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6일 월요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 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물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약간 불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쟁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식민지시기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 진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구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 와 아베 게이지(安部桂司)는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로 인한 유산이 그대로 북한에 남겨져 1953년 이후까지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식민지시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북한 지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의 공업화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호리 가즈오(堀和生)의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같이 재미있게 잘 씌여진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와 아베는 북한지역의 공업화를 설명하면서 거시적인 공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각 기업체와 공장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언제 어느 지역에 어떤 투자를 해서 무엇을 생산했는가. 저자들은 본문에서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1945년 이전 북한 지역의 일본 기업활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 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개별 기업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1945~50년 시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저자들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소련 점령군과 북한인들이 일본 기업을 인수해 산업을 복구하는 과정과 1950~51년 사이에 기초적인 군수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저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유산과의 단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상당수의 기업들이 혼란기에 파괴를 면하고 그대로 북한의 공업 기반이 되었음을 개별 공장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렇게 북한에 승계된 공업기반이 북한의 전쟁 준비에 동원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저자들은 일본이 남긴 공업화의 유산이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증명함으로서 북한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식민지 유산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식민지의 유산이 1953년 이후의 공업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유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부록에서 해방이전 일본이 건설한 공장들이 오늘날 북한의 어떤 공장으로 승계되었는가를 정리한 표를 실어 놓았지만 이것 이외에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서술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공업이 해방 이후의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2009년 3월 11일 수요일

뒤늦게 도착한 책 한 권

작년 연말 환율이 잠시 낮아졌을 때 책을 몇 권 질렀었는데 그 중 마지막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1943~44년 독일군이 동부전선 남부에서 수행한 퇴각전을 다룬 롤프 힌체(Rolf Hinze)의 저작입니다. 살인적인 유로 환율 때문에 독일에서 나온 책을 몇달간 구입하지 못 했는데 마침 적당한 가격에 나와있기에 바로 질렀습니다.;;;;

책 가격도 적당하고 덤으로 괜찮은 책갈피도 하나 넣어 주더군요. 마음에 들었습니다.


롤프 힌체는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동부전선 방어전에 대한 저작들로 유명합니다. 이 양반이 저술한 동부전선의 작전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바그라티온 작전 초기 중부집단군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루는 시기는 작전의 시작 부터 민스크가 함락되는 때 까지 입니다.

Das Ostfront-Drama 1944 : Rückzugskampfe Heeresgruppe Mitte
위의 책의 후속편 격입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중부집단군의 퇴각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스크가 함락된 직후 부터 1944년 가을 독일군이 감행한 국지적인 반격작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East Front Drama 1944: The Withdrawal Battle of Army Group Center라는 제목으로 영어판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 1943-44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책 입니다. 소련군의 드네프르 돌파 부터 크림 반도 탈환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Mit dem Mut der Verzweiflung: Das Schicksal der Heeresgruppen Nord- und Südukraine, Süd-/Ostmark 1944/1945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Das Ostfront Drama와 함께 44년 소련군의 대규모 하계공세에 붕괴되어 가는 동부전선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시간적인 범위는 넓은데 소련군의 하계공세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이 붕괴되는 시기 부터 독일군이 1945년 봄 헝가리에서 감행한 반격이 실패하면서 본토로 향해 퇴각하는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 Kämpfe der Heeresgruppe Nordukraine/A/Mitte
서술의 밀도가 다섯 권 중 가장 떨어집니다. To the Bitter End: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North Ukraine, A, Centre, Eastern Front, 1944-45라는 제목으로 영어판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1944~45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 즉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방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저작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다룬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Das Ostfront Drama 두 권 입니다. 물론 롤프 힌체의 저작 답게 딱딱하고 밋밋한 문장으로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두 권의 책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된 이후 초가을 무렵 폴란드에서 전선이 안정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서술의 밀도가 대단히 치밀합니다. 특히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는 소련군의 공세 시작부터 민스크가 함락되는 짧은 시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대공세를 맞은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어지간한 소설 못지 않은 긴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도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를 다루고 있으니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3월 8일 일요일

할로스캔이 맛이 갔습니다;;;;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구글 블로거가 트랙백 기능을 제공하지 않아서 할로스캔을 달아놓고 쓰고 있습니다. 한글 지원기능이 개차반이긴 해도 트랙백은 할 수 있으니 나름 만족하고 살았습니다만...

그런데 요즘 할로스캔이 말썽입니다. 오늘도 댓글을 달았는데 제가 달아 놓은 댓글이 먼저 올라온 댓글의 앞에 달리는 겁니다;;;;

물론 달아놓은 댓글이 날아가는 것 같은 심각한 문제는 아닌데 좀 황당하긴 합니다;;;; 사용한지 한참 지나서 할로스캔을 안 쓸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 저래 난감합니다.

100만대의 비행기

1차대전에서 유례가 없던 대규모 소모전을 경험한 뒤 각국의 군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업동원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공업력으로 고생을 한 러시아의 후계자, 소련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에버스타트는 비상 조직에서의 보좌역이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지만 전시동원의 진행은 곧 그의 코포라티즘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해 포레스탈(James Forrestal)과 토론하곤 했다. 포레스탈은 에버스타트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명확한 코포라티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초기부터 부분적인 전시동원을 통해 미국의 생산력을 재조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력과 자본, 정부조직과 산업계, 납세자와 관료기구들을 국가적 노력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잘 조직된 계획만 있다면 미국은 1년에 50만대에서 100만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레스탈에게 이러한 생산을 통해 ‘적들에게 극도의 경각심을 주고’ 대공황으로 산산조각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Jeffery M. Dorwart, Eberstadt and Forrestal : A National Security Partnership 1909~1949,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1, pp.39~40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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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

2009년 3월 5일 목요일

굳건한 한미공조체제

오바마 "지금이 미국 주식 살때" 발언후 증시 하락 '망신'

굳건한 한미공조체제가 미국 국내정치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God Bless America!

2009년 3월 3일 화요일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오래된 떡밥이라 많은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타임라프 2차대전사에 대한 잡상

게르니카에 대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오랜만에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새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2차대전과 관련해서 관심있는 책들을 조금씩 사서 읽다 보니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 전집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을 다시 읽을 일은 없을 듯 해서 적당한 시기에 처분을 할 까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당분간은 계속 가지고 있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론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건의 맥락을 잘 잡아내고 있고 작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개설서로서 아주 모범적인 글쓰기 방식인 것 같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새로울 것이 없더라도 글쓰는 방식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배울 만한 점이 많더군요.

역시 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관심도 두지 않고 있던 책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을 줄이야.

2009년 2월 27일 금요일

환율

환율 1,530원대로…11년만에 최고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는데 별로 기쁘진 않다.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왜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eedman)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도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심심할 때 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오는 국가인 만큼 핵전략에 대한 의문도 많을 법 한데 의외로 ‘핵전략’에 대한 관련 서적 찾아 보기가 어렵더군요.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서적들은 많지만 순수하게 ‘핵전략’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서적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물론 도서출판615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제외하고) 도서검색을 해 보면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핵전략에 대한 서적들이 제법 번역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핵전략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는지 ‘핵전략’에 대한 서적이 소개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잊을 만 하면 기어 나오는 북한의 핵공갈에서 볼 수 있듯 핵무기가 가지는 정치적 위상은 냉전이 끝났어도 여전합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는 여전히 ‘최종’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프리드먼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는 핵무기 문제에 대한 잘 씌여진 개설서 입니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뒤 2003년에 제 3판이 나왔으니 거의 30년은 된 책이지요. 여전히 개설서로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꾸준히 나온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할 수 있겠습니다. 꾸준히 개정판이 나오면서 새로운 내용도 추가되었는데 1980년대의 핵 전략과 냉전 종식 이후의 핵무기 문제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본질적으로 미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냉전시기 핵무기 경쟁의 주된 참여자는 미국과 소련이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 프랑스, 중국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그나마 유럽은 중요하게 다뤄지는 편이라 7장이 유럽의 핵문제에 할애되어 있고 이 중에서 한 절은 영국에, 나머지 한 절은 프랑스와 서독의 핵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럽국가들에 대한 서술이 이렇다 보니 인도나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듣보잡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책 후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개설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책은 전략폭격의 하위 수단으로 인식되던 1940년대의 초보적 핵 전략에서 상호파괴확증전략(Mutual Assurance of Destruction)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핵전략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끼친 여러 이론들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분들에게 아주 유용한 참고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올 때 마다 우리도 핵무기를 가지면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걸 보면 왜 이런 책은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한국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슈타인호프님이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국군과 경찰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 편 써 주셨는데 사족을 조금 달아보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1948년 초 NSC8이 작성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5만명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즉 소화기는 5만명 분을 원조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병력을 증강하면서 애초 미국이 상정한 병력 상한선을 돌파해 버리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병력규모를 놓고 협상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2월 미육군부 장관 로얄(Kenneth Claiborne Royall)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중장을 대동하고 이승만과 회견합니다. 이 회견이 있은 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육군 6만5천명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 내용은 1949년 3월 16일의 NSC8/1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NSC8/1에 반영된 군사원조가 당장 이행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추가된 1만5천명분의 소화기는 1950년도 회계연도 군사원조가 결정된 이후에야 이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한국군은 5만명 분의 미제 소화기만을 장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7만5천명 수준으로 증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일선 부대의 소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참고로 1949년 6월경 국군 제7연대와 제10연대의 장비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에 잘 나타나듯 두 연대는 미제 소화기의 부족으로 편제를 초과하는 일본제 99식 소총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기가 편제에서 크게 미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보병연대는 미제 소총이 300여정 부족하며 제 10연대는 미국제 소총이 인가량에서 1200정 가량 미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대 모두 부족분을 일본제 소총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연대의 경우 소총이 없는 병력이 2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용화기도 편제에서 미달하고 있으며 특히 기관총과 바주카포의 부족이 두드러지지요. 이 두 연대는 비교적 초기에 창설된 연대이지만 신규 창설 부대를 위해 장비를 차출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6월 시점에서는 공용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총 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국군병력은 1949년 8월 시점에는 10만명에 육박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6월 이후 이승만과 미국 대사관, 군사고문단간의 협상은 나머지 5만명분의 미제 소총과 덤으로 중장비를 원조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NSC8/1과 수정안 8/2에 의거해 1만5천명분의 장비만 더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NATO의 창설과 같은해 통과된 상호방위원조법안(Mutual Defense Assistance Act) 때문에 미국의 지원능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명시된 원조 우선순위 13위(15개 국 중에서)였기 때문에 충분한 원조 예산이 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배당된 원조액을 맞추기 위해서 1만5천정의 M-1 소총 대신 퇴출된 장비인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원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1950년 5월 26일 미육군 군수국은 상태가 양호한 3만정의 M-1903 재고를 확보했으며 NSC8/2에 의거해 이 중 2만정을 수리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수리비용을 포함해 책정된 비용은 1정당 20달러로 총 3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낼 2만정의 M-1903 소총이 정비창으로 보내진 것은 1950년 6월 19일 이었는데 2만정 모두를 사용 가능 상태로 수리하는데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수령님이 땅크를 몰고 쳐들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스프링필드 소총을 만져볼 기회는 없어졌습니다.

조병옥 박사의 놀라운 연기력

조병옥 박사가 이미 일제의 패망 전에 원자폭탄의 개발을 예언한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예지력을 갖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심히 곤란하기 때문에 조박사께서는 각별히 조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간악한 일제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간다면 조국의 독립이 물 건너 갈 수 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조박사는 겉으로는 충량한 황국신민인 것 처럼 위장을 했습니다.

장덕수와 조병옥이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에 대한 의분(義憤)을 고조시키고자 ‘그들에 대한 오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일본어가 꽤 유창한 장군은, 관계 당국이 현재 육지와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황을 좀더 자세히 알려주어야 하고, 미얀마와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나 계획이 명료하게 설명되고 또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군은, 조선인들은 정부의 충량한 병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는 한편 정부는 조선인들에게 총리대신이나 대사가 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기(八木信夫) 보안과장과 하다(波田重一) 장군이 이 발언에 대해 상당히 언짢아 했다.

윤치호의 1943년 2월 28일 일요일자 일기 중에서

윤치호/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비평사, 2001, 495쪽

조병옥 박사의 연기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예지력을 감추기 위해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위장하셨던 조박사께서 왜 고향 동네의 사람들에게는 원자폭탄의 개발을 술술 털어놓으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조박사께서는 동네 사람들이 일제에게 자신의 예지력을 밀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波田重一를 읽는 법에 대해서 배군님께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배군님이 지적해 주신게 맞는것 같은데 저도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좋은 조언 해 주시는 배군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2009년 2월 21일 토요일

재활용

언제나 그렇듯 난감한 청와대소식.

회전문 by Sprinter

국정원 2차장에 김석기?



가카의 알뜰함은 정말 대단합니다.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항상 재활용을 고심하시니 그야말로 눈물이 나네요.

그런데 이건 다른 손님이 먹다 남긴 단무지를 재활용하는 중국집을 보는 느낌이네요.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해야 겠어요.

비밀

예전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과 미국의 용병(用兵) 상의 연구가 흡사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일치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등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방용병이나 군사기밀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상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에 기반하여 신중한 연구를 거듭한다면 결국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일본해군 군령부장 가토히로하루(加藤寬治), 1930년

가토요코 저/박영준 역, 『근대 일본의 전쟁논리 - 정한론에서 태평양 전쟁까지』, 태학사, 2003, 206~207쪽

가토히로하루의 이 발언은 제 개인적으로 '비밀'의 핵심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군사기밀 뿐 아니라 사회의 다른 여러가지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료를 모으고 분석을 거듭 하면 그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시간이 걸리는 분석 보다는 당장 귀에 들어오는 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게으르고 편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지곤 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요상한 음모론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에 음모론이 꼬이는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무엇인가 상식을 벗어난 특별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인식 때문이지요.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막상 일급기밀 문서들이 공개되면 대부분은 상식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은 쉽지요. 사실 요즘은 정보의 쓰나미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정말 어렵더군요. 당장 제 자신을 돌아보니 사회적으로 민감한 일이 터지면 뭔가 말은 꺼내고 싶은데 처리해야 할 정보는 산더미 같고 귀찮다 보니 그냥 넘겨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S****t님이나 S******r님 등 이글루의 거물들은 정말 대단하신듯.

※ 배군님이 인용문의 오류를 지적해 주셔서 수정했습니다.

안도감

1달러당 원화가 1,500원대를 돌파한 것을 보니 말이 안나옵니다.

지난해 말 정부의 개입으로 1,200원 중후반까지 떨어졌을 때 지금 책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여러권을 질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더 떨어지길 기대하다가 늦게 주문했으면 지금쯤 울화통이 치밀어 실신했을 듯 싶군요.

경제 관련 뉴스들을 보면 1,400원을 한 번 넘어가면 상승세가 꺾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고점일지, 아니면 계속 상승할 지 궁금하군요.

이번 용역이 끝나고 돈 받을 때 쯤에는 환율이 1,200원 이하로 떨어졌으면 싶습니다.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대인배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

동방의 대인배 마오주석TM께서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셨을 무렵의 일화라는군요.

모택동이 장개석을 화제에 올렸는데 스탈린이 갑자기 진백달(陳伯達)을 상대로 말을 꺼냈다.

“아, 그렇지. 진백달 동지가 쓴 『인민공적 장개석』이라는 책을 나도 읽어 보았소.”

진백달은 원래 한켠에 앉아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스탈린이 자기의 저작을 언급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한결 활기를 띠게 되었다. 통역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노어를 아는 진백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탈린의 관심은 모택동한테서 진백달에게로 옮겨졌다.

(중략)

이렇게 되다보니 비서인 진백달이 한동안 대화의 중심이 되고 모택동이 도리어 한편에서 듣기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야기에 열을 올린 스탈린은 술잔을 들더니 진백달의 앞으로 걸어왔다.

“중국의 역사학자이고 철학가인 진백달 동지를 위하여 건배!”

라고 하였다.

진백달은 자기도 잔을 들고 답례를 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걸출하신 역사학자이시며 철학가이신 스탈린 동지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실로 진백달로서는 당시 분위기에 맞지 않는 거동이었다. 모택동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진백달은 최고위급 회담에서 자기가 각광을 받았노라고 무척 기뻐하였다.
회담 중에 생긴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하여 모택동은 심히 불쾌해 하였으며 특히 진백달의 분수를 모르는 경거망동에 대하여 더욱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심야에 회담은 끝났고 스탈린도 돌아갔다. 진백달이 여전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택동의 연락을 접하게 된다. 다음 부터는 회담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 이었다.

그 후에 있는 몇 차례의 회담에 진백달은 한 번도 참가하지 못 하였다.

섭영렬/최재우 역, 『모택동과 그의 비서들』, (화산문화, 1995), 212~213쪽

넵. 전에 소개한 스탈린 동지의 이야기 처럼 ‘쪼잔함TM은 대인배의 기본 소양이라 하겠습니다.


잡담 1. 진백달은 이후 모택동의 신임을 크게 잃긴 했지만 계속해서 모택동의 비서직을 수행했습니다.

잡담 2. 진백달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숙청되어 1971년에 투옥되지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닌게 4인방이 타도된 뒤에는 임표∙강청 반혁명집단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징역 18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2009년 2월 17일 화요일

한편, 동아일보 사이트는...



동아일보 인터넷 판에서는 미네르바 관련 사과문을 구석에 실어놨습니다.

아무래도 동아일보사에서는 자신들의 오보를 언제 인정하나 고심하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자 이때다 싶어 사과문을 실은 듯 싶군요.

정말 안습.

신동아의 굴욕

동아일보 미네르바 사과문 게재


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군요.

동아일보사가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 신동아 기사 "미네르바 가짜설"에 대한 사과를 냈습니다.

80년대에는 신동아가 월간지로서 쓸만한 기사도 많이 내더니 90년대 이후 질이 떨어지면서 결국 이꼴이 됐군요.

안습입니다.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妄想劇場] 3000

줄거리

서기 660년. 당나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분노한 의자왕의 왕비는 당의 사신을 우물에 처 넣는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백제에 상륙하고 김유신의 신라군도 동쪽에서 쇄도해 오면서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한 의자왕의 왕비는 3천 궁녀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결전에 나서는데.

당나라의 13만 대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 붓지만 3천 궁녀의 결연한 저항에 패배를 거듭한다.

마침내 당나라는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내 놓는데…

드디어 의자왕의 왕비와 3천 궁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음모의 배후 측천무후.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한다.

“나는 관대하다…”

과연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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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영화 ‘3000’ 섹시 마케팅 ‘후끈

올 여름 화제의 한국형대하역사블록버스터 ‘3000’이 개봉 전부터 섹시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비키니를 입은 3천궁녀가 당나라 13만 대군과 맞서는 장대한 전투 장면. 제작사 관계자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섹시한 장면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또한 시사회를 관람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영화의 절정부분에서 황금 비키니를 입은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는 장면은 마치 동성애 관계를 암시하는 듯 했다는 후문이다. 홍보사는 메인 포스터를 비키니를 입은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로 꾸미고 섹시함을 강조한 홍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죠센일보 20XX 7월 15일자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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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영화 ‘3000’ 감독 듣보잡 인터뷰

기자 : ‘3000’이 개봉 전부터 화제를 뿌리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 ‘300’과 제목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오해다. 원래 시나리오는 ‘300’보다 ‘3000’이 먼저 나왔다. 다만 자금 조달문제로 제작이 연기되다 보니 그 와중에 ‘300’이 먼저 나왔을 뿐이다. ‘300’보다 0이 하나 더 많다고 아류작으로 보지 말아 달라.

기자 : 내용에서도 말이 많다. 전설에 따르면 3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도륙하고 있다.

듣보잡 : (버럭)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 역사를 서술한 신라의 조작이다. 우리는 패배한 백제의 입장에서 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고자 했다.

기자 : 삼국사기 등을 보면 의자왕의 왕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유학자라는 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학자들의 서술인 만큼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누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의 왕비가 당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기자 : 영화의 절정에서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측천무후가 백제에 온 일은 없지 않은가?

듣보잡 : (버럭) 마찬가지이다. 측천무후가 백제에 오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을 제약하지 말아 달라.

기자 : 3천궁녀의 의상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백제시대에 비키니가 있었는가?

듣보잡 : 자료가 거의 없다 보니 고증문제로 미술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고심 끝에 당나라 군대와 맞서는 3천궁녀의 씩씩한 건강미를 표현하기 위해 비키니로 의상을 통일했다. 결코 제작비가 부족해서 헐벗게 한 것은 아니다.

경양신문 20XX 7월 15일자 20면

2009년 2월 12일 목요일

손학규 전 대표에 대한 추억

문수훃의 화려한 개그

경기도지사는 정말 머리 좋은 사람 바보로 만드는 이상한 자리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한 추억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이 양반이 아직 경기도지사로 있던 몇 년 전.

이 어린양의 아버지께서 표창을 받으러 가실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표창을 받으시니 아들로서 당연히 따라갔지요.

마침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는다고 해서 시청에서도 담당 공무원이 한 분 따라 나왔습니다. 대략 40대 중반 정도 된 분이었습니다.

이날 손학규 지사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연설하는 자리에서 횡설수설을 하다가 내려왔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재미없고 지루해 죽을 지경이더군요.

마침내 상을 주고 악수하는 자리.

제 아버지의 차례가 왔습니다.

손학규 지사가 제 아버지와 악수를 한 뒤 옆에 있던 시청 공무원을 보고 말하길.


"선생님은 아드님을 참 잘 두셨군요."


순간 손학규 지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버~엉 쪘습니다.

손학규 지사의 옆에 있던 도청 공무원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분 아드님은 이쪽입니다."

하고 해명했습니다. 그러자 손학규 지사는 멋쩍은 표정으로 "허허" 하더니 지나가더군요.

이 일이 있고 나니 손학규 지사의 앞날이 별로 밝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2009년 2월 11일 수요일

[妄想大百科事典] 정론지(正論紙)

[妄想大百科事典] 정론지(正論紙)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는 활자매체를 해당 정파가 높여 부르는 말.

특정 매체가 특정 정파로 부터 정론지 호칭을 받을 경우 그 매체의 신뢰성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정론지라 하더라도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보도를 할 경우에는 단번에 해당 정파에 의해 찌라시로 격하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특정 정치집단의 정론지 타령은 정치 의식의 저열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고 있다.

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이박사는 밀리터리매니아?

1949년 초의 어느 날,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박사께서 갑자기 이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찦車에 鐵板을 加工하야 鐵匣車를 우리의 손으로 優良品을 생산할 수 있다하니 五十臺 可量 製作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第十二回 國務會議錄, 檀紀四二八二年 一月二十一日

이박사 말씀인즉, 이런 물건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아무래도 건국 초의 대한민국은 안보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보니 대통령인 이박사가 군대에 관심이 많은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시콜콜한데 까지 신경쓰는걸 보면 좀 묘합니다. 물론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군사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런 잡다한 물건까지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밀리터리매니아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충분한 돈과 기술이 있었다면 이박사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을까요 아니면 더 매니악한 기질을 발휘해 히총통 처럼 됐을까요?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박사에게 지프를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꺼냈을까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2009년 2월 8일 일요일

구글 블로거의 아쉬운 점

제가 구글 블로거(Blogger)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요란한 것을 싫어 하다보니 네이버 블로그 같이 화려한 블로그 서비스는 피곤해서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단촐한 면이 크나큰 매력이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누차 이야기 했지만 트랙백이 되지 않아 할로스캔(Haloscan)같은 외부 서비스를 끌어다 써야 하고 이러다 보니 가끔 댓글이 제대로 표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가 지우지도 않은 댓글을 지웠다고 욕을 먹기도 하니 이건 정말 고역이죠.

그런데 가장 아쉬운 점은 레이블이 제한된다는 점 입니다. 블로거에서는 다른 블로그의 태그와 같은 레이블이 있는데 이게 글자수 제한이 있어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내용을 다 입력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전 올린 글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레이블에 표시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그럴 수 가 없으니 정말 아쉽군요.

미국 합동참모 본부의 대소 작전계획 : 1945~1950

지난해 11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작전 연구안 Gunpowder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안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의 하위 개념으로 연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상위 계획인 미 합참의 전쟁계획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1945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 합참이 수립한 여러 개의 전쟁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석 달 째로군요.

이 글에서는 Steven T. Ross의 American War Plans 1945~1950의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서적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서 냉전 초기 미 합참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 합참의 평가

미 합참은 1944년부터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종결된 지 2개월 남짓 지난 1945년 10월 9일에는 합참 예하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유럽과 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합참은 이 보고서를 받아 들인 뒤 10월 16일에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검토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원해제 이후에도 병력 441만1천명, 113개 사단 및 410개 항공연대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측에 따르면 동원해제 이후의 미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합참은 만약 소련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다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1945년 10월 시점에서는 아직 냉전이 격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합참은 소련이 전쟁을 먼저 도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5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극도로 빈약하고 영국은 본토 방어에 급급하거나 기껏 해야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할 능력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미 합참은 계속해서 소련의 전략적 의도와 능력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1월 31일에 합참 예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가 제기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련의 전쟁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합동정보위원회는 소련은 경제 복구를 위해서 향후 5년간은 전쟁을 피하겠지만 만약 스탈린이 다른 국가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다면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합동정보위원회에서는 1946년 7월 9일에 전후 안정을 위해서 소련과 세력권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합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 합참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의 합참 정보평가에서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정했으며 소련이 1956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공군과 150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특히 이 평가에서는 소련이 재래식 전력의 우위 때문에 미국이 핵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상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이후 급속히 군사력을 감축하고 있었고 특히 육군이 집중적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지상전에서 소련을 저지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2. Pincher 계획과 그 보완계획 – 최초의 대소 작전계획

1946년 3월 2일, 합참 예하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핀처(Pincher)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시작한 도발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첫 번째 작전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그리스와 터키, 이란 방면으로 이익을 획득하려 압력을 가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터키를 장악한다면 이것은 영국의 중동에 대한 통제력에 큰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터키 침공은 영국과의 충돌을 가져와 이것이 3차대전으로 확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발발시 총 113개 사단과 동맹군 84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 중 40개 사단을 터키 및 중동 방면의 침공에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총 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수에즈 운하 지구를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영국의 참전과 동시에 서유럽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이 계획안은 미군과 영국,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라인강 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방면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로 철수해 포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소련군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이탈리아는 함락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핀처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초기부터 지상전에 휩쓸려 소모되는 것을 피하고 미국이 가진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살리는 방안을 추천했습니다. 서유럽은 포기하되 영국, 이집트, 인도, 이탈리아(방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을 거점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전략 폭격으로 대응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는 서유럽을 탈환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에 점령된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미 육군이 소모전에 말려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레닌그라드나 무르만스크, 리가 등 소련의 해안지역에 상륙하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핀처 계획의 초기안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병력 감축으로 제한된 미군의 능력을 고려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소련에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핀처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는 계속 되었는데 추가 연구에서는 극동에서 소련군이 공세로 나올 경우 만주와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주고 미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핀처 계획에서 승인된 이 방안은 이후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핀처 계획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력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미 합참은 소련이 동원을 시작하면 동원 시작 60일 이후 서유럽 전선에 총 27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42개 사단을 중동 방면에, 49개 사단을 극동 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반면 소련의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막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략 공군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상군 만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그리고 핀처 계획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이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4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군을 제외한다면 연합군 중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에 비해 장비가 구식이긴 하지만 훈련도가 높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또 터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를 폭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핀처 계획을 기반으로 1946년 12월 20일에는 이탈리아 방어 계획인 닭발톱(Cockspur) 계획, 1947년 8월 4일에는 이베리아 반도 방어 계획인 북소리(Drumbeat) 계획, 1947년 8월 29일에는 극동 방어 계획인 월출(Moonrise) 계획 등이 작성되었습니다.

한편, 핀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 단계의 대응만을 상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합참은 핀처 계획을 보완할 계획 작성을 시작합니다.

1947년 2월 13일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제출한 전쟁계획 JCS 1725/1은 핀처 계획의 연장선 상에서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 소련이 유럽 본토를 석권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북미의 주요 공업지대를 방어하고 영국과 수에즈 운하지대, 인도 북부 등의 핵심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략 폭격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석유 생산시설 중 80%가 영국이나 이집트에서 발진하는 미국 폭격기의 작전 범위내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터키를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터키를 잃게 되면 지중해 동부가 소련 공군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이집트를 통한 보급을 대서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터키가 소련군에 함락 될 경우 그 다음의 방어선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발발 1년 차에는 전략 방어를 취하고 전쟁 발발 2년 부터는 전략폭격을 중심으로 소련의 전쟁 수행역량을 감소 시킨 뒤 전쟁 발발 3년 째에 흑해와 카프카즈를 통해 소련 남부로 진격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상정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동원은 전쟁 1년 차에 육군 45개 사단과 공군 70개 항공단 및 56개 독립항공대대, 항공모함 9척, 전쟁 2년 차에는 육군 80개 사단과 공군 139개 항공단 및 113개 독립항공대대, 전쟁 3년 차에는 육군 90개 사단과 공군 264개 항공단 및 141개 독립항공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21척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육군의 규모는 2차대전 당시 동원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7월 말에 작성된 동원계획 JWPC 486/7에서는 소련에 대한 전략 폭격 중 핵공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능력의 86%, 항공기 엔진 생산능력의 99%, 각종 화기 생산능력의 56%, 전차 및 장갑차량 생산능력의 99%, 석유 생산능력의 52%를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해 소련의 사기를 꺾고 최선의 경우 이를 통해 소련의 항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핀처 계획을 보완하는 여러 계획들은 공통적으로 전쟁 초기의 전략 방어와 전략 폭격을 통한 대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알래스카, 중동, 파키스탄, 오키나와, 일본의 기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군이 강력히 지지하는 B-36 폭격기는 미국의 전략 폭격 및 핵 타격능력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계획에서 논의된 전후 처리 문제인데 소련이 항복하면 동유럽의 국경은 1939년의 국경으로 되돌린다는 합의가 잠정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혹시 히총통이 노린 것은 이것?!?!)


3. Broiler, Frolin 계획 – 비상대응계획

브로일러(Broiler) 계획은 핀처 계획과 1947년에 작성된 여러 동원 계획을 반영해 작성되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은 소련이 1948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를 상정한 계획으로 일종의 비상대응계획이었습니다. 합참의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1947년 8월 29일에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각종 계획을 반영해 1948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응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안은 같은 해 11월 8일 합참 브리핑에서 처음 발표됩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위해 충분한 원자폭탄을 확보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고 원자폭탄의 숫자도 부족하기 때문에 서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터키와 지중해 해안 일대, 이집트를 방어하는 것 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우세한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공군 기지를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폭격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반격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다시 1949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상정한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8년 2월 1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도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은 순식간에 서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장악하고 미국이 전략 핵폭격을 할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영국과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총 173개 사단과 동맹군의 68개 사단 및 25개 독립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1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고 전쟁 개시 150일 이내에 2만대로 증강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육군 9개 사단과 9개 독립연대,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하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에 유럽 본토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개전 70일 만에 프랑스까지 점령되고 만약 소련군이 스페인까지 침공할 경우 소련군은 개전 180일에 지브롤터까지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방면의 공격에서는 최악의 경우 개전 90일에 터키가 항복하고 175일 차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될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또한 서유럽이 함락되면 개전 12개월 뒤에는 서유럽에 전개한 소련공군이 하루 평균 전술폭격 1,550회를 실시하고 또한 V-2 개량형으로 영국을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한반도는 모두 포기하고 중국은 연안 일대의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 본토도 포기하되 일본은 반드시 사수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편, 반격은 거의 유일하게 전략 핵폭격에 의해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기지는 이집트와 인도 북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의 핵폭격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JWPC 486/7과 거의 동일한 것 이었습니다. 이 밖에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바그다드와 모술까지 반격한 뒤 2단계 작전으로 이란에서 소련을 축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중동에 대한 반격작전에는 미군 12개 사단과 영국군 8개 사단이 배정되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핵폭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한다면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상륙작전을 펼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계획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브로일러 계획을 간략화한 프롤릭(Frolic) 계획이 입안되었는데 브로일러 계획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의 취약상을 강조하고 전략 핵폭격을 중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은 핀처 계획 및 그 보완 계획들 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 지중해 재해권의 상실까지 염두에 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영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등 군축에 따른 미국 군부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 Bushwacker 계획

1948년 1월 3일, 합참의 전쟁 계획들을 검토한 군수위원회(Munitions Board)에서는 핀처 계획에 기반한 작전 계획들이 현재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합참에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8일, 기존의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작전 계획, 부시워커(Bushwacker) 계획이 입안됩니다. 부시워커 계획은 전쟁이 1952년 경에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수립되었습니다.
먼저 소련이 1952년에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 졌습니다. 부시워커 계획안에서는 소련이 1952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 전쟁 발발과 동시에 11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으며 동원 개시 180일 만에 50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지상군은 3만대의 전차와 77,500문의 견인포, 7,500문의 로켓포, 13,000대의 자주포 등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도 1952년에는 대부분 제트기로 이루어지는 2만대의 항공기를 보유할 것이며 특히 B-29에 필적하는 중폭격기 1,600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해군은 200척의 신형 고속 잠수함과 130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가지고 미군의 교통선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워커 계획에서는 소련이 1952년까지 원자폭탄을 보유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부시워커 계획은 소련이 미국의 의도를 과소평가하고 제한적 도발을 시작하면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은 소련 육군에 의해 단기간에 석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실시하고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수부대 투입도 가정하고 있는 등 소련이 보다 과감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시워커 계획 또한 다른 계획들과 유사하게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16일간 지속되며 소련의 전략적 공세와 미국의 전면적인 방어로 진행됩니다. 2단계는 미국이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면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고 3단계에서는 미국이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한다는 것 입니다. 특히 부시워커 계획은 미군의 증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1단계와 2단계는 신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의 효과가 없어 미국이 당장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미 육군을 1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증강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통해 소련인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1952년 까지는 충분한 수의 B-36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공군으로 소련의 20개 주요도시들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초기의 핵공격에도 저항을 계속한다면 다음 단계로 터키,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북아프리카 등에 기지를 확보하고 전략 폭격을 지속하고 추가적으로 소련 본토에 대한 지상공격을 준비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핀처 계획에 기반한 비상 작전계획인 브로일러, 프롤릭 계획과 같이 부시워커 계획을 기반으로 한 비상 작전계획도 수립되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에 이어 수립된 새로운 비상작전 계획은 크랭크축(Crankshaft)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 또한 이전의 비상 작전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 영국군은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중동, 중국, 한반도는 포기하고 해당 지역의 방어는 각국의 지상군에 맡기되 미국은 공군 및 해군 지원만을 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개전 60일차에 소련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개전 75일에, 시칠리아는 개전 105일에, 그리스는 개전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점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는 최대 개전 150일까지, 수에즈 운하지대는 개전 175일 무렵 소련군에 장악되고 이란과 아라크는 개전 60일차에, 그리고 중국과 남한은 개전 150일차에 점령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은 공군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는데 브로일러, 프롤릭 처럼 전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복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래전은 전략폭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수행될 예정이었습니다.
1단계의 반격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유전 지구에 감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공격에 이곳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생산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철수할 것이었지만 소련이 전략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장기전으로 가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유전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1단계 반격에는 미군 18개 사단과 영국군 9개 사단을 먼저 바레인에 상륙시킨 뒤 쿠웨이트-바스라를 장악하고 다음 단계로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소련군을 격퇴하는 것이 반격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확보한 뒤 이곳을 그리스와 터키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장악하면 다음 단계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참은 전면적인 전략 핵폭격과 뒤이어 그리스와 터키 까지 탈환한 상태에서도 소련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은 터키를 발판으로 우크라이나에 상륙,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소련 본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면 대규모의 육군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2차대전과 비슷한 90개 사단 수준으로 소련에서 지상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입안가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5. Halfmoon 계획 –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

한편, 미 합참은 1948년 4월 워싱턴에서 영국, 캐나다군 관계자와 함께 기존에 작성된 대소 작전계획을 토의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는 새로운 작전계획인 반달(Halfmoon)을 승인합니다.
반달계획은 전쟁 첫 해에 시행될 단기간의 비상 계획으로 기본적으로는 브로일러 계획과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소련이 1949년에 국지 도발을 감행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 또한 전쟁 종결 뒤에는 소련의 국경을 1939년 국경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반달 계획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계획들과 동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 한가지만은 기존 계획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계획에서는 서유럽이 소련에게 단기간내에 석권되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반달 계획에서는 서유럽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선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점령지역의 저항 활동을 촉진하고 만약 라인강이 돌파된다면 영국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은 프랑스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군 주력은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는다면 프랑스의 연안 지역으로 퇴각하고 스페인이 참전할 경우 피레네 산맥을 경유해 스페인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둔 연합군은 가능하면 독일 주둔군과 함께 라인강선으로 퇴각하고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라인강 방면으로의 퇴각이 봉쇄되면 이탈리아로 후퇴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스위스를 경유해 후퇴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그리스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은 전면전 발발시 서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한 것 입니다.
다른 지역은 기존의 계획과 유사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지대는 지중해와 중동일대의 방어 거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전략 방어를 실시할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기는 하겠지만 아시아 본토를 포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달계획은 전쟁 첫해에 적용될 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국이 처음으로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계획들과 차별화 되는 계획입니다. 이후 수립된 전쟁 계획들은 유럽 대륙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상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1949년 1월 28일 완성된 트로잔(Trojan) 계획은 기본적으로 반달계획을 바탕으로 한 전쟁 첫해의 전략 계획이었는데 전략 핵폭격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트로잔 계획에서는 전쟁 첫 해에 소련의 주요도시 70곳에 총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힌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트로잔 계획은 언급된 대규모 공군작전에 대규모의 군수지원이 필요하고 작전 기지가 될 수에즈 운하 지구의 비행장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광범위한 군축 때문에 트로잔 계획의 실행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트로잔 계획을 검토한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은 현재의 병력으로는 트로잔 계획을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6. Offtackle 계획 – 유럽에서의 적극적인 작전

각 군 수뇌부들은 반달 계획 및 트로잔 계획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트루먼 행정부의 군비 축소는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도했습니다. 특히 육군의 감축은 심각해서 트로잔 계획에 명시된 개전 초기의 능동적 방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해군 또한 예산 확보에서 공군에 밀려 극도로 불만이 많았고 그나마 감축을 덜 당했다는 공군 조차 원래 계획했던 70개 비행단을 확보할 수 없어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축소된 군사력에 맞춘 새로운 계획의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지상전력의 취약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일 합참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소련 육군은 총 104개 소총사단, 35개 기계화사단, 10개 전차 사단,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위성국의 90개 사단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육군은 겨우 10개의 현역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중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개 사단이었습니다. 나머지 9개 사단은 편제에 미달하는 병력과 장비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더욱 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원자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것 보다 본토 방공을 위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시급해 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합참의 정보평가는 소련이 1953년 중순까지 135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전략적 우위가 사라진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1948년 3월 17일에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유럽에 보다 적극적인 안보공약을 제공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유사시 라인강선의 적극적인 방어를 요구했고 미국도 1948년부터 이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군사원조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단기간에 전쟁을 개시한다면 이것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 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에게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전쟁 계획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반달계획은 처음으로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명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작전계획들을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4월 26일 합동참모본부는 예하 합동전략기획위원회에 새로운 비상 전쟁 계획의 수립을 지시합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전략적 공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전장이 될 서유럽에서는 영국-라인강 선을 잇는 방어선을 고수하고 라인강이 돌파되더라도 서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가피하게 서유럽 전체가 석권된다면 최대한 빨리 서유럽에 대한 상륙과 탈환을 계획하도록 했습니다. 즉 새로운 작전 계획은 기존에 취하고 있던 서유럽 포기를 완전히 폐기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 계획은 1949년 12월 합참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이 계획은 사실 여전히 부족한 병력으로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안보목표인 서유럽의 방어를 위해서는 전력이 증강될 때 까지의 단기간의 문제점은 감수한다는 것이 합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태클 작전은 처음으로 3차대전 이후의 정치적 질서 재편을 언급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도 전쟁 후 소련의 영토를 축소한다는 계획 정도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명확한 대소 정책의 뒷받침은 없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전쟁이 종결되면 동유럽에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공산 정부를 붕괴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능력 만이라도 와해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소 작전계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는데 오프태클 계획에서는 소련이 중동으로 침공해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이스라엘도 동맹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이 서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동시에 공세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제 1단계에서 라인강선을 방어하는 것은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계획들과는 다르게 라인강선이 돌파되더라도 꾸준히 지연전을 펼치고 서유럽에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해 반격의 발판을 삼는 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마지막 교두보에서 밀려나더라도 서유럽에 대한 탈환작전을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럽을 상실할 경우 영국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개전 2개월 이내에 영국에 총 144개 대공포연대와 전투기 1,152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미국 항모기동부대 또한 영국 방공전에 투입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중해 서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지상군과 공군을 신속히 증강하고 서유럽이 함락될 경우 북아프리카를 유럽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되었으나 만약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한다면 피레네 산맥에서 1차 방어를 하고 이곳이 돌파되면 지브롤터로 점진적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1단계에 서유럽에서 전략방어를 실시하는 동안 미공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략 핵폭격을 실시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개시 3개월 이내에 영국 주둔 전략폭격기 부대를 7개 항공단으로 증강해 소련의 서부 공업지대에 타격을 가할 것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3개월 이후 부터는 제 2단계로 전환해 전략 폭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병력 동원을 가속화해 유럽 탈환을 준비할 예정이었습니다. 동시에 서유럽 상륙작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칠리아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또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전쟁개시 12개월 에서 24개월 사이에는 제 3단계로 전환해 서유럽 탈환작전을 시작하도록 되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상륙작전에는 미군 41개 사단과 항공모함 전투단 10개, 그리고 43개 항공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은 셀부르에서 덴마크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 중 그때 상황에 적합하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감행될 것이었으며 서유럽에 상륙한 주력은 이탈리아에서 북상하는 부대와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어 서유럽의 소련군을 섬멸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이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결론이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군사적인 면 보다 서유럽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많이 작용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부에서는 오프태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7. Dropshot 계획 – 유럽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한편, 합참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1956년 7월 발생할 경우를 상정한 비상 계획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안은 다시 전쟁 발발시기를 1957년 1월로 늦추었고 당시 미군의 군비 축소를 고려해 최소한의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는 방향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이 연구안은 1949년 1월 31일 제출되어 드롭샷(Dropshot)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드롭샷 계획은 소련이 개전 당일 135개 사단과 20개 포병사단을 동원하고 개전 한달 이내에 248개 사단, 그리고 개전 1년 내에 500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은 76개 사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는데 이 경우 코탕탱 반도에 10개 사단, 브르타뉴에 20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북부 프랑스에는 대규모 육군을 지원할 만한 항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두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드롭샷 계획에서는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34개 사단을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말타, 크레타, 키프러스 등을 확보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이러한 작은 섬은 유럽 탈환의 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드롭샷 계획은 기존의 계획과 달리 중동을 장기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터키의 경우 전토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이 있을 경우 터키 남부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도 가능한 사수하되 소련군에게 점령될 경우 최대한 빨리 탈환작전을 펼치도록 예정됐습니다. 극동지역은 기존의 계획들과 동일하게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전략 방어를 하되 홋카이도는 유사시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브래들리 장군이 드롭샷 계획의 보강을 지시해 드롭샷 계획의 개정안이 1949년 12월 19일 합참에 제출되었습니다.
개정안에서는 작전에 필요한 병력 규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산정했습니다. 먼저 반격의 주력이 될 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 미공군은 3,529대, 영국 등 연합군은 5,058대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하고 개전 6개월 차에는 미공군이 4,270대, 연합군은 5,399대로 증강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30개월 차에 미공군은 11,152대까지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13척의 정규항모, 4척의 경항모, 9척의 호위항모를 동원하고 육군은 개전 첫 단계에 15개 사단, 그리고 개전 30개월 까지 74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증강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포함한 전 전선의 연합군은 같은 기간 동안 총 213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전략 핵공격에는 미군 19개 비행단, 영국군 7개 비행단 등 총 26개 비행단, 폭격기 780대가 배정되었습니다. 최 우선 공격목표는 소련의 핵공격 수단으로 여기에는 핵폭탄 제조 시설, 폭격기 기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을 파괴하는데 100발의 원자탄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목표는 석유 생산시설, 발전소, 철강을 포함한 금속 생산공장이었는데 이 목표를 공격하는데 최초의 30일간 180발의 원자탄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타격을 한 이후에도 복구를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핵폭격 및 통상 폭격을 실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의 공업 시설을 타격하는데 원자탄 73발이 배정됐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 1단계에 총 76개 사단(이중 미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고 2단계에서는 서유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미군을 55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2단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다면 그대로 동유럽과 소련으로 진격해 무장해제 및 점령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2단계에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는 대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동유럽에 대한 공세는 다시 세가지 안으로 뉘었습니다. 첫 번째는 North안으로 이 안은 108개 보병, 38개 기갑, 5개 공수사단과 90개 항공단을 동원해 쾰른을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력은 베를린을 해방한 뒤 계속 동진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조공은 크라쿠프에서 주력과 합류할 것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폴란드 남부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해 발칸반도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두번째 안은 Pincer안으로 이 안은 117개 보병, 30개 기갑, 9개 공수사단과 110개 항공단을 동원해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동시에 공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먼저 터키 남부의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해 그리스에 상륙한 뒤 교두보를 확대해 루마니아로 진출하고 이후 폴란드 남부로 공세를 확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연합군도 반격을 개시해 78개 사단이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로 진격,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안은 South안으로 이 계획은 총 182개 사단과 124개 항공단을 동원하는 등 세가지 안 중 가장 규모가 큰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주력은 터키에서 발칸반도로 진출, 베를린과 폴란드로 진격할 예정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유럽의 연합군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드롭샷 계획은 합참에서 승인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프태클과 함께 미국의 서유럽 방어 계획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NATO의 강화와 함께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 방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갑니다.

2009년 2월 6일 금요일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 - 1948년의 통계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하루 종일 하지(John R. Hodge) 중장 문서철을 뒤졌는데 쓸만한 것을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허탕을 치면 정말 허무하고 우울해지죠;;;;;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 보니 1949년에 작성된 주한미군 의무감실의 문서가 한 건 있었습니다. 1948년도의 의무활동 결산 보고서인데 잠깐 쉬어가는 셈 치고 보고서를 훑어 보다 보니 1948년도 성병 발병율에 대한 통계가 있더군요. 이 통계를 보니 작년에 John Willoughby의 논문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표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Willoughby가 인용한 미 제3군의 성병 발병율 통계에 따르면 유색인종이 백인에 비해 성병에 걸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하지요. 주한미군은 독일주둔 미군과 비교했을때 어떠했을까 궁금해 지더군요. 호기심에 해당 통계를 복사해서 비교해 보니 주한미군의 경우도 백인에 비해 유색인종의 성병 발병율이 높게 나타나더군요.

해당 보고서에 실린 1948년도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독일 주둔 미군과 비교하면 낮지만 유색인종이 백인 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성병 발병율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환자 중 82%에 달하는 2924명이 임질(Gonorrhea)에 감염되었고 10%인 360명이 매독(Syphilis) 환자입니다. 나머지 8%인 284명은 기타 성병으로 분류되어있고 구체적인 병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군요.

이 문서 외에 역시 하지 중장 문서군에 들어있는 13번 Box의 문서철 두건은 모두 1947년부터 1948년 기간의 주한미군 의무관계 문건들인데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70% 가까이가 성병관계(;;;;) 기록이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문서철은 모두 성병관계 기록이더군요. 한번 구체적으로 읽어 볼까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덮었습니다. 이걸 일일이 분석해 본다면 아주 흥미로운 글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당장 필요한 문건은 아니라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잡담 1. 그러고 보니 빨리 스캐너를 하나 사야 겠습니다. 표 만드는 것 보다 그냥 스캔하는게 더 편할 것 같군요.

잡담 2. 그런데 역시 골치 아픈 물건들은 통신부호가 가득 섞인 전문들이죠. 어디 까지가 통신부호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2009년 2월 4일 수요일

시장 對 국가 :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

The Commanding Heights의 한국어판 『시장 對 국가 :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를 읽었습니다. 지난 달에 채승병님이 같은 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 대한 글을 쓰셔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원작의 한국어판이라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다큐멘터리의 영향 때문인지 도서관에 있는 한국어판이 모두 대출 중이라 좀 늦게 읽게 됐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을 하기에는 경제 분야에 대한 지식이 형편 없으니 간단한 감상을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먼저 한국어판의 문장에 대해서 한 마디. 영어판은 읽지 못했지만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미리 보기를 놓고 보면 번역판도 읽기 편하게 잘 번역됐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원판의 문장 자체도 읽기 편하게 잘 쓰여진 것 같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저술은 충실한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활용해야 합니다. 간혹 개설서를 쓰면서 복잡하게 배배꼬인(!) 문장을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저자들은 가능한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 혹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아무래도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책이니 만큼 2000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떠올리며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시장 주도 경제의 이야기로 끝을 맺기 때문에 결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시장 주도 경제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21세기에 직면하게 될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금융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마치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예측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저자들은 21세기에도 시장에 대한 신뢰가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퇴보할 것인지 의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 신뢰에 대한 첫 번째 시험이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인지 저자들의 던진 의문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은 신념과 아이디어에 있다는 지적 또한 인상 깊습니다. 비록 뻔한 이야기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저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야 세상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책에서는 2차대전 이후 수많은 국가에서 이루어 졌던 경제적 실험들이 성공 또는 실패하는 과정과 실패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사례는 더욱 감동적입니다. 신생 독립국들이 희망에 부풀어 추진한 경제적 실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비록 담담한 문장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마음에 와 닿는 바가 많습니다. 한국이나 대만 처럼 성공의 길을 가는 경우이건 인도와 같이 실패를 경험한 뒤 먼 길을 돌아가는 경우이건 말입니다. 이들 국가들의 경제적 실험은 마치 미지의 항로를 찾아 작은 배 몇 척으로 대양에 맞섰던 탐험시대의 용감한 항해자들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물론 탐험시대의 항해자들과 달리 국가의 경제적 실험은 끝없이 계속되겠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좌절이 있더라도 더 나은 길을 향한 모색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겠지요. 시지프스의 바위라는 우화가 떠오르게 되는군요.

이 책을 조금 더 빨리 읽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없진 않습니다만 지금 읽게 된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2009년 2월 3일 화요일

언제나 환율이 문제

현재 추진 중인 어떤 일 때문에 조금 뒤에 약속이 있습니다.

며칠 전 그 회사의 사장님과 통화를 했을 때 다른건 다 괜찮은데 환율이 걱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환율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데 오늘 뉴스를 보니 장중 환율이 1달러 당 1,400원대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올해 초의 경제 전망 중 1/4분기에는 환율이 1,300원 대에서 1,400원대를 오가다가 2/4분기 이후 안정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나쁜 쪽으로는 잘 들어 맞는군요. 환율 때문에 잘 풀릴 일도 꼬이지나 않을런지 걱정입니다. 업무는 물론이고 지름 생활에도 곤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진짜 골치 아프죠;;;;

이놈의 환율은 언제쯤 안정이 될 것인지;;;

2009년 2월 1일 일요일

조병옥 박사의 놀라운 예지력

모든 예언은 항상 사건이 터진 다음에 들어 맞는다고 하지요. 무슨 큰일이 날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노라고 요란하게 떠들어 댑니다. 물론 왜 그런 예언들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모두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지요.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뒷북 예언, 예측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최근의 사례로는 미네르바의 정체를 사전에 간파한 전여옥 여사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여옥 여사가 미네르바의 정체를 미리 간파한 것은 예언 축에도 못 낄 정도로 엄청난 예지력을 갖춘 분이 과거에 계셨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되시겠습니다.

1945년 8월 초 조병옥 박사는 상경하던 도중 소련의 참전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패망의 날이 올 것을 우리 한민족들은 36년동안 매일같이 손꼽아 기다렸거니와 나 자신은 일본패망론에 대하여 일찍부터 간파한바 있어 올것이 왔고나 하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내가 천안서 소개(疏開)생활을 하였을 때에도 그 일본패망론을 동리사람들에게 말하였드니 처음에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설명하기를 미국은 물질자원이나 인적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과학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입체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공군력이 몇 배나 일본보다 강하고 원자탄이 제조되어 일본이 연합군측에게 끝까지 항전하는 경우에는 일본민족은 전멸될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 일본의 경우로 말하면 남방을 점령하여 거기서 인적 물적자원을 충당시켜 보려고 하였으나 그곳 원주민들이 대일협력을 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항적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한국같은 가난한 나라의 대대손손이 간직해 내려오는 유기(鍮器)그릇 또는 은가락지 금반지 및 비녀 숟가락 등을 공출해 내라고 하니 그 자원에 있어 벌써 미국에 지고 들어가는 고로 일본은 도저히 장기항전을 못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손을 들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런 말을 시골에 가서 한 지 2년도 못되어 일본은 패망의 날이 내일로 닥쳐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던 것이다.

趙炳玉, 『나의 回顧錄』, 民敎社, 1959, 141쪽

조박사께서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실전에 투입하기 2년여 전에 원자폭탄의 개발을 알고 계셨던 것 입니다. 물론 이런 예지력을 가진 분이 북괴의 남침 날자를 정확히 예견하지 못 하셨다는게 궁금하긴 합니다만 뭐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요.

안녕하세요

제 블로그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처음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블로그가 어떤 블로그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는 술자리 잡담 분위기를 지향합니다. 뭐, 대략 대학가 술집에서 오고가는 진지한 듯 하면서도 진지하지 않은 그런 대화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블로그 주인장인 저의 관심사와 지식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보니 블로그에서 다루는 주제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에. 그리고.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가끔 글을 쓰는데 이런 성향이 튀어 나오기도 하니 종교, 특히 유일신 신앙을 가지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저는 정치인 빠돌이/빠순이들을 매우 싫어합니다. 박빠건 노빠건 다 싫습니다. 특히 노빠는 극도로 혐오합니다. 이런데 갑자기 "왜 우리 노짱을 싫어하시나요" 같은 질문을 하시는 분은 매우 곤란하겠지요. 사실 네이버 블로그와 이글루를 거쳐 이곳으로 오기까지 정말 이런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물론 정치인의 빠순이, 심지어 노빠라도 나카마 유키에나 손예진 같이 아리따운 분이라면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 아니, 만약 그런 미인들께서 이 블로그에 왕림해 주신다면 당장 노빠 블로그로 개편하고 노비어천가로 도배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인들이 이런 재미없고 칙칙한 블로그에 들러주실 리는 당연히 없겠지요. 고로 모든 정치인 빠돌이/빠순이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밖에

주체사상 신봉자, 환빠, 음모론자들은 노빠 이상으로 혐오합니다. 민족자주 천년왕국의 도래나 사뷁력을 호령하는 대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분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물론 환빠라도 나카마 유키에나 손예진 같이 아리따운 분이라면 열렬히 환영할 것 입니다. 만약 그런 미인들께서 이 블로그에 왕림해 주신다면 당장 환빠 블로그로 개편하고 치우천황을 찬양하는 글로 도배를 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인들이 찌질하게 환빠질이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농담을 하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들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농담을 할땐 함께 농담을 하시면 됩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가끔 제 정치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할일 없는 양반들이 있습니다. 특히 노빠계열들은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하지요. 그런 양반들에게 제가 쓸데 없이 시비걸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 블로그는 열린 공간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길바닥에서 파는 떡볶이 냄새를 맡는건 자유지만 그걸 먹으려면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제 개인공간인 블로그의 글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인상쓰는건 자유지만 뻘플을 싸지르는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트랙백을 달기 위해서 할로스캔을 쓰는데 이놈의 할로스캔은 한글 지원이 부실해서 한글 아이디로 답글을 다시는 분들의 닉네임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댓글이 표시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글이 한 번 뒤로 밀리면 댓글을 확인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니 오래된 글에다 댓글을 달아주시면 신속한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우리에게 필요한 신문은 이런 신문이다!

간만에 the Onion에 들어가 봤더니 아주 죽이는 기사가 하나 떴습니다.


Asian Teen Has Sweaty Middle-Aged-Man Fetish



百問不如一見!!!



이래서 양키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지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문을 달라!

2009년 1월 26일 월요일

최악의 연휴

일단 연휴에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감일이 하필 28일인지라 요 며칠동안 의자에 앉아서 자는 중이죠;;;;;

그리고 연휴 기간 동안 계속 눈이 내리니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눈까지 치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눈을 싫어하진 않는데 일이 있을 때 내려주니 정말 선녀님들을 고발하고 싶군요.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은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빕니다.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정말 의외로군!

The first edition of ‘The War for Palestine’ was publish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in 2001. The success of this book surpassed all our expectations. It received considerable critical acclaim; it sold over 8,000 copies; and it was translated into three languages – Arabic, French, and Italian.

Eugene L. Rogan and Avi Shlaim(ed), The War for Palestine(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xvii

8,000부 판매한 것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라니. 영어권의 학술서적 시장이 저 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다.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서술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쓴 일이 있습니다. 원래 다른 용도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양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황해도의 우익단체 봉기나 북한측의 주장에 대해서 상세히 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군요. 나중에 신천학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그리고 역시 그 글에 넣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북한 점령기간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구체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북한의 억지 주장처럼 미군이 수 만명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에 대한 소규모의 공격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UN을 통해 미군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국제 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이런 선전 중에는 신천학살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민간인 살해는 미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 육군 제187공수연대전투단과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미육군 10군단 헌병대의 민간인 살해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1950년 11월 평양 인근에서 187공수연대전투단 D중대 소속의 모리슨(Aubrey L. Morrison) 이병과 손더스(Arnold A. Saunders) 일병의 주도로 일어난 민간인 살해사건에 대한 개요입니다.

(전략)

2. 개요 : (CID 보고서 51-O-78-A의 색인 A를 참고). 1950년 11월 3일 오전 178공수연대 전투단 소속의 모리슨 이병과 7명의 사병은 북한 평양 근교의 주둔지를 출발해 한 마을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북한군 군복을 입고 있는 민간인을 발견했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북한인민군의 탈영병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손더스 일병이 그에게 45구경 권총 두 발을 발사했으며 모리슨 이병은 총검으로 찔렀다. 그 민간인은 이때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모리슨과 7명의 사병(이 중 두 명은 오전의 수색조에도 속해있었다)과 함께 다시 공산군을 찾는다는 구실로 주변 마을들을 돌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모리슨은 여섯 명의 한국 민간인을 총으로 쏜 뒤 총검으로 찔렀다. 다른 사병 두 명도 각각 한국 민간인 두명을 쐈으며 그 뒤 모리슨이 총에 맞은 민간인들을 찔렀다. 이들은 수색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았다. 모두 남성인 민간인 아홉명이 살해되었다.

2. Facts : (See Tab “A”, CID Report 51-O-78-A). On the morning of 3 Nov 50 a Pvt Aubrey L. Morrison and seven other EM of the 178th Abn RCT left their area near Pyongyang, North Korea, and proceeded to a Village where they found a civilian who had among his effects a North Korean uniform. The EM were told that the civilian was a deserter from NKPA. He was not armed. Pfc Saunders shot the civilian twice a caliber .45 postol and Morrison bayoneted him. The civilian died from such wounds.

On the afternoon of the same day Morrison and seven EM(two of whom had been present in the morning group) again went to other outlying villages, assertedly in search of communists. During this trip Morrison shot and then bayoneted six Korean Civilians. Two other EM each shot Korean civilians and Morrison proceeded to bayonet them also. None of the soldiers were on authorized patrol. Nine civilians, all men, were killed.

‘Request for confinement and mental evaluation’, 29 Jan 51, RG 338, Eighth U. S. Army, Box 740, Security-Classified General Correspondence

다음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입니다.

(전략)

2. 1950년 11월 3일, 미 해병대를 태우고 원산을 출발한 기차가 덕원(德源)에 정차했을 때 해병대원 중 일부가 전화선 작업을 하던 철도 신호원들을 아무 이유 없이 총으로 쐈다고 한다. 철도원 한 명이 허벅지에 총을 맞아 현재 치료 중이다.

3. 1950년 11월 10일, 10군단 헌병대의 차량과 사병(이 기차에 장교는 타고 있지 않았다)을 태우고 10시 30분에 원산을 출발한 기차에서 탑승한 헌병대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타당한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a. 13시 25분 경, 용훈 근처의 야산에서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한국인이 한 명이 총을 맞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b. 용훈 근교에서 14세 정도의 한국 소년 한 명이 기차에 손을 흔들다가 총을 맞았다. 그는 양 손을 모두 치켜들고 있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될 때 까지 사격이 계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13시 30분경에 일어났다.

c. 16시경 야산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으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d. 밭에서 일하던 7명의 한국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 사격을 받았다. 모두가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그대로 있었다. 이 총격의 결과는 알 수 없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05분경이다.

e. 의류를 짊어 지고 가던 한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30분 경이다.

4. 한국군 수송장교와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유창하게 하는 그의 부관이 중간에 기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그러기 싫거든 민간인들을 쏘지 말고 차라리 자신들을 쏘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한국군이 상관할 일이 아니며 만약 그들이 공산당이거나 또는 공산당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북쪽으로 가버리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자들과’ 똑같이 당해 보라고 대답했다. 기차에 타고 있던 다른 한국군 장교들은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 기차에는 부사관 한 명이 인솔자로 동승하고 있었으나 사병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 On 3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bearing US Marines stopped at Dukwon and some of the marines, without any provocation being noted, allegedly began firing weapons at railroad signal men who were working on the telephone lines. One worker was hit in a thigh and is presently hospitalized.

3. On 10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leaving there at 1030 hours, and bearing vehicles and enlisted men(no officer accompanying them) of X Corps Military Police unit had the following incidents allegedly performed by members of this group, all of which apparently were unprovoked and uncalled for :

a. A Korean man walking up a mountain side near Yonghoon, carrying an “A” frame, was shot and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25 hours.

b. A Korean boy, age about 14 years, near Yonghoon, waving his hand at the train, was fired upon. He raised both hands above his head, firing continued till he was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30 hours.

c. A Korean man standing on a small hill watching the train pass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0 hours.

d. Sev(en) Korean women, children a(nd) old men working in a field were fired upon. All fell flat and remained that way. Effect of fire not known.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5 hours.

e. A Korean man carrying a bundle of clothing on his back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30 hours.

4. The KA Transportation Officer and his aide, who is a well educated person fluent in speaking, reading and writing the English language, stopped the train at one point and remonstrated with the men, asking them to cease these sort of action, or to shoot them instead of these people. The reply was, in effect, that it was none of their(the Korean’s) business and that if they were, or liked, Commies they should go north or get the same thing thing they (the MP’s) were giving people “who had killed their buddies”. Other Korean officers on the train were helpless to do anything and hid their faces in shame and disgust. The Military Police on this train were apparently in charge of a non-commisioned officer, who did nothing to stop their activities.

‘Malicious Use of Weapons’, 15 Nov 1950, RG 338, KMAG Box 39, AG 333.5 G-1

먼저 첫 번째 문서에 나타난 살해 사례는 수색 작전 도중에 발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비정규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례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민간인 살해는 17~19세기 유럽에서 게릴라전에 직면한 유럽군대에서도 일어 났었고 2차대전 당시의 게릴라전 상황에서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에서 나타난 10군단 헌병대의 경우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특히 앞의 문건에 기록된 사건은 전투 작전(비록 허가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 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반면 두 번째 문서에 나타난 민간인 공격은 전투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명백히 민간인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에서는 인종적 멸시감이 주된 동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인’에 대한 ‘적’으로서의 적대감입니다. 민간인 살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북한인들을 ‘전우를 죽인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것은 북진 이후 알려진 미군 포로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 적국의 민간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하는 경우 또한 기존의 전쟁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적대감에 인종적 멸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글을 쓰자 이것이 인터넷 게시판의 좌우투쟁(!)에 인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북한의 주장에 휘둘리는 자칭 진보들을 볼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편’의 손이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논쟁을 구경한 뒤 제 블로그가 지나치게 우편향(?)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에만 사로잡힌 논쟁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찝찝한 국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어쨌든 휴전 이후 6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편을 갈라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벌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2009년 1월 18일 일요일

각하의 정치력, 가카의 정치력

이명박의 낮은 정치력은 박근혜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고 갈등만 키우는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와대측에서 한나라당 중진들을 오찬회동에 초대하면서 관례를 무시한 행동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요.

한나라 중진들, 靑 '의전소홀' 떨떠름

Sonnet님이 얼마 전에 지적했 듯 박근혜와 같은 강력한 정적을 제어하는데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큼지막한 감투를 하나 던져주는 것 입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막강한 정적들을 쳤지요. 이 방법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명박에게 가장 쓸만한 카드였을 것 입니다. 만약 집권 초에 이 카드를 썼다면 아마도 지금쯤 개각을 핑계로 박근혜를 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이 방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은 사람은 이승만일 것입니다. 이승만은 첫 내각을 구성하면서 처음에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이 의회에서 거부당하자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해 통과시킵니다. 게다가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여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 측에서는 군 장교단이 이범석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이범석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앉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범석의 중요한 권력 기반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해체시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흡수시켜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이범석이 저항을 하긴 했지만 이승만은 그것을 간단히 제압해 버리지요. 이승만은 족청을 해체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이범석을 국방부장관에서 해임시켜 버립니다. 족청이라는 강력한 방패가 없어지자 이범석의 정치적 위상은 취약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1950년 4월에 이범석을 국무총리직에 해임 함으로서 이범석에게 결정타를 먹이지요.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할 때 다시 한번 이범석을 끌어들인 뒤 또 한번 등에 비수를 꽂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과시합니다. 1952년 대선에서 이범석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물론 가카의 정치적 수완이 바닥이라는 점은 그의 정적들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1차 중동전쟁과 레바논군

캠브리지 대학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The War for Palestine 2판을 읽는 중입니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확대되면서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글이 한편 추가되었더군요. 휴즈(Matthew Hughes)가 쓴 이 짧은 글은 꽤 재미있는데 이 글을 바탕으로 관련 1차 중동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도와 수니파, 시아파 이슬람교도, 드루즈파 등 잡다한 종교집단이 뭉쳐져 만들어진 나라이다 보니 독립부터 약간 불안한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2차대전 중 자유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약속 받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에 국가협약을 체결해 독립국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 협약은 1932년도 인구조사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의 주요 직위를 각 종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가지는 식입니다.
물론 기독교도는 물론 이슬람교도 중 상당수가 이 국가협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레바논에서 이슬람의 우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슬람교도에 상당수의 권력을 양보한 국가협약에 극도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측이 시리아의 지원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도들도 이전부터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이스라엘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에 대통령을 지낸 에데(Emile Edde)는 1948년 7월 3일에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회동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할 경우 기독교도가 베이루트에서 반정부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레바논이 아랍의 포위망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레바논 기독교도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므로 에데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Hughes, 2007, p.206]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국가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은 아랍연맹의 가맹국 중 유일하게 최후까지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습니다.[Pappe, 2001, p.102~103]

어쨌든 정부에 반발하는 기독교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만큼 레바논 군대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규군도 기독교도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국가협약에서 국방부장관이 기독교도에 배분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령관도 기독교도인 셰합(Fuad Chehab) 대령 에게 돌아갔고 참모장은 드루즈 출신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기독교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레바논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을 때 레바논군 장교단의 71.8%가 기독교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식민통치의 유산이었습니다. 레바논 군대는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만든 식민지군대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도와 함께 군대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이 독립하자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고 레바논 군은 기독교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장교단 중 이슬람교도는 1958년 까지도 20%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셰합 대령은 신생 레바논군의 장교단을 소수의 정예화된 장교들로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고 교육수준이 낮은 시아파나 수니파 이슬람교도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의 이슬람 교도들은 레바논군을 ‘우리의 군대’라기 보다는 ‘기독교도 군대’로 인식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은 4개 경보병대대(Battaillons de Chasseurs)와 1개 포병대대, 1개 기갑대대, 약간의 기병대와 독립 공병, 의무, 수송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차 중동전 당시 레바논군의 총 병력에 대해서는 Herzog의 2,000명 설에서 5,000명 설 등이 있는데 레바논군의 작전일지를 활용한 휴즈는 3,0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장비로는 18대의 프랑스제 전차(아마도 R-35)와 장갑차, 75mm와 105mm 포가 혼재된 2개 포대 규모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제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측과 M-4 셔먼을 도입하는 문제를 협상했는데 이것은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7월 까지도 진전이 없었다고 하는군요.[Hughes, 2007, p.207]

레바논은 아랍연맹(Arab League)에 가입한 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기는 했습니다.물론 실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투입된 것은 3대대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레바논군은 1차 중동전 와중에도 국내 치안 유지와 산적 토벌 등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이스라엘 군과의 전투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교전한 3대대 조차 1948년 5월 7일에 바알벡(Baalbek)의 치안 유지를 위해 1개 중대를 차출해서 보냈다고 하니 어떤 상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친 시리아 성향 이슬람 교도들이 시리아와 연계할 것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전하는 상황에서도 동맹국(!)인 시리아 국경에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바논군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교전한 것은 1개 대대에 불과했습니다. 1차 중동전쟁에서 레바논군의 역할은 미미하다 보니 대부분의 연구들은 레바논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중동전쟁 개설서인 김희상(金熙相)의 『中東戰爭』에서는 레바논군의 공세에 대해 ‘네 줄’만을 할애하고 있지요(;;;;)[김희상, 1989, 59쪽]
1948년 5월 중순, 아랍연합군은 레바논군에게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군과 합류해 갈릴리 방면에 대한 공세에 나서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처음에 레바논 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크레를 점령한 뒤 하이파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하는 것 이었습니다.[Pappe, 2001, p.125] 그러나 셰합 대령은 레바논군의 전력이 고작 4개 대대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공세에 적합하지 않다고 연합군 수뇌부를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도인 레바논 대통령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셰합 대령의 방어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결국 레바논군이 담당한 알 나쿠라(al-Naqura) 지구에서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바논 국내의 이슬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정부에 공격을 요청했기 때문에 레바논군은 결국 소규모의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레바논군의 공격목표인 말리키야(Malikiyya)는 5월에 아랍해방군(ALA)이 잠시 점령했다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바논군에게는 다행히도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이프타흐(Yiftach) 여단의 1대대가 예루살렘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오데드(Oded) 여단의 예하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험이 부족한데다 장비도 형편없어서 전투력이 낮았습니다.
1948년 6월 5일, 레바논군 3경보병대대(병력 436명)이 공격을 개시하자 오데드 여단은 약간의 저항만 하고는 이날 17시30분에서 18시 사이에 말리키야를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레바논군은 전사자 두 명을 내는데 그쳤으며 이스라엘 측은 8명이 전사했습니다.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오데드 여단은 이것을 최소 2개여단 규모의 대공세로 착각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스라엘 측의 이런 착각이 전후의 연구에도 반영되어 대표적인 개설서로 꼽히는 Herzog의 저작에도 이날의 전투는 시리아-레바논 연합군 2개 여단에 의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은 이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시리아-레바논 연합군이 말리키야를 점령한 뒤 유대인 지구에 대한 공세를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전투는 소규모로 전개된 전투였으며 레바논군은 국내외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공세에 나선 만큼 말리키야를 점령한 선에서 공세를 멈추려 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군은 7월 8일에는 아랍해방군에게 말리키야를 인계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으로 1차 중동전에서 레바논군의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어 버립니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이슬람교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리키야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기념하여 베이루트에서 각 종파 지도자들의 참석 하에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레바논군이 생색내기용 전투를 벌이고 승전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말리키야를 인계 받은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 측의 대대적인 반격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아랍해방군은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창설에 관여한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비정규부대 답게 부대원의 질적 수준도 들쑥 날쑥해서 그야말로 강간과 약탈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건달부터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훈련과 장비 모두가 부족해 정규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게다가 보급도 부족해 9월 이후 탄약 재고가 영국제 소총은 1정당 18발, 프랑스제 소총은 1정당 45발, 기관총은 1정당 650발 수준이었습니다. 사실 아랍연맹의 가맹국들은 겉으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국내의 단결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서로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개시될 당시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국내의 강경한 여론 때문에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시리아나 이라크 등은 아랍해방군 같은 군사조직을 지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기묘하게도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해방군의 전투력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랍해방군의 총 병력을 25,000명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장비와 훈련수준도 높다고 보았습니다.[Pappe, 2001, p.129]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만.

※ 1차 중동전쟁에 대한 과거의 저작들은 아랍해방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먼저 7월 8일 발동된 데켈(Dekel) 작전으로 7월 18일 까지 중부 갈릴리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떨어집니다.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방적으로 패주해 버립니다. 데켈 작전 종료 이후 일시적인 소강기가 시작되자 아랍해방군 병사들은 식량 부족, 질병 등의 이유로 대규모로 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스라엘이 다시 히람(Hiram) 작전을 발동해 공세로 나서자 이미 붕괴 상태에 있던 아랍해방군은 전면적으로 패주합니다. 식량은 커녕 물 조차 보급받지 못하자 병사들은 물을 찾아 부대를 이탈해 버리고 일부 병사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레바논 경찰에 총을 팔아 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랍해방군의 제1 야르무크(Yarmuk) 대대는 히람 작전 기간 동안 불과 세 명의 전사자만 냈으며 피해의 대부분은 탈영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니 전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패주의 뒷면에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패주하던 아랍해방군 병사들이 같은 무슬림 형제들을 약탈하거나 강간했다는 것 들입니다.

이미 승전행사를 한 뒤 쉬고 있던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의 대공세를 맞은 아랍해방군이 포병 지원을 요청하자 점잖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을 석권한 이스라엘이 레바논 국경을 넘자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해 버렸습니다. 결국 레바논군에게 실질적인 전투는 말리키야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끝나고 포로 교환이 있었을 때 레바논측은 36명의 포로가 귀환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랍해방군에 지원한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였다고 합니다.

레바논은 놀랍게도 1948년의 난장판을 별다른 손실 없이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항상 이렇게 좋은 결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결국 참혹한 내전에 휘말려 콩가루가 되었다는 씁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요.


참고문헌
金熙相, 『中東戰爭』, 日新社, 1977/1989
Chaim Herzog, Shlomo Gazit, The Arab-Israeli Wars: War and Peace in the Middle East, Greenhill, 2004
Matthew Hughes, ‘Collusion across the Litani? Lebanon and the 1948 War’, The War for Palestine(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2007
Ilan Pappe, The making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947~1951, I. B. Tauris, 1992/2001

※잡담 1. 참고 자료를 찾아 볼까 해서 레바논군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로 서비스가 되는군요. 레바논군 박물관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레바논이 안전해 지면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곳 입니다.

※잡담 2. 이번에 글을 쓰면서 찾아 보니 셰합 대령은 나중에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더군요.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군고위직은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징검다리인가 봅니다.

2009년 1월 12일 월요일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by Richard L. DiNardo

옛날 농담 하나.

히틀러와 도죠가 지옥에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히틀러가 말하길.




“다음 전쟁은 이탈리아를 빼고 합시다.”

이 썰렁한 개그가 상징하듯 2차대전 당시 독일과 그 동맹국들간의 공조체계는 엉망이었습니다. 이미 푀르스터(Jurgen Förster) 같은 쟁쟁한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디나르도(Richard L. DiNardo)의 Germany and the Axis Powers 역시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들과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붕어빵 같이 똑같은 내용이라면 굳이 책을 쓸 필요가 없었겠지요. 디나르도는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를 각각 전략 차원과 작전 차원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에서는 독일군의 각 병종 별로 동맹국들과의 협력의 성과가 달랐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동맹군과의 관계에서 가장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중해 전역에서 몰타에 대한 공격과 루마니아의 플로예슈티(Ploieşti) 방공전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궁극적으로는 동맹국들을 하위 동반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기술 협력에서는 비협조적이었다는 한계를 지적합니다. 독일 육군과 동맹국의 관계는 최악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부전선입니다. 독일 육군은 동부전선에 대규모의 동맹군을 끌어들였지만 정작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보급에는 비협조적이었으며 이것은 1942~43년 겨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합니다. 동부전선에서 동맹군 사령부에 파견된 독일연락장교들은 종종 상대방이 무례한 간섭으로 여길 정도로 행동해 거부감을 키우는 등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동부전선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관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 미국의 관계와 비교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가 독일 육군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꼽는 것은 롬멜인데 저자는 롬멜은 동맹군인 이탈리아군을 잘 활용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저자는 전략 단위의 동맹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미국과 영국과 같이 통일된 전략적 지휘체계가 없었다는 꼽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와 발칸반도에서 무모한 모험을 벌여 독일을 수렁에 빠트린 것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이해 관계가 제각각 이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해관계 차이는 지중해 전역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동부전선에서도 동맹국들이 각각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치중했기 때문에 1944년에 파탄을 가져왔다는 것 입니다. 독일의 동맹국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핀란드도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1942년 말부터 전쟁에서 빠질 구실만 찾았으며 독일의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공세에 무관심했다는 점은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흥미 있게 생각한 것은 독일은 미국보다 뒤떨어지는 산업력으로 미국이 자국의 동맹국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 입니다.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군사 및 경제원조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미국이 아니었으니 이런 체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우수한 해군을 가졌지만 석유 부족으로 1942년 초부터 작전에 지장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지중해 전역을 위해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석유 보급에 신경 썼지만 독일의 능력으로는 이탈리아 해군을 지원하는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1943년 이후 동맹국들은 독일에 더욱 더 많은 원조를 요구했지만 이제는 독일 스스로도 자국의 필요량을 채우는데 급급해 졌습니다.

저자는 독일이 1차대전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독일은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제 1의 동맹국을 단순한 하위 협력자로 대했는데 그러한 과오를 2차대전에서도 반복했습니다. 특히 전략적 차원에서의 동맹 관계는 완전한 실패 그 자체였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반대로 독일의 적국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 모두 독일보다는 양호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차대전 당시 영국-프랑스의 관계나 미국-영국의 관계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독일과 그 동맹국들과는 달리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가 가능한 강대국들이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주요 동맹국들은 하나 같이 독일보다 국력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국가들이었고 열강 대접을 받던 이탈리아도 그 점에서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만약 독일이 자국과 동등한 수준의 동맹을 가졌다면 2차대전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한국전쟁시기 한미관계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한국은 월등한 국력의 강대국을 동맹으로 가진 만큼 이 저작이 충분한 시사성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 - 김태우

국내의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한 양이 축적되어 있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기원과 발발과정, 또는 휴전과정과 그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대부분은 전쟁기의 학살, 피난민 문제 등 사회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본격적인 군사사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흥미로운 민간 연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09년 1월 7일 수요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룡인시에 사는 어린양입네다

오늘 도착한 책 한 권.


헉. 이 어린양이 졸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거주하는 태양민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가끔 그냥 Korea라고 표기해서 오는 경우는 봤는데 North Korea로 찍혀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에 주문한 책 중에서 이놈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점이죠.(4일만에 날아와서 놀랐습니다.)

가카의 대약진운동 2

정부의 일자리 대책에 대해서 언론들이 재원 조달 방안이 미흡하다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녹색 뉴딜] 급한 일자리+친환경 성장 '한국형 뉴딜'

조선일보도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군요.

[사설] '녹색 뉴딜'로 정말 96만 개 일자리 창출 가능한가

이번 대책은 정책적 고려가 부족한 상태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졸속으로 수립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이런 불황 상태에서는 정부 지출로 이런 임시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건 일단 재원 조달 방안은 확실해야 믿을 수 있지요. 그런데 정부의 계획은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뭐 어떻습니까. 일자리만 늘어나면 되는거죠!

한국일보에서 퍼왔습니다.




중국이 철 생산량을 늘린 것 처럼 말입니다!

2009년 1월 6일 화요일

가카의 대약진운동

지하철 가판대에서 한국일보를 사보니 1면에 아주 멋진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올해는 완전고용 시대?

가카께서 명령을 하달하니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이건 무슨 대약진운동 시기의 농민대회를 보는 것 같군요;;;;


공업에서의 대약진에 앞서 먼저 식량 생산에서 증산 경쟁 운동이 일어났다. 1958년에 ‘최고의 수확을 다짐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 과거 밀 수확량은 1에이커 당 500근에 불과했으나 이날 출전한 첫번째 인민공사 대표는 1에이커 당 3,000근을 목표로 내세웠다. 두번째 대표는 4,000근을, 세번째 대표는 5,000근을 다짐했으며 결국 대회에서는 모두 10,000근을 달성할 것을 결의했다.

차문석, 『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박종철출판사, 2001, 244쪽

넵. 물론 결과는 다들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가카는 마오주석 부럽지 않은 양반입니다. 가카께서 일자리를 만들라고 하시니 각 부처별로 일자리 만들기 경쟁을 하는군요. 벌써 일자리가 100만개를 넘어섰다고 하니 남조선은 구원받았습니다!

※ 역시 한국일보는 돈 주고 사 볼 가치가 있는 신문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기사를 뽑아낸다는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2009년 1월 5일 월요일

Napoleon's Last Victory and the Emergence of Modern War - by Robert M. Epstein

Ladenijoa님이 트라헨베르크(Trachtenberg)계획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대 나폴레옹 필살전법 - 트라헨베르크 플랜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나폴레옹 전쟁 후기의 전투들이 1807년 이전의 전투들과 성격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설명해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 입니다. 1813년 뤼첸(Lützen)바우첸(Bautzen)에서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열세한 동맹군에 대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05년과 1806년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거둔 눈부신 승리들은 나폴레옹의 전성기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나폴레옹은 저 두 전역에서 동맹군을 상대로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외교적으로 크게 유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07년의 아일라우(Eylau)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프랑스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우위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제 프랑스군이 언제나 전술적으로 동맹군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1805년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동맹군이 전장에서 프랑스군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것일까요?

오늘 이야기 하고 자 하는 엡스타인(Robert M. Epstein)의 ‘Napoleon's Last Victory and the Emergence of Modern War’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저작입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를 분석해 이 전역을 기점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근대전쟁의 성격도 변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엡스타인이 주목하는 점은 이 전역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나폴레옹은 1805년과 1806년의 전역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일방적인 대승리를 거두면서 외교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두 전역에서 동맹군은 항상 결전장에서 프랑스군에게 주력이 격멸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1809년 전역에서는 나폴레옹이 똑 같은 승리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엡스타인은 그 원인으로 1805년 이후 동맹군도 프랑스와 동일한 군제개혁에 성공한 점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이 전역 이후로 프랑스를 모방한 군-군단-사단-여단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완성합니다. 러시아군은 1807년의 아일라우 전투 당시 불완전한 군단-사단체제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1809년까지 전쟁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군단-사단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실험할 기회가 1809년에 찾아옵니다.

※ 초기 프랑스군의 사단편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을 한 편 썼습니다.
->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1809년 전역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자신의 적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바그람 전역의 초반인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지휘하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결전인 바그람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후퇴시키긴 하지만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 전역이 본격적인 근대전쟁의 막을 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한 차례의 전역에서 결전을 이끌어내 적을 무너뜨렸지만 1809년 전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군단-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프랑스군이 과거에 누리던 전략적 기동의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한 개 군으로 편성되어 느리게 이동하던 적을 상대로 군단단위로 분산된 부대를 신속하게 전개해 전략적으로 포위, 결전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의 적들도 군단단위로 기동하게 됨으로서 프랑스군의 이러한 기동성의 우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군단단위로 넓은 전장에 산개해 이동함으로서 군단단위의 산발적인 교전의 가능성이 늘어나고 중앙의 사령부에서 전장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 졌습니다. 모든 장군들이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일 수는 없었습니다. 1813년의 독일전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된 근대적 전쟁의 여러 측면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단 한차례의 결전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뤼첸, 바우첸, 그리고 드레스덴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결전을 기대하면서 라이프치히에서 동맹군과 싸웠지만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 끔찍한 인명손실을 입힌 소모전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813~14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점진적으로 소모되어 갔으며 이것은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이어집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해할 수 는 없었던 전쟁의 역동성에 의해 타도된 것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져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근대 이후의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2009년 1월 1일 목요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해 제 블로그에 대해서 간단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는 술자리 잡담 분위기를 지향합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로 진지한 듯 하면서도 진지하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는 대학가의 맥주집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제 관심사와 지식의 범위가 지독히 좁다 보니 블로그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관심사를 넓히기 위해 노력중인데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는 않는군요;;;;

제 재미없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들은 모두 환영합니다.

그 밖에, 저의 정치적 성향이나 기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즐거운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2009년 첫 날은 어떻게 맞으셨는지요?

저는 원래 어제 쯤 강원도나 경상북도 북부의 한적한 마을로 가서 삼일 정도 조용히 쉬다 오려했으나 일이 계속 밀리다 보니 일을 하면서 2009년을 맞게 됐습니다. 지금도 일을 하는 중 입니다.(;;;;) 제가 좀 게으른 인간이다 보니 빨간 날에도 의자에 앉아 있는게 좀 고역이로군요.

그러고 보니 2009년은 구글 블로거로 옮겨온 이후 세 번째로 맞는 해 입니다.

되돌아 보면 재미있는 글을 쓰겠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썰렁한 농담이나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에 불과한 글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댓글로 격려를 해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9년에는 보다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역시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많은 분들을 새로 만나고 그분들을 통해 몰랐던 사실을 배워간다는 점일 것 입니다. 이런 점이 블로그 활동을 계속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겠지요. 많은 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일일이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2009년은 모든 분들께 즐거운 일이 가득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