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말 이겠지만 어느 나라건 간에 외국인의 자국군대 입대에 대한 법적 근거는 있기 마련이고 독일도 당연히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5월 21일에 제정된 독일 국방법(Wehrgesetz)의 1조 1항은 모든 ‘독일남성’을 대상으로 국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닌 외국인과 무국적자의 경우에는 18조 4항에 의거해 총통의 허가를 받을 경우 자원입대가 가능했습니다. 외국인의 자원입대를 허가하는 권한은 다시 1935년 6월 26일에 전쟁성장관(Reichskriegsminister)에게 주어졌다가 1938년 2월 4일에는 국방군총사령관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사령부는 1939년 10월 7일자로 이중국적자, 무국적자, 외국인,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n)의 국방군 입대를 허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법령과 명령들이 전쟁 기간 중 잡다한 외국인 지원병 부대를 편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독일은 전쟁 초반부터 잡다한 외국인 의용부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본격화 된 것은 독소전 발발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모병활동이 있었지요. 어쨌건 초기에는 유럽인 위주로 외국인 입대를 허용했지만 소련 및 미국과의 전쟁으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독일군도 인종전시장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인도인 부대를 편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1년 4월 3일 찬드라 보스(Chandra Bose)가 소련을 경유해 독일로 입국한 뒤였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잘 나와 있는데 보세는 스탈린이 인도 독립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해서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보세가 독일로 오자 독일 외무성은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트 주 졸츠(Adam von Trott zu Solz) 참사관의 관할하에 ‘인도 특별국(Sonderreferats Indien)’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 처럼 인도 독립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스는 1941년 4월 29일에 처음으로 인도군 포로를 중심으로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독일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독일 측에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독립군을 인도로 진격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방안은 현실성이 부족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스는 독일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942년 5월 27일에 히틀러와 회견하고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별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펀자브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셰다이(Mohammed Iqbal Shedai)라는 독립운동가가 반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셰다이는 종교 때문에 이슬람 중심의 인도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 보스와 회담한 뒤에는 힌두교도와의 협력으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움직여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데 합의합니다. 보스의 활동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인도독립군 편성에 동의하게 됩니다. 인도독립군의 근간은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수용된 인도군 포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6월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이하 인도군단)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1942년 7월에 1,738명의 인도인 포로가 기차편으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롬멜이 1942년 6월 21일에 토브룩을 함락시키면서 추가로 6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인도군 포로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인도 독립군을 연대 급으로 편성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에서 공작원으로 공수훈련을 받고 있던 80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도군 포로들을 활용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으나 1942년 이후 사실상 이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포로들을 받고 보니 보스 휘하의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1942년 7월에 인도군단에 자원한 포로는 280명에 불과했고 이것은 당초 보스의 예상을 밑도는 규모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인도받은 포로 중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은 자들은 다시 안나부르크(Annaburg)와 람스도르프(Lamsdorf)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모집을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초의 자원자가 모집되자 작센의 프랑켄베르크(Frankenberg)에서 첫 번째 대대의 편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레스덴 근교의 쾨니히스브뤽에 훈련소가 설치되고 이후의 부대편성과 훈련은 이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인도군단의 본대와 별도로 50명이 브란덴부르크 교도연대(Lehrregiment Brandenburg)로 보내져 특수공작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군단의 편성 초기에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지원자 중에는 부사관 이상의 포로가 전혀 없어 소대 편성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측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부사관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포로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어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포로들이 또 다시 카스트와 종교별로 나뉘었습니다. 포로 중 50%는 힌두교도, 25%는 이슬람교도, 20%는 시크교도, 5%는 기독교도였는데 이들을 그냥 섞어놓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군단은 1942년 10월까지 추가 지원자를 받아들여 대대급으로 확장됩니다. 첫 인도군 대대의 지휘관은 크라페(Kurt Krappe) 소령이었습니다. 이 대대는 42년 10월 보스와 주독일본대사관 무관 등의 참관하에 대대훈련 시범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전 목적이 강한 훈련이었습니다. 인도군단은 1943년 2월에는 제3대대의 창설을 마치고 총 15개 중대 3,000명으로 증강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선 모두 정신 없이 꼬여가던 시점이라 독일군 수뇌부는 인도군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스도 독일의 태도에 실망해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인도군단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든 1개 연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인도군단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인도군단 병사들 중 일부는 당초 인도독립전쟁을 위해 자원한 만큼 프랑스로 갈 수 없다고 항의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독일측은 이 중 주모자 두 명은 6년형을 선고하고 이외에 시위에 가담한 40명도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인도군단은 1943년 5월 벨기에로 이동해 제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됩니다. 이때 인도군단은 제950보병연대로 개편됩니다. 연대장은 크라페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된 2개 대대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동해 1대대는 Ymuiden에, 2대대는 Texel섬에 배치됩니다. 인도군단의 2개대대는 다시 1943년 9월에 남부프랑스로 이동해 제344보병사단에 배속됩니다. 1944년 1월 8일에 제159예비사단이 보르도를 담당하게 되자 인도군단은 159예비사단으로 배속 변경됩니다. 인도 자원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943년 10월 1일에는 12명의 인도인 부사관이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일-힌두어 사전이 보급되어 언어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1944년 6월 30일, 인도군단의 9중대(장교 3명, 부사관 및 사병 199명)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9중대는 2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44년 7월 리미니(Rimini)에 배치됩니다. 9중대는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빨치산 토벌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도군단의 나머지 병력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퇴각전 과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교전했는데 이중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29명이 9월 22일에 학살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측은 인도군단이 퇴각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항의했는데 실제로 인도군단 병력이 레지스탕스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고 약탈행위를 한 사례가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독일 국경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인도군단 병사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인도군단 3대대는 9월 16일에 미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별다른 중장비가 없는데다 전의도 없어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제3대대가 콜마-스트라스부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대 병력 중 300명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퇴각한 이후 인도군단은 후방 경계 및 진지 공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도군단이 프랑스에서 퇴각전을 치르는 동안 인도군단에 관심을 가진 고위층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친위대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히믈러였습니다. 인도군단은 1944년 8월 8일부로 친위대 해외국(Auswärtigen Amt) 관할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인도군단이 퇴각전 중이었기 때문에 크라페 중령이 계속해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퇴각전을 치르고 알자스에 도착한 인도군단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관할이 친위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1944년 11월, 인도군단은 다시 독일 영내로 이동해 라스타트(Rastatt)와 뷜(Bühl) 지구에 주둔하다가 다시 12월 말에는 호이베르크(Heuberg)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무렵 인도군단은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1945년 초에는 계속 후퇴만 하다가 4월에 모든 전투장비를 독일측에 반납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인도군단의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단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됩니다. 본대와는 떨어져 있던 인도군단의 보충대대(Ersatzbataillon)는 미군에 항복합니다.

인도군단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뒤에 있었던 일은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Rudolf Absolon, Die Wehrmacht im Dritten Reich Band V, Harald Boldt Verlag, 1988
Carlos Caballero Jurado,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 Osprey, 1983
Franz W. Seidler, Avantgarde für Europa : Ausländische Freiwillige in Wehrmacht und Waffen-SS, Pour le Merite, 2004

※ 위에서 언급한 저작 들 중 Carlos Caballero Jurado의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는 오류가 몇 가지 있더군요. 인도군단에 대한 내용 자체도 짤막하긴 하지만 연대 편성에 대해 나와 있어서 참고했습니다.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간만의 짐바브웨 이야기

Zimbabwe declares cholera emergency

A month ago, the hospitals were overflowing. Now they lie empty

Zimbabwe declares cholera emergency

정치적 난장판과 식량난을 겪던 짐바브웨에 이번에는 콜레라가 덮쳤다고 하는군요. 짐바브웨의 참상을 전하는 소식들을 보면 1946년 남한에 창궐한 콜레라 사태의 참상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정치적 상황은 한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재로 안정(????) 되어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무가베는 반대 정파를 내각에 입각시키는 선에서 타협을 보려 했는데 효과는 꽝인듯 싶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짐바브웨가 처한 문제가 산더미로군요. 짐바브웨는 경제적으로도 파탄상태이니 국제적인 원조가 없다면 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영국 등 국제사회는 경제적 위기와 전염병 창궐 등에 대한 무가베 정권의 무능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든 브라운 영국총리와 라이스 국무장관이 무가베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격렬히 비난하는군요.

Mugabe must go, Brown insists, as crisis grips Zimbabwe

Condoleezza Rice: Southern Africa must pressure Mugabe to quit

일부 인사들은 무가베 축출을 위한 국제사회의 무력 개입도 주장하고 있군요(;;;;)

짐바브웨를 볼 때 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제3세계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능력과 정통성을 다 가지면 좋은데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죠. 물론 둘 다 없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만. 만약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남한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민감한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기 딱 좋지요.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회해전역 패배에 대한 장개석의 반응

장경국이 쓴 장개석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해전역이 종결될 무렵 장개석의 반응을 서술한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회해전역은 국민당 직계 군이 대규모로 괴멸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전역인데 장개석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는 꽤 궁금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장경국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담담했던 모양이더군요. 과연 실제로 그랬을지는 조금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구청천(邱淸泉) 사령관이 오늘(1월 9일) 전쟁터에서 전사 했다. 지난해 11월 22일 황백도(黃伯鞱) 장군이 서방회전에서 전사한 이래로 우리 군의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두율명(杜聿明) 부대 역시 근일 정세가 몹시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군이 서주에 저장해 두었던 화학포탄을 미리 폐기하지 못한 관계로 공산군이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 진지를 파괴하고 많은 장병들을 참살시켰으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영성(永城)과 숙현(宿縣) 사이의 청룡집(靑龍集)과 진관장(陳官莊) 지구의 두율명 부대는 이미 반격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버렸다. 아버지는 두(杜), 구(邱) 사령관의 전보를 받고는 전국이 절망 상태임을 판단하고 그들을 데려올 비행기를 보냈다.
두율명 부대가 격파를 당한 뒤 아버지는 일기에 그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율명 부대가 오늘 아침 태반이 공산군에게 격멸된 모양이다. 보고에 따르면 그래도 3만 명이 진관장 서남에서 포위망을 뚫고 있다는데 무사히 탈출했는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여태 남들의 강압 때문에 인퇴를 할 수 없다고 버텨 온 것도 실은 이 두율명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내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어야 하고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태연해 지기도 한다.

蔣經國 著/金學主 譯, 『풍운 80년의 나의 아버지 蔣介石』, 澈文出版社, 1976, 183~184

주력군이 붕괴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되었는데 마음이 태연해 진다니(;;;) 확실히 장 총통 각하도 대인배는 대인배인 모양입니다. 장경국이 인용한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장개석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짧은 글을 두 편 썼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007 - Quantum of Solace

주말이고 해서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원래는 어제 저녁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와일드 번치’를 볼 생각이었는데 약속이 하나 생겨서 보지 못 했습니다. 와일드 번치는 예전에 재상영 했을 때 극장에서 한 번 보고 DVD도 샀지만 극장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많이 아쉽더군요.

오늘 본 영화는 007 - Quantum of Solace였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온 지난번 007도 그랬지만 새 007은 이전 시리즈들 같은 황당한 맛이 없습니다. 왠지 007 답지 않더군요. 원작 소설은 어떤 형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화판 007은 뭔가 황당한 짓을 하는 적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 007의 악당들은 소박하게 수자원 확보 정도에 열을 올립니다.(;;;;) 최소한 우주 병기를 가진 북괴군 정도는 나와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전 시리즈들에서 줄기차게 나오던 007의 유치한 비밀무기도 없으니 더욱더 007 답지가 않았습니다. 007이 몸으로만 때우다니(;;;;;) 몸으로 때우는 첩보원은 이미 ‘제이슨 본’이라는 좋은 캐릭터가 있는데 007도 비슷한 짓을 하니 좀 별로였습니다.

나름 첩보물이라고 남미의 쿠데타나 미국과의 갈등 등 그럴싸 해 보이는 요소를 집어넣었지만 묘사 방식이 유치하다는 생각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팔아먹는 강대국은 너무 많이 우려먹는 소재라 007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007은 007답게 여자를 꼬시면서 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황당한 악당을 때려잡아야죠.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하는 것은 007이라고 할 수 가 없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좋은 배우 같아 보이지만 그가 연기하는 007이라는 캐릭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만약 제임스 본드가 아닌 다른 캐릭터였다면 불만이 없었겠지만 말이죠.

아. 물론 볼만한 영화이긴 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007이 아니란 점이 문제였죠.

2008년 12월 4일 목요일

소련군과 신발

sonnet님께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의 의무지원 문제를 다룬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sonnet님이 인용하신 책들을 읽다가 소련의 부실한 전투지원 능력에 대해 경악했는데 특히 병사들의 개인 군장류의 문제점이 심각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신발 문제였습니다.

특히 군화가 문제였다. 합성소재로 만든 군화는 암석이 많은 거친 지형에서 1개월 정도만 신어도 닳아 떨어졌다. 군화의 바닥 부분은 너무 미끄러웠고 군화의 끈을 묶는 부분은 모래나 작은 돌이 신발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지 못 했다. 더욱이 소련제 군화는 너무 무거운데다 발목 부상이나 삐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병사들은 체코제 등산화(아프가니스탄 군에 지급되는)나 육상용 신발(track shoes), 스니커즈, 운동화(gym shoes) 같은 것을 선호했다.

The Russian General Staff(translated & edited by Lester W. Grau & Michael A. Gress), The Soviet-Afghan War : How superpower fought and lost,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289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초강대국이 제대로 된 신발 하나 보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신발 외에도 부족한 피복과 개인 장구류의 문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문제를 이 정도로 인정하고 있었으니 전선의 실상은 더 고약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니더라도 소련군이 신발과 피복 보급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여기 저기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들은 것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이야기 인데 1960년대에는 문제가 조금 더 좋지 않았던 것 같더군요. 서방으로 망명한 뒤 1980년대에 소련군에 대한 이런 저런 찌라시(???)를 유포했던 빅토르 수보로프는 자신이 초급 장교로 있던 1960년대의 소련군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 군인에게는 가죽군화가 지급된다.

소련군에서는 ‘신병(Ersatz)’이 들어오면 보급품을 지급 한다. 이후 소련 병사가 가죽군화를 신는 것은 짧은 기간 뿐이며 천으로 만든 군화 같은 것을 지급받는다. 오직 주요 도시에 주둔하는 근위연대나 근위사단(Hof-Regimentern und Divisionen) 정도만 싸구려 가죽군화를 지급받았을 뿐이다. 외국인들은 소련군인이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동독, 폴란드, 헝가리 등에 주둔하는 소련 점령군은 가죽 군화를 지급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련은 ‘초강대국’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초강대국’은 모든 병사들에게 가죽군화를 보급할 능력이 없었으며 소련에 주둔한 소련 병사들은 천으로 만든 군화를 신고 행군해야 했다.

Viktor Suworow, Der Tag M, Klett-Cotta, 1995, s.11

이보다 20년 전인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소련군의 신발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아서 자본주의자들로부터 신발을 받아가며 싸웠다지요.;;;;;

이런걸 보면 냉전기에 수백만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는 꿈도 못 꿀 보급과 전투지원을 할 수 있었던 미국이 정말 무서운 나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3일 수요일

'칼, 실용과 상징' : 고려대학교 박물관

얼마전에 번동아제님께서 소개해 주신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도검 전시회, '칼, 실용과 상징'전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별로 없어서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제왕의 칼', '무사의 칼', '선비의 칼', '여인의 칼', '신들의 칼' 등 다섯가지 주제로 이루어 졌는데 재미있는 구분 방식 같습니다. 전시 구성외에도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료로 배포되는 안내용 브로셔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알차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전시실의 구성과 배치도 좋은 느낌이더군요.



전시물 중에는 조선, 일본, 청나라의 갑옷도 있어서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복을 입은 철종어진의 모사도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은 처처음 봤습니다. 전시실의 설명문에는 철종어진이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조선국왕의 어진이라고 하는군요.
전시된 칼 중에서는 흑칠천단초금장곡병환도(黑漆千段草金裝曲柄環刀)가 인상 깊었습니다. 개항기 이후 서양식 예도의 외형을 응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더군요.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런 물건을 접하니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식칼도 흥미로운 전시품이었습니다.


전시물 관람을 마친 뒤 전시실 밖에서 은장도 제작과정을 다룬 영상물을 관람했습니다. 정말 재미있더군요.

그리고 전시회 포스터도 한 장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가 그렇지만 사진 촬영이 안되는 점은 유감이었습니다. 전시도 재미있었고 전시물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도 있어서 도록을 구입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알찬 전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도검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라서 전시물들에 대해서는 뭐라 평할 방법은 없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한번 관람하셨으면 싶습니다.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잡담

어제 2008년의 가장 중요한 일을 완료했습니다. 마무리가 뭔가 조금 이상하게 된 것 같긴 한데 뭐 중요한 일을 끝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겠군요.

그리고 역시 어제 2008년 하반기의 가장 중요한 일도 완료했습니다. 계약 때문에 추가적인 작업이 더 있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이 일 덕분에 10월 부터 11월 까지 두달 가까이 정신이 없었던 걸 생각하면 덜덜덜 합니다.

11월 마지막 주는 중요한 일 두가지 때문에 거의 정신이 없었는데 12월에는 조금 여유가 생길 듯 싶군요. 번동아제님이 소개해 주신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특별전시를 볼까 생각중입니다. 어제는 중요한 일을 마친 김에 두달 가까이 가지 못했던 극장을 가 봤는데 볼만한 영화가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읽어야 할 밀린 책들의 압박도 있군요.

다음주에 짧게 여행을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링 제로' DVD를 찾았습니다. 아흙 유키짱!!!

압박감을 덜었으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 그러고 보니 이글루스에서는 며칠간 한바탕 논전이 벌어졌었군요.

전쟁이 변화시킨 독일의 작은 마을 - Kirchmöser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 1914~1924를 읽는 중인데 1차대전 중 화학공업(주로 화약)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뒤에 간단한 소개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개별주제에 대한 소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의 공업화에 대한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Sebastian Kinder의 Transforming a village into an industrial town : The royal Prussian powder plant in Kirchmöser라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볼 까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게이츠 국방장관이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기용되는군요

요 며칠간 정신이 없다보니 뉴스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게이츠 국방부장관의 유임이 확실해 진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됐습니다.

Gates agrees to stay on under Obama

Obama puts faith in Bush's defence secretary

Defense Secretary Gates to Keep Job Under Obama


게이츠 장관이 차기 정권에서도 유임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가을부터 솔솔 흘러나온바 있습니다.

게이츠 장관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물론 오바마가 노선차이 때문에 게이츠 장관을 유임시키지 않을 것 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Defense Secretary Gates Doesn’t Belong in Obama Cabinet


결국은 유임되는군요.

게이츠 국방부장관은 오바마 측에서 보다 더 적합한 인물을 찾을 때 까지 유임될 모양이긴 합니다만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있어서는 오바마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만큼 단순한 땜빵용 장관은 아닐 듯 싶습니다. 물론 이라크나 미사일방어체제(MD) 문제에 있어서는 오바마 당선자와 게이츠 국방부장관의 입장이 반대되는 만큼 오바마의 임기초에 게이츠 장관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궁금합니다.

2008년 11월 23일 일요일

옛날 농담 하나

어제 어떤 교수님으로 부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농담 하나를 전해 들었습니다.



30대 교수는 다 아는 것 처럼 이야기 하고

40대 교수는 아는 것만 이야기 하고

50대 교수는 하고 싶은 것만 이야기 하고

60대 교수는 했던 것을 또 이야기 한다.




나름대로 진리인듯 싶습니다.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패배의 조선일보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靑 "미네르바, 처벌 아닌 경제관료로 기용" 주장 진위 여부 주목

그렇다면 이 기사의 출처가 된 한국일보의 칼럼을 보시죠.

[서화숙 칼럼/11월 20일] 핵심관계자 대 미네르바

하지만 이건 그냥 농담입니다.

※ 서화숙 칼럼에 대한 해설(?)은 sprinter님 블로그에 올라온 농담이겠지?를 참조하세요

아흙. 이런 개그에 낚이면 어쩌자는 거냐 조선일보! 어떤 글이건 끝까지 다 읽어 봐야지;;;;;

아아. 패배의 조선일보;;;;

※ 프레시안이 낚인 언론들에 대한 기사를 썼군요. 낚인 언론이 한두곳이 아니었네요;;;

"'미네르바 경제관료 기용' 칼럼은 '패러디'"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하얼빈지방검열부 통신검열월보' 1942년 11월호를 읽다보니 좀 재미있는 단체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天津猶太國復興運動結成委員會


중국에도 유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시오니즘 운동이 없지는 않았겠습니다만 2차대전이 발발한 와중에 독일 동맹국의 점령지역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건 좀 깨더군요.

예전에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를 읽다가 국공내전 와중인 1948년에 만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독일인들을 독일로 송환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을 읽고 재미있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그것 보다 약간 더 특이한 것 같습니다.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John Barber의 글

A World at Total War를 읽다 보니 독소전 당시 소련의 여성문제를 다룬 바버(John Barber)의 글이 있더군요. 짤막하지만 핵심적인 부분들을 잘 짚은 것 같은데 이 글에서 소련 여군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서 올려봅니다.(좀 날림번역 입니다;;;)

전선의 병사로서(Фронтовики)

2차대전 당시 소련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기존에 있던 여성과 전쟁간의 전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약 80만명의 소련 여성이 2차대전 기간 중 군대에 입대했다. 빨치산을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100만을 넘어설 수도 있다. 연합군과 비교했을 때 소련의 전쟁은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카프카즈와 그 너머에 걸친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 걸쳐 전개된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현역 복무는 종종 전선에 직접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전통적인 업무 – 군의관, 간호사, 취사병, 제빵병, 세탁 및 목욕탕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전선에 파견된 의사 중 41퍼센트, 그리고 군의관 중 43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존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전투공병, 야전공병, 전화교환수, 무전병, 운전병, 정비병, 교통헌병, 통역병, 정보병, 그리고 정치장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열거한 임무들은 전쟁에서 필수적인 임무들이었으며 전선에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거나 사상자를 내곤 했다.

그러나 수 천명의 여성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시작된 초기의 몇 개월 동안은 여성 스스로의 자원이나 조종사 등의 특수한 임무에 필요한 경우가 아닐 경우 여성의 전투 참여는 배제되었다. 붉은군대가 수백만명의 전사자와 포로를 내고 이들의 빈자리를 메꿀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 진 1942년 초에 가서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전투에 직접 참여할 여성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봄부터 시작된 콤소몰 주도의 대규모 모병 활동으로 방공군 10만을 포함해 수많은 여성이 모집되었다. 1944년까지 네 차례의 여성 모병운동이 더 있었다. 1943년에 이르러 여성은 소련 군대 병력의 8퍼센트에 달했다. 1945년에는 여군 병력이 246,000명에 달했다. 소련 여군들은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백병전을 치르고 포병과 대공포 부대에서 활동했다. 또한 여군들은 저격병과 기관총사수, 공수부대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여군 중에는 전차장과 보병 소대장도 있었다. 전투기 연대 한 개와 폭격기 연대 세개는 조종사부터 정비병까지 모두 여성으로만 편성되었다. 독소전에 대한 영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는 2차대전 중 소련 여성의 전쟁 참여 기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역사상 용기와 인내, 그리고 수난의 이야기로서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드물 것이다. 붉은군대의 우수한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연방영웅이 되거나 사후에 추서되었다.” [Erickson 1993, 59~60]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한 동기는 다양했다. 많은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취한 요소는 애국심과 전쟁수행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어떤 볼고그라드 출신의 여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탈린 동지에 대한 사랑”으로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여성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참전 결정은 보다 개인적인 의도에서 이뤄지곤 했던 것 같다. 전사한 남편, 남자 형제, 아버지, 아들, 애인의 복수나 또는 전선에서 이들을 찾기 위해서 등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곤 했다.

최근 독소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경외감, 이질감, 그리고 죄책감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전쟁의 현실간의 괴리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었다. 한 참전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남자군인들이 전선에서 여성을 목격하면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군 한 명의 목소리로도 남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참전군인의 회고는 이렇다. “여성이 전투에 참여하면 남자들은 보다 명예롭게 행동하고 용감해졌다.” 반면 저격병으로 활동했던 한 참전군인은 살인이 가지는 “비여성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두 명의 여자가 저격용 소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무인지대로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 ‘사냥’이다. … 비록 나 자신도 저격수였지만 … 어쨌든 나는 남자였다. … 나는 수색정찰을 나간다면 이런 여자들과 함께 가겠지만 아내로서 함께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선의 여성들은 남성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위험과 잔인함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그들이 적의 손에 사로잡힐 경우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여성들은 그와 반대로 폭력적인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전투 중 적의 전차 두 대로부터 공격 받았을 때 두 명의 남성 군인이 비겁한 행동을 했다. … 방어선이 유린되고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 파시스트들은 우리의 부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다음 아침에 대대원 전체가 정렬한 자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들을 끌어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 총살대에 의한 처형 … 세 명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기관단총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랐다. …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선의 남성과 여성간의 작용은 전우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야전의 아내(Подно-полевая Жен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그리고 이것은 붉은 군대의 여성에 대한 태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였다.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 전선에 있는 여군은 장교들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만약 한 여군이 남자가 생기면 이제 다른 남자들도 끊임없이 치근덕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격렬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한 전선의 생활은 개인간의 사적인 관계를 촉진시켰다.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법적 지위였다. 군대에서의 결혼은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고 공인된 관계를 가지는 남자와 여자의 숫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복잡한 남녀관계가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

John Barber, ‘Women in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39~241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큰일났다!

「링0 : 버스데이」 DVD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 비좁은 방 밖으로는 나간적이 없는 DVD인데 도데체 어디로 간 것인가. DVD들 사이에 없는걸 보니 책장 어디쯤에 꽂혀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봐도 안보인다. 이럴수가!



아흙. 유키짱 지못미;;;



※ DVD를 찾으면 나카마 유키에 말고는 건질게 없는 이 졸작영화에 대해서 글이나 써볼까 합니다. 빨리 찾아야 되는데;;;;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부시 행정부의 민군관계에 대한 한 공화당 지지자의 비판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상당수의 공화당 성향 유권자들이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오바마에 투표했다는 점이 재미있더군요. 오늘 할 이야기는 부시 행정부의 삽질에 환멸을 느낀 한 골수 공화당원에 대한 것입니다.

미국은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잘 확립된 국가입니다. 하지만 문민통제는 민간인으로 이뤄지는 최고 정책 결정집단과 이를 수행할 군인들 간에 힘의 균형이 이뤄져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시 대통령 + 럼즈펠드 국방장관 이라는 최강의 조합으로 미국식 문민통제가 막장으로 치닫는 모습을 이미 구경했으니 균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입니다.
민군관계와 관련해서 제가 즐겨 읽는 저자 중 한 명인 허스프링(Dale R. Herspring)은 이렇게 민간관료와 군인간의 균형 유지에 많은 관심을 쏟는 인물입니다. 이 양반의 저작들은 이미 제 블로그에서 몇 번 간략히 소개했었지요.

허스프링은 공산권의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한 번 정도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 입니다. 허스프링은 해군 대령 출신이며 또 해외 주재 무관으로 20년간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민군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발전모델(developmental model)이라는 이론을 만든 인물입니다. 이 양반의 논문이나 저서들은 대부분 소련과 동유럽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미국의 민군관계를 대상으로 한 것도 많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저작인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라던가 비교적 최근의 저작인 Rumsfeld’s War 등이 이에 속하지요.

허스프링은 자신의 저작인 Rumsfeld’ War에서 밝히고 있듯 골수 공화당원입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삽질은 이 골수 공화당원 마저 환멸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허스프링은 Rumsfeld’ War의 서두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지난 수년간 내가 쓴 모든 책과 논문 중에서 이 책의 내용보다 더 심란한 주제를 다룬 것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에 두 번이나 투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국무부의 해외 주재 무관으로서 20년간 활동했으며 32년간 미해군에 복무하면서 말단 사병에서 대령까지 진급했다. 나는 부시행정부가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WMD)로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며 사담 후세인과 9/11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인 오사마 빈 라덴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기도 했다. 나는 퇴역 해군 장교로서 나의 최고 사령관을 지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생각하지 않았다.

Dale R. Herspring, Runsfeld’s Wars : The Arrogance of Powe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ix

하지만 이 골수 공화당원은 부시 행정부의 삽질, 특히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럼즈펠드의 삽질에 환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2003년 3월의 이라크 침공을 결행하는 과정과 미군의 군사적 전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됐다. 나는 대통령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발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도 사담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어쨌건 후세인은 이라크인들에게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했으며 또 이란에도 사용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담과 빈 라덴의 연관성에 대한 가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매우 실망했으며 분노했다. 이 가설은 국방부의 민간 관료들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이 명백해졌으며 만약 국방부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와 그의 측근들이 자료를 왜곡하고 대통령에게 이라크 침공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현재 미군은 이라크에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늑대가 문 앞에 닥쳤다고 요란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우리에 갇혀 있는 늑대가 위협이 된다고 사람들을 믿게 만들려 했다.
그리고 나는 럼즈펠드가 직업 군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럼즈펠드는 최소한 30년 이상을 군에 헌신한 고위 장성들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으며 군사 혁신과 군사전술, 그리고 작전 절차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장군들에게 강요했다. 물론 (군에 대한) 민간 통제는 원칙이지만 이것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장관과 군대 사이에 상호 존중이 있어야 한다.

Ibid, pp. ix-x

허스프링은 이미 이 책을 쓰기 몇 년 전에도 부시 행정부가 군대에 대해 저지르는 삽질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바가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전쟁 수행 방식은 존슨 행정부와 한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다르다. 존슨과 맥나마라는 군대를 비판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려고 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럼즈펠드의 군 개혁 시도를 지지하면서 이러한 싸움에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으려 한다.
공개된 자료들을 가지고 판단할 때 럼즈펠드는 군인들의 사고 방식이 경직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부시 행정부 초기부터 군대와는 협조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럼즈펠드는 신세키(Eric Ken Shinseki)와 같은 장교들이 군을 혁신하려 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럼즈펠드는 자신의 급격한 개혁 계획을 직접 수행하려 했으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럼즈펠드는 대부분의 군부 인사들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으며 극 소수의 장교만이 럼즈펠드의 의사 결정 집단에 참여할 수 있었다. 럼즈펠드는 자신과 자신의 민간인으로 이뤄진 측근들이 수년간 군대에 복무한 군인들 보다 미국에 대한 위협 요소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럼즈펠드는 자신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군인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에서 럼즈펠드는 군대를 멸시했다. 물론 럼즈펠드는 국방부가 외부에 어떻게 비춰지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합참의장과 합참부의장을 자신의 방식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장교로 골랐다. 저자가 보기에 마이어스(Richard B. Myers)페이스(Peter Pace)는 (럼즈펠드에게) 이의를 제기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공식적인 발표를 할 때에는 최고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개인적인 권한의 측면에서 볼 때 마이어스 대장은 2차대전 이래 가장 약한 미합참의장이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m FDR to George W. Buc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404~405

허스프링은 부시 행정부에서의 민군관계, 특히 럼즈펠드 장관과 군대의 관계에 대해서 극도로 비판적이며 2008년에는 위에서 인용한 Rumsfeld’s War라는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아예 책 한권을 할애해서 럼즈펠드를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민군관계에서 볼 때 얼마나 럼즈펠드에게 실망을 했는지 알 수 있겠더군요.

이렇게 수년간 계속된 럼즈펠드와 부시의 삽질은 허스프링 같은 골수 공화당 지지자 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잘 아시는 것이죠.

요즘 한국에서도 대통령과 한 '장관'의 삽질이 범 국민적인 짜증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부시가 럼즈펠드에게 군사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고 방관한 것 처럼 이명박도 강만수에게 큰 권한을 안겨주고 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삽질을 보면 이명박과 강만수의 관계는 부시와 럼즈펠드의 관계와 유사해 보입니다. 럼즈펠드는 미군을 이라크에 처박아 엉망으로 만들고 극심한 비판에 직면하고 나서야 물러났습니다. 물론 미군은 아직도 럼즈펠드의 삽질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명박의 신뢰를 받는 강만수가 삽질을 하면서 극심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될 수 있다면 럼즈펠드 처럼 사태를 구제불능으로 만들기 전에 강만수는 물러났으면 싶습니다만 이명박의 완고한 태도를 봐서는 당분간 어려울 듯 싶군요.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득템 - USB메모리

오늘 볼펜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런데 몸통 윗 부분은 USB메모리 더군요.


용량을 확인해 보니 2기가 입니다. 여태까지 512메가 짜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제 이놈을 대신 가지고 다녀야 겠습니다. 그런데 볼펜 자체는 별로 쓸모가 없을 듯 싶습니다.

덤으로 포인터도 되는데 USB 충전방식인 모양입니다.

2008년 11월 8일 토요일

Gunpowder - 1948년 3차대전이 발발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새로운 가상적이 되자 미군 수뇌부는 매우 심각한 전략적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병력 감축이 급속히 이루어진 결과 재래식 전력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소련을 상대하기가 버겁게 된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핵무기에서의 열세를 재래식 전력으로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에 들어오면 재래식 전력에서 육군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b) 아군 :
(1) 미군은 한국에 대한 침공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2) 태평양함대는 Y일로부터 15일이 지난 뒤에야 제한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이다.
(3) 극동공군(FEAF)은 Y일로부터 3일에서 9일이 지나기 이전에는 대한해협에서 소규모의해상 활동을 보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제공권을 장악하지는 못 할 것이다.
(4)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5) 국민당정부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겠으나 만주와 화북, 산동반도의 주요 철도노선과 항구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
(6) 블라디보스톡, 부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각각 한 발의 핵폭탄으로 핵 폭격을 실시하면 이후 90일간 주요 항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b) Own Forces:
(1) That US forces will be unable to repel the invasion of Korea
(2) That Pacific Fleet units will be available for limited operations on or before Y plus 15 days.
(3) That FEAF will be unable to maintain air superiority over the Korea-Tsushima Straits area except for limited ability to protect ship movements from Y plus 3 through Y plus 9 days.
(4)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eople will wholeheartedly support the defense of Japan.
(5) That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will declare war and will be unable to prevent hostile use of the principal rail lines and ports of Manchuria, North China and the Shantung Peninsula.
(6) That one atomic bomb at each port can effectively deny Vladivostok, Pusan, and Port Arthur-Dairen as major embarkation points for 90 days after detonation.

December 31, 1948,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RG 55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Subject File, 1945-52, Entry 2, Box 5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4. 작전
a. 생략(작전지역)
b. 작전은 일본 본토와 류쿠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기본으로 한다.
c. 총괄 기동계획에 따라 한국과 화북에의 병력 철수를 신속히 하고 극동군 병력을 규슈 북부와 혼슈에 집결시키고 홋카이도는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방어하되 극동군사령부의 특정한 명령이 있을 경우 포기한다.
d. 간토(関東) 평야는 일본의 핵심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한다.
e. 극동군 사령부의 지도하에 일본정부는 다음의 지역에 전반적인 방어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 가고시마(鹿児島), 고베(神戶)-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도쿄-요코하마(橫濱), 센다이(仙台)
f. 중국에 주둔한 미군은 해로를 통한 철수를 고려하여 칭타오(靑島)를 가능한 장기간 방어해야 한다.
g. 중국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가능한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h. 제5공군은 초기에는 방공 임무에 주력하며 서부 내해 지역(동해)에서 아군 측 선박 항행에 대한 적의 공습을 저지하고 24군단의 철수를 보호하며 홋카이도-쓰가루(津輕) 해협 지구에서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i. 오키나와에 전개한 중(中)폭격비행단들은 가능할 경우 간토 평야 지대로 이동해 극동에서의 전략 폭격 임무에 참가한다.
j. 해군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 철수 임무를 수행하며 극동 지역에서의 기뢰 부설, 극동 해역의 제해권 확보를 수행한다.

4. Operations
a. –
b. Operations are based upon a strategic defense of Japan and the Ryukyus.
c. The general scheme of maneuver visualizes a precipitate evacuation of Korea and North China, a concentration of CINCFE forces in north Kyushu and Hinshu, and the defense of Hokkaido to the maximum effort practicable, to be abandoned only upon specific order of CINCFE.
d. The Kanto plain in considered the vital area of Japan, to be defended at all costs.
e. All-round field defenses will be constr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 general CINCFE direction in the following areas : Kagoshima, Kobe-Osaka, Nagoya, Tokyo-Yokohama, and Sendai.
f. US forces in china will hold Tsingtao as long as practicable consistent with Water withdrawal.
g. The Military Advisory Group in China will continue their functions as long as practicable.
h. The 5th Air Force is initially employed in air defense, in preventing hostile air attacks on friendly ship movement in the western inland seas area, in protecting the withdrawal of XXIV Corps, and similar mission in the Hokkaido-Tsugaru Straits area.
i. Medium bomb groups are concentrated on Okinawa, are displaced to the Kanto Plain area as feasible, and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Strategic Air Offensive.
j. Naval forces will conduct evacuation as indicated above,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minig campaign, and secure control of seas in Far East waters.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일본을 공격방어한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a) 24군단
(1) 지연전 수행.
(2) 인천과 부산의 항만 시설 파괴.
(3) 한국에서 민간인 철수.
(4) 한국에 잔류 시킬 정보조직의 구성.

(a) XXIV Corps
(1) Delaying Action
(2) Destruction of port facilities of Inchon and Pusan
(3) Evacuation of civilians from Korea.
(4) An intelligence establishment to remain in Korea.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발을 뺀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소식

인터넷 신문들을 보다 보니 재미있는 기사가 몇 개 눈에 띄더군요.

먼저 가디언에는 오바마 당선으로 호황을 맞은 어떤 산업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Obama election prompts surge in US gun sales

오바마 당선으로 총기 규제가 강화될 것을 우려한 시민들이 총을 사재기 하고 있다는군요. 지름신 발동!

파이낸셜 타임즈에는 신비의 나라 인도에서 경기 불황으로 기업가들의 자살이 늘어났다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 이름을 바꿔서 재탕할 수 있는 기사같습니다.

Sharp rise in Indian investors’ suicides

뉴욕타임즈에는 미군의 오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결혼식장이 박살났다는 난감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군 조종사가 외로움이 골수에 사무친 솔로였나봅니다.

U.S. Airstrike Reported to Hit Afghan Wedding

그리고 파키스탄에서도 미군 공습으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군요.

U.S. Missile Attack Kills at Least 10 in Pakistan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

국내에 나온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들은 대개 신해혁명을 다룬 다음 1차대전에 대한 설명은 간략히 하고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과 5∙4운동에 대한 서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국내에 출간된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를 모두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개설서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1차대전 같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중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개설서라 하더라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게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중국사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를 찾아 보다 보니 정말 중국과 1차대전의 관계에 대한 단행본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권의 연구는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과 함께 해외 중국학 연구의 양대 산맥인 영어권의 연구가 저 정도 라는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쉬궈치(Xu Guoqi, 徐国琦)의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는 바로 영어권의 중국사 연구에서 ‘공백’이라고 할 만한 1차대전기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유럽 파송 같은 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을 1차대전이라는 하나의 틀에 넣어 잘 정리해 놓은 글은 처음 접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연구서가 한 권 나온 일이 있긴 하다는데 이것은 중국 쪽 자료를 별로 이용하지 않고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자인 쉬궈치가 1차대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초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중국의 지식층은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병립은 다소 모순되게 느껴지는데 20세기 초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것의 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국력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국제질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강화된 민족주의는 5∙4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5∙4운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1차대전 중 근대적 민족주의가 함양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 수궈치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중국의 역할 자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 키건이나 니알 퍼거슨 등이 쓴 유명한 개설서들은 1차대전 중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중 중국 지식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청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은 아직 세계체제(World System)하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체제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중화’라는 개념 대신 ‘시민’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민’의 사상적기반으로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저자는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를 타고 수많은 근대적 언론매체들이 등장한 것은 대중(public)의 증가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적 ‘대중’은 중국의 국가적 운명과 주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대중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르는데 좀 오묘한 느낌이 드는 용어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중국 민족국가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문제로 골몰하고 있을 때 드디어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기회가 왔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 입니다.

저자는 중국정부가 1차대전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전쟁에 교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한다면 새로운 중국 국가는 평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량치차오(양계초, 梁啟超)와 같은 지식인들과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원세개의 측근이고 참정원(參政院) 참정으로 있던 량스이(梁士詒)는 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에게 참전을 부추겼고 원세개는 주중공사 존 조던(John Jordan)에게 영국이 칭타오를 공격할 경우 중국군 50,000명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1915년 말까지 계속해서 영국에게 참전의사를 밝힙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만약 중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의 참전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참전제안을 거부당하자 중국 정부는 우회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노동자 파견을 제안합니다. 이공대병(以工代兵) 이라는 정책은 역시 량스이의 발상이었다고 하는데 량스이는 1915년 영국측에 30만명의 노무자(이 중 10만명은 전선에 투입될 무장 노무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서부전선의 소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1915년 3월 프랑스가 중국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해왔고 영국은 1916년 8월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노무자들이 서부전선으로 파견됩니다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공헌은 철저히 무시당합니다. 당시 영국 외무상이었던 밸푸어(Arthur Balfour)는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해서 “1실링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는 군요.
물론 중국도 뒤에 공식으로 전쟁에 참전하긴 합니다만 애당초 중국군 파병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한 미국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군사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중국은 선전포고만 하고 전투는 참여하지 못 하게 됩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연합군에 기여한 것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참여한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 와중에 원세개가 다시 제정을 부활하려다 정권 자체가 무너져 버려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중국의 주장이 모두 무시당하면서 낭만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중화민국 초기의 외교정책은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 국제체제에 편입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무산되게 됩니다. 신해혁명 이후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적인 중국 지식인들은 1차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보인 태도를 통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깨닫고 이후 공산주의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지식인들이 냉전 초기까지도 국제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 이었는데 저자의 일부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노무자 파견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식민지 이긴 했지만 역시 수많은 노동자와 전투 병력을 파견한 베트남의 전쟁 기여도가 차라리 중국 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파병조차 하지 못했으니 기존 역사가들의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저자의 일부 논지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쉬궈치는 근대국가 건설문제를 국제전쟁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시각을 매우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일자가 다가와서 허겁지겁 읽느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은데 뒤에 다시 시간을 내서 숙독해볼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권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2008년 11월 3일 월요일

최종보스 부시

Russians With Pumpkins Protest Many U.S. Plots

러시아인들 중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매케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루지야 분쟁을 도발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올해 알게 된 음모론 떡밥 중 가장 썰렁한 떡밥이기도 하군요.

하지만 기사에서 이 부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When that will happen, we will totally control all humanity,” said the actor playing Mr. Bush, swigging a beer, as a picture of the globe in chains glowed behind him.

직접 봤다면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역시 황상폐하는 최종보스!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성범죄 문제 - Birgit Beck의 연구

살인적인 유로의 환율 때문에 요 몇 달간 독일책은 전혀 구입하지를 못했습니다. 구입하려고 찜해놓은 책이 몇 권 있긴 한데 1유로당 1800원에 육박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침만 흘릴 뿐 이죠. 이렇게 살 생각만 굴뚝같고 경제적 문제로 못 사는 책 중 한권이 비르기트 벡(Birgit Beck)의 Wehrmacht und sexuelle Gewalt : Sexualverbrechen vor deutschen Militärgerichten 1939-1945입니다. 제목부터 흥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 읽고 있는 A World at Total War라는 책에 비르기트 벡이 자신의 저작 중 일부를 요약해 놓은 에세이, Sexual Violence and Its Prosecution by Courts Martial of the Wehrmacht가 실려 있더군요. 비록 경제적으로 궁해서 비르기트 벡의 책은 못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축약해 놓은 에세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나쁘진 않더군요.

이 에세이에서는 독일 국방군이 자행한 성범죄가 독일 군법회의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인 벡은 1차대전 초기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의 강간이나 일본군이 중일전쟁 기간 중에 저지른 강간, 또는 남북전쟁 기간 중 양측에서 대량으로 자행된 성폭력 등은 비교적 연구가 많이 이뤄졌는데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가 자행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벡의 연구에 따르면 2차대전 기간 중 독일군의 민간인 강간 사례 중 실제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5,300여건에 불과하며 실제 강간에 의해 처벌받는 비중도 적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인 양상을 보면 독일군에 의한 강간은 프랑스의 패전 이후 급증했다가 1943년 이후 줄어든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1943년 이후는 독일군이 패배하면서 도망치기 바쁜 시기이니 강간할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프랑스의 패전 이후 일어난 강간사례에 대한 분석은 흥미로운데 독일군 또한 강간대상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독일군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106보병사단과 211보병사단에 의해 자행된 강간 피해자의 연령대는 6세의 아동부터 67세의 노인(;;;;)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나마 프랑스는 다행이었던 것이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이 프랑스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군율로 통제가 가능했다는 점 입니다. 1940년 7월 5일에는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취(Walther von Brauchitsch)가 각 야전군사령관들에게 강간범에 대한 처벌 문제에 대한 명령을 하달합니다. 프랑스에서 강간으로 기소되는 경우 유죄가 인정되면 10년의 징역을 선고 받는 사례도 나타납니다. 독일군 지휘부는 프랑스에서 대민관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 목적에서도 성범죄자에게 중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군요. 프랑스에서는 1944년까지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성범죄 예방을 위해 국방군이 관할하는 위안소를 대량으로 설치했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되긴 합니다.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은 인종전쟁이라는 막장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범죄에 있어서도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저자인 벡은 독일군 지휘관들도 동부전선에서는 군율을 무너뜨릴 정도가 아닌 강간은 묵인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통계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서부전선에서 강간으로 기소된 병사는 유죄가 10년 형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동부전선의 경우는 기소받는 경우도 드물었고 유죄로 판결 받더라도 1년에서 2년 형이 최고형이었다고 합니다. 나치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슬라브인 여성에 대해서는 독일인 여성과 같은 정조(Geschlechtehre)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도 강간이 아니게 되는 황당한 결정이 자주 내려졌다고 합니다. 서부전선, 특히 프랑스의 경우 성범죄는 피해자가 직접 해당 경찰서에 신고하면 프랑스 경찰이 독일 헌병과 협조해서 처리하는 등 상식적으로 처리되었으나 동부전선에서는 그나마 양심적인 독일군인들이 성범죄를 신고해야 기소가 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혹한 점령통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련 여성들이 독일 점령군을 상대로 직접 강간피해를 신고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군요. 벡은 소련에 대한 전쟁은 정복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강간은 그 정복 행위의 일종이었기 때문에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역사정치학 - 시노하라 하지메(篠原一)

지난 10월은 여러가지 일 때문에 독서량이 그야말로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난감할 정도로 독서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재미있는 책을 한 권 건졌다는 점 입니다.

시노하라 하지메(篠原一)의 『역사정치학 : 혁명, 전쟁, 민주주의를 통해 본 근대유럽의 정치변동』은 예상 이상으로 내용이 재미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책 입니다. 일단 서문에서 저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인 시노하라 하지메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실제로 실험을 할 수 없는 만큼, 역사적 자료와 사례를 제쳐두고서는 분석을 알차게 이끌어 갈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차대전 까지의 유럽사에 이론적 틀을 적용하면서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글을 써 나가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강대국에 치우친 서술을 탈피하고자 북유럽과 중동부 유럽의 소국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균형잡힌 서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개설서로서 매우 좋은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가 주된 이론적 틀로 사용하는 개념은 달(R. A. Dahl)의 폴리아키(polyarchy) 입니다. 시노하라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이전의 유럽 정치를 폴리아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론적 틀에 대한 설명을 한 뒤에는 바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로 들어갑니다. 먼저 2장에서 19세기 중반 폴리아키의 성립 이전까지의 유럽 정치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는데 개설서라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절대왕정의 성립부터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구체제의 붕괴까지의 유럽정치사를 짧은 분량 안에 아주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한 폴리아키의 성립과 중동부유럽, 남유럽의 상대적 후진성을 설명하고 또 폴리아키의 성립과정에서 등장하는 노동운동 등의 저항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9세기 중후반기의 정치변동에서 북유럽과 스위스 등 작지만 ‘선진화(?)’된 국가들의 정치적 발전과정이었습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중동부유럽의 후진 듣보잡(?) 국가들에 비해 존재감은 느끼되 정작 제대로 된 지식이 없었는데 이 책에 요약이 잘 되어 있는덕에 기초적인 개념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이후의 정치사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개설서 입니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했듯 중소규모 국가의 정치사에 대해서도 공평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다. 번역도 일부 명사가 영어식으로 옮겨진 것을 제외하면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모습을 형성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정치 양상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 입니다.

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방문객 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번에 있었던 논쟁으로 많은 방문객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유익한 조언을 해 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그가 감정싸움의 장이 된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로 많은 분들이 유익한 조언을 해 주셨고 앞으로는 이런 조언들을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신 분들이 많은데 일일이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제 블로그가 원래 그랬던 것 처럼 가벼운 술자리 잡담 분위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 방문객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유익한 조언을 주신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 진명행님께서 이 논쟁을 정리하겠다고 하셨으니 이 논쟁은 정리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방문객 여러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요 며칠간 제 블로그에서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토론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결국은 상대의 인신공격에 흥분해 방문객 분들께 누를 끼쳤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방문객들께 사과드리고 저 자신도 각성을 할 겸 관련 글들을 당분간 대문에 걸어놓도록 하겠습니다.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 -> 다시 확인해 보니 제 번역이 맞습니다.

아이고 배꼽이야! -> 제가 흥분해서 질 낮은 조롱글을 올렸습니다. 반성 차원에서 올립니다.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

사실 자료 문제로 할 말이 더 있고 해서 글을 더 쓸까 했는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그만 두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제 블로그가 늘 그랬던 것 처럼 가벼운 술자리 잡담 스타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10월 25일 6시 추가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에 진명행님의 협박이 들어왔습니다.


제 글을 수정하라고 협박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할까요?

그리고 이렇게 문제가 생겼는데 관련 글을 수정하는 것은 방문객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블로그는 공개된 공간인 만큼 주인장인 저로서는 방문객분들에 대해서 신뢰의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명행님의 요청만 받고 제 글들을 수정하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두 번째 글만으로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명행님께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진명행님께서는 많은 분들이 지켜보는 공간에서 저를 협박하셨습니다. 그렇게 진명행님이 떳떳하시다면 협박하시지 말고 저의 질문에 대해 자료와 논리로서 대응하십시오.


※ 10월 25일 이후 추가

토론을 하려고 준비해 둔 것이 조금 있으니 가끔 올려볼까 합니다.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진명행님이 글을 하나 써 주셨습니다.


진명행님은 왜 댓글을 지우시는 걸까?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문제에 대한 반론

진명행님 블로그에 글이 또 올라왔는데

진명행님께서 사과를 하라고 하시는데

2008년 10월 29일 수요일

진명행님께서 사과를 하라고 하시는데

진명행님이 블로그에 글을 써서 자신을 사기꾼으로 매도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라고 하시는군요.

처음에 "교차검증을 할 줄 모른다" "도그마만 남았느냐"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시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먼저 인신공격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올려주신 사진만 봐서는 진명행님이 이 책을 예전부터 읽었는지, 아니면 최근에야 읽기 시작했는지 확인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진명행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오나 진명행님이 책은 가지고 있었으되 논쟁이 시작된 뒤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책이 있다는 것과 책을 읽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죠. 게다가 지금까지 진명행님이 꾸준히 해 오신 말 바꾸기를 생각하면 진명행님의 말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진만 봐서는 이게 진명행님의 책인지 아니면 어디서 빌려오신건지 확인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인신공격을 먼저 시작하신 것이 진명행님인데 제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는 듯 합니다.

진명행님 블로그에 글이 또 올라왔는데

결국 말꼬리 잡기로 나가는군요.

제 번역을 확인해 보고 맞아서 다시 맞다고 정정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논점일탈을 하는데 수집되는 정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왜 자꾸 말 돌리기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꾸준히 지켜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진명행님은 초기에는 오역이라고 말 꼬리를 잡더니 오역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니 자료를 취사선택했다고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오역이라고 지적한 것에는 취사선택한 것도 포함된다고 하는데 기가 막히는군요. 그렇다면 사전에 그 점을 지적했으면 될 것이지 오역문제로 물고늘어지다가 말을 바꾸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논지와 상관없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어째서 취사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진명행님은 자신이 한 애매모한 문장을 근거로 사전에 취사선택(?)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군요. 아니. 그럼 그때는 왜 지적안하고 글을 지워달라고 사정을 했습니까?

게다가 이 주장은 더욱 황당하군요.

ISNK의 내용을 ISNK로 검증합니까라고 하기 전에 그러는 자신은 ISNK 보고서상에 나타난 북한군 병력이 들쑥날쑥하다며 같은 보고서의 근거끼리 대차대조를 한 이유는 뭔가? 그 논리대로라면 ISNK의 내용을 가지고 ISNK의 내용을 검증한 게 아니고 뭐냐고.

신뢰성을 검증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ISNK의 내용을 통해 미군에게 수집되는 정보가 들쑥날쑥하다는 점을 지적한것인데 이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하지만 ISNK의 신뢰성 문제는 ISNK의 내부 내용으로 입증할 수 가 없는 것 입니다.

논쟁을 지켜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작 제가 문제를 제기하면 진명행님은 별다른 답을 대지 않았던 것을 아실 겁니다. 예를 들어 진명행님은 북한의 1947년 파병설의 근거로 이미 1946년에 북한에 귀국한 최광을 들기도 했지요. 제가 최광의 1946년 귀국을 지적하자 진명행님은 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해명도 없습니다. 자신이 불리하면 입을 닫고 말꼬리 잡힐 만한 것은 골라서 왜곡 확대해 나가는데 황당하더군요.

애초에 주장을 입증해야 할 것은 진명행님인데 말꼬리 잡기만 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이 이겼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시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의 논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ISNK의 문제

ISNK는 진명행님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내세운 주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를 제기했듯 이 자료의 내용을 입증하려면 중국에서 해당되는 내용을 뒷 받침해 줄 자료가 공개되어야 합니다. 그때 까지 ISNK의 자료는 그냥 신뢰도가 입증되지 않은 자료일 뿐입니다.
저는 ISNk에 수록되고 있는 자료들이 인민군의 병력 통계에서 극도로 심한 편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진명행님은 저에게 ISNK에 수록된 북한의 국공내전 파병정보가 틀렸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환국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환빠들과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부재증명을 하라는 말 입니까?


현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주장은 자료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 뿐 입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ISNK를 근거로 북한인민군의 파병을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릅니다.

ISNK는 주사료이니 만큼 주사료의 신뢰도가 확실히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진명행님이 제시한 보조사료들은 진명행님의 주장을 입증하기에 부족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야 할 사람은 진명행님인데 진명행님은 ISNK의 북한군파병에 대한 신뢰성은 입증하지도 못하면서 말꼬리 잡기와 인신공격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누차 강조하는데 ISNk에 있는 북한군 파병 정보의 신뢰성을 입증해야 할 것은 진명행님입니다. 진명행님은 ISNK에 있는 정보의 신뢰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꼬리만 잡고 있습니다.


2. 북한자료의 문제


북한자료의 과장성과 낮은 신뢰도는 이미 제가 지난 포스팅에서 지적했습니다. 이 점은 방문자분들께서 판단해 주실 문제이기도 하지요. 북한자료, 특히 김일성의 회고등은 매우 모호한 표현으로 ISNK의 북한군 파병문제를 입증해 주기에는 신뢰도가 부족합니다. 게다가 북한측이 파병의 근거로 내세우는 사례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아전인수격으로 김일성이 파견한 것 처럼 호도하고 있는 등 문제가 많습니다.

진명행님이 역시 자료로서 내세운 북한외무성 자료는 해당되는 서술주체가 불분명하고 이것이 북한군이라는 것을 입증해 줄만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3. 신문자료, 남한공보처자료의 문제

신문자료의 문제 또한 지적했습니다. 동시대의 국공내전 관련 보도들의 신뢰성이 떨어진 다는 점은 누차 지적했습니다. 진명행님은 여기에 대해서 "오보가 하나 있으면 신문기사가 다 거짓이냐"면서 논점일탈을 시도하고 있는데 당장 오보가 많은 기사 속에서 "진위여부가 명백하지 않은 보도"가 있는데 이것을 신뢰하는것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역시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은 ISNk의 정보와 조합해서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남한공보처자료 또한 제가 지적했듯 내용에서 오류가 있는 등 각 사항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해당 자료의 북한인민군 파병에 대한 내용은 현 시점에서 검증할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저의 주장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 되지만 이 논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지금까지의 제 주장은 정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말꼬리 잡기와 말바꾸기는 계속되겠지만 진명행님은 이런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되는 ISNK의 신뢰성 문제를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은 입증하지 못하면서 말꼬리 잡기만 하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이제는 완전히 논쟁이 산으로 갔습니다.

판단은 제 블로그와 진명행님의 블로그를 들러주시는 분 들이 해 주시겠지요.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문제에 대한 반론

이젠 배가 산 꼭대기로 올라간 느낌이지만 진명행님의 반론이 있었으니 거기에 대한 답을 할까 합니다. 진명행님의 반론은 지난번 글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1. ISNK nr.28에 대한 반론

진명행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논점흐리기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 문제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지 미군이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아니었거든요. 제가 지적한 문제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진명행님의 블로그에서 캡쳐한 아래 부분을 보시지요.


진명행님은 이상하게도 저의 핵심 주장이 담긴 윗 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있습니다. 굳이 반론을 하고 싶으시다면 아래와 같이 잘라야 정상이죠.


앞으로 계속되는 진명행님의 비난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제가 원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의 문제점은 비켜가고 엉뚱하게 미군의 분석으로 이야기를 돌리고 있습니다.


2. ISNK nr.30에 대한 반론

저는 진명행님이 이 글을 언급하시기에 그 동안 쭉 해왔던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가 nr.30을 오역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반론글을 보시죠.


아니. 제 해석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해석이 틀리지 않았으니 이 부분은 어물쩡 넘어가고 엉뚱한 꼬투리를 잡아 비난을 하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 해석이 틀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실토하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분은 처음 봅니다.;;;;

다음으로, 제가 고의적으로 뒷 문장을 잘라내 내용 왜곡을 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저는 고의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아님의 글 “다른 해석의 가망성”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뒤의 문장 “A 2,000,000 man goal was evidently intended as propaganda since both soviet and peoples Committee officials have stated privatelly that an army of 500,000 was the actual goal”을 언급했습니다.


이 문장을 은폐할 거라면 왜 다른 분의 블로그에 가서 이 이야기를 꺼냅니까? 저는 그런 한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본문에 넣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똑같은 신뢰성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진명행님은 북한이 이미 1947년 초에 50만을 징병하려 했다는 것은 믿으십니까?

그나 저나 진명행님께서는 그 동안 제가 ISNK nr.30을 오역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시더니 이제는 아무 해명도 없이 저와 같은 해석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제게 했던 공갈은 다 거짓말 이었군요.

궁금한 것이 진명행님께서는 예전에 ISNK를 읽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오역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 입니까? ISNK를 읽었다면 오역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예전에 읽었다는 것도 거짓말 입니까?


3. ISNK nr.35에 대한 반론


아니. 결국 또 원점으로 돌아오는 군요. 이미 1947년에 훈련병을 포함해 125,000명이 있었다면 왜 1949년 여름까지도 북한군 병력이 8만 수준밖에 안 됐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ISNK의 내용을 ISNK로 검증합니까?


4. ISNK nr.36에 대한 반론


별표까지 쳐 놓은걸 보니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아주 기쁘셨던 모양입니다. 이 부분에서 진명행님께서는 1947년 5월에 제8종대 소속의 22, 23, 24사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진명행님의 글에 댓글로 지적했듯 제8종대는 1947년 8월에서 9월에 걸친 부대개편 기간 동안에 편성되었습니다. 5월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부대를 억지로 가져다 맞추시는군요. 그리고 Column을 어떻게 종대로 해석하냐고 하시는데 ISNK nr.36에 나오는 23rd Column에 대한 설명을 보지요.

23rd Column – This unit has been held mainly in reserve. It is up to its full strength of 90,000 and is at present engaged in training and rear area guard duty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병력이 90,000명이나 되는 사가 있습니까? 저런 문장이 나온다면 보다 상위 제대인 종대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1947년 5월 동북민주연군에는 병단(兵团)이나 군(军)급 편제가 없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다시 제8종대의 실재 여부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먼저 중국국방대학에서 출간한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解放军出版社,1983/2003)의 부록에 실린 1947년 6월 당시 동북민주연군의 전투서열에는 소속 부대가 다음과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종대 - 1종대, 2종대, 3종대, 4종대, 6종대
동북민주연군 직할사 - 독립1사, 독립2사, 독립3사, 독립4사
동북민주연군 직할대 - 기병사령부, 포병사령부

ISNK nr.36이 나오고 한달이 지난 뒤에도 제8종대는 편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张明金, 赵功德의 『中国人民解放军 历史上 70个军』(解放军文艺出版社, 2006), 328쪽에 따르면 제8종대는 7, 9, 10종대와 함께 1947년 8~9월에 걸쳐 편성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으니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진명행님은 바로 삭제하더군요. 이유는 본인의 마음이랍니다.;;;;;;


어쨌건 제가 위와 같이 반론을 달았더니 진명행님 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셨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시는군요. 그런데 진명행님 본인의 블로그에서는 제 댓글을 삭제하고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다시더군요.


그것 참.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게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겠다는 것 이었습니까.;;;;; 진명행님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입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진명행님은 왜 댓글을 지우시는 걸까?

진명행님이 또 글을 써 주셨기에 가서 읽어 봤는데 당장 눈에 띄는 오류가 있더군요. 하늘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을 잘 봐 주십시오.


그래서 본 답글을 쓰기 전에 간단히 댓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진명행님이 이 댓글을 지우셨네요.

왜 지우셨을까?

어차피 트랙백으로 또 갈텐데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분 입니다.

진명행님이 글을 하나 써 주셨습니다.

진명행님이 글을 하나 써 주셨군요.

어느 역사학도의 훼적(毁籍)질..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입니다.

제가 고의로 글을 왜곡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이야기는 트랙백 걸린 기린아님의 블로그나 제 블로그의 본문에서 간단히 언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진명행님이 오히려 글을 왜곡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트랙백을 날려달라고 하시는군요.

시간나는대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진명행님의 “북한군 국공내전 참전...국내, 해외 신문자료”라는 글에 진명행님이 다신 댓글입니다.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기뻐하시는 진명행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진명행님이 예측하셨듯 저는 신문기사는 오보가 많으니 당연히 신뢰도를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진명행님이 인용하신 언론보도들의 내용을 입증해 줄 직접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진명행님이 퍼오신 신문보도의 신뢰도는 급강하합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심심하니 관련보도들의 신뢰성을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는 방법도 써봐야겠지요. 진명행님이 북한군의 중국내전 참전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문기사의 신뢰도를 평가해 보지요.

저도 할 일이 많으니 진명행님이 퍼온 자료 중 웹에서 간단히 퍼올 수 있는 동아일보 기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검색창에 임표를 넣고 검색하면 자료의 종류별로 분류가 됩니다. 연속간행물에는 173건의 정보가 있군요. 이제 연속간행물을 클릭해 보지요.


몇 번 클릭하면 진명행님이 퍼 온 동아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확대해 보지요. 아하.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로군요.


자. 그러면 진명행님이 퍼온 동아일보의 기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침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의 바로 밑에도 임표 관련 기사가 있군요. 이 기사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으앗! 정말 충격적입니다.

林彪將軍被殺!!!



확대해도 몇몇 글자가 잘 안보이긴 합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한편, 중공 측 임표(林彪) 장군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반전적(反戰的) 부하에게 사살(射殺)되였다는 보●는 사실이다.”

아앗! 국민당군의 정보부 발표를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임표는 벌써 1946년에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971년에 사망한 임표는 가짜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당시의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던 동아일보의 기사는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정보력이 취약해 국민당 정부측의 선전에 의존하던 당시 한국 신문들의 국공내전 기사의 신뢰도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신문들은 회해전역 초반에는 국민당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내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단편적인 신문기사들이 역시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ISNK의 정보를 입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진명행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아래의 글과 관련해서 내용 보충을 하지요.

우선 진명행님이 토론중에 하신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세기와 더불어』에 수록된 북한의 중국 지원관련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김일성의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관련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북한식 표현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주보중을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 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 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 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 무렵 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261~262쪽

이 뒤에는 왕일지가 북한을 방문해 부상병의 피난과 전략물자의 소개 문제 등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신발을 보내줬다는 내용도 있지요.

진명행님은 이종석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나와 있듯 1946년에 이미 25만에 달하는 조선계가 국공내전에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김일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것 처럼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의 북한군이 참전했을 경우 국공내전에서 싸운 조선계 군인은 총 35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 참고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계 군인의 규모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63,000명 수준입니다.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니 『세기와 더불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실린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북한이 국공내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중국의 정치정세는 좋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중국인민은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반혁명세력의 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과를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조만간에 승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방 후 수차에 걸쳐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으며 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전략물자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방조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 입니다.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 , 261쪽, 『김일성전집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한 구체적인 시기도 모호하고 몇 명이나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게 전투병력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원이라는 표현 그대로 의료인력 등 전투지원을 위한 인력을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이런 몇 줄의 문장으로 수 만명 규모의 전투병력이 파병됐다는 ISNK의 정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진명행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 아무 근거 없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진명행님께서는 어떤 점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증언을 신뢰하십니까?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

아래의 글에 이어지는 추가 글 입니다.

진명행님께서 그만 하기를 원하시지만 진명행님께서 ISNK의 북한인민군 파병의 근거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셨으니 여기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92년에 간행된 김일성 전집 8권에 실려있는 관련 내용을 올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이 북한인민군을 지원했다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글 입니다.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들은 중국 동북해방전투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금주, 사평 해방전투들에서 조선의 아들 딸들이 피를 흘리며 숭고한 국제주의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장춘 해방전투에서 박락권 동무가 지휘하는 부대가 커다란 공훈을 세운데 대하여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락권 동무는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나와 만난 주보중 동무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조선인 부대들은 동북민주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전투업적은 중국인민들 속에서 훌륭한 모범으로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부대 내에 있는 조선동지들이 전투에서 돌격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민은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주고 있는 조선인민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국제주의적 임무이다. – 림춘추와 한 담화 1948년 10월 23일」, 『김일성전집』 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385쪽

여기서 장춘 해방전투에서 전사한 박락권(朴洛權)이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의 대표 사례로 인용됩니다. 그런데 박락권의 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박락권은 장춘 전투에서 길동 경비 1려의 제1단 단장이었습니다. 즉 연대장이었습니다. 길동 경비 1려는 연변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로 북한 인민군과는 관련이 없는 부대인 것 입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마치 박락권의 부대가 북한에서 만들어진 부대인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길동 경비 1려는 뒤에 동북군구의 독립 1사 1단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47년 8월에는 30사 89단으로 개편됩니다. 이 연변조선족 부대는 마지막으로 47군 141사로 통합됩니다. 47군 141사는 임표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소속 부대였습니다.

예. 진명행님이 북한군 참전설의 근거로서 언급한 임표 지휘하의 조선인 부대가 바로 이 부대입니다.

북한공산군이 아닌 연변조선족부대…

하지만 김일성 전집의 김일성 발언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는 점에서 좀 나은 편입니다.

김일성의 공식 발언이 나오고 나니 북한 당국에 의한 역사 왜곡이 시작됩니다.;;;; 다음의 글을 보시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 장병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데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사평, 금주, 심양 해방전투들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주체35(1946)년 4월에 있은 1차 장춘해방전투에서 박락권이 인솔한 2만여명의 조선인 사단은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 있던 최광 부대의 후원 하에 장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 도당이 위수사령으로 틀고 앉아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1만 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 련대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 19 – 세계혁명의 새로운 길 개척』,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155

박락권이 지휘한 부대가 졸지에 2만명의 사단으로 둔갑했습니다.;;;;;

김일성이 국공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딸들을 보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구자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은 박락권 부대와 같이 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를 마치 북한에서 만들어 보낸 것 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역사서는 1개 단으로 정규편제의 연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선족 부대를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드는 2만명의 사단』으로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ISNK의 신뢰성도 문제인데 진명행 님께서는 신뢰성이 의심되는 ISNK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역시나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찬 북한의 주장을 근거로 세우신 겁니다.

진심으로 유감스럽지만 역시 아래의 글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1.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부분 인용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2.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을 발췌했다.

둘 중 어떤 것이던 진명행님은 블로그의 방문자들을 속이신 겁니다.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아이고 배꼽이야!

아래의 글에 진명행님께서 신속한 답변을 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보시다 시피 진명행님께서는 ISNK는 읽지도 않았다고 밝히시는군요.

아이구. 그런데 왜 전에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나요?


아니. 진명행님은 읽지도 않았다는 ISNK no.46 p.10을 저보고 참조하라고 하셨잖아요.

읽지도 않은 자료를 어떻게 내용까지 다 알고 친절히 저에게 읽으라고 하셨나요. ㅋㅋㅋ

캡쳐해 두기를 잘 했군요!

그리고 아랫 글은 별로 수고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잖아도 지금 읽고 있는 Army Staff, Entry 154, Box 20 Plans & Operations Division 1946~1948, 091. Korea. Sec. I 같이 수백쪽 넘어가는 문서자료도 수십박스는 보는데 이런 간단한 정보 보고서 요약하는게 뭐 대수겠어요.

친절히 제 블로그 까지 오셔서 자폭을 해 주시니 정말 웃겨서 미치겠습니다.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

요 며칠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 주장을 하고 있어서 뭔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나 했더니 역시나 거의 20년은 된 쉰 떡밥이더군요.

처음에는 간단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론하면 이해를 하시려나 했는데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관련 자료라고 글을 하나 올려 주셨는데 당시의 동아일보 같은 신문기사더군요;;;; 군사정보의 내용을 당대의 카더라 통신 수준의 신문기사로 검증하겠다는 사람은 정말로 처음 봤습니다. 정말 진담입니다. 학술대회에 진명행님 같은 자료를 들고 나간다면 개그콘서트가 된다에 500원 걸겠습니다.

물론, 중국측이 북한인민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당연히 제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인정할 것 입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제한적 자료의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 해 보지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요.

결국 배가 산으로 가고 말았으니 원점에서부터 정리를 해야 겠군요.

진명행이라는 분이 처음에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주한미군정보참모부에서 발간한 북한정보요약(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이하 ISNK)의 내용이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 께서는 북한정보요약에 실린 북한군 관련 내용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논지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ISNK에 실린 북한의 군사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해당 정보 보고서에 실린 북한군 병력현황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진명행님께서는 ISNK가 추산한 북한군의 참전 병력규모를 신뢰하고 계시니 ISNK의 북한군 병력관련 통계가 높은 신뢰도를 보인다면 그만큼 진명행님의 주장도 신뢰도가 높아지겠지요.

ISNK는 주한미군의 정보참모부가 작성했기 때문에 군사문제에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군사력 항목은 소련군과 북한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나뉘며 북한군은 다시 정규군(Peoples Army), 철도경비대(Chol To Kyung Bi Dai) 등 세부 항목으로 나뉩니다. 각 항목에 해당되는 정보는 엄격히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명행님의 주장에 나타나듯 북한군의 대규모 만주 파병이 시작되었다는 1947년의 북한군 병력 통계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먼저 들지요.

Information received during the period has tended more than ever to fall into two types, that from comparatively reliable source indentifying those individuals groups which are definitely CCP, and the more alarmist type of statement concerning huge concentrations of Communist Troops. An example of this latter type was the report that an army of 86,000 men had been concentrated on the 38th parallel alone and of this number, 50,000 wore named as CCP troops.

본 보고서의 분석 기간 중 접수된 정보들은 양 극단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정보에서는 중국공산당임이 분명한 개별 집단이 나타나며 보다 기우에 가까운 정보는 대규모의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정보 중에는 86,000명에 달하는 공산군이 38선 인근에 집결했으며 이 중 50,000명이 중국공산군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28 For Period of 01 January 1947 to 15 January 1947, p.4

1947년 1월에 중국공산군 5만 명이 38선 인근에 집결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이렇게 극과 극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관련 정보분석은 최대한 신중히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NK의 북한군 병력 현황 분석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이제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지요.

c. Conscription : The initial conscription program called for the drafting of a force to be taken from various sections of the population as follows : city dwellers – 800,000; farmers – 500,000; students – 400,000; labor unions – 300,000

징병 : 다양한 계층을 징집하는 최초의 징병 계획이 선포되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도시 거주자 800,000명, 농부 500,000명, 학생 400,000명, 노동조합 300,000명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0 For Period of 1 February 1947 to 15 February 1947, p.13

1947년 2월에 북조선 정부가 200만명의 징병계획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경천동지할 일 입니다!

다음은 조선인민군(!) 이야기입니다.

General Comment on Peoples Army

(중략)

This Army, consisting of three major commands each containing from three to seven subordinate “Divisional” level units, has a strength which in conservatively estimated at 125,000

인민군에 대한 총평

인민군은 각각 3개에서 7개의 사단 급 부대가 소속된 세 개의 주요 사령부로 구성되어있으며 병력은 신중히 평가하더라도 125,000명으로 추정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5 For Period of 15 April 1947 – 30 April 1947

1947년 4월 시점에서 “인민군”만 125,000명이라고 신중한(conservatively) 분석결과를 내 놓고 있습니다. 참고로 1947년 5월 경 인민군의 전신인 인민집단군은 제1 경보병사단, 제2 경보병사단, 제3 독립혼성여단의 세 개 부대 뿐이었습니다. 의문이 나시거든 장준익 등 인민군에 대한 국내 연구를 참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보고서를 보시죠.

e. Strength of North Korean “Army”

(중략)

There is no doubt that a total of 125,000 trained man has been reached and possibly far surpassed, however the present location of these trained men is admittedly obscure

4-e. 북한군의 병력

훈련받은 병력이 125,000에 달하는 것은 틀림없으며(no doubt)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병력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아!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된 북한인(North Koreans)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Percentage of North Koreans in CCP units

As of 1 April, all columns, ie, 22d, 23, and 24th, of the CCF in Manchuria had in their ranks 15~25% Soviet trained North Koreans.

4월 1일 기준으로 만주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의 22종대(纵队), 23종대, 24종대를 포함한 모든 종대는 각 부대별로 소련이 훈련시킨 북한인 15~25%가 포함되어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p.12

이야. 드디어 나왔군요!

그런데 22종대, 23종대, 24종대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에는 없는 “유령 부대”입니다.

아하! 북한 인민군은 존재한 적도 없는 인민해방군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것이로군요. 그래서 10만 명이나 참전했는데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 다음 보고서로 넘어가지요.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1947년 5월까지 인민군은 총 125,000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의 보고서는 충격적인 정보분석을 내 놓습니다.

3. The Total Strength of the Forces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These figure were also furnished by Source PUKTO

Bo An Dai (including the Chol To Bo An Dai) : 30,000
Chol To Kyung Bi Dai(Railway Constabulary) : 20,000
Soo Sang Kyung Bi Dai (Coast Guard) : 12,000
Total : 62,000

Note : PUKTO did not have figure available on the Fire Brigade, but estimated that they did not exceed 5,000
Total : 67,000 Dept. Int. Affairs.

Total Force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Bo An Kan Boo Hul Yun So : 306,000
Force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67,000
Total : 373,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5 June 1947 – 30 June 1947, Incl #1, The Evolution of the Armed Forces of the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August 1945 – June 1947 p.16

이거 정말 충격적입니다. PUKTO라는 암호명의 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의 무장력은 내무성 산하 부대를 제외하고도 무려 306,0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병력이 18만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자. 다음에는 다시 북한 인민군의 만주 파병 건입니다.

1. CCF-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Mutual Assistance Pact

(중략)

(d) 60,000 North Korean troops to be shipped to Manchuria by the end of July

1. 중국인민해방군-북조선인민위원회간 상호조약

(중략)

(d) 60,000만 명의 북한군을 7월 말 까지 만주로 파병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4 For Period of 1 September 1947 – 15 September 1947, p.18

보시다시피 60,000만명의 북한군이 7월까지 만주로 파병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북한군의 병력이 약 30만명이니 이후의 보고서에는 북한 인민군의 병력이 24만명은 되어야 정상입니다.

북한군 병력에 대한 다음 번 보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 Strength of the People’s Army

(중략)

It is not believed possible at this time to alter the estimate of 125,000 People’s Army troops under the control of or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현재로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통제하에 있는, 또는 동원가능한 인민군의 숫자가 125,000명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5 For Period of 15 September – 30 September 1947, p.13

네. 결국 6월의 보고서에 나온 인민군 30만명은 틀렸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만주로 파병된 병력에다가 7월에 파병되었다는 6만 명을 빼면 북조선에는 도데체 어느 정도의 인민군이 있는 걸까요?

자. 이제 다음달의 보고서를 보지요.

3. People;s Army Fiscal Matters

(중략)

First Center (Division) – 65,000
Second Center(Division) – 55,000
Third Center(Independent Mixed Brigade of Division) – 45,000
Pyongyang Academy – 3,000
Staff School – 3,000
Central Guard Unit – 2,000
Battalion Department – 2,000
Total – 175,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6 For Period of 1 October – 15 October 1947, p.10

네. 전투서열은 정확하게 1사단과 2사단, 3독립여단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력은 1사단이 65,000명, 2사단이 55,000명, 3여단이 45,000명이고 총 병력은 175,000명입니다. 한 달만에 인민군의 총 병력이 5만명이나 늘어났군요.

지금까지 제가 간단히 정리해 놓은 북한인민군 병력 통계에 대한 ISNK의 분석을 보셨다면 제가 왜 여기 나온 정보들에 대해 극도로 의심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병력 통계가 한 달만에 5만, 많으면 15만씩 바뀌는데 이걸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북한군이 포함되었다는 중국군 부대는 실재하지도 않는 보고서 상의 부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점을 검증할 중국 자료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외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글에 대한 토론에서 제가 진명행님께 북한군 총 병력이 17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자. 그런데 진명행님의 답 글을 주목하십시오. 이 답 글은 진명행님이 ISNK를 직접 읽고 분석한 것이 아니라 백학순의 논문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 북한군의 파병 및 후방기지 제공」에 달린 각주 38번을 그대로 올린 것 입니다. 백학순의 논문에 달린 각주 38번을 한번 보실까요?

북조선 인민위원회 재정국 소속으로서 1947년 6월까지 북한군 주요 부대의 월별 지출표 작성을 담당하였던 한 미군 정보원에 의하면, 지출표에 의한 북한군의 숫자는 1947년 2월부터 6월까지 173,000명이었다고 한다.(ISNK, no.46. p.10) 이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때까지 만주에서 중공군과 함께 북한으로 퇴각한 조선 의용군 병사들의 숫자(약 50,000 내지 70,000명, ISNK, no.30 p.6)와 북한에서 같은 해 4월부터 만주로 파병하기 시작했던 북한 병사들의 숫자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커밍스는 만주 파병 북한 병사의 숫자를 100,000 내지 150,000명으로 잡고 있다.

이 각주 38번에서 언급하고 있는 ISNK, no.46. p.10의 통계는 제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보고서에 나와 있는걸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보고서의 통계 변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학순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의 상상으로 저 통계를 해석한 것 입니다. 백학순의 연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죠. 그리고 진명행님께서는 ISNK의 통계는 전혀 보지 않고 백학순의 각주에 달린 해석을 그대로 베낀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1. 진명행님은 실제로는 ISNK는 읽지도 않았고 그냥 백학순의 글만 베꼈다.

2. 진명행님은 ISNK의 통계를 모두 검토했으나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백학순의 해석만 인용했다.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 진명행님께서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신 것 입니다.

제가 왜 진명행 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전쟁은 물량으로 해야지!

지난 3월에 올렸던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게 아니다?!"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악영향에 대하여 다뤄 보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한들 황군의 백발백중의 포 1문으로 귀축영미의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오호라. 그러나 역시 일제의 악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투사들의 생각은 달랐으니...

안만 질이 善良 하드라도 量이 워낙 不足하면 難을 能히 克服 못하는 것입니다. ‘탕쿠’ 한 臺는 잘해야 ‘탕쿠’ 三臺, 四臺를 克服 할 수 있지 열臺, 수무臺는 克服하지 못하는 것이요 優秀한 砲 한 門은 二門, 三門은 制壓할 수 있어도 砲 十門, 二十門은 制壓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이 量이 必要하다는 것입니다.

李範奭 長官 退任辭, 『國防』, 大韓民國 國防部, (1949. 4), 3쪽

역시 양이 중요한 것 입니다.


鐵驥 將軍 萬歲!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이글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습니다. 미국측의 정보문서를 토대로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글의 토대가 된 미국측 정보는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 -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어제 지하철에서 한국일보를 읽다 보니 고종석이 쓴 무신론에 대한 칼럼이 실려있었습니다. 짧긴 했지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칼럼이 꽤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그러다 보니 저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확고히 해준 책이 한 권 생각나더군요.

바로 Frank Moore Cross『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은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스는 미국의 사해문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또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과 구약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마크 스미스(Mark S. Smith) 같이 이 사람이 가르친 학자들도 비슷한 주제로 재미있는 책들을 펴내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매우 기억에 남는 책 입니다. 학부시절 어떤 학술지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주문을 했습니다. 책 제목에 Essays라고 적혀 있으니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도착한 책을 몇 장 훑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연구사 정리도 없이 전혀 모르는 기존의 구약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텍스트가 튀어나오니 정신이 없더군요;;;; 영어 해석이 뒤에 붙어있긴 한데 처음 펼쳐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뜨악 했습니다. 게다가 수없이 나오는 다양한 학술저널과 주요 연구문헌들의 약자는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앞장의 약어표를 찾아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일단 무신론자라면 결코 재미가 없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구약 연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자는 야훼와 유대교의 뿌리인 가나안의 신화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가나안의 신앙체계가 후대의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크로스가 이 에세이집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야훼’의 기원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일신 숭배가 확립되는 과정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야훼’라는 신의 기원입니다. 저자는 1장의 3개 절에서 엘(El)과 야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엘’은 고대 가나안의 여러 신 들 중에서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신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로서의 특성은 꽤 중요합니다. 크로스는 야훼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모든 것의 아버지’인 가나안의 신 ‘엘’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의 특성을 차용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Yahweh라는 신의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문외한이긴 하지만 여러 문헌의 교차검증을 통한 추적과정은 매우 인상깊더군요. 다음으로, 야훼와 바알의 관계에 대한 서술 역시 흥미롭습니다. 크로스는 초기 문헌에서 나타나는 야훼의 전사로서의 모습이 폭풍신 바알에서 차용해 온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야훼는 여기 저기서 핵심 개념을 빌려온 아주 빈곤한 ‘신’인 것입니다. 아. 정말.

저는 혹시나 신을 믿더라도 이런 허접한 짝퉁신은 결코 믿지 않을 겁니다.;;;;

4장과 5장은 구약시대 역사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크로스는 문헌분석을 통해 신의 역사인 구약을 인간의 역사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부분이나 열왕기에 대한 분석은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저자가 인용하는 그 많은 학설들을 따라가며 내용을 이해 하는 게 좀 어려웠습니다. 책 후반부에서 그게 더 크게 느껴지더군요.

원래 197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요즘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 것은 1997년에 나온 9판입니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이때까지의 최신 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소장한 서울대도서관에 있는 것도 제것과 같은 1997년판인 모양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