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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일 금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전석담의 논문

며칠 전에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나 했는데 나츠메님이 참고문헌에 대해서 물어 보셨습니다. 사실 네이버 블로그를 포함해서 4년 정도 블로그질을 하다 보니 재탕 또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게 되고 그래서 가끔 참고서적을 빼고 글을 쓸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 들이라면 어떤 글은 어디서 베낀 것인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죠.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무의식적으로 참고문헌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어쨌건 나츠메님에게 대략 답글 형식으로 간단하게 답변을 드렸는데 그러다가 중요한 논문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바로 전석담이 쓴 「조선로동당의 령도하에 전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인민이 달성한 성과와 그 의의」라는 논문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석담은 1940년대 조선에서는 꽤 유명했던 경제사학자 였습니다. 당연히 월북했고 월북한 뒤에도 꽤 잘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석담이 1960년에 력사논문집 제4집을 통해 발표한 이 논문은 전후복구기의 북한 경제에 대해서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입니다. 일단 이 시기의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남한 등 북한 외부의 연구자들은 북한의 1차 자료를 거의 활용할 수 없으니 2차 자료 중에서 신뢰도가 높은 것을 인용할 수 밖에 없지요. 일단 전석담의 이 논문은 발표 시기도 이르고 또 저자의 이름값도 있고 해서 꽤 많이 인용됩니다. 제가 자주 참고하는 김연철의 북한의 산업화의 경제정책 같은 경우도 전후 복구기의 북한 경제통계에 대해서는 전석담의 논문을 많이 인용하고 있지요. 물론 전석담의 논문은 선전 목적이 강해서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나 잔뜩 실려 있을 뿐 전후복구기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기에는 한참 부족한 글 입니다. 뭐,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백 배 낫죠. 하여튼 전석담의 논문은 1950년대 후반 북한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꽤 중요한 논문입니다. 글에 있는 내용을 비판적으로 봐야 하지만 북한의 전후복구기의 실상을 살펴보는데 있어 꽤 중요한 글 입니다.

참고로, 전석담의 이 논문이 실린 력사논문집 제 4집은 1960년에 출간됐는데 이 논문집은 전후복구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선전 목적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석담의 논문외에 함께 실려 있는 논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덕호, 「우리나라에서 집단적 혁신 운동의 발생 발전」
리국순,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이 걸어온 승리의 길」 – 이 논문은 일제시기부터 전후복구기까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꽤 읽을만 합니다.
엄창동, 「제1호 용광로와 해탄로의 복구 개건을 위한 황해제철소 로동자들의 투쟁」
리상준, 「조선로동당의 농업 협동화 정책과 평남도에서의 그의 승리적 실현」

이 논문들은 모두 선전목적이 강해 수령님 보시기에 좋은 내용만 가득하지만 어쨌든 이 시기 북한의 경제정책과 산업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됩니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로 러시아나 동유럽의 자료를 활용해 이 시기의 북한을 다룬 연구들이 가끔 나오고 있으니 이런 연구들을 참고해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더 좋을 것 입니다.

이 논문집은 국회도서관의 독도자료실에 비치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한번 읽어 보십시오.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 목록을 보다 보니

어제 한겨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더군요. 벌써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좀 늦게 봤습니다.

군, 대학교재·베스트셀러도 “불온서적”

불온서적 목록에 오른 서적 상당수는 왜 올라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 들입니다. 그런데 리스트를 보니 낯익은 물건들이 몇 개 있군요.

바로 도서출판615에서 나온 『북한의 미사일 전략』과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입니다.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두 책은 책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쓰레기 들이죠. 불온서적이라고 보다는 불량서적이 적절할 듯 싶습니다. 도서출판 615의 찌질한 행각에 대해서는 예전에 포스팅 한게 있습니다.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2)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그런데 한겨레의 보도 이후 불온서적 목록에 올라간 다른 책들이 잘 팔린다는데 거기에 편승해 도서출판 615의 저 쓰레기들도 다시 출간될까 두렵습니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에 올랐다고 해서 모든 책이 억울한 것은 아니니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을 읽는 분들은 없으시길 빕니다.

2008년 7월 29일 화요일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

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2008년 7월 20일 일요일

수령님의 꿈도 가끔은 이뤄진다

지금은 미라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괴상한 관광상품이 되신 수령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많은 꿈을 꾸셨습니다. 수령님은 북조선 인민들이 모두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날을 꿈 꾸셨으며 북조선 전체를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을 꿈꾸셨습니다.

물론 이건 꿈으로만 그쳤고 실현된건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꿈 꾼 것 중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에 한번 내용을 소개했었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라는 책의 51쪽에는 수령님께서 기계공업을 육성해 미래에는 각국에 Made in DPRK 로고가 새겨진 기계를 수출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은 실현되었으니...


정밀기계인 미사일은 북조선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2008년 4월 30일 수요일

장군님의 감자혁명!

북조선의 력사과학 2003년 1호에는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라는 글이 하나 실렸습니다. 이 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0년대부터 감자 생산량 증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큰 성과를 거뒀다는 내용인데… 그 감자혁명의 시발점은 1998년이라고 합니다.

오늘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비약이 나래치고 있는 내 나라, 내 조국땅우에 감자농사혁명의 새 력사가 펼쳐졌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지펴 주신 감자농사혁명의 불길은 온 나라 협동벌의 이르는 곳 마다에서 더욱 세차게 타 번지고 있다.
우리 인민의 식량문제해결에서 커다란 전환을 안아 오고 있는 감자농사혁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원대한 구상과 선견지명, 빛나는 예지와 현명한 령도속에 펼쳐 지게되었다.
1990년대 후반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를 잘 하는 것을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보시고 감자농사혁명의 새로운 구상을 펼치시였으며 대흥단군을 현지지도하시면서 감자농사혁명의 장엄한 포성을 울리시였다.
주체 87(1998)년 10월 1일 선군혁명령도의 바쁘신 속에서도 머나먼 북방의 대흥단벌에까지 찾아 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킬데 대하여>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켜 먹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우리 당이 내놓은 중요한 방침입니다. 우리 당은 농업생산을 추켜 세우기 위하여 감자농사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후략)

림영환,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 『력사과학』, 2003년 1호

장군님의 력사적인 담화의 결과 북한의 감자 생산량은 1998년 헥타르 당 10.58톤에서 1999년 헥타르 당 7.88톤으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2008년 3월 13일 목요일

세계에 우뚝선 개그강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직전 북조선의 사회과학잡지(?) 력사과학에 이런 글이 실렸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새 사회 건설에 시종일관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하여 끊임없는 방조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쁠럭 불가담 나라들과 발전도상나라들, 특히 아프리카 나라들이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고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이 나라들과의 협조를 강화할 것 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중요한 대외경제협조방침의 하나로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아프리카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를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강화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나라들이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의 빛발아래 농업발전에서 이룩한 우리 나라의 성과와 경험을 따라 배울 수 있게 하시였다.

(중략 – 위대한 수령님이 어쩌고 저쩌고, 지도자 동지가 이러쿵 저러쿵)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크나큰 배려와 깊은 관심속에 1980년대 중엽까지만 하여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남남협조의 정신에서 아프리카 나라들을 비롯한 22개의 발전도상 나라들에 30여개의 공장을 건설하여주고 20여개 나라들에 관개공사를 하여 주었으며 50여개 나라에 5,000여명의 기술자,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새 사회건설을 성의 껏 도와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아프리카 나라들의 튼튼한 농업생산 토대를 마련해 주기 위한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성심성의로 되는 적극적인 협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식량문제를 자체로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남남협조를 확대발전시켜나가는데서 선구자적 모범으로 되고 있다.

림춘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진행된 아프리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력사과학』1995년 제1호(153호), 13~16쪽

이 논문이 쓰여진 1995년은 이미 북한의 농업이 파탄에 이르러 쌀 수요량 중 200만톤이 부족한 실정이었고 대규모 수해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결국 같은 해 8월에는 공개적으로 전세계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1999년까지 고난의 행군과 함께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다고 하지요.

인민들이 굶어죽어가는 마당에 아프리카에 농업원조를 해 줬다고 거들먹 대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 글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읽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제 3세계 인민들을 바라보는 스탈린의 시각

전세계 근로인민의 보호자이며 스승이신 강철의 대원수께서 극동 소국의 정치인 두 명을 친히 접견하고 가르침을 주셨을 때의 일화라는군요…

(전략)

더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좌익진영 내부의 분파투쟁은 격화되었다. 반대파는 사람들에게 좌익진영의 지도층, 그 중에서도 먼저 박헌영의 명성을 실추시키기 위한 성명서와 격문, 팜플렛을 뿌렸다. 공산당과 인민당 그리고 신민당을 통합시킨다는 노선은 반대파 집단의 각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들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전후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반대파의 문건을 분석해 볼 때 통합에 대한 반대파의 저항은 원칙적인 동기가 아니라 대단히 개인적인 야심적인 동기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동기들의 한 가지 논거 즉 그러한 통합지시가 외부에서, 스탈린에게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나는 남편(필자인 샤브시나 꿀리꼬바의)의 얘기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1946년 7월 남편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위원장이었던 Т. Ф. 스찌꼬프로부터 얼마 동안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 있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끄바로 날아갔다. 남편이 배석한 회담석상에서 여러가지 것이 논의되었다. 스탈린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고압적인 것 같았고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는 듯 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스탈린에게서 비공개적으로 이 회담에 대해 전해들은 남편과 우리가 놀란 것은, 좌익정당들의 통합에 관한 부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혹은 노동당을 표방하면서 가까운 장래의 과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아마도 그런 문제에 준비를 못한 듯한 조선의 동지들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무심코 말했다.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우리가 이 문구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본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록이 정확하게 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남편에게 캐물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였다. 인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무시도, 비록 우리와 가까운 나라라 할 지라도 엄연히 다른 나라의 내부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특징적인 것인가!

(후략)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인물 회고 :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185~186쪽

강철의 대원수에게 조선의 인민들은 장기의 졸에 붙은 먼지 한 조각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10월 14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2)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위의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도데체 이 출판사의 책이 어느정도 수준이냐? 하는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에 귀한 돈을 낭비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샘플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과학 기술 수준이 그렇게 높고 훌륭하다면 왜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서구 사회의 일반적 수준보다 낮은 것일까?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과학 기술과 소비 생활의 현격한 격차. 독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낮은 것은 바로 미국의 각종 제재조치와 경제봉쇄 때문이다.

(중략)

일부 독자들은 북한의 과학 기술이 그렇게 우수하다면 기술의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면 경제난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난을 해결한답시고 과학 기술을 수출할 경우 미국은 주변국의 전력을 탐색하듯이 북한의 사정에 통달하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다. 만약 백두산 1호, 백두산 2호의 정보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미국은 이에 대한 방어 기술을 실제로 개발할 지도 모른다.

이 경우 북한으로서는 지금까지 유지하였던 군사적 우위를 한 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다.

전영호, 최한욱,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도서출판 615, 2006 pp.115~117

시리아 관련 소식

뉴욕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Analysts Find Israel Struck a Nuclear Project Inside Syria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번 건으로 승상께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신듯 보입니다.

Behind closed doors, however, Vice President Dick Cheney and other hawkish members of the administration have made the case that the same intelligence that prompted Israel to attack should lead the United States to reconsider delicate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over ending its nuclear program, as well as America’s diplomatic strategy toward Syria, which has been invited to join Middle East peace talks in Annapolis, Md., next month.

Mr. Cheney in particular, officials say, has also cited the indications that North Korea aided Syria to question the Bush administration’s agreement to supply the North with large amounts of fuel oil. During Mr. Bush’s first term, Mr. Cheney was among the advocates of a strategy to squeeze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n hopes that it would collapse, and the administration cut off oil shipments set up under an agreement between North Korea and the Clinton administration, saying the North had cheated on that accord.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S대인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부작용도 있는 법.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던 저능아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입어 양지로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21세기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저능아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의 한 가운데 바로 도서출판 615라는 괴이한 출판사가 있습니다.(이 출판사는 홈페이지가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 제가 본 것은 아래의 세 종류입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 전영호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선군정치와 북한경제 – 전영호

핵과 한반도 – 최한욱

특히 전영호가 쓴 두 권의 책은 ZRYB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 적은 종이낭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에서는 북한의 과학기술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봉쇄만 풀리면 두자리 수의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라던가 북한의 교육 제도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데 남한의 그것은 입시위주의 저급한 교육이라던가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그냥 실려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또한 황당하기로는 감히 대적할 책이 마땅치 않은 쓰레기입니다. 대포동이 미사일이라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모략이며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이은 세계 4대 우주기술 강국(!!!!) 이라는 헛소리를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놓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런 책이 팔리긴 팔리는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은 교보에서는 무려 품절(!!!!) 이라는군요.
‘핵과 한반도’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해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이 당당히 굴러다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방적이고 열린 사회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쓰레기들 때문에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1970년대 남북한의 2차대전사 인식 - 아주 단적인 예 하나

꽤 많은 분들이 김일성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나 폐쇄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급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개인적으로는 개방성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오십 보 백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사소한 예 하나.

노르망디 작전

제2차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프랑스의 서북쪽 노르망디에서 진행한 미영제국주의 련합군의 상륙작전.

6월 6일부터 7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쏘련과의 국제협약에 의하여 1942년에 구라파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제2전선의 형성을 2년동안 태공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키며 쏘련의 약화를 기도하였다.

쏘련군대가 능히 단독으로 파쏘독일을 쳐부시고 구라파인민들을 파쑈독일의 기반으로부터 해방시킬수 있게 된 1944년에 이르러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전후 구라파에서의 제놈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작전을 조직하였다. 당시 파쑈독일은 쏘독전선에 기본력량을 투입한 관계로 프랑스 북부 연안지대방어에는 한 개 집단군만이 동원되였고 상륙지대에는 다만 3개 보병사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쏘독전선에서 쏘련군대의 결정적인 진출과 프랑스에서의 항쟁운동의 강화, 독일무력의 상대적인 약화는 미영제국주의군대로 하여금 이 작전을 비교적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구라파에서의 반파쑈전쟁행정에서 그 어떤 본질적인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력사사전, 1971년판, 상권 433쪽

왜곡으로 가득찬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력사사전 1971년 판에는 독소전쟁 관련 전투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만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반면 김일성의 빨치산 전쟁은 전투라고 할 수 없는 보천보전투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북조선과 비교하면 게임 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이 고작 이 정도의 저급한 역사 인식만 가지고 있던 반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는 비록 미국을 거쳐 들어온 것일 망정 소련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서적들이 합법적으로 유통이 되고 있었거든요.

1973년에 출간된 발렌타인 2차대전사 시리즈, 즉 승리와 패배의 6권 스탈린그라드와 11권 쿠르스크는 미국인 저자인 제프리 쥬크스가 썼지만 기본적인 서술은 소련의 공식 역사서술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쿠르스크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 공간사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지요.

박정희가 독재자인 것은 맞지만 김일성 정권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소한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생각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있었지만 북조선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게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모든 출판물을 통제하는 국가와 제약은 있을 망정 출판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2007년 8월 29일 수요일

나는 통일 정치쇼의 들러리였다 - 권오홍

가끔가다가 한심한 제목을 달았지만 내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통일정치쇼의 들러리였다」역시 제목은 매우 한심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인 책입니다. 출판사도 동아일보사이기 때문에 보수 언론을 혐오하시는 분들은 편견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목과 출판사만 보고 읽지 않기에는 아까운 책 입니다.

(약력만 가지고 판단하면) 책의 저자인 권오홍씨는 대북사업에 초창기부터 관여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장 전문가의 눈으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자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특히 지난 2006년의 핵위기부터 이해찬 총리의 방북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있었던 북한과의 협상과정을 회고하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양측(주로 한국정부)의 과오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책 초반에 나오는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물러난 사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자는 북한측의 평가를 빌어 이종석 장관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이종석이란 한 인물을 두고 나온 평가는 여러 갈래다. 결론은 “그는 학자(아마추어)다”라는 말이다. 그쪽 식으로 볼 때는 “꾼”이 아닌 사람이 처리하기에는 남북한 양자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능을 보였다. 그러나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39쪽)

이종석 전통일부장관이 현실감각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그 동안 간간히 나오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품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니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안희정으로 대표되는 대통령 심복들의 능력 부족과 무지함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 정부의 실세들이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의욕 과잉으로 일만 벌이는 통에 대북정책이 엉망으로 표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화영의원(현 민주신당)에 대한 비난은 굉장히 신랄합니다.

결국 안희정이나 이화영, 이호철을 통해서 본 그들의 세계관, 시대관, 한반도관, 나아가 처세하는 방식은 과거의 정치인보다 더 몹쓸 여지가 많다는 게 개인적 결론이다.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난 몇 년 동안 국가 정책의 저변에 흐른 게 아니었나 싶어 마음 한 편이 씁슬하다.(279쪽)

이 책에서는 정치 흥행을 목표로 한 기존의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냉철하게 계산된 경제중심의 협력만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회고록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매우 많아 충분히 읽을 만 한 책 입니다. 물론 노빠 같은 부류들은 동아일보사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을 불신할게 뻔하긴 합니다만.

저자는 앞으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상당히 기대가 되는 책 입니다.

2007년 3월 3일 토요일

북한이 외교에 강한 이유!

다나카와 엑스의 논의는 진전 없이 반복됐고 시간만 하릴 없이 흘러갔다.

"당신은 경질되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엑스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후나바시 요이치, 김정일 최후의 도박 : 북한 핵실험 막전막후 풀 스토리,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41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북한 외교가 강한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2007년 2월 28일 수요일

오늘의 농담

어떤 "인터넷 신문"에서...

통일만 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살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영원히 이 땅에서 전쟁은 사라진다.

통일만 되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우리민족이 막아낼 수도 있다.

통일만 되면 일제와 서양세력들에게 빼앗긴 문화재도 되찾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국을 이룰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착하디착한 우리 민족의 인정 많은 성품과 고상한 문화, 그리고 강인한 기상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아름답게 물들일 수가 있다.

나머지 부분은 여기로...

망상하는 꼬라지 하고는....

2007년 1월 4일 목요일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오늘자 중앙일보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북한 파워 그룹 대해부 <상> 권력 지도가 바뀌었다


권력서열에서 인민군의 약진이 두드러 지고 있다는 내용이군요. 인민군 고위 간부들은 노동당원을 겸하고 있으니 당내 서열도 당연히 높아졌겠지요. 아주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50-60년대에 군대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군 간부들을 두들겼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선군정치 타령을 줄기차게 해 대더니만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스탈린 동무의 경우 군대의 목소리가 커질 것 같으면 적절한 선에서 손을 봐 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였던 투하체프스키가 골로 간 것이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건방을 떨던 주코프가 좌천된 것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북한은 90년대 중반 지방당 조직이 붕괴된 이후 군대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어 군대의 목소리가 계속 커지더라도 이들을 손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드는군요.

두 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유학파가 줄어들고 김일성 대학 출신이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만경대 학원 출신이 조금 늘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보면 국내파로 권력 핵심부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별로 개혁 개방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요.

2007년에는 대선도 있는데 과연 저 양반들이 어떤 대남정책을 펼칠지 별로 즐겁지 않은 호기심이 당깁니다.

2006년 12월 2일 토요일

수령님 어록

오늘날 공화국 북반부를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후진지역으로 이끄시고 사상적으로는 신정일치 고대국가로 변화시키신 경애해 마지 않는 수령님께서는 말바꾸기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치신 바 있다.

장군님 어록

수령님께서 1968년에 말씀 하시길.

사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당안의 형편만 보아도 『박헌영파』요 『오지섭파』요, 『연안파』요, 『이르꾸쯔파』요 뭐요 하는 숱한 어중이 떠중이들이 있었는데 그 자들은 제가끔 상전을 등에 업고 그에 아부굴종하면서 자기파들끼리 한 자리 해 먹자고 날뛰었습니다.

근로단체들의 역할을 높일 데 대하여, 1968년 10월 11일, 김일성 저작집 23, 이종석, 북한로동당연구, p159에서 재인용


그리고 1948년 말씀에는…

경애하는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 북조선에 남아 있는 쏘베트군대의 철거에 대하여 쏘베트정부가 채택한 결정에 관한 보고를 듣고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전 조선 인민의 이름으로써 각하와 또는 각하를 통하여 위대한 전 쏘베트인민에게 나의 무한한 경애와 감사에 넘치는 뜨거운 충정을 표하는 바 입니다.

(중략)

앞으로도 위대한 쏘베트련맹과 친히 당신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께서는 우리가 민족적 및 자주적 권리를 수호함에 있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발전강화함에 있어 지지와 원조를 하여 주실 것을 우리 인민은 믿어 마지 않습니다.

(중략)

조선 인민의 가장 친근한 벗이며 해방자이신 쓰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이 1948년 9월 22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김일성선집 권 2, 1954, p277, 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p99~100에서 재인용


수령님께서는 건망증이 심하셨던 것 같다. 낄낄낄.

2006년 11월 14일 화요일

북한의 아리랑 공연으로 만든 gif 애니메이션

예전에 어떤 친구가 북한의 아리랑 공연의 수준은 좀 버벅거리는 gif 애니메이션 수준이라고 평한바 있는데 어떤 유쾌한 서양인이 정말로 이걸 가지고 gif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과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래, 다 좋으니 당신들 꼴리는 대로 사시구려. 우리는 귀찮게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