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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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주버가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비판에 반박하자 홈즈도 다시 재반론을 합니다. 사실 주버의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는 제목부터 그렇고 내용에서도 도발하는 면이 없지않았는데 홈즈도 새로운 반론에서 날을 살짝 더 세웁니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홈즈는 반박문의 도입부에서 주버가 1914년 여름 소 몰트케가 취한 전략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 대해 비판하는게 아니라 주버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빈정거립니다. 홈 즈 자신은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 비슷하게 우익을 통한 포위기동을 실시하려 했다고 설명했는데 주버는 이것을 싹 무시하고 홈즈는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슐리펜 계획으로 회귀한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 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8월 27일 소 몰트케가 제1군에게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일이 없는데 주버는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멋대로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홈즈의 반론은 처음에 했던 반론과 동일합니다. 주버가 계속해서 사료를 오독하고 자신의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슐리펜 계획이 무조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 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의 계획은 매우 융통성이 강한데 주버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버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는 홈즈가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는데 홈즈는 주버야 말로 사료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초기 부터 우익에 주력을 두고 베르덩-벨포르(Belfort) 를 잇는 프랑스군의 요새선을 포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안에서는 돌파의 중점이 메지에흐(Mézières)-라 페레(La Fère) 방면이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 이지요.

  다음으로는 1905년 비망록에 대한 주버의 주장을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독일군의 병력 부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일단 존재하지 않는 사단으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을 위해서는 80개 보병사단과 16개 보충사단(Ersatz-division)이 필요한데 1905/06년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에는 72개 사단만이 배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이에 대해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일반적으로 해당 년도의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즉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1906년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의 작성은 그 전해의 1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즉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1905년 12월 경에는 이미 1906/07년의 부대전개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에는 26개 군단과 12개 예비군단, 3개 예비사단 등 총 79개 사단이 배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볼프강 푀르스터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이라는 점 입니다. 즉 주버가 선행연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8개 군단에 해당되는 병력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홈즈는 전시에 동원되는 예비병력으로 부족한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슐리펜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슐리펜은 이미 1891년부터 이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전쟁성은 예산 문제로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총참모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8개 군단의 편성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전시에 예비군을 대량으로 동원해 신규부대를 편성할 생각을 했다는 점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습에서 슐리펜은 당시 동원 가능했던 19개 예비사단 대신 16개 예비군단(32개 예비사단)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이 96개 사단이 있더라도 서부전선의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점을 들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일 가능성을 부정했는데 홈즈는 이것도 주버가 전후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8개 보충군단(Ersatzkorps)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의 독일군이며 8개 보충군단만 편성되면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생각하고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면전쟁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슐리펜계획은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에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먹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독일 정보당국이 러시아군의 동원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슐리펜이 가장 신경쓴 것은 러시아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질이었다. 홈즈는 그 근거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러시아군을 평가한 몇 편의 문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이 남긴 문서를 보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대해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작성이 되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모로코 위기 당시 러시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홈즈는 첫번째 반론에서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들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분석하면 슐리펜이 이 무렵부터 우익을 강화해 포위섬멸전을 펼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한 재반론에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 반격을 통해 격파하는 방안을 더 중요시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실시한 뒤 프랑스군을 로렌에서 격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히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할 경우 국경의 요새선으로 퇴각할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 경우 독일은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은 1904년 참모부연습의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강력한 우익으로 포위기동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는 것 이지요.
1904년의 두 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홈즈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두 번째 참모부 연습은 1905년 비망록과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우려한 것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 독일측에서 로렌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공세를 중단하는 것 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지적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오자 우익에서 2개 군을 차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이 맡은 임무는 프랑스군의 2선급-3선급 부대에 대한 견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주버의 해석이야 말로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슐리펜이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우익만 가지고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쵤너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쵤너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라 페레, 랭스 방면까지 공격하는 것이 명백하며 이것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 즉 서부와 동부 양면에서 전략적 방어를 취했던 워게임에 대해서는 주버의 설명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무엇보다 주버가 1905년 겨울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오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의 논평 중에서 “Wir würden demnach zu bekämpfen haben…”이라는 구절을 주버는 "Therefore we will have to fight against..."로 번역하는 오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해석하면 "Thus we would have to fight against..."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슐리펜은 양면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훈련에서 가정한 상황이 모두 현실화 될 경우에 양면전쟁을 치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게다가 슐리펜은 논평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홈즈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이를 위한 실제 전쟁계획이었습니다.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조선에서 제일 불쌍한 건 누구?

“이 양반이..... 이 양반두 아마 서울서 정치하는 양반인가 보군. 당신네들은 입만 벌리면 농민은 순진하구 불쌍하구 애국적이구 하다구 떠들지만 그래 가지군 정치 못 합넨다.

(중략)

당신두 우리 투표 얻을려거던 그 희떠운 민주주이 소리 집어치구 쌀을 주시우 쌀을... 시방 조선서 젤 선량하구두 불쌍한 게 누군지 아시우? 우리네 월급쟁이들예요.

천안역에서 올라탄 어떤 청년의 발언,  채만식, 「역로(歷路)」(1946), 홍정선ㆍ정호웅ㆍ김재용 편,『해방 50년 한국의 소설 』1(한겨레신문사, 1995), 38-39쪽

요즘도 이 말에 공감할 분이 많으실 듯.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젊은 날의 황장엽

얼마전 사망한 황장엽의 예우 문제를 두고 며칠 간 꽤 시끄러웠지요. 김일성의 충실한 이데올로그였던 인물이 팔자에도 없는 북한 민주화의 화신이 되었으니 확실히 황당하긴 했습니다.

물론 저는 황장엽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고 그저 세간에 알려진 그와 관련된 글을 몇 편 주워 읽은 수준이긴 합니다만 그 양반을 둘러싼 논의를 보다가 그 양반이 젊은 시절 썼던 글 한편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복사해 둔 것을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그 글을 찾았는데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더군요.

잘 알려진 장안파 공산주의자인 이청원은 월북 이후 연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지금이야 북한의 역사학 수준이 눈뜨고는 못 볼 수준으로 퇴보했지만 사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역사학계는 꽤 흥미로운 성과를 많이 거두었지요. 1950년대 중반부터 숙청의 바람이 몰아치기 전 까지는.

이청원은 1955년에 사회주의 운동사를 정리한 『조선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저작은 바로 황장엽과 같은 신진 학자들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1957 12, 황장엽은 김후선과 함께 집필한 「리청원 저 조선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에 관하여」라는 글을 『근로자』에 기고합니다. 황장엽은 이 글에서 이청원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황장엽의 이 글은 매우 노골적으로 김일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청원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김일성의 역할을 올바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것 들이죠. 이 글의 일부분만 인용해 보지요.

저자의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는 우리 나라 로동 운동이 30년대에 와서 무장 투쟁의 형태를 취하게 된 리유를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로동 운동에서의 주관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에 관한 이..쓰딸린의 명제 (쓰딸린 저작집 5로씨야 공산주의자들의 전략과 전술에 관하여참조)들을 거의 그대로 인용부 없이 서술하고 30년대의 로동 운동이 무장 투쟁 형태를 띠게 된 객관적 조건은 일제의 가혹한 파쑈적 탄압, 주관적 요인은 우리 로동 계급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장성 성숙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적 명제로서는 우리 나라 로동 운동의 질적 비약성의 설명될 수 없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만 가지고는 로동 운동이 폭동적 형식을 취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어도 무장 투쟁의 형태를 취하게 될 필연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만 가지고는 절대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이 진행한 항일 무장 투쟁이 우리 혁명 운동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열어 놓았다는 것이 설명될 수 없다. 즉 이것으로서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출현 없이도 무장 투쟁이 가능하였다는 결론 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첫째로 우리 로동 계급이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맑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돌르 받게 되었다는 것. 둘째로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적 핵심의 출현은 종래 각종 종파 단체들에서 떠돌던 비속화 되고 실천과 유리된 공론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진정한 맑스-레닌주의가 위대한 쏘련 및 중국을 통하여 우리 로동 계급에게 전파되었으며 대중 투쟁의 무기로 되기 시작하게 된 결과라는 것(후략)
100~101.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일성 동지는 일제기 국제당과의 긴밀한 관계하에서 조선에서의 새로운 형의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 사업을 빛나게 수행해 나갔다. 즉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일국 일당의 원칙에 립각하여 당 조직을 체계적으로 조직 확장하였으며 당 생활을 강화하였으며 당성을 단련시키며 당적 지도를 강화하여 왔던 것이다.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당 조직을 가지였으며 또 통일적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을 위한 사상적, 조직적 및 전술 전략적 기초를 구축하는 투쟁 없이 조선의 로동 계급의 헤게모니는 절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프로레타리아트 헤게모니 실현의 문제를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당 창건의 투쟁과 분리하여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101

항일 무장 투쟁 시기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민족 해방 운동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 헤게모니를 위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보여 줌에 있어서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성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항일 무장 투쟁 단계에로의 민족 해방 운동 발전의 력사적 필연성과 그의 합법칙성을 론증하면서 김일성 동지를 비롯한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해결된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전략 전술의 확립, 조선 혁명 수행에 대한 정확한 정치 로선과 정책들의 강구 실시, 혁명 운동의 대중적 지반의 확대 강화를 위한 실천적 투쟁 등을 통하여 새형의 맑스-레린주의 당 창건을 위한 사상 조직적 준비 과정을 론증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20년대의 종파의 극악한 해독성을 청산하기 위해서와 혁명 운동에 대한 온갖 좌유경 기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프로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진실로 조선 혁명의 령도적 계급으로 단련되게끔 한 견실한 조선 공산주의 력량의 장성과 그 집결 과정, 그의 실천적 활동을 규명하는데 돌려야 할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항일 무장 투쟁 시기의 지도적 핵심인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활동을 불충분 하게 취급하였으며 소홀히 하였다.
105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일성 동지와 그의 전우들을 선두로 하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활동의 실천적 투쟁을 통하여 온갖 종파적 경향과 기회주의와의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공산주의 진영 내의 통일과 단결을 위하여 헌신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온갖 비속화의 경향과 수정주의를 반대하여 조선 혁명의 구체적 실천에 맑스주의 리론을 결부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과 투쟁을 통하여 민족 해방 운동의 최고 형태인 항일 무장 투쟁 단계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의 구체적 활동에 대한 분석은 없이 일제와 파쑈 폭압과 국내 운동의 폭동등의 조건들을 가지고 투쟁 형태의 이행 문제를 형식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은 매우 불충분하며 본질적인 점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옳게 해명해야만 김일성 동지와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맑스-레닌주의 당 창건을 위한 투쟁 방침이 명확히 천명되는 바 저자는 이와 같은 설명이 없이 20년대 정세가 당 창건을 요구하였다는 것으로서만(동서 213페지) 문제를 끌어 가고 있을 뿐이다.
106

 이와 같이 김일성 동지와 그 전우들의 지도하에서 민족 해방 운동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의 요구가 실현되어 나갔는 바 그 실현은 혁명적 당 창건을 위한 사상 조직적 준비 투쟁과의 심오한 결부가 없이는 도저히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항일 무장 투쟁의 전 행정은 공산주의적 핵심의 집결 단련 과정이었으며 대중과의 련계의 부단한 강화 과정이었으며 유일한 규률로 결속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의 강화 발전 과정이었다. 빨찌산 투쟁 형태를 통하여 로동 운동, 농민 운동을 그에 결합시키면서 조선 혁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 이 영광스러운 행로는 아직 통일된 맑스-레닌주의 당은 조직된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상조직적 및 전술적 준비는 구축된 것으로써 바로 여기에 우리 당의 혁명적 전통을 밝혀 주는 관건이 있다고 보며 이것을 떠나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 문제의 론의는 형식적이라고 본다.
107

 인용된 부분을 보고 있으면 수령님에게 제발 저 좀 예쁘게 봐 주세요하고 알랑거리는 젊은날의 황장엽 동지가 떠오릅니다. 사실 젊고 정치적으로 야심있는 학자가 학계의 쟁쟁한 선배들을 합법적으로제거할 기회가 왔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황장엽의 이 글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이라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합니다. 어쨌든 젊은날의 황장엽은 학문적 정치투쟁을 통해 권력과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이청원 등의 선배들이 몰락했을 때 황장엽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물론 이 글을 쓸 때는 자신이 남반부 괴뢰정권에 쿵짝하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요. 하지만 글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보고 있자니 노년의 황장엽도 딱히 상상못할 존재는 아니라는 느낌도 듭니다. 대부분의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천수를 누리다 갔으니 나름 인생의 승리자라고나 할까요.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뭔가 이상한 인종차별;;;;

1945 년 4월 2일, 뷔딩엔 인근에서 미군에게 포위된  6SS 산악사단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포위망을 형성한 미군 부대 중에는 흑인으로 편성된 제761전차대대도 있었는데 이 대대의 한 장교에 따르면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전투 임무에서 우리는 독일군을 숲에서 몰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낮게 사격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사격을 좀 높이 해서 나무들을 날려 버려라. 이렇게 해서 파편이 좀 더 많이 튀었고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으며 독일군들을 숲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독일군들은 백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Kameraden!(전우들!) ”

나는 부하들에게 해치를 잠그고 전차 안에 있다가 적들이 전차 가까이 오거든 그대로 보병들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런데 몇몇 친구가 해치를 약간 일찍 열었다. 독일놈들이 이걸 보더니 말했다.

“Schwarze Soldaten!(흑인 군인이다!)”

독일놈들 사이에 이 소리가 퍼지더니 녀석들은 다시 그 좆같은 숲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제761대대 C중대장 찰스 게이츠(Charles Gates) 대위의 회고

Joe W. Wilson, Jr, The 761st Black Panther Tank Battalion in World War II(McFarland, 1999), p.168

물론 다시 숲으로 들어갔던 독일군들은 생각을 고쳐 먹고 항복 했다지만 미군들은 기분이 별로 였을듯;;;;

2010년 10월 6일 수요일

4차 중동전쟁 당시 이라크군에 대한 어떤 평가

4차 중동전쟁 기간에 이라크는 시리아 전선으로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라크는 이라크군 때문에 이스라엘이 다마스커스로 진격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서방의 한 군사전문가는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군은 1973년의 전쟁에서 아랍측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기여를 하기는 했다. 이라크군이 자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자면 10월 13일 이라크군 8기갑여단이 괴멸되었을 때 이스라엘군은 이라크군을 격파하는데 주의를 돌리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시리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라크군은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전차를 단 한대도 격파하지 못하는 초라한 성과를 거뒀지만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 이스라엘측이 휴전 체결 이전에 이집트군에게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시나이반도로 병력을 차출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라크군의 지연전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이 때문에 다마스커스를 포병을 대규모로 투입해 위협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군은 다마스커스를 봉쇄하거나 점령할 의사는 없었지만 포병의 사정권에 넣고 위협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W. Andrew Terrill, ‘Iraq's role in the 1973 Arab-Israeli War’, Small Wars & Insurgencies 11-3(2000), p.17

이건 조롱인지 칭찬인지 모르겠군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어떤 희망사항


이 블로그가 늘 그래왔듯 썰렁한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미군이 서부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독일군과 대규모 기갑전을 벌이면서 미제 전차가 독일군의 전차에 비해 여러모로 열세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런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 한 패튼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지요. 미육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신형전차의 배치를 서두르게 됩니다. 나중에 M-26으로 불리게 될 이 물건은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이젠하워도 M-26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마샬(George C. Marsha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육군의 장비 중 지프와 M-1 소총 말고는 독일군의 무기보다 나은게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신형 T-26을 대량으로 확보하기만 한다면, 특히 강화된 90mm 포를 탑재한 더 최신형의 전차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기갑부대는 기동성과 숫자는 물론 화력 면에서도 우위에 서게 될 것 같소.”

Forrest C. Pogue, George C. Marchall : Organizer of Victory 1943-1945(Viking Press, 1973), p.553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이 편지를 마샬에게 보낸 것은 1945년 3월 12일 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희망사항과 달리 미군 기갑부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질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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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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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이전 글에서 소개한 테렌스 홈즈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는 테렌스 주버의 충격적인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면서 지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주버의 재반론을 소개하기 전에  홈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슐리펜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계획을 완성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직전이었고 그때문에 그 이전의 훈련에는 이러한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슐리펜이 실시한 각종 훈련을 분석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버는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사료를 오독하게 된 것이다.

주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접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주버는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합니다.(이 논문은 좀 짧습니다) 주버는 먼저 “우익으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기동”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우익의 주공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24개 사단을 포함해 총 82개 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실행한 계획에서도 우익에는 54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그쳤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장래에 편성될 부대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정보기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25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그뢰너 등 슐리펜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인물들은 슐리펜의 마지막 전쟁계획인 1905-06년 계획에서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회고했는데 주버는 이것이 (서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 에서 일관되게 명시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원사료를 분석하지 않고 1938년에 집필된 쵤너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의 결과 우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데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상정한 상황을 혼동한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는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로 돌입하기는 했으나 북프랑스까지 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슐리펜계획”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과 “슐리펜계획”을 관련시키는 것이 “제법 대단한 상상력(quite remarkable powers of imagination)”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워게임(Kriegsspiel)이 실제 작전계획, 즉 슐리펜계획과 동떨어진 일탈적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버는 여기에 대해서도 좀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즉 홈즈의 설명에 따른다면 슐리펜은 퇴임하기 직전에 너무나 무료해서 쓸데없는 워게임을 한게 된다는 겁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11-12월 워게임은 모로코 사태로 촉발된 긴박한 정세, 즉 독일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쟁을 벌여야 할 수 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자신이 주사료로 사용한 디크만의 원고를 홈즈가 무시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의 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슐리펜 퇴임이후에 대한 홈즈의 해석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버는 소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1904년 참모부연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홈즈의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소몰트케는 진짜 전쟁계획은 놔두고 우발계획만 연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소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11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홈즈의 설명을 따를 경우 소몰트케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아르덴느로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우익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진격하는 양상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프랑스군의 주력을 우회기동으로 포위하는게 아니라 벨기에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은 파리 서쪽으로의 우회기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홈즈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군의 주공이 파리와 베르덩 사이로 우회하게 되는 등 모순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1911년의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실제 병력은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합니다. 또 소몰트케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3:1수준으로 조정했는데 이것은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봅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합니다. 독일 제1군은 5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것과 같은 파리 서부로의 우회기동에는 13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불과 5개 군단으로는 파리 서부로 우회할 경우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버의 설명입니다. 주버는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은 단지 센강 하구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2010년 10월 3일 일요일

Thomas E. Hanson저,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

몇달 전에 네비아찌님과 트위터로 한국전쟁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다가 올해에 출간된 토마스 핸슨(Thomas E. Hanson)의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에 대한 소감문을 하나 써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늘 그래왔듯 공수표를 발행한 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간단한 감상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의 신분이 육군장교라는 점은 이 책의 문제의식에 꽤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점은 뒷 부분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해묵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책임이 바로 “2차대전 직후 평화분위기에서 무리하게 육군을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와 5년간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전투준비를 소홀히 한 극동군사령부 및 8군 사령부”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답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육군을 감축하고 준비태세를 위험할 정도로 떨어트린 트루먼 행정부와 군수뇌부에 있으며 일본 현지의 8군 사령부는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상당부분을 미8군 예하부대들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 확립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핸슨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인식을 확립한 페렌바흐(T. R. Fehrenbach)의 저서 This Kind of War와 애플만(Roy E. Appleman)이 저술한 미육군의 공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입 니다. 저자는 페렌바흐가 한국전쟁 초기 연전연패의 책임은 미군 수뇌부와 일선의 부대 모두에 있다는 입장을 정립했으며 이것이 이후 수십년간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약간 재미있는 점은 페렌바흐가 미해병대를 높이 평가하고 미육군을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 그런가?) 또한 이런 논리를 비판해야 할 미육군도 공간사를 통해 이런 시각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꽤 단순합니다. 먼저 2차대전 이후 트루먼 행정부와 군 최고 수뇌부의 안이한 안보정책이 육군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잘 알려진 것 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외에 대규모 육군을 주둔시킨 경험이 적었으며 트루먼 행정부는 2차대전으로 변화한 국제정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육군이 방대한 점령지 유지를 위해 대규모 지상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 국방예산의 감축과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 때문에 미육군은 급속히 감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초대 국방부장관 포레스탈과 2대 국방부장관 존슨 모두 미국의 안보를 해군이나 공군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육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육군에 대한 예산도 크게 삭감되어 일본에 주둔한 미8군의 예하 사단들은 1950년이 되면 인력과 장비면에서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 육군 감축으로 인한 장교단의 감축 또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을 불러왔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주일미군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를 분석한 4~7장 입니다. 분석의 대상은 25보병사단의 27보병연대, 7보병사단의 31보병연대, 24보병사단의 19보병연대,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입니다. 저자는 이 4개연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8군이 점령기간 중 부대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 예산 삭감으로 인한 장비와 훈련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예하부대들은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널리 유포된 “게이샤들과 놀아나느라 기강이 해이해진 육군” 이라는 인식을 깨고자 합니다. 비록 미육군이 개전 초기에 연전연패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선 부대의 장교나 사병들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육군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미국의 거시적인 안보정책에 있다는 것 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군사사를 연구하는 군인답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통해 오늘날 미국 안보정책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여전히 충분한 육군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특히 부시 행정부 초기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정부의 잘못된 안보정책의 댓가를 전장에 투입된 장병들이 치뤄야 했던 한국전쟁으로 부터 배울 것을 강조합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강력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군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는 점 때문에 육군에 대한 변호로 읽힐 소지도 다분하지만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잡담 하나. 공수표 하나를 처리했으니 공수표 하나를 또 발행해야 겠군요. 그래도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라고 관련저서들이 꽤 나왔는데 그 중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올해에 낸 한국전쟁에 대한 소개글도 써볼까 합니다.

2010년 9월 21일 화요일

내가 맹아론자라니! ㅋㅋㅋ

얼마전에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해방이후의 (정치, 경제적) 성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해방 이후의 성장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라 식민지 시기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저를 대뜸 “자본주의 맹아론자+민족주의자”로 인식하더군요. 아주 웃기는 경험이었습니다.

어째서 A가 아니면 자동으로 B가 된다고 생각하는건지 이해를 못 하겠더군요. 어쨌든 저는 졸지에 자본주의 맹아론을 신봉하는 민족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그놈!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미국측 자문단장이었던 토마스 도드(Thomas Joseph Dodd)가 1946년 7월 1일 아내 그레이스에게 보낸 편지 중 한구절.

내 사랑 그레이스,

지난 토요일에 재판은 한시까지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지막 피고를 마무리 했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중요한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어. 예전에 러시아쪽에서 독일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항복한 폴란드군 장교 1만1천명을 학살했으므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거 기억하지? 물론 독일쪽에서는 러시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왔지. 이제 우리는 양쪽 모두로 부터 세 사람씩의 증언을 들어야 해. 이게 얼마나 걸릴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지. 나는 그냥 동전던지기로 정해버리면 좋겠어. 독일과 소련 모두 범죄를 저지를 동기가 충분하니까. 그리고 어떻든 양쪽은 1939년에 힘을 합쳐서 폴란드를 유린했으니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해. 단지 단 하나의 사실, 한가지 “작은” 사실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 1만1천명의 폴란드군 장교가 잔혹하게 집단으로 살해됐다는 점 말이야. 그리고 독일이나 러시아 둘 중의 하나가 범인이라는 건 확실하겠지. 내 생각에 세상은 독일과 소련이 논쟁을 벌이는 것엔 관심이 없을 것 같아. 하물며 역사의 관심도 받지 못하겠지.

(후략)

Christopher J. Dodd, Letters from Nuremberg : My father’s narrative of a quest for justice(Crown Publishing, 2007),  p.333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예고편을 올렸을 때 천천히 연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천천히 올리고 있군요;;;;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 테렌스 홈즈의 첫 번째 반론


테렌스 주버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논쟁의 막이 오르자 군사사연구자들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에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인 학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주버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주버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가 시작했습니다. 홈즈는 주버가 논문을 발표했던 War in History 8권 2호(2001)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란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이 반박논문은 핵심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는 주버의 분석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이 논문에서 주버의 주장은 참신하지만 근본적으로 1905년 비망록 자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작 주사료가 되어야 할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이 크게 부족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에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을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버의 주장에 대해 슐리펜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적의 주력을 ‘어떤 곳에서 상대하건 간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를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소(小)몰트케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병력부족문제에 대해서도 주버와는 반대로 설명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난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작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홈즈는 슐리펜은 실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력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는 조금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서 비판을 시작합니다.
홈즈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에 대한 평가도 주버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 것을 독일군의 정보보고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홈즈는 이에 대해 주버가 제한적인 사료를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공세계획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합니다. 주버가 첫 번째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하는 계획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양면공세를 펼칠때나 가능한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없이 프랑스가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슐리펜으로서는 독일측이 먼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인 공세로 나서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주버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홈즈는 근거로서 1905년 비망록이 프랑스의 국경지대 방어선에 대해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은 변화된 전략환경에 대한 슐리펜의 고민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슐리펜이 퇴임직전 실시한 마지막 연습에서 러일전쟁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요새선에 대한 정면공격 대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포위섬멸을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은 주버가 설명한 대로 국경지대에서의 포위 섬멸이 불가능할 경우 취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 반격을 통한 포위섬멸전에 집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파리를 포위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국경지대에서의 포위섬멸전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는 주버의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이 비망록의 핵심은 엔(Aisne)강 서안, 랭스(Rheims)에서 라 페레(La Fere)를 잇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은 이 방어선의 좌익으로 우회하면 반드시 프랑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파리 동쪽의 방대한 지역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엔강 서안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마른강과 세느강의 방어선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파리라는 대도시가 이 방어선의 좌익에 강력한 보루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대안은 파리의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 홈즈의 설명입니다. 즉 홈즈는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슐리펜도 이러한 상황은 가능한 피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우익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1905년 비망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 번째 안에서는 ‘가능하다면’ 프랑스군의 주력을 파리 동쪽, 즉 랭스와 라 페레를 잇는 선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첫 번째 안에서도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 처럼 프랑스군 주력이 마른과 센강 서안으로 퇴각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안과 여섯번째 안에 이르면 파리를 우회포위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시 한번 주버가 제기한 문제 하나에 대해 답을 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까지의 각종 연습에서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이 실시되지 않았는가? 홈즈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슐리펜은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이것이 1905년 비망록에 반영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독일군의 우익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되 최대 진출선을 라 페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파리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할 경우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독일군 우익의 기동이 제한되는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비판합니다. 슐리펜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주력을 포착해 섬멸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주력이 어디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파리를 우회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포위섬멸전의 주역이 독일군 우익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음으로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과 슐리펜이 재임중에 실시한 여러 연습간에 이질성을 강조하는데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프랑스가 방어를 취할 경우에만 서부전선에서 선제공격을 고려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홈즈는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즉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앞서 주버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의 능력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 연습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서부전선에 대한 작전개념은 어디까지나 그가 1897-98년에 작성한 비망록과 베셀러가 1900년에 작성한 작전연구에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의 1897-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작전연구가 ‘슐리펜 계획’의 개념과 유사한 점은 주공인 우익을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게 한다는 점 말고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우익의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1897-98년 비망록은 우익에 8개 군단을,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10~11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우익의 규모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우익의 규모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 총참모부 철도국(Eisenbahnabteilung)의 국장이었던 슈탑(Hermann von Staabs)과의 회의에서 슈탑이 모젤 이북에 집결할 병력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이후라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1903~1904년이 ‘슐리펜 계획’이 구체화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것 입니다.
홈즈는 이 시기에 정립된 기본 개념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홈즈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우익이 최대한 진출해서 프랑스군이 어떠한 대응을 취해도 포위될 수 밖에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이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더라도 그 후방에 있는 다른 방어선에 막힐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파리라는 강력한 거점을 끼고 있는 방어선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이어지는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계속해서 홈즈는 주버가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에 35.5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지만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에 17개 군단만을 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1904년 4월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이 약했기 때문에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이 끝난 뒤 최종논평에서 우익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할 경우 우익에 위치한 주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의 5개군을 베셀(Wesel)-디덴호펜(Diedenhofen) 일대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에 명시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아헨-트리어 지구의 철도망이 증설되면서 슐리펜이 우익의 주력을 보다 더 북쪽으로 배치하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메츠의 요새를 강화해서 우익의 측면을 더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했습니다. 홈즈는 이 결과 1905년 참모부연습을 실시할 무렵에는 병력, 부대집결지, 초기 목표 등에서 슐리펜계획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고 봅니다.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워게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워게임 모두 우익을 활용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홈즈는 이러한 주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아 실시한 첫 번째 연습에서는 독일군 우익의 포위기동에 의해 프랑스군 주력이 격파되었으며 쿨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세 번째 연습에서도 주버의 설명과는 달리 우익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단지 슈토이벤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두 번째 연습에서만 슐리펜이 우익의 상당수를 로렌 방면으로 돌렸지만 이경우 조차 주력의 5개 군 중 2개군을 돌린데 불과했으며 우익에 남은 나머지 3개군은 주력이 빠진 프랑스군의 2선급 부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홈즈는 이 연습에 대한 쵤너(Zoellner)의 논평은 슐리펜의 구상이 옳다는, 즉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한 뒤 우익으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를 참조한 주버가 사료를 오독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두 번째 워게임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일부 병력을 돌린 것이 부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프랑스군이 로렌을 공격할 경우 우익은 지체없이 공세에 나서도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05년 11~12월에 실시된 워게임에 대한 해석도 주버와는 다릅니다. 이 워게임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전략방어를 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을 작성하기 전에 실시한 마지막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이 워게임이야 말로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 이후 가지고 있었던 구상을 살펴본다면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야 말로 슐리펜의 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의 병력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독일군의 증강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반면 홈즈는 이것을 말 그대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위해 병력 증강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小) 몰트케는 총참모장에 취임한 직후 슐리펜으로 부터 넘겨받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주버는 이 점에 주목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지요.
홈즈는 소 몰트케는 프랑스군이 전략적 방어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 상당기간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이점은 1906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 몰트케가 이후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공세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홈즈는 소 몰트케 취임 이후 국경지대, 특히 메츠의 요새를 강화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로렌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는데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이런 환경에서는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베르덩 북쪽으로 주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독일군과 직접 격돌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홈즈는 결국 이 때문에 1911년에 소 몰트케가 그동안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홈즈는 소 몰트케가 1911년에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 했다는 주버의 해석은 옳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말고는 주버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 중에서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을 명시한 지도(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홈즈에 따르면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는 대부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책은 슐리펜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 몰트케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슐리펜은 대규모 포위섬멸을 위해 우회기동을 구상한 반면 소 몰트케는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개념에서 우회기동에 주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도 3과 6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주버는 지도3에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작전계획으로서의 미비함을 강조하는데 홈즈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재검토했을 때 파리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소 몰트케의 목표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신속히 프랑스를 격파하고 서부전선의 병력을 돌려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은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소 몰트케가 1914년 8월 전역에서 어떤 식으로 야전부대를 지휘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 몰트케는 1914년 8월 30일 독일 제2군이 생 캉탱 방면에서 반격을 받자 제1군과 2군에게 진격방향을 남서에서 남쪽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 주력이 파리로 퇴각하지 않고 반격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격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입니다. 즉 홈즈는 실제 전역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적 주력의 섬멸이 최우선이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미국 공군에 대한 어떤 평가

팽덕회는 한국전쟁 참전 직전 사단급 이상 주요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미국 공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합니다.

미 공군은 비록 조선에 [항공기를] 많이 투입하고 있지는 않음에도 우세하다. 그러나 공군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공군은 나름대로의 곤란한 점이 있다. 또한 공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존재도 아니다.

‘在中人民解放军师以上干部动员大会上的讲话’(1950. 10. 14), 彭德怀军事文选(中央文献出版社, 1988), p.323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

2010년 9월 6일 월요일

짜증나는 사설

한주의 시작을 잡치는 짜증나는 사설 하나.



나는 전쟁 첫날 최전방의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을 때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던 인간의 기념관을 세우는 건 절대 반대다. 

예전에 축석령 전투 전적비에 이름조차 알수 없어 그냥 무명용사로 표기된 전사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 초기의 혼란통에 기록을 상실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이승만은 피난열차를 타고 도망쳤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치는 건국대통령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니다. 글자그대로 권력이 시민에게 있기 때문에 정통성이 생기는 것이지.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셔먼의 놀라운 생산성!

셔먼의 생산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다음의 자료를 보시죠.





이 엄청난 설계에서 알 수 있듯 셔먼은 비숙련 노동자 한 명 조차 1분이면 생산할 수 있는 놀라운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입니다. 독일놈들이 전쟁에 진 것도 다 이유가 있지요.



우리는 셔먼의 깜찍한 위용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남베트남군 보병사단의 편성문제(1955~56)

얼마전 1950년대 베트남군 지원을 다룬 미육군의 공간사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 베트남공화국(이하 남베트남) 군대의 편성문제였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베트남화~남베트남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보니 베트남전쟁 초기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남베트남군의 초기 보병사단편제는 약간 의외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결과 1955년 남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미국 군사고문단(MAAG,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예산상의 문제로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하려 했습니다. 이때 미국 쪽에서 군대를 감축하기 위해 6천명의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풍부한 고참 부사관을 일거에 전역시키기도 했는데 이건 나중에 미국의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지요. 어쨌든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베트남군을 10개 사단 15만명으로 증강시킨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 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크레핀비치(Andrew F. Krepinevich, Jr)의 단행본에서는 초기 남베트남군의 사단 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에 북베트남과 중국 등의 전면공격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1)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베트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포병연대를 가진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한국군도 전쟁의 경험으로 사단포병을 연대급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규전을 염두에둔 편제라면 당연히 이런 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육군 공간사를 읽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더군요. 1956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편제는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에 더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먼저 정규전 수행을 고려한 4개 야전사단은 편제상 병력 8,500명에 3개 보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대대’와 중대급 지원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급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38선에 배치된 한국군 보병사단과 유사한 구조지요. 그리고 6개의 경보병사단은 사단포병 없이 3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되었습니다.
물론 사단단위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군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한국국전쟁 직전의 한국군 편제 보다는 훨씬 나은 편제였습니다. 연대 단위에서는 오히려 미군의 편제 보다도 나은 부분이 있더군요. BAR는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50% 많았고 81mm 박격포는 3분의 1이상 많았습니다. 경보병사단은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경기관총은 30% 더 많았고 BAR는 10% 더 많았습니다.2)  사단급 화력의 부족을 연대급 이하의 화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메꾸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창군 초기 남베트남군대의 보급이나 전투지원능력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물론 경우에 따라 중국군과의 정규전도 고려했다는 편제치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편제입니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가 한국의 경제사정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적당한 편제였을지 몰라도 정규전에는 부적합한 편제였지요.

크레핀비치의 저작에 남베트남군의 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있었다면 오해가 없었을 텐데 이점이 아쉽군요. 어쨌든 늦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Andrew F. Krepinevich, Jr, The Army and Vietna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2
2) Ronald H. Spector,  Advice and Support, The Early Years(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3), pp.262~268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