다. 우리는 공장구경은 오다 하기로 하고 그 길로 '마마애브' 구릉으로 왔다.

이 언덕은 스딸린그라드의 유일한 고지로서 여기를 차지하고 못하는 것이 서로 승패의 운명을 결하는 것이 되였다. 주위 10리는 넘을까 고도도 시가에서 4, 50척 될지한 정도다. 나무도 별로 없다. 잔숲이 군데군데 있으나 그 뒤에 자란 것들일 것이다. 큰 전차 한 대가 보인다. 이것은 기념으로 남겨둔 것으로 우군 응원전차대가 가장 깊이 들어왔던 선봉전차였다 한다. 탄피는 걸음마다 밟히고 가장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여기 저기 해변에 조개껍질 나부끼듯 하는 임자 없는 쇠 전투모들이다. 산적했던 전차, 트럭, 대포, 비행기, 기관총 등의 잔해를 기계로 긁어가고 철모, 혹은 벌써 자루가 썩고 녹투성이가 된 총신들은 다시 부스러기로 떨어진 것이라 한다. 뒹구는 철모는 탄환에 구멍 뚤린 것도 많었다. 독군 시체만 14만이 넘었다니 이 임자 없는 전투모인들 얼마나 많었으랴! 장비 좋은 독군으로도 가장 중장비와 중포(重砲), 중전차(重戰車)로 들어왔던 곳이 여기라 한다. 이 언덕에서만 독군의 시체 14만 7천, 포로가 9만 1천, 그 중에 장관만 25명, 장교 2천5백, 대포 4천, 자동차 6만, 비행기 3천여대 였다 한다. 적시(敵屍)만 14만7천! 얼마나 많은 피였을까! 여기 저기 피 묻은 군복자락 썩는 것이 그냥 나부낀다. 푹신푹신한이 붉으레한 황사언덕, 걸음마다 아직도 신바닥에 피가 배일 것 같다. 더욱 언덕 밑에서 독군포로들이 수도공사로 땅을 파고 있는 것과 건너편 마을 가까이서 꽝 소리가 나더니 검은 연기가, 영화에서 보던 폭탄처럼 올려솟는 것이 실감을 준다. 전적을 설명해주던 장교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지뢰가 가끔 저렇게 터지기 때문에 길 이외에는 들어서기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태진, 『소련기행ㆍ농토ㆍ먼지』, 깊은샘, 2001, 112~114쪽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미국 정부의 동방부대 소속 포로 처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포로 관리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찾았습니다. 한국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입니다만. 2차 대전 중 동방부대(Osttruppen) 포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격리를 하기 이전인 전쟁 초기에 수많은 독일 포로가 수용을 위해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포로 중 약 4,300명이 뒤에 소련 국적자로 판명되었다.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자 이 포로들은 곧 다른 독일인 포로들과 격리되었으며 소련으로 송환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파견된 소련 대표단의 심사를 받을 특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소련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일반 (독일) 포로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소련은 뒤에 가서야 이들을 소련인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 포로들은 소련 당국이 선박편을 준비하는 것에 맞춰 소련으로 송환되었다.

George G. Lewis and John Mewha(1955), History of Prisoner of War Utilization by the United States Army, 1776-1945, Department of the Army, p.148

소련 국적의 독일군 포로에 대한 내용은 이게 전부여서 매우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이 있긴 합니다. 먼저 미국으로 이송된 동방부대 소속의 포로가 4,300명 정도라는 겁니다.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이고 외교적으로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에 만약 뒤에 관련 연구를 한다면 의외로 수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소련정부와 송환 협상도 이루어 졌으니 관련 문서가 별도로 분류되어 있을 것 같네요.

두 번째는 소련 정부가 초기에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점 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천명의 자국 국민들이 독일군의 편에 서서 총을 들었다는게 알려지면 이래 저래 난감할 것 입니다. 그래도 반역자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빨리 송환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대박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직후,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의 전쟁포로국에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2월 3일 현재까지 관할 수용소와 전선의 임시수용소에 19만6515명의 포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내 : 86,894명
전선임시수용소 내 : 78,951명
보건인민위원회 소속 병원 내 : 11,995명
수용소,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 8,477명
수용소, 이송 중 탈진 또는 질병의 결과로 사망한 자 : 10,198명

이 밖에 각 전선군 및 야전군사령부의 집계중인 보고에 따르면 1만6천명의 포로가 내무인민위원회 관할의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 중 16,059명의 포로는 노동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 2,448명
부사관 18,243명
사병 66,203명

장교 : 장군 4명, 대령 23명, 중령 31명, 소령 68명, 대위 330명, 중위 141명, 소위 625명, 사관후보생 1,078명, 상선단 장교 6명, 기타 간부 141명

이 밖에 돈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전선군 관할지역의 포로 중 장교가 2,500명이고 이 중 장군이 24명 입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öhr 1943-1953, Bechtermünze Verlag, 1996/2000, s.38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 번으로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가 전쟁이 시작된 뒤 1년 반 동안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장군은 여섯배!

그야말로 대박 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스탈린 동지도 꽤나 흐뭇하셨을 듯.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촬영된 유명한 사진 한 장


2차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이 사진을 한 번 정도 보신 기억이 있을 것 입니다.

이 사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촬영된 사진으로 이 전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들 중 한 장입니다. 이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매우 궁금했는데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Island of Fire : The Battle for the Barrikady Gun Factory in Stalingrad'에 이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이 있더군요.

제이슨 마크에 따르면 이 사진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빙클러(Friedrich Konrad Winkler) 대위로 이 사진이 촬영된 1942년 10월 16일에는 중위 계급으로 305보병사단 577보병연대 6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빙클러 대위는 1909년 8월 22일 보름스(Worms)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전쟁 발발 당시에는 5보병사단 56보병연대에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빙클러는 1941년 11월 1일 부로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305보병사단으로 전출된 것은 1942년 중순이라고 하는데 577보병연대 본부중대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2년 12월 1일에는 대위로 진급했습니다.

빙클러 대위는 6군이 항복할 때 까지 살아남았지만 결국에는 1943년 2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 베케토브카(Бекетовка)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전작인 Death of the Leaping Horseman도 그렇고 제이슨 마크의 투철한 노가다 정신은 정말 본받을 만 합니다. 이런 노가다 정신이 없었다면 마크의 저작도 많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저작들 처럼 특징없고 밋밋한 책이 됐겠지요.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말 이겠지만 어느 나라건 간에 외국인의 자국군대 입대에 대한 법적 근거는 있기 마련이고 독일도 당연히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5월 21일에 제정된 독일 국방법(Wehrgesetz)의 1조 1항은 모든 ‘독일남성’을 대상으로 국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닌 외국인과 무국적자의 경우에는 18조 4항에 의거해 총통의 허가를 받을 경우 자원입대가 가능했습니다. 외국인의 자원입대를 허가하는 권한은 다시 1935년 6월 26일에 전쟁성장관(Reichskriegsminister)에게 주어졌다가 1938년 2월 4일에는 국방군총사령관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사령부는 1939년 10월 7일자로 이중국적자, 무국적자, 외국인,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n)의 국방군 입대를 허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법령과 명령들이 전쟁 기간 중 잡다한 외국인 지원병 부대를 편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독일은 전쟁 초반부터 잡다한 외국인 의용부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본격화 된 것은 독소전 발발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모병활동이 있었지요. 어쨌건 초기에는 유럽인 위주로 외국인 입대를 허용했지만 소련 및 미국과의 전쟁으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독일군도 인종전시장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인도인 부대를 편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1년 4월 3일 찬드라 보스(Chandra Bose)가 소련을 경유해 독일로 입국한 뒤였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잘 나와 있는데 보세는 스탈린이 인도 독립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해서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보세가 독일로 오자 독일 외무성은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트 주 졸츠(Adam von Trott zu Solz) 참사관의 관할하에 ‘인도 특별국(Sonderreferats Indien)’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 처럼 인도 독립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스는 1941년 4월 29일에 처음으로 인도군 포로를 중심으로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독일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독일 측에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독립군을 인도로 진격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방안은 현실성이 부족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스는 독일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942년 5월 27일에 히틀러와 회견하고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별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펀자브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셰다이(Mohammed Iqbal Shedai)라는 독립운동가가 반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셰다이는 종교 때문에 이슬람 중심의 인도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 보스와 회담한 뒤에는 힌두교도와의 협력으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움직여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데 합의합니다. 보스의 활동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인도독립군 편성에 동의하게 됩니다. 인도독립군의 근간은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수용된 인도군 포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6월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이하 인도군단)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1942년 7월에 1,738명의 인도인 포로가 기차편으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롬멜이 1942년 6월 21일에 토브룩을 함락시키면서 추가로 6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인도군 포로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인도 독립군을 연대 급으로 편성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에서 공작원으로 공수훈련을 받고 있던 80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도군 포로들을 활용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으나 1942년 이후 사실상 이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포로들을 받고 보니 보스 휘하의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1942년 7월에 인도군단에 자원한 포로는 280명에 불과했고 이것은 당초 보스의 예상을 밑도는 규모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인도받은 포로 중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은 자들은 다시 안나부르크(Annaburg)와 람스도르프(Lamsdorf)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모집을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초의 자원자가 모집되자 작센의 프랑켄베르크(Frankenberg)에서 첫 번째 대대의 편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레스덴 근교의 쾨니히스브뤽에 훈련소가 설치되고 이후의 부대편성과 훈련은 이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인도군단의 본대와 별도로 50명이 브란덴부르크 교도연대(Lehrregiment Brandenburg)로 보내져 특수공작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군단의 편성 초기에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지원자 중에는 부사관 이상의 포로가 전혀 없어 소대 편성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측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부사관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포로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어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포로들이 또 다시 카스트와 종교별로 나뉘었습니다. 포로 중 50%는 힌두교도, 25%는 이슬람교도, 20%는 시크교도, 5%는 기독교도였는데 이들을 그냥 섞어놓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군단은 1942년 10월까지 추가 지원자를 받아들여 대대급으로 확장됩니다. 첫 인도군 대대의 지휘관은 크라페(Kurt Krappe) 소령이었습니다. 이 대대는 42년 10월 보스와 주독일본대사관 무관 등의 참관하에 대대훈련 시범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전 목적이 강한 훈련이었습니다. 인도군단은 1943년 2월에는 제3대대의 창설을 마치고 총 15개 중대 3,000명으로 증강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선 모두 정신 없이 꼬여가던 시점이라 독일군 수뇌부는 인도군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스도 독일의 태도에 실망해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인도군단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든 1개 연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인도군단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인도군단 병사들 중 일부는 당초 인도독립전쟁을 위해 자원한 만큼 프랑스로 갈 수 없다고 항의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독일측은 이 중 주모자 두 명은 6년형을 선고하고 이외에 시위에 가담한 40명도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인도군단은 1943년 5월 벨기에로 이동해 제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됩니다. 이때 인도군단은 제950보병연대로 개편됩니다. 연대장은 크라페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된 2개 대대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동해 1대대는 Ymuiden에, 2대대는 Texel섬에 배치됩니다. 인도군단의 2개대대는 다시 1943년 9월에 남부프랑스로 이동해 제344보병사단에 배속됩니다. 1944년 1월 8일에 제159예비사단이 보르도를 담당하게 되자 인도군단은 159예비사단으로 배속 변경됩니다. 인도 자원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943년 10월 1일에는 12명의 인도인 부사관이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일-힌두어 사전이 보급되어 언어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1944년 6월 30일, 인도군단의 9중대(장교 3명, 부사관 및 사병 199명)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9중대는 2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44년 7월 리미니(Rimini)에 배치됩니다. 9중대는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빨치산 토벌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도군단의 나머지 병력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퇴각전 과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교전했는데 이중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29명이 9월 22일에 학살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측은 인도군단이 퇴각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항의했는데 실제로 인도군단 병력이 레지스탕스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고 약탈행위를 한 사례가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독일 국경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인도군단 병사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인도군단 3대대는 9월 16일에 미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별다른 중장비가 없는데다 전의도 없어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제3대대가 콜마-스트라스부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대 병력 중 300명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퇴각한 이후 인도군단은 후방 경계 및 진지 공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도군단이 프랑스에서 퇴각전을 치르는 동안 인도군단에 관심을 가진 고위층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친위대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히믈러였습니다. 인도군단은 1944년 8월 8일부로 친위대 해외국(Auswärtigen Amt) 관할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인도군단이 퇴각전 중이었기 때문에 크라페 중령이 계속해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퇴각전을 치르고 알자스에 도착한 인도군단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관할이 친위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1944년 11월, 인도군단은 다시 독일 영내로 이동해 라스타트(Rastatt)와 뷜(Bühl) 지구에 주둔하다가 다시 12월 말에는 호이베르크(Heuberg)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무렵 인도군단은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1945년 초에는 계속 후퇴만 하다가 4월에 모든 전투장비를 독일측에 반납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인도군단의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단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됩니다. 본대와는 떨어져 있던 인도군단의 보충대대(Ersatzbataillon)는 미군에 항복합니다.

인도군단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뒤에 있었던 일은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Rudolf Absolon, Die Wehrmacht im Dritten Reich Band V, Harald Boldt Verlag, 1988
Carlos Caballero Jurado,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 Osprey, 1983
Franz W. Seidler, Avantgarde für Europa : Ausländische Freiwillige in Wehrmacht und Waffen-SS, Pour le Merite, 2004

※ 위에서 언급한 저작 들 중 Carlos Caballero Jurado의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는 오류가 몇 가지 있더군요. 인도군단에 대한 내용 자체도 짤막하긴 하지만 연대 편성에 대해 나와 있어서 참고했습니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2008년 7월 6일 일요일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

역시,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서 파생된 글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더군요. 바보이반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전에 한번 읽었던 비더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의 회고록이 생각났습니다. 비더만은 평범한(?) 보병사단의 평범한(?) 장교였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인데다 결정적으로 포로생활을 아주 운좋게 마친 경우입니다. 비더만의 회고록에서 그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 봤습니다.

1945년~1946년 겨울의 이야기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업반은 눈 덮인 숲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어야 했다. 숲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해졌다.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베고 톱으로 나무를 켠 뒤 다시 그것을 해머와 쐐기로 쪼갰다. 이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용소 주위의 토지는 거의 콘크리트 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붙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시체는 보다 부드러운 늪지대에 매장해야 했다. 우리는 늪지의 땅을 긁어서 파내어 죽은 사람들이 안식을 취할 곳을 만들었다. 나는 시체 매장반으로 작업을 나갔을 때 산딸기를 발견해서 그것을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자로티(Sarotti)가 있었다. 물론 자로티는 그의 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명한 북해 지역 항구도시의 사업가 집안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의 자로티 초콜렛 공장을 경영했었다. 그의 침상은 바로 나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의 머리가 한 쪽으로 젖혀져 턱에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자로티의 시체를 밤 사이에 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늪으로 가져가 매장했다.
사망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급증했고 그 중에는 온스트메팅엔(Onstmettingen) 출신의 교사 헤르만과 엔드링엔(Endringen) 출신의 젊은 드레셔,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1945년과 1946년 겨울 사이에 내가 있던 수용소에 있던 포로 중 3분의 1 이상은 그들의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임시 공동묘지에서 마치게 되었다.

Gottlob Herbert Bidermann , Translated by Derek S. Zumbro, In Deadly Combat :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pp.302-303

그리고 1946년 봄이 되고 보다 큰 수용소로 이송된 비더만은 대우가 약간 개선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교 포로들에게 특별히 배급되는 물자를 받았는데 그것은 열 다섯 개피의 담배와 하루 5그램의 설탕이었다. 사병 포로들은 마호르카 담배를 받았다.

Ibid. p.306

우리는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망률은 작년의 사망률 보다는 낮았다.

Ibid. p.307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포로가 된 지 2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쓰여진 이 편지들에 답장을 보냈고 이 답장들은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우들과 알자스 출신의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의 현명한 정치인이 포로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것 이었다. 독일 출신의 포로들도 곧 석방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비록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식량 배급도 개선되었다.

Ibid. p.308

그리고 모범수(?) 비더만은 1948년에 석방되어 고향 땅을 밟게 됩니다. 이점에서 1950년에 석방된 일반 포로나 1955년에야 석방된 무장친위대나 경찰 출신 포로에 비하면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가. 비더만의 회고록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발터 셰흐터를(walter Schaechterle) 대위는 쿠어란트 집단군에서 통신장교로 있었다. 어느날 아침 셰흐터를 대위는 스페인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형편없는 식사에 항의해 노동을 거부했다. 이들은 사병들도 자신들의 항의에 참여해 주길 기대하고 행동을 했으나 사병들은 수용소내의 반파시스트 집단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곧 분노한 경비병들이 막사로 쳐들어와 총부리로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발터 셰흐터를과 두 명의 스페인인 장교는 따로 분리되어 격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사보타지 혐의로 종신형–보통 25년 정도-을 선고 받았고 키르기스탄 동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셰흐터를이 이송되기 직전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에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발터의 아버지는 비티히하임(Bietigheim)에 있는 리놀륨 공장의 이사로 있었고 2년이 넘도록 스웨덴을 통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발터의 아버지는 소련 고위 관료들에게 막대한 양의 미국 달러를 바친 뒤 마침내 아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1950년대에 펠바흐(Fellbach)에서 발터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재회를 축하했다.

Ibid. p. 309

과연 달러신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자본주의 만세!

2008년 3월 29일 토요일

'영광의 탈출'이 될 뻔한 어떤 사건

Peter Schmoll의 Die Messerschmitt Werke im Zweiten Weltkrieg, 134~135쪽에는 전쟁말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실려있습니다.

1944년 2월 중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남동쪽 오버트라우블링(Obertraubling)에 있는 메서슈미트사의 시험비행장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련군 포로 두명이 독일공군에 인도되기 위해 시험비행을 기다리던 Bf-109 한 대를 탈취해 탈출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독일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오전의 시험비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할일이 없어진(?) 시험비행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한대의 Bf-109가 활주로로 진입해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사인 그로스(Ludwig Groß)는 시험비행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지할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이륙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기는 제때 고도를 높이지 못해서 비행장의 담에 랜딩기어가 걸리면서 추락했습니다. 당장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이 달려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련군 포로 두 명을 체포했고 이 두 명의 포로는 군사재판에서 독일국방군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혐의로 총살형을 언도 받았고 2월 14일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소련군 포로는 바실리 야레쉬(Васи́лий Яреш)소위와 드미트리 우테비코프(Дмитрий Утевиков) 소위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메서슈미트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명 중 한명이 조종사여서 독일 비행기를 훔쳐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들의 활극은 비극으로 끝났고 이 두 포로는 총살된 지 이틀 뒤인 2월 16일에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성공했다면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남았을 법한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울한 사실이지만 모두가 영화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요.

2008년 3월 4일 화요일

문명의 충돌

줄루전쟁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는 집단들은 대개 왜 그렇게 하는 지에 대해 명확한 관념이 없다. 많은 경우 포로를 잡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그냥 관습이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79년의 줄루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는 생포한 줄루족 포로들에게 줄루족들은 항상 영국군 포로를 학살했는데 자신이 줄루족 포로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이 질문에 한 줄루족 포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포로를 죽이는 것은 그게 우리 검둥이들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 흰둥이들의 관습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영국군 장교는 이 포로의 대답을 듣고 줄루족 포로들을 살려줬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영국군은 줄루족을 상대로는 (포로대우에 있어) 호혜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로를 잡지 않았다.

Lawrence H. Keeley,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84

이 어린양은 영국인들의 융통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 입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

그러나 과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들이었을까? 또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을까? 또는 리델 하트에게 한 말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었을까?

(리델 하트와의 대화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은 독일 장군들이 리델 하트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했는지 보여준다. 그리즈데일(Grizedale)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장교 중 한 명인 헨리 펄크(Henry Faulk) 중령의 회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5년 12월 28일에 리델 하트가 독일 장군들에게 면담을 신청했을 때 펄크 중령은 그들에게 리델 하트가 찾아 왔으니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독일 장군들은 모여서 리델 하트와 이야기 할 때 어느 정도 선 까지 정보를 알려 줄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어가 유창했던 펄크 중령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리델 하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리델 하트는 펄크 중령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펄크 중령은 아마도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은 엘리트적이고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집단이므로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정말 리델 하트가 펄크 중령의 말대로 독일 장군들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면? 전범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1945/46년 겨울에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인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델하트 자신도 영국측의 전범 기소 책임자인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를 만난 1945년 9월 무렵부터 전범재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리델하트는 자신이 전쟁성과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독일 장군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laric Searle, "A Very Special Relationship :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1953", War in History Vol 5 Issue 3,(1998), pp.332~333

이 이야기는 리델 하트가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을 면담하면서 The Other side of the Hill의 저술을 준비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The Other side of the Hill은 2차대전 초기 아주 큰 삽질로 거의 매장(???) 당할 뻔 한 리델 하트가 다시금 명성을 되찾도록 해 준 저작이고 또 냉전시기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한 저작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Alaric Searle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군사이론가와 군사사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펄크 중령의 증언은 리델 하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리델 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를 이용해 독일 장교단은 나치나 히틀러의 범죄와는 무관한 애국적인 집단이었다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퍼트릴 수 있었습니다. 리델 하트는 지속적으로 독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만토이펠은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무장친위대 장군 비트리히를 구하기 위해서 리델 하트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지요.

사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