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핏줄이 같고 한 영토 안에서 살아도 언어가 다르면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1970, 256쪽
어쩐지... 북한 방송을 볼 때 마다 이질감을 느낀것이 아무 이유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령님 만세!
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핏줄이 같고 한 영토 안에서 살아도 언어가 다르면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1970, 256쪽
평양에서 이종석이란 한 인물을 두고 나온 평가는 여러 갈래다. 결론은 “그는 학자(아마추어)다”라는 말이다. 그쪽 식으로 볼 때는 “꾼”이 아닌 사람이 처리하기에는 남북한 양자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능을 보였다. 그러나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39쪽)
결국 안희정이나 이화영, 이호철을 통해서 본 그들의 세계관, 시대관, 한반도관, 나아가 처세하는 방식은 과거의 정치인보다 더 몹쓸 여지가 많다는 게 개인적 결론이다.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난 몇 년 동안 국가 정책의 저변에 흐른 게 아니었나 싶어 마음 한 편이 씁슬하다.(279쪽)
독일 육군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
1차대전 발발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엘사스-로트링엔에 거주하는 징집연령자 16,000명 중 징집통지서를 받고 귀국한 사람은 불과 4,000명 밖에 안 된다는 점을 보면 이들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최소한 7,000명 이상이 병역회피 사유로 재판에 회부된 상태였다. 1차대전 기간 동안 17,650명의 엘사스-로트링엔 사람이 프랑스 육군에 복무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징집연령대의 남성들은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보통은 20-150명씩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거나 아예 마을 전체의 남성들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소한 전쟁 발발과 동시에 3,000명의 남성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위스와 인접한 국경지대에서는 국경을 넘는 병역기피자의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사스-로트링엔이 국경지대라는 점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상(上)엘사스의 관구 사령관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애국심이 없으며” “병역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병역을 (영광이 아니라) “처벌”로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한 마을의 시장은 병력 소집을 방해하려 했다. 많은 지역에서 병역 회피가 계속됐는데 상엘사스의 마르키르히(Markirch)에서는 전체 인구 11,800명 중 700명의 남성이 병역회피를 위해 잠적했다. 그리고 1917년 6월이 되자 병력 적령기의 남성 427명 중 213명이 스위스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병역소집통지는 징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배달했으며 무장병력이 동반했다. 로트링엔과 하(下)엘사스에서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남성들이 병역을 회피했다.
역설적이게도 독일 군부역시 엘사스-로트링엔 지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징집을 사용했기 때문에 병역에 대한 부정적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1915년 8월, 육군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엘사스와 로트링엔의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을 소집했다. “병역, 또는 노동에 적합한” 최대한의 기준이 적용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가혹한 방식 때문에 징집이 잘 되기 보다는 반발만 늘어났다. 전쟁 초기부터 징집은 엘사스-로트링엔 전 지역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쟁의 종결이 가까워지자 더 많은 민간인들이 징집을 피해 잠적했다.
징집될 경우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했다. 이들은 같은 고향 출신자들을 규합해서 위험한 명령을 거부하고 종종 탈영이나 폭동을 일으켰다. 독일 군부는 특히 탈영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탈영은 부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아니라 군의 기밀을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중에 발생하는 포로와 실제로 탈영해서 항복한 경우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탈영에 대한 통계는 주의해서 살펴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의 탈영율이 높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1917년 7월에 독일육군 부참모장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달리 말하면 10,000명 중 80명이 탈영했다고 기록했다. 일반적인 독일군의 탈영율은 10,000명 당 1명 이었다. 그리고 1917년 12월에서 1918년 9월까지 530명이 더 탈영했다.
Alan Kramer, "Wackes at War : Alsace-Lorraine and the failure of German national mobilization 1914-1918", 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o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110-112
소련 영내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개념적인 정복”은 특별한 기준이나 계획이 없이 시행됐다.
소련이라는 국가의 건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제정 러시아에서 탄압받은) “미개한”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되찾는 것은 1927년부터 시작된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에 실망하고 있던 소련 정부에게 상당히 곤란한 문제였다. 1929년 스탈린이 외친 과거와의 “대단절(Великий перелом)”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개혁을 가속화하는 것이 국가의 목표가 되었다. 소련정권은 소련 인민들의 “인류학적 진보”를 위해서“작고” “약한” 민족들을 보다 발전된 “상위민족(Главные народность)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처음에는 서류상으로 시작했고 시행단계에서는 소수민족의 영토와 언어정책을 변경하는 것을 통해 추진했다. 즉 막스적 역사발전단계에서 여전히 봉건체제나 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소련인민들을 공산주의 단계로 앞당겨 인도하려는 것 이었다. 이런 민족통합작업은 스탈린의 “대단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최초의 인구조사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소련정권은 자국의 국민과 영토, 그리고 자원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때 조사된 인구통계는 1928년 발행되었으며 여기에는 166개 민족과 4개의 소집단, 그리고 6개의 기타 민족집단의 연령, 성별, 언어, 문자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Francine Hirsch,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137
국학연구원은 "식민사관에 젖어 자국의 역사 축소에 앞장서온 국내 학계는 그동안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양심과 책임을 저버렸음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며 "교육인적자원부의 용단을 계기로 국내 상고사연구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이번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국학연구원은 ▲단군 조선의 건국 전후사에 관한 문헌고증 연구를 존중하고 국사교육에 수용하는 방안 적극 검토 ▲단군 이전의 신시와 환국의 역사 연구 심화 ▲한국사의 외연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말고 고구려, 발해, 금, 요, 원, 청, 일본 열도로 뻗어나간 역사를 밝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야 함 ▲민족 고유의 선도문화 연구 강화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사관과 사회주의 유물사관에서 벗어나야 함 등 5개 연구 제언도 함께 제시할 예정이다.
통일만 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살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영원히 이 땅에서 전쟁은 사라진다.
통일만 되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우리민족이 막아낼 수도 있다.
통일만 되면 일제와 서양세력들에게 빼앗긴 문화재도 되찾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국을 이룰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착하디착한 우리 민족의 인정 많은 성품과 고상한 문화, 그리고 강인한 기상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아름답게 물들일 수가 있다.
나머지 부분은 여기로...
첫째, 그때나 지금이나 손진태가 말한 내용 가운데 국민이 곧 민족이라는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각기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선 상황에서 국민이 민족이라고 주장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945년 하나의 민족이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고,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며 한국인이 두 국가의 국민으로 나뉜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의 국민이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한민족 두 국가의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용어에 마비되어 국민과 민족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민족끼리” “우리끼리”라는 북한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 그 결과 한 민족 두 국가의 현실에 있으면서도 민족과 민족공조라는 말에 꼼짝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146쪽
그런데 이러한 민족이 한국인의 신앙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벌어진 6.25전쟁 뒤 지금까지 휴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택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이념(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2002년 서해에서 북한 함정의 공격을 받아 한국 해군의 함정이 침몰하고 해군들이 전사한 전투가 있었다. 이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 사이에서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어떤 면에서 때로는 국가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153쪽
그러나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민족과는 다른 문제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국가의 이념과 체제로 택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주체사상을 택하여 자주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거부하며 북한 인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그처럼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드는 폐쇄적인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이 각별히 경계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주체사상으로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하는 체제의 전파다.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사학은 위와 같은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민족을 발명해 서로 다른 두 이념과 체제위에 놓고서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로 삼았다. 현대 한국사학이 만든 민족사는 민족이 우선이고 국가(국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현대 한국사학이 국가와 국민보다 민족이 먼저라는 역사 지식과 역사의식을 한국인들에게 주입한 것이다.
(중 략)
가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만든 현대 한국사학은 그러한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까지 정해 놓고서 실제 역사는 그 길을 벗어났다고 비판하며 꾸중해 왔다.
(중 략)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반민족적 왕국으로 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러한 민족사는 과거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현재의 정치, 군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6.25전쟁 이래 남한과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남침 기도를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학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며 신라를 반민족적 행위를 한 나라로 판정하는 역사 공식을 만들었다. 그러한 역사 공식은 6.25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남침을 막은 대한민국을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나라로 보도록 만든 것이다.
316~319쪽
레바논 정부군의 병사들은 각각 소속 종파를 찾아 탈영했다. 슈프 산악지대에서는 드루즈파가 팔랑헤당을 무참히 부수었다.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팔랑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해병대가 재건한 레바논 정부와 정부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국적/민족 | 무장친위대(야전부대) | 무장친위대(보충부대) | 의용군단(야전부대) | 의용군단(보충부대) | 비 고 |
네덜란드인 | 790 | 625 | 1,263 | 693 | - |
플랑드르인 | 88 | 153 | 528 | 373 | - |
노르웨이인 | 131 | 121 | 613 | 318 | - |
덴마크인 | 205 | 209 | 633 | 366 | - |
핀란드인 | 282 | 219 | 0 | 0 | - |
에스토니아인 | 0 | 0 | 1,222 | 야전부대 및 보충부대 합계 |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덴마크인 | 33 | 162 | 1,191 | - |
노르웨이인 | 20 | 50 | 464 | - |
스웨덴인 | 0 | 3 | 39 | - |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204 | 943 | 3,319 | - |
독일인 | 53 | 144 | 136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3 | 18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2 | 1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0 | 0 | 4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2 | 8 | 129 | - |
덴마크인 | 2 | 5 | 23 | - |
플랑드르인 | 0 | 3 | 1 | - |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204 | 943 | 3,319 | - |
독일인 | 6 | 29 | 75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1 | 192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0 | 2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1 | 0 | 6 | - |
플랑드르인 | 0 | 0 | 1 | - |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558 | 3,391 | 12,612 | - |
독일인 | 232 | 1,496 | 2,403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22 | 5,738 | - |
독일계 네덜란드인 | 0 | 2 | 1 | - |
독일계 덴마크인 | 5 | 26 | 16 | - |
독일계 벨기에인 | 0 | 0 | 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1 | 69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1 | 2 | 6 | - |
독일계 우크라이나인 | 0 | 0 | 2 | - |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 0 | 0 | 1 | - |
독일계 라트비아인 | 0 | 0 | 2 | - |
독일계 에스토니아인 | 0 | 0 | 1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1 | 19 | 254 | - |
덴마크인 | 41 | 193 | 1,123 | - |
플랑드르인 | 1 | 9 | 15 | - |
노르웨이인 | 29 | 62 | 705 | - |
스웨덴인 | 1 | 5 | 33 | - |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325 | 1,895 | 6,740 | - |
독일인 | 94 | 497 | 457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25 | 2,070 | - |
독일계 네덜란드인 | 0 | 1 | 1 | - |
독일계 덴마크인 | 1 | 2 | 4 | - |
독일계 벨기에인 | 0 | 0 | 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4 | 26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0 | 0 | 10 | - |
독일계 우크라이나인 | 0 | 0 | 1 | - |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 0 | 0 | 2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33 | 199 | 1,984 | - |
덴마크인 | 0 | 0 | 6 | - |
플랑드르인 | 1 | 0 | 5 | - |
노르웨이인 | 0 | 0 | 2 | - |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덴마크인 | 37 | 220 | 852 | - |
노르웨이인 | 21 | 48 | 269 | - |
스웨덴인 | 2 | 8 | 19 | - |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네덜란드인 | 39 | 291 | 2,406 | - |
플랑드르인 | 2 | 8 | 10 | - |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