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독일 기갑부대의 장비문제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복잡해 진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상태가 좋지 않는 군대라면 어느 군대건 겪는 일 입니다. 비슷한 예로 1941년 여름-겨울의 붉은군대를 보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복잡한 부대의 편성과 재편을 거친데다 전쟁 발발 이후 전멸과 재편성을 수 차례씩 반복하면서 그야말로 정신 없는 편제를 보여주지요. 하지만 1941년의 소련군의 장비는 T-26이나 BT 계열 같은 여러 모로 모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내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같은 문제를 겪은 전쟁말기의 독일군에 비하면 ‘국내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쟁 말기 많은 기갑부대가 중구난방으로 장비를 보충받다 보니 전차에서 돌격포로다운그레이드 되는 반면 또 어떤 부대는 난리통에 장비가 업그레이드(!)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1944년~1945년의 재편성 과정에서 장비가 오히려 좋아진 부대 중 하나인 독일육군 제 25기갑척탄병 사단 소속 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943년 6월 23일 제 25차량화보병사단을 개칭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사단은 1942년 하계전역 당시 남부전선에 투입된 차량화보병사단들과 달리 기갑대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된 뒤에도 한동안은 이렇다 할 기갑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단에 배속될 기갑대대가 편성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멸한 제 5기갑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잔존 병력을 근간으로 한 제 5기갑대대였습니다.
이 제 5기갑대대의 편성 명령은 1943년 8월 25일에 내려졌으며 부대 주둔지는 노이루핀(Neuruppin) 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대대의 대대장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베테랑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2중대장을 지냈던 레테마이어(Josef Rettemeier) 대위가 임명되었습니다. 대대의 기갑장비는 1943년 6월 20일자 K. St. N 1157(본부중대 통신소대), 1159(전차중대)에 따라 3대의 3호 지휘전차와 42대의 돌격포였습니다. 5기갑대대가 소속될 25기갑척탄병 사단은 동부전선의 중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월 초 까지 장비배치와 훈련을 마친 대대는 10월 10일부터 15일에 걸쳐 열차에 분승, 10월 20일에 대대의 선발대가 오르샤에 도착합니다.
25기갑척탄병 사단은 제 78돌격사단과 함께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구간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련군이 공격을 집중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10월 하순까지 독일측이 ‘고속도로 전투(Autobahnschlacht)’라고 부르는 두 차례의 격전이 있었으며 5기갑대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14일 제 3차 고속도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사단 예비대로 있던 제 5기갑대대는 119 차량화척탄병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소련군 전차부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이 전투의 전공으로 대대장인 레테마이어 대위는 1943년 12월 5일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소련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개시해 제 4차 고속도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12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8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소련군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합니다. 1943-1944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지구는 우크라이나의 해방에 가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이 중부지구 또한 겨울 내내 치열한 격전이 계속됐습니다. 치열한 전투 덕분에(?) 레테마이어 대위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지 석 달 뒤인 1944년 3월 6일에 백엽기사십자훈장 수여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봄부터 여름까지 장비 보충이 이뤄져 이미 5월 말 전차대대는 돌격포 45대를 갖춰 완편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겨울은 무사히 지나갔는데 문제는 아주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붉은군대의 1944년 하계대공세, ‘바그라치온’작전이 바로 중부지구에 가해질 예정이었고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소련군의 주공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죠. 제 78돌격사단과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이 방어하는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 구간에는 소련 제 11근위군과 31군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의 저항은 완강해서 6월 25일까지도 31군의 진격은 신통 찮았다고 합니다만… 다른 사단의 방어구역이 줄줄이 돌파 당했기 때문에 25기갑척탄병 사단은 후퇴 중 민스크 근교의 포위망에서 전멸당합니다. 물론 이때 5전차대대도 모든 장비를 잃고 전멸했고 대대장 레테마이어 대위는 포로가 됐습니다. 5전차대대에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대 정비중대와 약간의 부상병 정도였습니다.
※포로가 된 레테마이어 대위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귀국할 수 있었고 1997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하는 군요
어쨌든 이렇게 1943년에 돌격포를 장비했던 제 5기갑대대는 전멸했지만 바그라치온 작전 당시 전멸한 많은 부대들이 그렇듯 재편성됩니다. 재편성된 제 5기갑대대의 모체는 1944년 여름에 어수선하게 편성된 독립기갑여단 중 하나인 107 기갑여단의 2107 기갑대대였습니다. 편성 직후 네덜란드로 투입돼 영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이 여단은 11월 8일/9일에 걸쳐 전선에서 물러나 바움홀더(Baumholder) 훈련장으로 이동 이곳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Kampfgruppe 25. Panzergrenadierdivision)으로 개편됩니다. 이렇게 원래 판터를 장비하고 있던 기갑대대의 잔존 장비와 병력으로 편성된 덕분에(?) 새로운 5기갑대대는 비록 몇 대 안 되지만 판터를 장비하게 됩니다.(얼쑤 조쿠나! 득템이다!) 하지만 말만 좋아 재편성이고 실제로는 잠시 휴식을 취한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1월 18일에 재편된(이름만 바뀐)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알자스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보유한 기갑차량은 7대의 판터와 4대의 구축전차였다고 합니다. 전선으로 나간 이후 약간의 기갑차량 보충이 있어서 12월 중순에는 11대의 판터와 6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게 됩니다. 재편성 당시 근간이 됐던 2107기갑대대가 판터를 장비한 부대였기 때문에 신편성 5기갑대대는 계속해서 판터를 보충 받게 됩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11월 말부터 12월 까지 자르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로 작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월 1일자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다시 25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됩니다. 개편될 당시 5기갑대대는 25대의 판터와 10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단 전차엽병대대가 돌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Bernd Hartmann의 부대사에는 1월 1일 사단이 개편되면서 5전차대대도 돌격포로 장비를 교체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저작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봐서 오류 같습니다) 개편 직후 알자스에서 북풍(Nordwind) 작전에 투입됩니다. 북풍 작전에서 5기갑대대는 대대장 아른트(Kurt Arndt) 대위가 전사하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북풍작전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면서 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은 21기갑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에 투입됩니다.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 초반에 25기갑척탄병사단은 붉은군대의 제5충격군 예하 소총병 사단을 상대로 반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25기갑척탄병사단이 예비대로 돌려지면서 5기갑대대도 다시 병력과 장비 보충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작전 직전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현황은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티케에 따르면 1945년 4월 7일 당시 5기갑대대는 가동 가능한 4호 전차 1대, 판터 28대, 4호 구축전차 6대, 대공전차 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수리 중인 판터 6대와 4호 구축전차 3대가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역시 Bernd Hartmann의 부대사는 티케와 상충된 진술을 하고 있는데 다른 서적들과 교차 검증해 보면 티케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상충된 주장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를린 전투가 시작된 뒤 25기갑척탄병사단은 브리첸(Wriezen) 방면의 반격에 투입되어 전투 초반에 전투력의 상당수를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25기갑척탄병사단은 서쪽으로의 탈출에 성공해 5월 3일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5기갑대대는 전쟁 중 두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서적
Tony Le Tissier, 『Durchbruch an der Oder : Der Vormarsch der Roten Armee 1945』, Bechtermünz Verlag, 1997
Bernd Hartmann, 『Geschich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 1943-1945』, Selbstverlag, 2002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 2, Schiffer, 1996
Soviet General Staff, 『Belorussia 1944』, Frank Cass, 2001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 Motorbuch Verlag, 1992
Monday, June 30, 2008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
Friday, June 27, 2008
벼락치기 이탈리아 구경 - 밀라노, 베네치아
툰 기갑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베른 중앙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로 넘어갈 차례가 됐으니까요.
일단 밀라노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생긴것도 별로에 맛도 별로더군요.
맛없는 피자를 뱃속에 집어 넣은 뒤 밀라노로 가는 CIS를 탔습니다. 그런데 멋진 ICE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CIS는 뭔가 좀 모자라 보이더군요.
밀라노에 도착하고 바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방값은 비쌌는데 과연 관광객의 등골을 빼먹는 이탈리아다 싶었습니다.
대충 씻은 뒤 김윤진이 이탈리아말로 떠드는 로스트 시즌 2를 보고 잤습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에 중앙역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맑은 날씨에 보니 꽤 멋진 건물이더군요. 시설이 허접한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길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걸으면서 계속해서 독일과 비교를 하게 되더군요. 일단 알아보기 어렵게 붙여 놓은 도로표지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텔에서 대충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두오모 성당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크. 역시 먹는것 하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만세!
식사를 하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비둘기 모이를 강매하는 파키스탄인(?)만 제외하면 즐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San Lorenzo 성당으로 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중이어서 그 멋지다는 교회의 모자이크를 구경하지 못 했습니다. 책자의 설명으로는 370년 경에 처음 건립되었고 16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모자이크도 만들어 졌다는데 이거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정말 아쉽더군요.
아래 사진은 교회 쪽에서 밖을 보고 찍은 것인데 앞에 있는 돌 기둥들이 제가 밀라노에서 본 유일한 로마시대 유적이었습니다. 이 돌기둥 들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San Lorenzo 성당 다음에는 Sant'Eustorgio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 성당은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르바로사가 밀라노를 털때 성당의 성물인 동방박사의 유골을 탈취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실제고 그게 동방박사의 유골일 리는 없었겠지만 종교란게 다 그렇죠...
Sant'Eustorgio 성당을 구경한 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원래 계획에서는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하려 했는데 중간에 아르덴느 구경을 한 번 한 덕분에 멋진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단 하룻동안 '발가락'만 담그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귀국 한 뒤 이탈리아만 3개월 여행했다는 분을 만나서 아주 부러워 하기도 했지요.
중간에 어떤 중고차 가게에서는 재미있는 아이템을 하나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 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으로 갔습니다. 음. 역시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줌마들로 득시글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 앉아서 쉰 다음에 구경했습니다. 크... 그런데 이 어린양은 미적 감각이 제로여서 그런지 막상 유명한 물건을 구경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더군요;;;
마지막으로는 Sforzesco성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 멋진 건물은 정말 "밖에서 살짝"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르덴느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구경을 하루 줄인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생각해 보니 애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걸어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물론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해서 전에 예약해 놓은 야간열차를 확인한 뒤 바로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에 타니 자리가 없어서 베네치아 까지 꼼짝없이 서서 가나 싶었는데 어떤 친절한 승무원이 빈 좌석이 많은 객차를 알려줬습니다. 아아. 이탈리아 만세!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역의 물품 보관소는 그야말로 날강도 들이더군요. 시간 단위로 돈을 받아 먹는건 둘째 치고 그야 말로 살인적은 요금이었습니다. 1~2유로면 하루를 맡길수 있는 독일의 무인보관함이 한없이 그리워 졌습니다.
물품보관소에서 삥을 뜯긴뒤(?) 두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으니 시내 구경이라 하기도 민망했습니다만...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식당 한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마자 물품보관소의 불친절과 바가지에 대한 반감은 싹 사라지고 이탈리아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승상 체니의 비극
Bush Rebuffs Hard-Liners to Ease North Korean Curbs - The New York Times
크하하핫!
위치
11:4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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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6, 2008
파이어폭스 3.0을 처음 사용해 봤습니다.
오늘 간만에 컴퓨터를 포맷하고 다시 이것 저것 설치했습니다. 원래 파이어폭스 3.0이 나오면 바로 설치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며칠 있으면 공인인증서 만료일이고 하다 보니 컴퓨터를 포맷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파이어폭스 3.0을 설치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파이어폭스를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채승병님의 추천 때문이었는데 처음 사용하자 마자 시스템에 별 무리도 없고 익스플로러 처럼 구질구질하지도 않다는 점에 푹 빠져서 그 이후로는 기본 브라우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이어폭스를 좋아하는 다른 많은 분들 처럼 익스플로러는 은행이나 국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때만 사용하고 있지요.
오늘 처음 3.0을 설치하고 써 보니 파이어폭스의 장점인 가볍고 빠르다는 점은 여전했습니다. 브라우저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크게 변한 것 같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편한 느낌이 듭니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탭 기능이 2.X 들과 비교해서 크게 개선된 점이 없어 보인다는 정도 입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파이어폭스의 탭 기능을 흡수하면서 마우스 만으로 탭을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을 넣은게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파이어폭스는 고유의 장점인 탭 기능에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역시 익스플로러 7.0에서는 북마크에서 선택한 사이트를 바로 새 탭으로 띄울 수 있는데 파이어폭스도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고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3.0을 쓰다가 다시 2.X를 까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까지 별다른 불편함은 못 느끼겠더군요.
위치
10:0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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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조선 주요 도시들의 지도 -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
번동아제님이 "고전사 공부를 위한 지도 자료 문제"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길지는 않은 글이지만 역시 명성은 거저 얻어 진게 아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나니 다음으로는 예전에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지도들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텍사스 주립대 전자도서관의 Perry-Castañeda Library Map Collection에 포함된 1940년대 이후 한국 관련 지도들입니다. 처음 이 웹사이트의 한국 지도들을 이용하게 된 것은 2005년이었는데 매년 지도가 조금씩 추가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지도는 해방 후 남한 지역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이 작성한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거의 베낀) 1946년의 경성 지도였습니다. 해방이후 좌익이나 우익단체에서 활동한 분들의 증언을 채록해서 정리하는 일을 했었는데 중요 사건이 있을 때 동선을 파악하는데 아주 좋더군요.
번동아제님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현재 웹사이트에 1940년대의 지도가 올라와 있는 도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성(1946년)
평양(1946년)
진해
진남포
청진
해주
함흥
흥남
군산
겸이포
마산(1946년)
목포
나진
부산
웅기
원산
여수
업데이트가 계속 돼서 더 많은 지도가 올라왔으면 싶습니다. 제법 쓸곳이 많더군요.
위치
1:4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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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ne 23, 2008
[妄想劇場] 헬싱 3-4화
[妄想劇場] 헬싱 - 예고편???
[妄想劇場] 헬싱 1-2화
경고 : 이 이야기는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다시 며칠 뒤 박근혜 자택, 유신기관 서울 본부
안희정과 이광재의 기습으로 유신기관 본부는 예상 외의 타격을 받았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장광설에 본부요원 대부분이 정신줄을 놓아 버린 것이었다.
“아가씨, 인원 보충 건입니다만… 프로 용병을 고용했습니다.”
“용병?”
“네. 돈이 지불 되는 한 그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미 박근혜 자택의 지하실에는 한 무리의 용병이 모여있었다.
“서청원 대장. 우리 보고 부잣집 경비원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 우리의 임무는 친북좌파 퇴치야.”
이때 박근혜가 지하실로 내려왔다.
“맞아. 당신들의 임무는 친북좌파 퇴치. 그 중에서도 똥고집에 현란한 말발을 자랑하는 악질들이지. 이제부터 당신들을 친박연대라고 하겠어.”
이렇게 해서 유신기관의 정예 전투부대인 『친박연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가씨!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김종필 집사로부터 편지를 받아든 박근혜는 크게 놀랐다.
“소망교회 특무 18과… 『공구리오테』 기관이라고?!”
-다시 며칠 뒤, 용산 전쟁기념관
“도데체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오는거야?”
박근혜가 신경질을 내며 툴툴거렸다. 이때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 중 한 명은 인상이 아주 정나미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런, 우리가 늦은 모양이군요.”
“가까이 오지마! 대체 소망교회가 무슨 용건이지? 특히 기분 좋은 사람도 짜증나게 한다는 삽질기관 18과가?”
정나미 떨어지는 인상의 남자는 가뜩이나 짜증나는 면상에 썩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 큰일이군. 완전히 찍힌 것 같은데… 먼저 인사부터 드리죠. 18과의 장을 맡고 있는 소망교회 장로 이명박이라고 합니다.”
이명박의 썩소는 가뜩이나 비호감인 그의 매력을 더 떨어뜨렸다. 근혜는 역겨움을 참으며 대답했다.
“니가 누군진 관심없어! 용건이나 말해.”
박근혜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명박의 인상이 구겨졌다.
“우리가 공손하게 나가니까 아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만!”
“!”
“그놈의 주둥이 닥치고 들어! 이 수첩공주야!”
이때 갑자기 허경영이 나타났다.
“수첩공주? 과연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기분을 잡치는 소망교회 18과 답군!”
이명박의 실눈이 조금 커졌다.
“오오! 유신기관의 찌질이 처리반! 헛소리의 조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만나서 반가워 허경영.”
“나도 반가워. 명박.”
허경영은 말을 계속했다.
“그럼 잘가~ 너는 나의 주인을 수첩공주라고 불렀다. 멀쩡한 정신으로 용산구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버려!”
하지만 이명박은 여유 만만한 얼굴이었다.
“오오. 무서워라! 하지만 그쪽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이렇게 나가지!”
“!”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저 멀리서 추부길이 운하 위를 날으는 WIG 처럼 달려왔다.
“일격에 모조리 끝장을 내주마!”
허경영도 덩달아 신이났다.
“자아! 한 판 해보자! 정치 목사!”
이때 방송이 들려왔다.
“잠시 뒤에 여군 의장대의 의장 시범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추부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싸울 맛이 떨어졌군…”
“나도 마찬가지야. 나가서 여군들 허벅지나 구경해야지.”
허경영과 추부길이 여군 구경을 하러 나가자 다시 난감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명박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일단 구내 식당이라도 가서 이야길 하지.”
잠시 뒤, 박근혜와 이명박은 전쟁기념관 구내식당에 앉아 갈비탕을 앞에 두고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 용건이 뭐야?”
박근혜가 마지 못해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유신기관이 노빠들의 습격을 받아서 대원들 대부분이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리고 이광재란 녀석이 뭐라고 한 마디 했다지?”
“대단하군. 바로 그래.”
“그리고 그거, 봉하마을. 맞지?”
“….”
“좋아, 가르쳐 주지. 몇 년 전부터 노무현은 김해시 어딘가에 대규모 비밀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기지 건설 때문에 부산 신항만으로 들어가는 철도 노선까지 변경이 됐지.”
“!”
이명박은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바로 조선일보에 나왔거든!”
-얼마 뒤, 김해시 봉하마을
“봉하마을에 대해 그자들이 드디어 접근한 것 같습니다. 작전을 서두를까요?”
검은 그림자가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으응. 좋아. 아주 좋아. 정치다. 자네도 한 번 생각해봐. 정말 엉망진창인 정치판이 될거야.멋지지 않나? 정치. 정치라구!”
이렇게 대답하는 검은 그림자는!
<3화 끝>
-다시 며칠 뒤, 유신기관 서울본부
소망교회로부터 봉하마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유신기관은 즉시 허경영과 송영선을 급파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종필 집사가 말을 꺼냈다.
“지난 번 본부가 습격당한 것 때문에 예산이 부족합니다. 김해까지 내려갈 교통비가 모자란데요.”
박근혜는 매우 난감했다. 천하의 유신기관이 두 사람의 우등 고속버스 좌석조차 예약할 돈이 없다니!
“아니. 종필이 아저씨. 그렇다고 한 명만 내려보낼 수는 없잖아요?”
김종필 집사는 다시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따로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네 시간 뒤. 김해 행 고속버스 화물칸
송영선은 골프 백에 쭈그리고 들어가 김종필 집사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놔. 이 영감쟁이. 나중에 두고 보자.”
복수를 다짐하는 송영선이었다.
-같은 날 저녁. 김해시 XX모텔
허경영은 모텔 방에 들어오자 마자 송영선이 들어 있는 골프백을 구석에 처 박았다. 이때였다. 모텔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경영은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허 본좌! 허 본좌!”
모텔 밖에는 벌써 허경영의 이름을 듣고 몰려든 노인들로 가득했다.
“허 본좌의 공약을 듣고 싶다!”
“와아!”
허경영은 자신을 애타게 찾는 노인들을 보고 감격에 겨워 밖으로 뛰쳐 나갔다.
“나 좀 꺼내줘!”
물론 허경영은 골프 가방에 들어있는 송영선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러분. 제가 나왔습니다!”
“와아!”
허경영이 나타나자 그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허 본좌! 허 본좌!”
“제가 대통령이 되면 지금의 청와대는 국립 부정부패자 전시관으로 하고 대통령 집무실은 파주 1사단 사령부를 사용해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대통령 집무실 비용을 줄이겠습니다!”
“와아!”
“제가 대통령이 되면 취임식은 국립묘지에서 하고, 국회의원 전원을 선거법 등으로 체포, 수사 퇴출시키겠습니다!”
“와아!”
노인들은 허경영이 사자후를 토할 때 마다 열광했다.
-같은 시각. 봉하마을
“기쁘군. 아주 멋진 선전포고야!”
무현 소좌는 봉하마을 슈퍼마켓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허경영의 연설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잘 봐. 저 꼴을. 저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거야. 제정신과 광기를 오가는 존재. 무엇보다. 헛소리를 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닌 정치인!”
“어떻게 할 까요? 소좌?”
“유시민에게 전해. 출격 준비.”
-다시 XX 모텔 앞
허경영의 사자후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때 마다 모텔 앞에 모인 군중은 환호했다.
“허 본좌! 허 본좌!”
이때였다.
저벅. 저벅.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이야~ 이거 정말 멋진 연설이군요. 역시 유명한 허 본좌 답군요.”
허경영은 그 남자를 쳐다 보았다.
“나의 이름은 유시민. 친한 사람들은 ‘빽바지’라고 부르죠.”
“네가 이 노인들을 불러 들였냐?”
“저런 할 일 없는 노인들이라도 쓸모가 있었지. 그런데 당신이 자랑하는 사자후를 토할 기력은 얼마나 남았나?”
“머리가 좋군. 그래서 어쩔건가. ‘빽바지’?”
“나의 현란한 화술을 감상하게 해 주지.”
“!”
“나는 시골 노인들을 위해 특전사를 동원해 맷돼지를 사냥하겠다!”
순간 허경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가출했다. 잠시 뒤 허경영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래. 어쩔 수 없는 녀석들이었어. 너희들 이었군. 그렇다면 이 몸이 상대해 주는 게 당연하지. 한 번 망했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유시민은 허경영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공격했다.
“낙하산 인사가 모두 나쁜 건 아니다!”
허경영은 유시민의 말을 계속 듣고만 있었다.
‘천하의 허경영도 별 게 아니로군!”
허경영이 계속 침묵하고 있자 유시민은 더욱 기가 살아 입을 나불거렸다.
“준비는 되었나? 허경영 군. 정신을 가출 시켜주지!”
“후후후후. 아주 기뻐. 아직도 자네들 같은 멍청이 들이 존재한다니 말이야. 노사모. 최후의 빠돌이들. 그렇군. 그 자아도취 소좌가 통솔하는 3류 정치꾼 집단! 자. 간다. 빽바지. 돼지 같은 비명을 지르게 해 주지.”
유시민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돼 있었다.
“비명을 지르라고? 내가?”
유시민은 다시 헛소리를 시작했다.
“나이 60이 넘으면 뇌세포가 다운된다!”
이때. 갑자기 모텔 창문에서 송영선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노무현도 환갑이 넘었지!”
“헉!”
송영선의 일격에 유시민은 당황했다. 허경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대통령이 되면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만주와 연해주를 대한민국에 흡수해 대한연방을 만들것이다!”
“크아악!”
유시민도 허경영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4화 끝>
to be continued...
Sunday, June 22, 2008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Mugabe's men bring rape and torture to Harare suburbs- GUARDIAN
Mugabe allies 'set up' political terror - GUARDIAN
Assassins in Zimbabwe Aim at the Grass Roots - The New York Times
Zimbabwe opposition asks voters to end Mugabe rule - The Washington Post/AP
Krieg gegen das eigene Volk - Frankfurter Allgemeine
Mugabe setzt auf Mord - Der Spiegel
요 며칠 사이에 짐바브웨에서 아주 난감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는 선거 때 마다 막장상태가 반복돼 오긴 했습니다만 이번엔 약간 더 난감해 보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추종하는 민병대를 앞세워 정치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군요. 소총, 그리고 칼과 돌팔매(!)로 무장한 민병대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며 대통령의 반대파와 유권자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야당 당원에 대해서는 대량학살 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테러가 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테러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건 마치 이박사 치하의 대한민국을 살짝 업그레이드 한 듯한 막장 분위기로군요. 아니나 다를까 짐바브웨의 국가 경제도 엉망인걸 보니 그야 말로 이박사와 동급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습니다. "Krieg gegen das eigene Volk"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의 기사 제목은 정말 짐바브웨 사태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저 위에 링크는 하지 않았는데 AFP 통신의 한 보도에 따르면 무가베는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는건 "신" 뿐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역시 도킨스 옹이 옳았습니다. 정말 갖가지 쓰레기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막장으로 만들고 있군요.
짐바브웨의 막장 상태를 보니 이렇게 집에 편하게 들어앉아 대통령을 씹을 자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Saturday, June 21, 2008
[妄想劇場] 헬싱 1-2화
[妄想劇場] 헬싱 - 예고편???
경고 : 이 글은 정신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쓰다 보니 의외로 장편(?)이 될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서 인내심을 발휘해 주시길 빕니다.
대한민국 남부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고등학교에 교사 한 명이 부임했다. 이상한 교사였다. 그는 수업시간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 하는 것은 미국의 북한의 무력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며 미국의 경제 봉쇄만 풀리면 북한은 연간 수십%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후에도 헛소리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교사의 책상에 놓인 책을 본 한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교사가 보던 책은 바로…
며칠 뒤 학교 교장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박근혜님.”
“보고는 받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이쪽입니다. 오오. 당신이 바로 근혜님이시군요. 도데체 그 교사는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교사는 바로 주사파입니다. 아마 대학교 이래로 제대로 된 공부라곤 안 한 모양이네요.”
“아니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요즘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박근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교장선생님 같이 멀쩡한 분은 몰랐을테죠. 통칭 『유신 기관』은 오래 전부터 저런 바보들과 싸워왔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반공 특무기관이니까요.”
교사들은 멍하니 근혜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바보를 처리할 킬러를 교실로 보냈습니다.”
“그 사람은 괜찮은 겁니까?”
“그의 이름은 허경영. 나사 빠진 바보들을 상대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냥꾼이죠.”
이때 허경영은 어슬렁 어슬렁 문제의 교사가 있는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자 마자 정신나간 교사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아무리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는데 도가 텄기 때문이지!”
“싫어어엇!”
정신나간 교사는 액면가 마흔은 돼 보이는 여학생에게 계속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잠깐!”
허경영은 그 특유의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로 교사를 제지했다.
“적당히 해 두시지… 요즘 젊은 것들은 돼먹지 못한 것들이야. 상식도 없고 개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정신나간 교사는 순간 위압감을 느꼈다.
“넌, 넌 누구냐!”
“난 허경영. 『유신 기관』 소속의 주사파 킬러지! 너 같은 바보를 상대하는 전문가다!”
“크크크. 네가 주사파 킬러라고? 닥쳐!”
그리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늘어놓던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경영은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교사는 기고만장해서 외쳤다.
“하하하! 벌써 끝난거냐? 킬러양반!”
그러자 허경영은 조용이 말문을 열었다.
“크크크. 그정도 헛소리로는 어림없어! 자 이젠 내 차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60세 이상 국민에겐 매월 70만원을 지급할 수 있다!”
순간 교사의 머리에는 대학시절 처음으로 북한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상의 충격이 가해졌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너… 너… 어떻게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그 따위 헛소릴 할 수 있는거냐?”
“너 같은 바보들이 설쳐대면 곤란하거든!”
“크아아아!”
교사는 두 귀를 틀어막고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잠시 뒤…
“돌아왔다!”
교무실의 교사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허경영의 품에는 액면가 마흔의 여학생이 안겨있었다.
“그 애는 뭐야?”
“정치를 하려면 대변인이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박근혜는 순간 어이를 상실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이 바보야!”
이렇게 해서 송영선은 박근혜의 대변인이 되었다.
<1화 끝>
그리고 얼마 뒤. 박근혜 자택
박근혜 자택에서는 『유신기관』의 월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친북좌파의 준동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말문을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 반공단체의 지도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박근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특이한 것은 이들에게 ‘배후’가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뭐라고!”
참석자 전원은 충격에 빠졌다.
이때였다. 집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요?”
인터폰으로 현관 경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빠들의 습격입니다! 으아악”
잠시 뒤 인터폰으로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구제불능의 유신공주 박근혜양은 듣고 계신가요? 우리는 안희정, 이광재~. 지금 유신기관의 대원들의 정신을 빼놓는 중~ 이제 곧 그쪽도 정신 줄을 놓게 해 주지.”
순간 회의실은 공황상태가 되었다. 박근혜는 황급히 집사를 찾았다.
“종필이 아저씨 거기 있어요?”
“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잠시 뒤 박씨 가문의 집사 김종필과 대변인 송영선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종필이 아저씨. 우리는 이제 끝인가요?”
김종필이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 천만의 말씀입니다. 60년전 북괴 김일성의 남침 때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밉니다. 저 찌질이들에게 우리 『유신기관』의 수업료가 얼마나 비싼지 확실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이때 이광재와 한 무리의 노빠들이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크크크. 늙은이들 명줄 전에 정신줄부터 놓게 해 주지.”
이광재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때였다. 김종필이 노빠 무리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김종필. 『유신기관』의 전직 찌질이 처리반이지.”
“뭐… 뭐야!”
이광재와 노빠들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김종필은 그 뒤를 이어 숨돌릴 틈 없이 미8군 사령관과 맞짱을 뜨고 한일회담에서 날렸던 현란한 화술로 이광재를 비롯한 노빠들의 정신줄을 놓게 했다.
“크아악!”
이광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껏 노빠들과 말장난이나 하던 이광재의 수준으로는 김종필의 말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퍼억!
마지막 결정타는 하늘을 나는 AN-2도 떨어뜨린다는 송영선의 7번 아이언이었다.
“끄으응….”
이광재는 유신기관을 습격한 것을 후회하며 복도에 자빠졌다. 김종필이 한심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 찌질아. 네놈들의 배후는 누구냐?”
이광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쯤… 희정이 형이 허경영을 박살냈을 거다..”
김종필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뭐라고….”
이때 안희정은 지하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허경영. 여기 있지? 나와라! 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너의 강한 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이때. 나직한 허경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나는 도망치거나 숨지 않아. 기다리다가 조금 지쳤을 뿐이지.”
안희정은 막상 허경영이 나타나자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안희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천하의 허경영과의 대결을! 확인해 보겠어!”
안희정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한 시대에 있어서 엄청난 흔적과 궤적을 남긴 참여정부의 가치와 지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들기 보다는 더욱 싹을 틔울 것이다! 크하하하.”
허경영은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한심하군. 정말 찌질한 헛소리야. 이렇게 어이없는 것도 오랜만이군! 네놈을 C등급 정도의 정치인으로 인정하지.”
안희정은 허경영이 전혀 타격이 없는걸 보고 움찔했다.
‘아냐. 분명 녀석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길 수 있어! 정치인 허경영을!’
허경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진짜 정치인의 헛소리가 어떤 것 인지를!”
“!”
“15대 대선 공약 개방!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본문 개방!”
안희정은 점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백록담에 양수 발전소를 건설한다!”
“허억!”
“방송통신대학은 내가 만들었다.!”
“으아악. 넌… 대체! 넌… 대체 뭐야?!”
안희정은 충격과 공포로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허경영은 그런 안희정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자. 왜 그래? 나는 이제 겨우 헛소리를 두 번 했을 뿐이야. 어서 덤벼! 너도 빨리 아무 헛소리나 지어내! 어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어! 자. 어서! 어서!”
“이… 대인배놈!”
“그래 너도 그렇구나. 그저 그런 3류 정치꾼!”
“웃기지마! 박근혜의 장난감 주제에!”
“너는 찌질이다!”
허경영은 안희정을 살짝 비웃어 준 뒤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내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캄차카 반도의 소련 핵미사일 기지를 사들였다!”
“크아악!”
안희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고작 이정도 였냐, 애송아? 너는 똥 같은 놈이야. 꼴을 보아하니 위에 있는 놈도 알 만 하군.”
이때 1층에서는 박근혜가 이광재를 취조하고 있었다.
“너희는 대체 뭐지? 뒤에서 누가 조종하고 있는 거야?”
이광재는 썩소를 날리며 외쳤다.
“으하하! 이 돌대가리들아 가르쳐 주지! 한 가지만 가르쳐 주겠어! 으하하하!”
김종필과 송영선은 이광재가 참 찌질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광재는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쿵!
“봉하마을???”
<2화 끝>
to be continued...
Friday, June 20, 2008
외장하드를 하나 더 장만했습니다
오늘 우체국 택배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이틀전에 주문한 500G 외장형 하드디스크더군요.
케이스는 레토라는 회사 물건이고 안에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는 웨스턴디지털의 물건입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을 위해서 포맷까지 깨끗하게 해 놓았더군요.
이전에는 80G 짜리 외장형 하드디스크를 하나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USB 대신 들고다니려고 일부러 작은 물건으로 샀는데 노트북의 하드디스크가 60G 밖에 안되다 보니 결국에는 휴대는 못하고 집에서 보조 하드디스크로 쓰게 됐습니다. 이제 노트북을 보좌할 500G 짜리가 생겼으니 80G 짜리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필수적인 자료만 집어넣고 외출할 때 들고 다닐수 있게 됐습니다.
위치
10:46 P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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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19, 2008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 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Tuesday, June 17, 2008
天朝의 兵部尙書 두 양반에 대한 책
세상이 우울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 어린양 같은 소시민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은 아마존에 주문 넣은 책이 몇 권 도착했습니다.
발송한 날자는 다른데 도착은 같은 날 했습니다. 그야말로 Time on Target이로군요!
경제사정도 갈수록 악화되어 지르는 책의 양이 줄어들다 보니 그에 맞춰 책을 고를때도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신간을 바로 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고 나온지 최소한 두어달 이상은 된 책들을 서평을 살펴가며 사 보게 되었지요.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는 미국의 국방부 장관 두 명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첫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바로 이 책 입니다.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전쟁부 차관을 지내고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냉전 초기 미국의 국방정책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루이스 존슨(Louis Arthur Johnson)을 다룬 책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민군관계의 권위자인 허스프링(Dale R. Herspring)이 작심하고 럼즈펠드를 까기위해 쓴 책 입니다.
예전에 허스프링이 루즈벨트 이래의 미국 민군관계에 대해 쓴 책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허스프링은 럼즈펠드를 열심히 까고 있었는데 그때 까지도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현재 진행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직' 국방부 장관이 되었지요. 까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죠. 그래서 허스프링은 단행본 한 권을 할애해서 럼즈펠드를 까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 보니 허스프링은 민군관계에 있어 갈등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국방부장관의 임무는 이 갈등을 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협력적으로 끌고 가야하는데 럼즈펠드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마철의 무료함을 덜어줄 물건들이 생기니 아주 즐겁습니다.
7ㆍ4ㆍ7정책의 실현이 가시화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이 어린양의 친구 하나가 7ㆍ4ㆍ7 정책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 중에서 대통령 지지율 7%는 점점 가시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거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능력이 있건 없건간에 이래가지고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난감하군요.
위치
5: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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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5, 2008
융프라우, 스위스 육군 기갑박물관
바로 전날의 베른 구경은 별 생각없이 걸어다니기만 해서 그런지 편안한 느낌 말고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날은 날씨 부터 시작해서 아주 멋진 날 이었습니다.
아침일찍 융프라우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 인터라켄 역으로 나왔습니다. 슬금 슬금 해가 밝아오는 모양을 보아하니 이날의 날씨가 아주 좋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인터라켄 역에서 융프라우까지는 그냥 사진만 올리겠습니다. 이곳은 많은 분들이 가 보셨을 테니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Kleine Scheidegg에서 내렸는데 음... 역시나 한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평창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해서 전망대로 올라가보니 시간을 내서 한 번 와볼만한 곳은 맞는 것 같았습니다. 온난화로 다 녹아버리기 전에(?) 구경을 해야 나중에 후회가 안 되겠죠.
스위스 국기 구경까지 마치니 내려가는 열차 시간이 빠듯하더군요. 산 위에서 몇 시간 있다가 내려갔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이날 마지막 일정인 툰(Thun)의 스위스 육군 박물관을 구경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려가는 코스는 조금 다르더군요. 올라올때는 라우터브루넨을 겨쳐 올라왔는데 내려갈 때는 그린델발트를 거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터라켄에 도착하자 마자 툰으로 가는 기차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많은 동네가 그렇듯 툰으로 가는 길도 경치가 일품이었는데 사진 찍을 생각을 미처 못 했습니다. 툰도 호수와 산을 끼고 있는 곳이어서 매우 아름답더군요.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스위스 육군 박물관에 대해 물어보니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해당 부대 지휘관의 방문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안내소에서 근무하는 분이 부대 지휘관의 전화번호를 알려 줘서 통화가 가능했습니다.
※ 제가 방문했을 때 기갑박물관이 있는 부대의 지휘관 전화번호는 033-228-43-63 이었습니다.
통화를 해 보니 박물관 자체가 군인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이어서 건물안으로 들어가려면 며칠 전에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전차들은 야외 전시물이어서 간단한 출입절차만 있으면 구경할 수 가 있다고 하더군요. 방문자가 몇 명이냐고 물어보길래 단 한명이라고 하니 잠시 난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탱크 구경하러(...)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 하니 허가를 해 줬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마자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기갑박물관이 있는 Kaserne Dufour로 갔습니다.
막상 도착해 보니 걸어가도 될 거리였습니다. 역에서 몇 분 안 걸리더군요.(아이고 돈 아까워라!) 부대 정문의 초소에서 경비병에게 부대 지휘관과 통화를 했다고 말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부대내의 안내를 해 줄 병사를 불러왔습니다. 아주 인상이 좋은 Sandro Pletscher란 친구가 나오더군요. 어떤 미군 제독(Frank J. Fletcher)과 이름이 비슷하게 들린다니까 아주 좋아했습니다.(;;;;)
툰 기갑박물관의 전시물들 중에는 2차대전 이후에 스위스 정부가 프랑스로 부터 구입한 독일군의 전차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동 가능한 상태의 물건들만 들여온 탓에 전시물들의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또 스위스 육군이 운용한 마이너한 기갑차량들도 많은 덕에 아주 눈이 즐거웠습니다.
이 박물관에서 구경한 물건 중 가장 재미있었던 녀석들은 바로 스위스가 2차대전 중에 개발한 자주포인 Nahkampfkanone 시리즈였습니다. 특히 Nahkampfkanone II는 설계자의 미적감각이 의심스러운 놈이더군요.
스위스 육군의 개성만점인 기갑차량 외에도 여러 국가의 물건들도 많은게 이 박물관의 장점입니다. 이렇게 구경거리가 많은데 공짜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중간에 썰렁하니 포 하나가 전시되어 있으니 기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나 이 박물관에 온 진짜 목적은 2차 대전 중 사용된 독일 땅크들을 구경하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대부분 상태들이 좋으니 눈요기를 아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르노 R-35 전차에 체코제 47밀리 대전차포를 얻은 녀석(4.7cm PaK(t) auf R35)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어 아이템이죠.
그런데 이 박물관에 들른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던 왕호랭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럴수가!
그래서 안내를 맡은 플레처에게 왕호랭이의 소재를 물었습니다.
어린양 : 이봐. 왕호랭이 어디 있어?
플레처 : 나는 공병이라 땅크에 대해선 잘 모르겠는데.
어린양 : !!!(이게 뭔 선문답이냣!!!!!)
신나게 구경 잘 하다가 갑자기 핵심 아이템 하나가 보이지 않으니 섭섭했습니다. 아마 어디 수리를 하러 간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것 참;;;; 코블렌츠 박물관에 갔을 땐 판터가 트리어로 출장을 가더니만 툰에 오니 왕호랭이가 사라졌네요. 다음에 또 오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날씨도 좋고 구경도 아주 즐거웠던 하루였습니다. 모든 여행이 이렇게 즐겁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툰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베른으로 돌아와 밀라노행 CIS를 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절하게 부대 안내를 해 줬던 플레처(Sandro S. Pletscher)군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Wednesday, June 11, 2008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신천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수 많은 학살 중 한 단위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최대규모’인 학살입니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북한의 공식 주장에 따를 경우 신천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5,383명으로 북한 전역에서 가장 많은 것 입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신천 외에도 황해도의 안악, 은율은 각각 1만명을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황해도지역의 민간인 희생은 북한이 주장하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8선 이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자의 65% 이상에 달합니다. 현재로서는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에 대한 북한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지만 어쨌든 불과 3개월 사이에 황해도 지역, 특히 신천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입니다.
하여튼 신천학살은 그 규모 덕분에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정치적 이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외무상이던 박헌영은 1951년 4월 15일에 유엔에 보낸 서한에서 유엔군의 점령기간 중 38선 이북지역에서 미군과 ‘리승만 군대’에 의한 대량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당시 박헌영의 주장에 따르면 신천에서 25,000명, 황해도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국제적 문제가 되자 진보적 국제단체들은 미국의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북한으로 파견합니다. 첫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파견한 조사단 이었고 두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단이었습니다. 이 두 단체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기초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했고 당연히 미국과 남한정부는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국제조사단인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에서는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비롯해 ‘영국군’과 ‘한국군’이 거론되고 있는데 두 번째 조사단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발표에서는 ‘미군’의 학살만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초기의 발표에서 뒤의 발표로 가면서 학살의 책임이 ‘미군’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남한에서는 월남인들을 중심으로 ‘북괴의 선전’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로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반공항쟁’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들이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저작이 1955년에 출간된 박계주의 『한국전쟁 이면 비사 –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과 1957년에 출간된 조동환의 『항공(抗共)의 불꽃』이 있습니다. 특히 후자는 500쪽을 넘는 분량에 봉기 참여자들의 증언을 대량으로 수록해 ‘북괴의 모략’을 분쇄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선전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조동환의 책에는 앞머리에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張勉)의 義氣衝天 이라는 휘호가 실렸으며 이 밖에도 국방부장관 김용우(金用雨), 검찰총장 정순석(鄭順錫)이 발간사를 적었습니다. 이런 월남민들의 저작들은 학살의 책임을 북한에 전가하고 있지만 우익에 의해서도 약간의 보복학살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70년대 이후의 반공서적들 보다 다소 객관적인 면이 엿보이는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동환에 따르면 좌익에 의한 학살은 천여명 정도 수준으로 신천군 정치보위부에서 90명, 신천 군당방공호에서 100여명, 또 내무서 방공호 근처에서 230여명, 내무서 내에서 20명, 시내에서 3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모를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부터 남한의 대학가에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일단 북한의 주장은 국제민주여성연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라는 국제단체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방식의 비과학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다면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신천학살은 꽤 민감한 떡밥이어서 아직까지도 남측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미군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1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이나 2002년에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가 ‘신천학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미군의 학살 개입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북한은 미국이 학살을 저질렀으며 학살을 지휘한 자는 미군 중위 해리슨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군의 학살을 입증하려면 먼저 이 ‘해리슨’의 실체에 대해 밝혀야 겠지요. 실은 이 ‘해리슨’은 북한의 주장 뿐 아니라 남한의 반공성향 서적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연구소에서 1990년에 펴낸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 편에는 신천에 진주한 미군 지휘관이 ‘해리슨’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북한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증거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해리슨이나 남한의 서적에 등장하는 해리슨은 모두 문서로 확인이 안된, 증언에 기초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MBC의 취재가 밝혀냈듯 재령-신천일대에 진주한 미육군 24보병사단 19보병연대 3대대에는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1950년 9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미 육군 24보병사단 장교명부에 실려있는 19연대 소속의 H로 시작하는 장교들의 이름을 발췌해봅니다.
19보병연대의 H로 시작하는 이름의 장교
휴즈(Irving C. Hughes) 대위
할(Charles E. Hall) 대위
홀더(J. M. Holder) 대위
히슬롭(Kenneth C. Hyslop) 대위
핸들리(Norman C. Handley Jr) 중위
할스태드(Ray H. Halestead) 중위
하우겐(Richard D. Haugen) 중위
허버트(Robert L. Herbert) 중위
힐(James F. Hill) 중위
호넷(John H. Hodnett) 중위
호로니(John A. Horony) 소위
허드슨(George W. Hudson) 소위
헤일(Lindsey W. Hale) 소위
햄릭(Clifford D. Hamric) 소위
물론 미군의 학살을 굳건히 믿는 쪽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는 2002년 5월 호에서 학살을 저지른 미군 ‘해리슨’이 방첩대(CIC)나 헌병대 소속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심증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1950년 10월 미 24보병사단 방첩대와 헌병대에는 ‘해리슨’이란 이름의 장교가 있었느냐? 그럴리가 없죠…
미육군 24보병사단 24방첩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마운트조이(Pearl B. Mountjoy) 소령
쿡(Harvey J. Cook) 대위
매커비(John F. McCabe) 대위
킴(Calvin Kim) 중위
매키(Francis L. Mackey) 상급준위
요네무라(Minoru Yonemura) 상급준위
존슨(Joshep H. Johnson) 준위
이시하라(James H. Ishihara) 준위
스미스(Elmer L. Smith) 준위
미육군 24보병사단 24헌병중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햄릿(Lamar Hamlett) 대위
매닝(James D. Manning) 대위
애버릴(Edward R. Averill) 중위
보이드(Raymond S. Boyd) 중위
리건(Wandle Legan) 중위
풋냄(Harry A. Putnam) 중위
솔라-오티즈(Antonia M. Sola-ortiz) 중위
생각해 보면 오직 증언에 기초해 ‘해리슨’이란 인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최초의 국제조사에서는 ‘해리슨’이란 인물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이후의 조사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조작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입니다.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북한측이 ‘해리슨’의 학살을 목격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김종문과 민선홍은 1950년 당시 각각 11세와 6세였는데 이들이 영어를 다 알아들을 정도로 영어실력이 좋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뭐, 공화국이 당시부터 조기영어교육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만?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실 것 입니다. 그렇다면 재령-신천에 있었던 19연대나 방첩대, 헌병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 입니다.
먼저 재령-신천에서 작전한 19보병연대 3대대의 경우 대대장인 에이어스(Harold B. Ayres) 중령이 10월 7일 야전병원에 후송되어 로건(Edwad O. Logan) 소령이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3대대는 북진을 개시할 당시 재령의 도로교차점을 장악한 뒤 사리원 방향으로 진출, 북상하는 영국군과 접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10월 16일에 이 대대가 북진을 시작할 무렵 북한군의 저항은 와해단계에서 오히려 북한의 빈약한 도로망에 의한 교통정체가 더 큰 장애물일 정도였다고 연대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19연대는 재령에 돌입했고 다음날 까지 재령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19연대의 일지에는 신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언제 신천이 점령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재령은 사리원에서 신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앙에 위치한 교차점이었고 또 월남한 신천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아마도 18일 오후 늦게야 미군은 신천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령-사리원 일대를 장악한 미 19보병연대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진남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3대대에는 후방 경비의 임무가 내려졌고 이 중 L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6전차대대의 전차 몇 대가 재령-신천 일대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0월 20일에 재령 방향으로 북상한 제 5보병연대전투단에 방어구역을 인계했기 때문에 재령일대에는 불과 이틀 정도만 머물렀습니다. 설사 해리슨이 실존인물이라도 학살을 저지르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은 기간이지요. 물론 후속부대인 제 5보병연대도 바로 사단 주력을 따라 북상해서 별다른 건덕지가 없습니다.;;;;;
방첩대의 경우는 좀 더 건덕지가 있긴 합니다. 북진과정에서 24방첩대의 임무는 미군 포로의 수색, 특히 대전에서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행적을 찾는 것과 좌익 간부의 색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첩대의 일지를 보면 좌익 간부 색출은 상당수의 간부들이 줄행랑을 친 덕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방첩대가 좌익 색출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의 협조를 받았다는 점 정도입니다. 헌병대의 경우는 더 심심해서 교통정리와 피난민 통제 말고는 없습니다.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소규모 민간인 살해를 제외하면 미군이 북한의 주장 처럼 수만명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황석영의 손님이 출간 된 뒤 황석영이 신천학살을 내부의 문제로 돌리고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고 비난한 유태영 목사도 정작 자신은 미군이 학살을 저지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지요.
황석영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 처럼 신천 학살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휴전 이후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위해서 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석영의 설명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공식 역사인 조선전사에서는 신천학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천에서의 대중적 학살 만행은 신천 땅을 강점한 미제침략군의 우두머리인 해리슨 놈의 직접적인 지휘 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되었다. 이 살인마는 1950년 10월 17일 미제침략군이 신천을 강점한 첫날에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고 떠벌이면서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 이리하여 신천 땅에서는 일찍이 역사가 알지 못하는 야수적인 대중적학살만행이 감행되었다.
『조선전사 2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30~132쪽
이 서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는 구절입니다. 사실왜곡을 하는 와중에서도 진실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넣어놓았다는 것 이지요. 즉 북한의 논리는 ‘전쟁의 원천 제공자가 미제니까 미제가 다 한 것이 아니냐’인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고립을 유지하는 동안은 이런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올 것 입니다. 그게 언제가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추가(6월 12일 18시 36분)
그러고 보니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구체화 되는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아직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측 문헌을 모두 찾아 본 것은 아니지만 『조선전사 26권』(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신천학살박물관에서 펴낸 신천의 원한을 잊지 말자』(금성청년출판사, 1987), 고상진의 『조선전쟁시기에 감행한 미제의 만행』(사회과학출판사, 1989) 등 1980년대의 문헌에는 학살을 감행한 ‘살인마’의 이름이 ‘해리슨’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 부터인지 ‘해리슨’은 이름이 되었고 그의 성은 '메이든'(Madden)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해리슨’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없어도 ‘메이든’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있었느냐?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요.
역시 19연대 소속의 장교 중 성의 앞 글자가 M으로 시작하는 장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Nedd D. Moore 대령
Thomas M. McGrail 중령
Robert M. Miller 소령
Melecio J. Montesclaros 소령
Sidney M. Mark 대위
Nathan Masin 대위
Robert S. Mason 대위
Samuel T. Minnich 대위
Oliver L. Mcdougell 중위
James M. Mattson 소위
Cosby Mcbeath Jr. 소위
Raymond R. McEachin 소위
William R. Megibren 소위
Sunday, June 8, 2008
신의 은총
Friday, June 6, 2008
요즘 정국에 대한 잡상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그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임 100일만에 10% 중반이라는 사상 초유의 지지율을 기록할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을 것 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머리가 단순한 이 어린양도 심각한 혼란을 느껴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 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재 정국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심도 깊은 분석을 내놓고 있으니 저는 그냥 간단한 제 감상을 적어보려 합니다.
아마도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문제가 처음 언급되었을 때 이 정도로 이명박 정부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판이 엄청나게 커졌지요. 가끔씩 농담 삼아 나오는 ‘이명박 하야’라는 이야기도 요즘은 왠지 그럴싸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수습하기에는 늦은 판국이지만 과연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뒷정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까지 받은 타격으로도 향후 4년간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해 나가는데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뒷정리라도 잘 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저 난감해 보이는군요.
민주당은 예상대로 적극적인 대정부 공세는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쇠고기 수입협상 자체가 FTA 체결에 속한 일부분이니 몇 달 전까지 집권당으로 FTA 홍보에 열을 올리던 민주당은 적극적일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잘해야 제 얼굴에 침 뱉기고 잘못하면 한나당과 덩달아 쪽박을 찰지도 모를일이지요. 생각해 보면 제 1야당으로서 이명박 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해야 할 민주당이지만 과연 그 견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회창옹의 자유선진당은 그야말로 존재감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이명박 다음으로 비참해 보입니다. 애당초 현재의 정국에 자유선진당 같은 보수야당이 끼어들 공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을 공격해봐야 주목을 끄는 것은 민주노동당 아니면 민주당이지요. 창조한국당은 덤으로 존재감이 희미해 졌군요.
이번 총선에서 다행히 원내정당으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된 민노당은 대정부 공세에서 가장 적극적인 정당으로 보입니다만 어차피 집권할 가능성이 없는 정당이니 별로 대단해 보이진 않습니다. 아무리 강기갑이 촛불집회에 나가서 그 고막 찢어지는 목소리로 연설을 해봐야 민노당을 대안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유권자는 많지 않을 것 입니다. 만약 민노당이 17대 국회에서 대안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1%라도 보여줬다면 현재의 상황이 좀 더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민노당은 지난 국회에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만 보여줬을 뿐 입니다.
아마도 가장 난감한 것은 이 어린양이 꼬박꼬박 당비를 바치고 있는 진보신당이 되겠습니다. 네. 정말 제가 생각해도 애당초 정상적인 제도 정치하에서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정당입니다. 아무리 잘해봐야 다음 선거에서 현재 민노당이 차지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도겠지요. 사실 진보신당에 당비를 바치게 된 것은 지난 대선이 끝난 직후 저의 정치적 입장이 마치 “이명준”이 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부지런히 현실에 참여해 볼까 했는데 정작 뭘 해볼까 하니 지지할만한 정당이 없더군요. 만약 민주당이 노뽕 찌꺼기들과 합당하지 않았다면 민주당을 지지해 볼 수 도 있었겠지만. 아마 진보신당 당원이시라면 한 여름의 잠꼬대 같은 진보신당의 안보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회의적이지만)에 대해 잘 아시겠지요. 이런 개념 없는 정당에 당비를 납부하는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계속해서 고민 중입니다. 어쨌건 요즘은 진보신당도 제철 만난 메뚜기처럼 신나게 움직이지만 근본적으로 4년 후에 살아남으려면 지금이라도 없는 돈 쪼개서 정책 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진보세력들은 이번 광우병 정국을 마치 악의 축 한나라당을 무저갱에 처넣을 아마게돈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 표면적인 현상에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는게 가장 시급할 것 입니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은 한국 정치의 극단적인 유동성이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은 이명박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아무 대책없는 진보정당에 맹목적으로 표를 주지는 않겠지요. 개인적으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수준은 대학의 운동권 동아리가 덩치만 커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갈수록 맥이 빠지고 있습니다. 의회 경험을 4년이나 쌓았으면 뭔가 배운 것이 있을 텐데 현재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럽군요.
현실정치는 항상 답답하지만 요즘은 그런 마음이 더 합니다. 날씨만큼이나 우울하군요.
Thursday, June 5, 2008
2차대전 중 미-영 공군 지휘관들의 갈등 문제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군요.
비록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육군, 해군에서 있었던 것 만큼 지휘관들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군이나 해군보다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고위 장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전쟁 이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 연합원정공군(AEAF, 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대장(Air Chief Marshal)은 같은 영국인인 테더(Arthur Tedder)를 싫어했으며 또 자신의 하급자이며 제 2전술항공군(Second British Tactical Air Force) 사령관인 커닝햄(Arthur Coningham)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커닝햄 역시 자신의 상급자인 리-맬러리를 혐오했기 때문에 테더의 역할 중 하나는 커닝햄과 리-맬러리 사이를 중재하는 것 이었다.
1943년 12월 미 전략공군(U. S. Strategic Air Force) 사령관에 임명된 스파츠(Carl Spaatz) 중장역시 리-맬러리와 사이가 나빴으며 그는 전술공군 출신이 자신의 전략 공군부대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점은 당시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사령관이었던 해리스(Arthur Harris) 대장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폭격기부대를 마치 자신의 “영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제 8공군 사령관 둘리틀(James Doolittle) 중장도 제 8공군 예하의 전투기부대를 폭격기 호위 대신 전술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들이 의견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협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또한 공군과 육군 지휘관들간의 관계도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력이 뛰어난 아이젠하워 조차도 리-맬러리의 성질은 견뎌내질 못 했으며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젠하워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이었던 비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중장에 따르면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를 제외하면 아이젠하워의 인내심을 바닥낼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인물은 리-맬러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제 1군사령관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제 9공군 사령관 브레러튼(Lewis Brereton) 소장이나 제 9전술항공군 사령관 퀘사다(Elwood Quesada) 소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괴팍한 제 21집단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던 커닝햄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실제로, 몽고메리는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자신의 사령부 건물을 커닝햄과 같은 곳이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브룩(Alan Brook) 원수가 몽고메리를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갈 것을 자청할 정도였다. 결국 몽고메리와 커닝햄이 서로 이웃한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1944년 9월이 되어서 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해소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휘관들간의 관계는 연합군 공군의 조직력이 평균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보인 원인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D-데이가 있기 수 개월 전에 영국측은 미군이 자신들의 전략 폭격기 부대를 영국군의 통제하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영국군 내부에서도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를 전술 공군적 사고방식을 가진 리-맬러리의 휘하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반하는 이상한 절충이 이뤄졌다. 리-맬러리는 명목상 원정공군 사령관이었지만 전략 폭격기 부대와 예하 전투기 부대는 (실제로는 해리스와 스파츠가 지휘했지만) 형식상 공군참모총장(Chief of the Air Staff)인 포탈(Charles Portal)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4월 14일(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빨랐다)에 오버로드 작전에 투입되는 모든 공군부대는 전구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전략공군 부대의 운용은 아이젠하워의 공군 대리인 테더가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는 스파츠와 해리스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전술공군만이 사령관인 리-맬러리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절충안은 지휘관들간의 분란을 막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존재했다. 고위 지휘관들의 아래 단계에서, 즉 영국과 미국의 전술 지휘관들의 관계는 대개 좋았다. 83 Group 사령관인 브로더스트(Harry Broadhurst) 소장(Air Vice Marshall)은 미국측의 퀘사다와 사이가 좋았으며 퀘사다는 커닝햄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 – 테더, 커닝햄, 브레러튼, 스파츠, 해리스 – 은 항공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거의 매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보통 오전 11시에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그 전날 있었던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날 작전의 지침을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오버로드 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간의 관계와 항공 전역의 지휘 체계는 연합군이 성공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Alan Wilt, 「The Air Campaign」, 『D-Day 1944』,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35~139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
뉴라이트 대안 역사교과서...
오늘 서울 YWCA회관에서 있었던 『뉴라이트의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라는 학술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자극적인 떡밥이어서 그런지 참석자도 많고 꽤 재미있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시끄럽던 물건이어서 나름대로 관심은 많았는데 결국은 한번도 읽지 못한 채 세미나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물론 언론에서 이 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해 한 번 보도를 해 줬기 때문에 대략 어떤 물건인지 감은 잡고 갔습니다만...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40여곳 사실관계 틀려”
막상 직접 가서 세미나의 발표 내용과 발표문에서 인용한 교과서의 내용을 보니 이건 언론에서 대략적으로 접한 것 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습니다. "역사 교과서"가 기초적인 사실관계 조차 줄줄이 틀려먹다니! 개설서만 들춰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문제에서는 사료 해석도 틀려먹었다는 난감한 지적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하더군요. 이런 기초가 부실한 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있지는 않겠지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가 열심히 홍보해 준 덕분에 대안교과서를 출판한 회사는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고 하는데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싶습니다.
두 번째 발표에서 잠깐 졸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토론회였습니다. 물론 발표자들은 모두 뉴라이트와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진 분들이었지만 발표 내용은 뉴라이트 교과서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지적에 한정되어 정치적으로도 최대한 공정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오늘 참석자들에게는 말 많았던 후소샤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한국어판이 "무료"로 배부되었습니다.
Wednesday, June 4, 2008
우리 제국주의자 맞아!
미국 대사가 한국인의 낮은 과학상식에 대해 질타한 언론보도를 보노라니 60년전 한 미국 장군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나는 우리가 미국에서 이룩한 높은 생활 수준을 지속해 나가길 원하는 제국주의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미국이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들에게 이익을 주어 왔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높은 생활수준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제국주의국가였다. 우리 미국의 제국주의는 결코 나쁜 제국주의가 아니다.
I'm enough of an imperialist to want to preserve the standards of living we've achieved in the U.S. and I firmly believe that we have benefited the nations into which we have extended our influence. All nations with high standard of living have been imperialist. Our imperialism hasn't been a bad imperialism
- Lt. Gen. John R. Hodge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정말 대인배들입니다.
슈투카에 대한 오해
바로 아랫글에서 코럼 이야기를 다룬 김에 독일공군에 대한 오해 하나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진실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사실들이 입에서 입을 거쳐 전해지면서 마지막으로는 더 이상한 형태로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모든 분야에 걸쳐 골고루 나타나는데 군사사도 예외는 아닐 것 입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독일공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 독일공군과 관련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 중의 하나는 슈투카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슈투카에 대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바로 괴링의 측근이었던 우데트(Ernst Udet)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헬다이버가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먼저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해서 커티스 헬다이버를 구입한 것은 1934년의 일인데 Ju-87의 개발은 1933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Ju-87은 독일군이 개발한 첫 번째 급강하 폭격기도 아니었고 급강하 폭격에 대한 개념이나 교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했을 무렵에는 He-50이 급강하폭격기로 잘~ 사용되고 있었지요. Ju-87은 독일공군의 첫번째 급강하폭격기가 아니라 공군의 교리에 맞는 첫번째 ‘중’급강하폭격기 였습니다.
그리고 교리나 군사사상에서 보면 육군복무규정 300에는 따로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내용이 있지요. 일반적으로 무기의 개발은 먼저 작전개념과 교리가 확립되면 그에 맞춰 이뤄지는 것이니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미국이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 처럼 인식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데트가 기종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공군 기술국장에 임명된 것은 1936년입니다!
그럼 슈투카의 개발에 있어서 우데트의 역할은 무엇이냐?
좀 심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데트는 그냥 급강하 폭격기 빠돌이 정도 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데트가 활약(???)한 것은 1936년 이후 여러 항공기의 개발에 관여하면서 많은 계획들을 파탄(???)에 가깝게 몰아넣은 것이 되겠습니다. 우데트가 급강하 폭격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Ju-88, He-177, Me-210 등 독일공군의 차기 주력기종에 모조리 급강하 폭격 능력을 넣으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죠. Ju-88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으나 He-177은 급강하 폭격을 가능하게 하려다가 개발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결론을 말하면 우데트가 Ju-87 슈투카의 개발에 대해 그다지 큰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 했습니다. 물론 우데트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호크는 J u-87의 개발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긴 했지만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코럼이 1997년에 출간한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에 간략히 소개한 바 있고 예전에 제가 날림으로 번역했던 코럼의 글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에도 역시 관련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Tuesday, June 3, 2008
기대되는 책 -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간만에 캔자스 주립대 출판부에 들어갔는데 꽤 흥미로운 연구서 한권을 봤습니다..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저자인 코럼은 1997년에 출간된 The Luftwaffe: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에서 리히토펜의 일기를 주요한 사료로 독일공군의 형성과정을 탁월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코럼은 영미권 중심의 항공전 이론으로 독일공군의 교리를 폄하하는 영미권의 군사학계에 매우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하고 있으며 독일측 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될 리히토펜 평전은 그 점에 매우 기대가 되는 바 입니다. 출간예정일도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라 더욱 더 기대되는 군요.
Sunday, June 1, 2008
[妄想大百科事典] 이명박
[妄想大百科事典] 이명박
정치권이 개발한 대국민용 심리전 기동 병기. 나토 코드명 2MB.
2008년 2월 첫 실전 배치 당시 노뽕의 단순 개량형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노뽕과는 급이 다른 신형 병기로 판명되어 각국의 정보기관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고 있음.
1992년 민주자유 설계국에 의해 첫 시제품이 만들어졌으며 1998년까지 여의도 실험장에서 대 언론전술을 포함한 광범위한 테스트를 거쳤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 설계국이 제시한 김민석을 누르고 시장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서울시 봉헌 발언 등 상상을 초월한 헛소리로 그 성능을 입증하면서 각국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7년 12월, 민주 설계국과 열린우리 설계국이 통합된 통합 설계국이 제시한 정동영을 제치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채용되었다. 실전배치 당시 노뽕의 단순 개량형으로 파악하여 별도의 코드가 부여되지 않았으나 이후 신개념의 심리전 병기임이 밝혀지면서 나토가 새로이 2MB라는 식별코드를 부여했다. 대통령 채용 이후 대운하, 쇠고기 수입협상 등 여러 분야에서 국민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며 그 위력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취임 100일도 안되어 지지율이 20%대로 급강하 한 것은 역대 신기록으로 알려져있다.
식별 포인트는 평균적인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의 99%가 비호감을 표명하는 외모에 있으며 가동시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낸다. 삽부터 포크레인, 불도저 까지 다양한 중장비와 연계한 네트워크 운용이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