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아래의 글과 관련해서 내용 보충을 하지요.

우선 진명행님이 토론중에 하신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세기와 더불어』에 수록된 북한의 중국 지원관련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김일성의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관련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북한식 표현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주보중을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 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 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 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 무렵 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261~262쪽

이 뒤에는 왕일지가 북한을 방문해 부상병의 피난과 전략물자의 소개 문제 등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신발을 보내줬다는 내용도 있지요.

진명행님은 이종석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나와 있듯 1946년에 이미 25만에 달하는 조선계가 국공내전에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김일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것 처럼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의 북한군이 참전했을 경우 국공내전에서 싸운 조선계 군인은 총 35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 참고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계 군인의 규모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63,000명 수준입니다.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니 『세기와 더불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실린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북한이 국공내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중국의 정치정세는 좋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중국인민은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반혁명세력의 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과를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조만간에 승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방 후 수차에 걸쳐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으며 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전략물자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방조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 입니다.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 , 261쪽, 『김일성전집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한 구체적인 시기도 모호하고 몇 명이나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게 전투병력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원이라는 표현 그대로 의료인력 등 전투지원을 위한 인력을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이런 몇 줄의 문장으로 수 만명 규모의 전투병력이 파병됐다는 ISNK의 정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진명행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 아무 근거 없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진명행님께서는 어떤 점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증언을 신뢰하십니까?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

아래의 글에 이어지는 추가 글 입니다.

진명행님께서 그만 하기를 원하시지만 진명행님께서 ISNK의 북한인민군 파병의 근거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셨으니 여기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92년에 간행된 김일성 전집 8권에 실려있는 관련 내용을 올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이 북한인민군을 지원했다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글 입니다.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들은 중국 동북해방전투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금주, 사평 해방전투들에서 조선의 아들 딸들이 피를 흘리며 숭고한 국제주의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장춘 해방전투에서 박락권 동무가 지휘하는 부대가 커다란 공훈을 세운데 대하여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락권 동무는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나와 만난 주보중 동무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조선인 부대들은 동북민주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전투업적은 중국인민들 속에서 훌륭한 모범으로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부대 내에 있는 조선동지들이 전투에서 돌격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민은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주고 있는 조선인민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국제주의적 임무이다. – 림춘추와 한 담화 1948년 10월 23일」, 『김일성전집』 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385쪽

여기서 장춘 해방전투에서 전사한 박락권(朴洛權)이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의 대표 사례로 인용됩니다. 그런데 박락권의 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박락권은 장춘 전투에서 길동 경비 1려의 제1단 단장이었습니다. 즉 연대장이었습니다. 길동 경비 1려는 연변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로 북한 인민군과는 관련이 없는 부대인 것 입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마치 박락권의 부대가 북한에서 만들어진 부대인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길동 경비 1려는 뒤에 동북군구의 독립 1사 1단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47년 8월에는 30사 89단으로 개편됩니다. 이 연변조선족 부대는 마지막으로 47군 141사로 통합됩니다. 47군 141사는 임표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소속 부대였습니다.

예. 진명행님이 북한군 참전설의 근거로서 언급한 임표 지휘하의 조선인 부대가 바로 이 부대입니다.

북한공산군이 아닌 연변조선족부대…

하지만 김일성 전집의 김일성 발언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는 점에서 좀 나은 편입니다.

김일성의 공식 발언이 나오고 나니 북한 당국에 의한 역사 왜곡이 시작됩니다.;;;; 다음의 글을 보시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 장병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데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사평, 금주, 심양 해방전투들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주체35(1946)년 4월에 있은 1차 장춘해방전투에서 박락권이 인솔한 2만여명의 조선인 사단은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 있던 최광 부대의 후원 하에 장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 도당이 위수사령으로 틀고 앉아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1만 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 련대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 19 – 세계혁명의 새로운 길 개척』,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155

박락권이 지휘한 부대가 졸지에 2만명의 사단으로 둔갑했습니다.;;;;;

김일성이 국공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딸들을 보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구자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은 박락권 부대와 같이 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를 마치 북한에서 만들어 보낸 것 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역사서는 1개 단으로 정규편제의 연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선족 부대를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드는 2만명의 사단』으로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ISNK의 신뢰성도 문제인데 진명행 님께서는 신뢰성이 의심되는 ISNK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역시나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찬 북한의 주장을 근거로 세우신 겁니다.

진심으로 유감스럽지만 역시 아래의 글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1.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부분 인용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2.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을 발췌했다.

둘 중 어떤 것이던 진명행님은 블로그의 방문자들을 속이신 겁니다.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아이고 배꼽이야!

아래의 글에 진명행님께서 신속한 답변을 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보시다 시피 진명행님께서는 ISNK는 읽지도 않았다고 밝히시는군요.

아이구. 그런데 왜 전에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나요?


아니. 진명행님은 읽지도 않았다는 ISNK no.46 p.10을 저보고 참조하라고 하셨잖아요.

읽지도 않은 자료를 어떻게 내용까지 다 알고 친절히 저에게 읽으라고 하셨나요. ㅋㅋㅋ

캡쳐해 두기를 잘 했군요!

그리고 아랫 글은 별로 수고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잖아도 지금 읽고 있는 Army Staff, Entry 154, Box 20 Plans & Operations Division 1946~1948, 091. Korea. Sec. I 같이 수백쪽 넘어가는 문서자료도 수십박스는 보는데 이런 간단한 정보 보고서 요약하는게 뭐 대수겠어요.

친절히 제 블로그 까지 오셔서 자폭을 해 주시니 정말 웃겨서 미치겠습니다.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

요 며칠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 주장을 하고 있어서 뭔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나 했더니 역시나 거의 20년은 된 쉰 떡밥이더군요.

처음에는 간단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론하면 이해를 하시려나 했는데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관련 자료라고 글을 하나 올려 주셨는데 당시의 동아일보 같은 신문기사더군요;;;; 군사정보의 내용을 당대의 카더라 통신 수준의 신문기사로 검증하겠다는 사람은 정말로 처음 봤습니다. 정말 진담입니다. 학술대회에 진명행님 같은 자료를 들고 나간다면 개그콘서트가 된다에 500원 걸겠습니다.

물론, 중국측이 북한인민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당연히 제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인정할 것 입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제한적 자료의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 해 보지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요.

결국 배가 산으로 가고 말았으니 원점에서부터 정리를 해야 겠군요.

진명행이라는 분이 처음에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주한미군정보참모부에서 발간한 북한정보요약(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이하 ISNK)의 내용이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 께서는 북한정보요약에 실린 북한군 관련 내용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논지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ISNK에 실린 북한의 군사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해당 정보 보고서에 실린 북한군 병력현황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진명행님께서는 ISNK가 추산한 북한군의 참전 병력규모를 신뢰하고 계시니 ISNK의 북한군 병력관련 통계가 높은 신뢰도를 보인다면 그만큼 진명행님의 주장도 신뢰도가 높아지겠지요.

ISNK는 주한미군의 정보참모부가 작성했기 때문에 군사문제에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군사력 항목은 소련군과 북한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나뉘며 북한군은 다시 정규군(Peoples Army), 철도경비대(Chol To Kyung Bi Dai) 등 세부 항목으로 나뉩니다. 각 항목에 해당되는 정보는 엄격히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명행님의 주장에 나타나듯 북한군의 대규모 만주 파병이 시작되었다는 1947년의 북한군 병력 통계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먼저 들지요.

Information received during the period has tended more than ever to fall into two types, that from comparatively reliable source indentifying those individuals groups which are definitely CCP, and the more alarmist type of statement concerning huge concentrations of Communist Troops. An example of this latter type was the report that an army of 86,000 men had been concentrated on the 38th parallel alone and of this number, 50,000 wore named as CCP troops.

본 보고서의 분석 기간 중 접수된 정보들은 양 극단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정보에서는 중국공산당임이 분명한 개별 집단이 나타나며 보다 기우에 가까운 정보는 대규모의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정보 중에는 86,000명에 달하는 공산군이 38선 인근에 집결했으며 이 중 50,000명이 중국공산군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28 For Period of 01 January 1947 to 15 January 1947, p.4

1947년 1월에 중국공산군 5만 명이 38선 인근에 집결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이렇게 극과 극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관련 정보분석은 최대한 신중히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NK의 북한군 병력 현황 분석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이제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지요.

c. Conscription : The initial conscription program called for the drafting of a force to be taken from various sections of the population as follows : city dwellers – 800,000; farmers – 500,000; students – 400,000; labor unions – 300,000

징병 : 다양한 계층을 징집하는 최초의 징병 계획이 선포되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도시 거주자 800,000명, 농부 500,000명, 학생 400,000명, 노동조합 300,000명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0 For Period of 1 February 1947 to 15 February 1947, p.13

1947년 2월에 북조선 정부가 200만명의 징병계획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경천동지할 일 입니다!

다음은 조선인민군(!) 이야기입니다.

General Comment on Peoples Army

(중략)

This Army, consisting of three major commands each containing from three to seven subordinate “Divisional” level units, has a strength which in conservatively estimated at 125,000

인민군에 대한 총평

인민군은 각각 3개에서 7개의 사단 급 부대가 소속된 세 개의 주요 사령부로 구성되어있으며 병력은 신중히 평가하더라도 125,000명으로 추정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5 For Period of 15 April 1947 – 30 April 1947

1947년 4월 시점에서 “인민군”만 125,000명이라고 신중한(conservatively) 분석결과를 내 놓고 있습니다. 참고로 1947년 5월 경 인민군의 전신인 인민집단군은 제1 경보병사단, 제2 경보병사단, 제3 독립혼성여단의 세 개 부대 뿐이었습니다. 의문이 나시거든 장준익 등 인민군에 대한 국내 연구를 참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보고서를 보시죠.

e. Strength of North Korean “Army”

(중략)

There is no doubt that a total of 125,000 trained man has been reached and possibly far surpassed, however the present location of these trained men is admittedly obscure

4-e. 북한군의 병력

훈련받은 병력이 125,000에 달하는 것은 틀림없으며(no doubt)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병력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아!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된 북한인(North Koreans)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Percentage of North Koreans in CCP units

As of 1 April, all columns, ie, 22d, 23, and 24th, of the CCF in Manchuria had in their ranks 15~25% Soviet trained North Koreans.

4월 1일 기준으로 만주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의 22종대(纵队), 23종대, 24종대를 포함한 모든 종대는 각 부대별로 소련이 훈련시킨 북한인 15~25%가 포함되어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p.12

이야. 드디어 나왔군요!

그런데 22종대, 23종대, 24종대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에는 없는 “유령 부대”입니다.

아하! 북한 인민군은 존재한 적도 없는 인민해방군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것이로군요. 그래서 10만 명이나 참전했는데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 다음 보고서로 넘어가지요.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1947년 5월까지 인민군은 총 125,000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의 보고서는 충격적인 정보분석을 내 놓습니다.

3. The Total Strength of the Forces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These figure were also furnished by Source PUKTO

Bo An Dai (including the Chol To Bo An Dai) : 30,000
Chol To Kyung Bi Dai(Railway Constabulary) : 20,000
Soo Sang Kyung Bi Dai (Coast Guard) : 12,000
Total : 62,000

Note : PUKTO did not have figure available on the Fire Brigade, but estimated that they did not exceed 5,000
Total : 67,000 Dept. Int. Affairs.

Total Force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Bo An Kan Boo Hul Yun So : 306,000
Force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67,000
Total : 373,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5 June 1947 – 30 June 1947, Incl #1, The Evolution of the Armed Forces of the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August 1945 – June 1947 p.16

이거 정말 충격적입니다. PUKTO라는 암호명의 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의 무장력은 내무성 산하 부대를 제외하고도 무려 306,0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병력이 18만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자. 다음에는 다시 북한 인민군의 만주 파병 건입니다.

1. CCF-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Mutual Assistance Pact

(중략)

(d) 60,000 North Korean troops to be shipped to Manchuria by the end of July

1. 중국인민해방군-북조선인민위원회간 상호조약

(중략)

(d) 60,000만 명의 북한군을 7월 말 까지 만주로 파병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4 For Period of 1 September 1947 – 15 September 1947, p.18

보시다시피 60,000만명의 북한군이 7월까지 만주로 파병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북한군의 병력이 약 30만명이니 이후의 보고서에는 북한 인민군의 병력이 24만명은 되어야 정상입니다.

북한군 병력에 대한 다음 번 보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 Strength of the People’s Army

(중략)

It is not believed possible at this time to alter the estimate of 125,000 People’s Army troops under the control of or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현재로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통제하에 있는, 또는 동원가능한 인민군의 숫자가 125,000명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5 For Period of 15 September – 30 September 1947, p.13

네. 결국 6월의 보고서에 나온 인민군 30만명은 틀렸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만주로 파병된 병력에다가 7월에 파병되었다는 6만 명을 빼면 북조선에는 도데체 어느 정도의 인민군이 있는 걸까요?

자. 이제 다음달의 보고서를 보지요.

3. People;s Army Fiscal Matters

(중략)

First Center (Division) – 65,000
Second Center(Division) – 55,000
Third Center(Independent Mixed Brigade of Division) – 45,000
Pyongyang Academy – 3,000
Staff School – 3,000
Central Guard Unit – 2,000
Battalion Department – 2,000
Total – 175,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6 For Period of 1 October – 15 October 1947, p.10

네. 전투서열은 정확하게 1사단과 2사단, 3독립여단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력은 1사단이 65,000명, 2사단이 55,000명, 3여단이 45,000명이고 총 병력은 175,000명입니다. 한 달만에 인민군의 총 병력이 5만명이나 늘어났군요.

지금까지 제가 간단히 정리해 놓은 북한인민군 병력 통계에 대한 ISNK의 분석을 보셨다면 제가 왜 여기 나온 정보들에 대해 극도로 의심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병력 통계가 한 달만에 5만, 많으면 15만씩 바뀌는데 이걸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북한군이 포함되었다는 중국군 부대는 실재하지도 않는 보고서 상의 부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점을 검증할 중국 자료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외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글에 대한 토론에서 제가 진명행님께 북한군 총 병력이 17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자. 그런데 진명행님의 답 글을 주목하십시오. 이 답 글은 진명행님이 ISNK를 직접 읽고 분석한 것이 아니라 백학순의 논문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 북한군의 파병 및 후방기지 제공」에 달린 각주 38번을 그대로 올린 것 입니다. 백학순의 논문에 달린 각주 38번을 한번 보실까요?

북조선 인민위원회 재정국 소속으로서 1947년 6월까지 북한군 주요 부대의 월별 지출표 작성을 담당하였던 한 미군 정보원에 의하면, 지출표에 의한 북한군의 숫자는 1947년 2월부터 6월까지 173,000명이었다고 한다.(ISNK, no.46. p.10) 이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때까지 만주에서 중공군과 함께 북한으로 퇴각한 조선 의용군 병사들의 숫자(약 50,000 내지 70,000명, ISNK, no.30 p.6)와 북한에서 같은 해 4월부터 만주로 파병하기 시작했던 북한 병사들의 숫자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커밍스는 만주 파병 북한 병사의 숫자를 100,000 내지 150,000명으로 잡고 있다.

이 각주 38번에서 언급하고 있는 ISNK, no.46. p.10의 통계는 제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보고서에 나와 있는걸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보고서의 통계 변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학순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의 상상으로 저 통계를 해석한 것 입니다. 백학순의 연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죠. 그리고 진명행님께서는 ISNK의 통계는 전혀 보지 않고 백학순의 각주에 달린 해석을 그대로 베낀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1. 진명행님은 실제로는 ISNK는 읽지도 않았고 그냥 백학순의 글만 베꼈다.

2. 진명행님은 ISNK의 통계를 모두 검토했으나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백학순의 해석만 인용했다.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 진명행님께서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신 것 입니다.

제가 왜 진명행 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전쟁은 물량으로 해야지!

지난 3월에 올렸던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게 아니다?!"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악영향에 대하여 다뤄 보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한들 황군의 백발백중의 포 1문으로 귀축영미의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오호라. 그러나 역시 일제의 악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투사들의 생각은 달랐으니...

안만 질이 善良 하드라도 量이 워낙 不足하면 難을 能히 克服 못하는 것입니다. ‘탕쿠’ 한 臺는 잘해야 ‘탕쿠’ 三臺, 四臺를 克服 할 수 있지 열臺, 수무臺는 克服하지 못하는 것이요 優秀한 砲 한 門은 二門, 三門은 制壓할 수 있어도 砲 十門, 二十門은 制壓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이 量이 必要하다는 것입니다.

李範奭 長官 退任辭, 『國防』, 大韓民國 國防部, (1949. 4), 3쪽

역시 양이 중요한 것 입니다.


鐵驥 將軍 萬歲!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이글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습니다. 미국측의 정보문서를 토대로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글의 토대가 된 미국측 정보는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 -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어제 지하철에서 한국일보를 읽다 보니 고종석이 쓴 무신론에 대한 칼럼이 실려있었습니다. 짧긴 했지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칼럼이 꽤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그러다 보니 저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확고히 해준 책이 한 권 생각나더군요.

바로 Frank Moore Cross『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은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스는 미국의 사해문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또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과 구약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마크 스미스(Mark S. Smith) 같이 이 사람이 가르친 학자들도 비슷한 주제로 재미있는 책들을 펴내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매우 기억에 남는 책 입니다. 학부시절 어떤 학술지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주문을 했습니다. 책 제목에 Essays라고 적혀 있으니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도착한 책을 몇 장 훑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연구사 정리도 없이 전혀 모르는 기존의 구약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텍스트가 튀어나오니 정신이 없더군요;;;; 영어 해석이 뒤에 붙어있긴 한데 처음 펼쳐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뜨악 했습니다. 게다가 수없이 나오는 다양한 학술저널과 주요 연구문헌들의 약자는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앞장의 약어표를 찾아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일단 무신론자라면 결코 재미가 없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구약 연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자는 야훼와 유대교의 뿌리인 가나안의 신화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가나안의 신앙체계가 후대의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크로스가 이 에세이집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야훼’의 기원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일신 숭배가 확립되는 과정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야훼’라는 신의 기원입니다. 저자는 1장의 3개 절에서 엘(El)과 야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엘’은 고대 가나안의 여러 신 들 중에서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신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로서의 특성은 꽤 중요합니다. 크로스는 야훼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모든 것의 아버지’인 가나안의 신 ‘엘’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의 특성을 차용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Yahweh라는 신의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문외한이긴 하지만 여러 문헌의 교차검증을 통한 추적과정은 매우 인상깊더군요. 다음으로, 야훼와 바알의 관계에 대한 서술 역시 흥미롭습니다. 크로스는 초기 문헌에서 나타나는 야훼의 전사로서의 모습이 폭풍신 바알에서 차용해 온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야훼는 여기 저기서 핵심 개념을 빌려온 아주 빈곤한 ‘신’인 것입니다. 아. 정말.

저는 혹시나 신을 믿더라도 이런 허접한 짝퉁신은 결코 믿지 않을 겁니다.;;;;

4장과 5장은 구약시대 역사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크로스는 문헌분석을 통해 신의 역사인 구약을 인간의 역사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부분이나 열왕기에 대한 분석은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저자가 인용하는 그 많은 학설들을 따라가며 내용을 이해 하는 게 좀 어려웠습니다. 책 후반부에서 그게 더 크게 느껴지더군요.

원래 197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요즘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 것은 1997년에 나온 9판입니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이때까지의 최신 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소장한 서울대도서관에 있는 것도 제것과 같은 1997년판인 모양이더군요.

2008년 10월 15일 수요일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평가

며칠 전에 쓴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김홍일 소장의 기계화부대 건설 구상을 다소 비판적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째 김홍일 소장을 졸지에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 듯 해서 찝찝하더군요. 초기 한국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홍일 소장은 중국군 출신에 대해 비판적이던 미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군측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 보다 우수하다고 보았고 중국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김홍일 소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의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평가를 인용해 보지요. 아래의 인용문은 로버츠 준장이 육군본부의 볼테(Charles L. Boltes)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에 비해 월등히 우수합니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내버려 두면 일본식으로 지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높은 계급과 체면을 중시하며 그들이 중국군에서 가지고 있던 계급보다도 더 높은 계급을 원합니다.

(중략)

한국군의 고위장교단의 지도력은 매우 매우 부족합니다.

총참모장은 일본군 시절 소령으로 병기창에서 근무했던 인물입니다. 매우 열심히 노력하며 우리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물자를 횡령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재 한국군 장성 중에서는 가장 총참모장에 적합한 인물일 것 입니다. 그는 비만이지만 호감을 주는 인물이며 또 소장으로 진급하길 원하지만 좋은 조언자인 자신의 고문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모차장은 한국군 지휘관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며 훌륭한 전술가로 사단장으로도 적합한 인물입니다. 최근 그는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남부 지역의 공비들을 섬멸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일권) 입니다.

행정참모부장(원용덕)은 준장으로 원래는 군의관이었으며 반미주의자이고 무능함 때문에 사단장(5사단)에서 해임되었습니다.

호국군무실장은 준장으로 시대에 뒤떨어진(fuddy-duddy) 일본식 교리만 아는 인물로서 주의 깊게 감시하지 않는다면 사고를 칠 것(put it over) 입니다. 그의 이름은 신(응균)입니다.

한국군 1사단장(김석원)은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된 준장으로 한국군 총참모부와 국방부장관이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지휘하는 사단은 38도상의 개성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1사단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국인 고문관이 제어하지 않는다면 그자는 군벌처럼 될 것 입니다. 그는 사단의 8개 대대 중 7개 대대와 1개 포대를 특별히 중요한 일도 없는데 전방에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고문단에서는 그를 보통 곤경에 빠진 장군들이 가는 남쪽(게릴라 토벌)으로 전출시키려 시도 중입니다. 우리측에서는 예비대가 부족한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에 1사단의 후방에 추가로 부대를 배치했습니다.

7사단장(이준식)은 준장이고 이범석의 정치적 친구입니다. 고문단은 이제 겨우 그를 제어할 수 있게 됐습니다. 7사단은 바로 서울 북쪽의 38도선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6사단장(유재흥)은 괜찮은 인물입니다. 우리측에서 그를 추천했습니다. 그는 제주도를 평정했으며 고문단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동북해안지구에 배치된 8사단장(이형근)은 베닝(Fort Benning)에 교육을 보낸 세 명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장군이 되더니 맛이 갔으며(burst his buttons)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그는 통위부 시절이 전성기 였습니다. 그의 고문관인 중령도 당시에는 잘 나갔지만 너무나 쉽게 출세한 나머지 먼저 한 명이 나가 떨어지고 그리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르게 될 것 입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관(권준)은 대령으로 중국군 출신입니다. 즉 별 능력이 없으며 그는 그에 걸 맞게 행동합니다.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우리는 반드시 그를 해임시킬 것 입니다.

2사단장 송호성은 준장이며 한국군 최초의 장성입니다. 중국군 출신이며 원래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과 정치적 앙숙입니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으며 이범석파는 그를 가을쯤에 외국(아마도 중국대사관 무관)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는 작은 거래에는 서투른 편입니다. 사단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술적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특히 여순반란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그에게 온갖 칭찬을 다 했지만 실제로 일을 담당한 것은 풀러 대령(현재 25보병사단 참모장인) 이었습니다.

3사단장은 이응준 소장으로 그는 일본군 대령이었습니다. 한국군 장군 중에서는 매우 유능한 편이지만 예전에 그의 예하 대대장 두 명이 대대를 이끌고 월북해서 곤경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응준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하길 원합니다. 이응준은 한국군 장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5사단장은 사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육본 정보국장이었습니다. 이름은 백(선엽) 입니다. 우리는 그를 지지하며 저 또한 그가 좋은 지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 대령 중에도 유능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중국군 출신 장군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은 김홍일 소장이며 현재 그는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있습니다. 나이는 50이며 매우 명석하고 성실하며 학자풍인 인물이고 미국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한국군 지휘관들이 전술적 지식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요한 작전이 전개된다면 우리 고문관들이 전술적 실수를 막아줄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며 많은 경우 말 보다 행동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매우 주관적인 평가지만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전반적으로 중국군 출신 장성들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지만 김홍일 소장에 대해서는 평이 좋습니다. 물론 이런 후한 평가는 그가 Americanize 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만;;;;

추가) 로버츠 준장은 한국군 고급장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한국군 사병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보고서에서 한국군 병사에 대한 평가를 발췌해 봅니다.

사병들은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군 사병들은 6개월 정도의 훈련이면 상당히 좋은 병사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군 사병들의 주의 깊음, 극기정신, 훈련에 대한 욕구, 명령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 완고함은 미군 병사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2008년 10월 13일 월요일

체부동


한국 사람들은 걸핏하면 '5천년 역사'와 자랑스러운 조국을 들먹이지만, 돈이 전통을 사정없이 짓밟는 결정적 순간에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J. 스콧 버거슨, 『대한민국 사용후기』, 갤리온, 2007, 40쪽

역시. 어떻게 양키들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 이어지는 속편 되겠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스탈린 동지의 동종혐오

꽤 재미있는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라진스키(Edvard Radzinsky)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서로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또 비슷한 점이 많은 인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과 히틀러의 관계는 동종혐오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탈린의 혐오감은 소련의 언론들에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 ‘무시’ 였습니다.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는 1933년 1월 30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집권을 1면에 싣지 않고 그 대신 다른 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했다. 두 신문은 같은 해 2월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대서특필했고 또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안겨준 3월의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 통과에 대해서는 더 많은 비중을 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사건들은 ‘제1차 소연방 집단농장 돌격노동자 대회’의 개최 소식에 밀려 지면에서 사라져버렸다. 프라우다는 독일에서 공산당원에 대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해서는 자주 보도했지만 독일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몇 달 동안 한 줄의 사설도 내지 않았다. 비록 히틀러의 등장으로 서구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련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소련 자체의 인식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Jeffrey Brooks, 『Thank you, Comrade Stalin! : Soviet Public Culture from Revolution to Co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2001, p.151

물론 1939년의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태도는 갑자기 돌변했지만 오래 지속될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어 ‘스탈린의 세 번째 스승(라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 그러나 서쪽의 호적수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동방에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바로.




毛主席万岁!




네. 스탈린은 마오 주석에게도 히총통과 마찬가지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소련의 언론들이 마오 주석을 어떻게 취급했을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이렇게 중국혁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 소련 언론들은 마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관영지인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는 마오에 대해 단지 혁명의 지도자라고만 언급했을 뿐 그가 제2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여러 계획들의 창시자라는 점과 그가 맑스-레닌주의에 기여한 점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을 때 ‘노보예 브레먀’의 사설은 마오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원회의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천재적인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프라우다의 사설은 마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했으나 그것도 마오의 발언 중 중국혁명의 승리는 소련의 영향과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인용하기 위한 것 이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46

그렇습니다. 대인배가 갖춰야 할 품성에는 쪼잔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1$ = 1328.1₩

오늘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훈훈한 경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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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앙~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게이츠 장관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며칠 지났지만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Obama Aide Lauds Defense Secretary - Top Adviser Hints Gates Could Keep Job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기사인데 오바마의 국방분야 참모인 Richard Danzig가 게이츠의 여러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오바마도 게이츠의 여러 정책에 공감한다는 발언을 했다는군요. 오바마와 게이츠가 이라크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등에서는 유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것 입니다. 게이츠 장관은 다른 민주당 의원들로 부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니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경우 당분간 국방부장관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정권교체를 하더라도 안보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이니 말을 갈아타는 것은 별로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럼즈펠드가 남긴 좋지 않은 유산들도 정리를 해야 할 터이고.

꽤 재미있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가디언에 좀 난감한 소식이 하나 실렸습니다.

Zimbabwe on the brink of new crisis as food runs out

정치적 난장판을 겨우 정리한 짐바브웨에 기아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 정말 지구촌에는 바람잘 날이 없습니다. 뭐;;; 인류가 멸망할 때 까지 그럴 것이 100% 확실합니다만.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이 글은 지난 번에 올렸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을 보충하는 글 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간단히 전체 사단 중 몇 개 사단이 중앙군 계열 이냐만 이야기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단이 어떤 계열인지는 설명하지 않아서 여기에 궁금증을 가진 분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리한 표를 하나 올립니다. 지난번 글에서 중앙군 직계 부대를 분류할 때 약간의 오류가 있었는데 그것도 덤으로 수정했습니다.

아래의 표는 지난번 글에서도 인용했던 曹剑浪의『国民党军简史』,下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 입니다.


위의 표에서 112, 152师는 반직계 사단이기 때문에 기타로 분류했습니다. 112师는 원래 동북계, 152师는 광동계 부대였는데 중앙군으로 편입된 사단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글 에서는 제6병단의 8师, 99师를 기타로 분류했었는데 다시 찾아 보니 이 두 사단도 중앙군 직계 사단이더군요.

사단급 제대에 비해 군단급(军) 제대의 계통은 간단한 편 입니다.

원래 사천계에서 중앙군으로 넘어온 반 직계의 44군과 사천계의 41, 47군, 서북계의 55, 68, 59, 77군을 제외하면 모두 중앙군 직계 军입니다.

※ 덤으로, 1945년의 독일군 전투서열도 나름 막장으로 알고 있는데 국공내전 말기의 국민당군 전투서열도 만만치 않더군요. 사단장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단이 수두룩 하니 말이 안나올 정도입니다.

2008년 10월 1일 수요일

정말 대단한 민중의 호민관

연합뉴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세계에서 살인폭력 심각한 도시는

영광의 1위를 '민중의 호민관(?)' 차베스 대통령이 통치하는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가 차지했습니다. 살인률이 10만명당 130명이라는군요.

하도 재미있어서 기사의 원래 출처인 Foreign Policy 웹사이트로 들어가 봤습니다.

The List: Murder Capitals of the World

넵. 역시 원판이 더 재미있군요.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살인율이 67%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하하하. 민중의 호민관께서는 빈민들에게 빵만 뿌릴줄 알았지 갱단을 소탕할 줄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이런 병신같은 나라를 모범적인 국가로 치켜올리는 바보들이 같은 나라에 산다는게 정말 부끄러워 지는군요. 反美라면 앞뒤 안가리고 열광하는 얼간이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9월 30일 화요일

무서워라;;;;

어제는 하루종일 두통에 시달려서 거의 아무일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고 자다 깨보니 무시무시한 미국발 뉴스가 뜨는군요.

왠지 올 연말은 여러모로 훈훈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입니다.;;;;;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조지 오웰의 수류탄에 대한 추억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 보면 조지 오웰이 장비 부족에 대한 불평을 자주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전 초반 쓸만한 정규군 부대들은 프랑코 쪽에 많이 합류했고 소련의 지원도 내전 초기에는 외국 지원병들에게 잘 들어가지 않아서 장비 부족은 꽤 심각했던 모양이더군요. 조지 오웰의 무기에 대한 불평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제 수류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철모도, 총검도 없었다. 리볼버나 피스톨도 없었다. 폭탄은 다섯 명이나 열 명에 하나 씩이었다. 이 시기에 사용되던 폭탄은 ‘F.A.I.수류탄’으로 알려진 무시무시한 것 이었다. 전쟁 초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생산하던 것 이었다. 이것은 원리상으로는 달걀 모양의 밀스 수류탄과 같았으나, 레버가 핀이 아닌 테이프 조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프를 떼는 즉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류탄을 던져야 했다.

이 수류탄을 “공평하다”고들 했다. 맞은 사람과 던진 사람을 다 죽였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도 몇 가지 있었는데, ‘F.A.I. 수류탄’보다 더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 그러니까 던지는 사람에게 – 덜 위험할 것 같았다. 그나마 던질 만한 수류탄을 보게 된 것은 (1937년) 3월 말이 지나서였다.

조지 오웰/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50쪽

※F.A.I.는 1927년에 조직된 무정부주의 단체입니다.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의 약자이죠.

예전에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수류탄 개발에 참여하셨던 원로 기술자 한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뵈었을 무렵에는 화장품 회사 고문으로 계시면서 가끔 글을 쓰고 계셨지요. 그 분 말씀이 수류탄을 개발하면서 시험할 사람이 따로 없다 보니 기술자들이 직접 수류탄 시제품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한 기술자들이 어이없게 희생된 사례가 꽤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분의 증언을 들으면서 수류탄도 의외로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구나 싶었는데 뒤에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분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7세기 말에 원시적 수류탄이 사용된 뒤 요즘과 같은 모양을 가지기 까지 거의 300년 정도가 걸렸으니 지금 보면 참 단순한 물건 이라도 우습게 봐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오늘 구입한 책

저녁에 서점에 들렀다가 책을 한 권 샀습니다.


표지가 멋져서(!) 집어들었는데 목차와 본문의 몇몇 부분을 대략 훑어 보니 꽤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조금 더 읽었습니다. 대략 훑어 보니 저자가 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민족주의의 강화를 가장 우려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한국 부분에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부쩍 높아진 한국의 민족주의 문제가 한-미-일 삼각동맹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꽤 주목하고 있더군요. 대표적으로 2005년에 있었다는, 한국이 미국에게 한미동맹의 가상적으로 '일본'을 넣자고 요구한 민망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헉;;;;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을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는데 이 책은 그 책 보다는 조금 딱딱해도 비슷하게 재미있어 보입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그냥 잡담입니다. ^^

첫 번째 잡설. 국민당군의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에 대한 것 입니다. 원래 sonnet님의 글, “회해전투 당시 사단 무장”을 읽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트랙백 해야 겠다 하다가 건망증으로 잊어 버리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는 군요.

1947년 중순 3각 편제로 편성된 일반적인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인민해방군의 군단급 부대인 종대(纵队)의 장비현황도 같이 올려 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의 한 등급 높은 부대 조차 장비와 화력에서 국민당군 사단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인데 50mm박격포와 경기관총에서는 격차가 그나마 적다는 점 입니다. 국민당군에 비해서 중화기는 부족하지만 경장비는 그럭저럭 충실한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국민당군 보다 장비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인민해방군은 차량 같은 경우는 아예 보유하고 있질 못 합니다.

두 번째 잡설. 회해전역(淮海战役)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사단급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2병단 : 사령 구청천(邱淸泉)
-제5군 : 45사, 46사, 200사
-제70군 : 32사, 96사, 139사
-제74군 : 51사, 57사, 58사
-제12군 : 112사, 238사
-제72군 : 34사, 233사, 122사
-제116군 : 287사, 288사
기병 제1여
독립여

제6병단 : 사령 이연년(李延年)
-제99군 : 92사, 99사, 268사
-제39군 : 103사, 147사
-제54군 : 8사, 198사, 291사
-제96군 : 141사, 212사

제7병단 : 사령 황백도(黃百韜)
-제25군 : 40사, 108사, 148사
-제63군 : 152사, 186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00군: 44사, 63사
-제44군 : 150사, 162사

제13병단 : 사령 이미(李彌)
-제8군 : 42사, 107사, 237사
-제9군 : 3사, 166사, 253사
-제115군 : 39사, 180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6병단 : 사령 손원량(孫元良)
-제41군 : 122사, 124사
-제47군 : 125사, 127사

제12병단 :사령 황유(黃維)
-제10군 : 18사, 75사, 114사
-제14군 : 10사, 85사, 83사
-제18군 : 11사, 49사, 118사
-제85군 : 23사, 110사, 216사

제4수정구(绥靖区) : 사령 류여명(劉汝明)
-제55군 : 29사, 74사, 181사
-제68군 : 81사, 119사, 143사

제3수정구 : 사령 풍치안(馮治安)
-제59군 : 38사, 180사
-제77군 : 37사, 132사

독립 제107군 : 260사, 261사
독립 제20군 : 133사, 134사

이상의 전투서열은 중국 국민당군의 구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개석 직계부대와 군벌 계통 부대가 뒤섞여 있는 잡탕이란 점이죠.
회해전역에 투입된 국민당 군의 총 77개 사단 중 장개석 직계, 즉 중앙군 직계 사단은 46개 사단입니다. 원래 동북군계에서 장개석 쪽으로 넘어온 112사와 광동계에서 넘어온 152사를 중앙군 계열로 분류하면 48개 사단이군요. 여기에 기병 1여가 중앙군 직계이니 장개석 직계의 부대는 총 48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됩니다. 나머지 32개 사단은 국민당이 아니라 다른 군벌 소속 부대로 장개석 쪽에 붙은 사단이 되겠습니다.
다시 각 병단 별로 중앙군 직계 사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병단 : 총 16개 사단, 2개 여단 / 중앙군 직계 13개 사단, 1개 여단
제6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9개 사단
제7병단 : 총 11개 사단 / 중앙군 직계 5개 사단
제13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7개 사단
제16병단 : 총 4개 사단
제12병단 : 총 12개 사단 / 중앙군 직계 11개 사단
제4수정구 : 총 6개 사단
제3수정구 : 총 4개 사단
독립 제107군 : 총 2개 사단 사단 / 중앙군 직계 2개 사단
독립 제20군 : 총 2개

중앙군 직할 사단의 숫자로 보면 구청천의 제2병단과 황유의 제12병단이 실질적인 주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병단은 중앙군에 광동계(粤)와 사천계(川) 사단이 뒤섞여 있었고 16병단은 4개 사단 전체가 사천계, 그리고 제3수정구와 제4수정구는 모두 서북계, 독립 제20군은 모두 사천계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자체도 국민당 직계에 잡다한 군벌 부대를 긁어모아 완성한 것이었고 이런 난감한 구조는 중일전쟁을 거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롬 첸(陳志讓)이 재미있게 지적한 것 처럼 중국의 상황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했는데 장개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었던 것 이죠.

다시 회해전역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민해방군의 제 1단계 공격으로 괴멸당한 황백도의 제7병단은 서북군벌인 풍치안의 제3수정구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해방군에 가담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됩니다. 제3수정구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동성에서 우위에 있었던 제7병단은 어이없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도보로 추격해온 인민해방군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만약 제3수구의 반란이 없었다면 제7병단은 예정대로 철수를 마쳤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퇴로가 차단된 제7병단은 서주방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합니다만 서주에서 증원 나온 제2병단과 제13병단의 지원공격도 반란을 일으킨 제3수구에 인민해방군 산동병단 소속의 3개 종대가 증원되면서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제7병단은 그대로 전멸해 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벌부대가 다수 섞여 있어 전투력이 떨어졌던 것이 제7병단이 돌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 2단계 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정예부대인 황유의 제12병단이 섬멸된 문제입니다. 1948년 11월 24일, 장개석은 숙현(宿懸)을 탈환해 진포철도를 개통한 뒤 주력부대를 회남으로 철수시켜 방어에 임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원래 숙현지역을 방어하던 것은 제4수정구 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4수정구도 제3수정구와 같은 서북계 부대였습니다. 제4수정구는 11월 15일 인민해방군 주력의 1단계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면서 숙현을 넘겨줬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숙현 탈환을 위해 북상하는 황유 병단을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짰는데 숙현이 제대로 방어됐더라면 이런 덫이 놓이진 않았겠지요. 황유의 제12병단이 예정대로 숙현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인민해방군은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수했고 이를 추격한 황유 병단은 그대로 포위되어 섬멸됩니다.

그리고 회해전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두율명이 지휘하는 제 2, 제 13병단이 포위되어 섬멸된 것이었습니다. 두율명 집단이 포위된 것은 황유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니 결국은 제3, 제4수정구가 문제였던 셈 입니다. 서북군벌계의 이 두 수정구는 장개석의 이탈리아군(?)이 된 셈 입니다.

국공내전시기의 다른 전역에 대해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군벌계 사단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참고문헌
中国人民革命军博物馆 编,『中国人民解放军战史图集』,中国地图出版社, 1990
曹剑浪,『国民党军简史』下, 解放军出版社,2004
国防大学 “战史简编” 编写组,『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1983/2003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1996
陳志讓, 박준수 옮김, 『軍紳政權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1993

라이스에게 어울리는 일

Rice ruft zu Widerstand gegen "russische Aggression" auf

그간 대동강 촌놈들 같이 격에도 맞지 않는 것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굴욕이셨습니까. 비록 레이건 각하 시절 만큼 흉폭하진 못하지만 곰돌이의 재롱 정도는 되어야 귀하의 그릇에 걸맞을 겁니다. 하필 현재 대통령의 치세 말에 이런 일이 터져서 곰돌이들을 상대할 시간이 몇 달 남지 않은게 아쉽다면 아쉽겠습니다.

2008년 9월 17일 수요일

히치하이커 가이드의 여섯번째 책이 나온다는군요

가디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Eoin Colfer to write sixth Hitchhiker's Guide book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의 여섯번째 책이 나오게 된다는군요. 더글라스 아담스가 어이없게 요절하는 바람에 시리즈가 끝장난줄 알았는데 아담스의 부인인 제인 벨슨이 다른 작가에게 여섯번째 소설의 집필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사망한 아담스를 대신해서 여섯번째 가이드를 집필할 작가는 오웬 콜퍼(Eoin Colfer)라는 동화작가라고 하는군요. 아동문학쪽으로는 아는게 없어서 콜퍼라는 작가가 어느 정도의 작가인지는 모르겠으나 벨슨이 직접 고른 사람이니 한번 믿어 보고는 싶습니다. 매우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데 아담스의 유쾌한 필력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God Delusion을 사망한 아담스에게 바친다고 했던 도킨스는 벨슨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합니다. 도킨스도 아담스의 팬이었던 모양인데 말이죠.

2008년 9월 16일 화요일

Zeitgeschichte Online - 재미있는 논문이 많은 사이트

비록 조금 하락하긴 했으나 유로 환율은 여전히 높습니다. 좋은 책들은 어디에서나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특히 독일어권 서적들은 비싼 유로때문에 여전히 지르기가 두려운 물건이지요. 그러나 어디 단행본만 읽으란 법이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인터넷 덕분에 공짜로도 독일어권의 흥미로운 연구들을 접할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사이트는 바로 이곳 입니다.

Zeitgeschichte-Online

이 사이트는 독일 현대사와 관련된 연구논문과 에세이들을 PDF 형식으로 무료 제공하고 있는데 독일 현대사를 다루다 보니 2차대전과 관련된 글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초기 냉전시기를 다루는 글들도 많으니 2차대전에 관심없는 분들에게도 유용할 것 같군요. 물론 본격적인 군사사 논문은 별로 없으나 2차대전에 관한 사회사, 문화사쪽 논문은 많습니다. 그리고 에세이 중에는 영어로 된 에세이도 조금 있으니 독일어를 못하시는 분들도 쓸만합니다.
예전에 이곳을 이용할 때는 서버의 문제인지 2메가 정도 되는 논문 한편을 다운 받는데 10분 정도 걸리기도 했는데 언제 부터인지 꽤 빨라졌습니다. 물론 외부링크로 걸려있는 글들은 해당 기관에 따라 속도가 다릅니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예전에 나온 논문들, 특히 대학들의 외부링크로 걸려 있는 논문들 중에서 링크가 깨진 것이 더러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방치해 놨다는 것 정도 입니다. 그래도 많은 수는 해당 대학의 온라인 도서관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바뀐 주소로 연결되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언어유희의 매력!

14일에 가디언에 실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Robert Fox의 글 입니다. 제목에 주목하십시오..


George Bush's executive disorder



executive disorder!



executive disorder!!



executive disorder!!!



executive disorder!!!!


으하하. 정말 좋습니다. 이런 센스는!

이런 말장난이 계속되는 한 대영제국은 몰락하지 않습니다.

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장군님의 협상술

지난 7월에 sonnet님과 漁夫님이 공산주의 국가의 협상술에 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How Communists Negotiate - sonnet

지도국 발표 담화 - sonnet

북한식 협상술의 한 예 - 漁夫

이쪽 동네의 상식으로는 황당한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최근 남베트남 붕괴 당시 북베트남에 포로가 되어 고생했던 이대용 공사의 회고록에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먼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78년 7월 24일부터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 인도 베트남 대사관이 소유하고 있는 부속건물인 허름한 독립가옥에서, 한국∙북한∙베트남의 3개국 외교 대표단들이 모여 호치민 시 치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국 외교관들의 석방 문제에 대해 비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중략)

북한측 대표단은 조명일이 수석대표였다. 조명일은 당시 대남비서 김중린 밑에서 사실상 남북대화를 총괄해 온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대표로는 노동당 3호 청사 통일전선부의 박영수, 김완수 등이었다.
그들은 나를 압박하여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 망명서를 받아내는 것과 그대로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는 양면시나리오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석방할 때 남한에서 복역중인 남파간첩과 한국 외교관은 교환비율은 뉴델리 3자 회담의 진전을 봐 가며 조절하기로 정하고 있었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에 대남비서 김중린은 이들 대표단을 데리고 당 중앙이며 조직비서인 김정일의 지시를 받기 위해 찾아갔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김정일은, “남조선에 갇혀 있는 남조선 혁명가(남파간첩)가 현재 얼마나 되느냐?”고 김중린에게 물었다. “400명 될 겁니다만…” 김중린이 대답하자, 김정일은 대뜸, “으음…. 그러면 1명당 150명으로 바꾸자고 그래…”라고 명령했다.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더라도 나머지 한국 외교관 두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고, 또 나를 서울로 보낼 때에는 한국 외교관 세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는 수치는 이렇게 김정일의 한 마디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너무도 엄청난 편차가 있는 교환비율에 김중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정일은 한마디 덧붙였다.

“왜 그러는가? 많아서 그런가? 회담에 임할 사람들이 그렇게 졸장부 여서야 되겠느냐. 회담이든 뭐든 처음부터 판을 크게 치고 내밀어야지… 그러면 얼마로 하려 했는가?”

김정일의 말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신(神)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중린 이하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이대용, 『최후의 월남공사 李大鎔은 말한다 –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 경학사, 2000, 130~131쪽

물론 이것은 이대용 공사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제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 이지만 요즘 북한의 해괴한 협상 행태를 보면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 입니다. 북한이 외교협상에서 황당무계한 발언을 일삼은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정책의 최고결정권자들이 저렇게 해괴한 발상을 탑재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쉽게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2008년 9월 9일 화요일

미군의 파키스탄 영내 공습

U.S. Attack on Taliban Kills 23 in Pakistan

얼마전 미국이 파키스탄 영내로 지상군을 투입했는데 이번에는 미사일을 날렸군요. 흥미로운 기사였습니다.

※ 미군이 처음으로 파키스탄 영내를 공식적으로 공격한 사건은 라피에사쥬님이 며칠전에 글을 하나 써 주셨습니다.
=>Angoor Ada 강습, 미군 처음으로 파키스탄영토에 발을 내딛다.

결국 파키스탄의 국경지대가 탈레반의 '성지'처럼 돼 버렸으니 이걸 그냥 놔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베트남 전쟁과 비슷한 양상이군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것은 베트남 전쟁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이 여론의 비난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라오스나 캄보디아 영내로 진입해 군사작전을 펼친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내륙국가들이 길다란 국경을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환경은 비정규전을 펼치는 입장에서 그야 말로 천혜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정규군이라면 외교적 물의를 무릅쓰고 국경을 멋대로 넘을 수 없지만 이쪽은 그런걸 개의치 않아도 될 상황이니 아주 좋지요. 미국의 라오스나 캄보디아내 군사작전은 반전여론에 기름만 들이 붓고 결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 했는데 최근 수행된 파키스탄 월경작전도 정치적인 부담만 만들어 주고 끝날 것 같은 생각입니다.

뭐, 앞으로 미국이 파키스탄 문제를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관건이겠군요. 어쨌건 미국은 외교적으로 파키스탄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이죠.

2008년 9월 7일 일요일

빈 - 셋째날 : 빈 시내의 Flakturm 답사기

이제 빈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이 밝았습니다. 전날과는 달리 화창한 날씨가 아주 좋더군요. 유감스럽게도 늦게 일어난 덕분에 빈 소년합창단의 합창을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만...

마지막 날은 빈 시내의 대표적인 2차대전 유적인 대공포탑(Flaktürme)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빈 시내에는 2차대전 기간 중 건설된 대공포탑이 세 곳에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첫 번째 대공포탑들은 Esterhazypark과 Stiftskaserne에 있는데 후자는 군사시설에 있어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공포탑들은 Arenberg 공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대공포탑들은 Augarten 공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대공포탑"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대공포탑은 대공포가 설치되는 전투탑(Gefechtturm, 이하 G-Turm)과 사격관제를 담당하는 지휘탑(Leitturm, 이하 L-Turm)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탑이 하나의 방공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 대공포탑에 대한 위키 항목

독일어 항목 / 영어 항목

독일어 사이트이긴 한데 이 사이트의 설명도 꽤 괜찮습니다.

Die Flaktürme in Wien


먼저 시내 중심가에 있는 Esterhazypark의 대공포탑을 갔습니다. 이 대공포탑은 지휘탑인 L-Turm 입니다. 전투탑은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 군사시설이어서 방문하지 못 했습니다.


이 지휘탑은 특이하게도 수족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더군요.




수족관 관람을 마치면 대공포탑 꼭대기로 올라갈 수 가 있습니다. 올라가는 계단 중간 중간 2차대전 당시 대공포탑의 건설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문이 붙어 있습니다.


빈 시내의 여섯개 대공포탑 중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곳입니다. 대공포탑의 꼭대기는 빈 시내를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족관과 꼭대기 구경을 마친 다음에는 대공포탑의 지하실에 설치된 고문기구역사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가족단위 관람객으로 북적대는 수족관과 달리 고문기구박물관은 관람객이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전시물이라고는 이런 것 뿐이니 가족단위 관람객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관람을 마친 뒤 다음 목적지인 Arenberg 공원의 대공포탑으로 갔습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한국처럼 지하철이 매우 한산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Arenberg로 가는 길에는 소련군의 빈 해방 기념비가 있습니다. 오랫만에 이 놈을 보니 반갑더군요.




Arenberg 공원은 동네 놀이터 수준(?)이다 보니 찾아 가는 길이 약간 어려웠습니다. 가는 길에 군사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헌책방도 하나 찾았는데 일요일이다 보니;;;;

드디어 Arenberg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L-Turm이 눈에 들어오는 군요.



그리고 바로 옆에는 G-Turm이 있습니다.



Arenberg의 대공포탑들을 구경한 뒤 간단히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Augarten으로 향했습니다.

Augarten으로 가는 길에 한장. 다들 잘 아시는 프라터 공원의 회전관람차(Riesenrad) 입니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분의 동상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리싸(Lissa) 해전의 영웅인 테게토프(Wilhelm von Tegetthoff) 제독의 동상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친 동상인데 뒤에 리싸 해전에 대한 글을 읽은 뒤 이 양반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어떤 인물인지 알고 나서 동상을 보게되니 또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테게토프 제독에게 인사를 한 뒤 아우가르텐 공원으로 갔습니다. 아우가르텐은 매우 규모가 큰 공원이어서 조금 전에 갔던 아렌베르크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먼저 G-Turm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렌베르크의 것과는 모양이 다르군요.




일반인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으니 바깥에서 구경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탑 위에 올라가 공원 전체를 구경했으면 싶은데 그게 안되니 아쉽더군요.

다음으로는 L-Turm을 둘러봤습니다. L-Turm들은 모두 대략 비슷하게 생긴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빈 시내의 대공포탑들을 모두 구경한 뒤에는 편안하게 도나우강가를 거닐며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다시 저녁 무렵 시내 중심가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빈의 야경을 구경했습니다.

빈을 마지막으로 여행은 끝났고 이제 빈 서부역으로 돌아가 뮌헨행 야간 열차를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이 즐겁게 끝나니 역시 남는 것은 아쉬움 이더군요. 밤 기차에서 좀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2008년 9월 5일 금요일

The Somme - Robin Prior and Trevor Wilson

지난번에는 솜(Somme) 전투를 다룬 책 중에서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를 소개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할 책도 역시 솜 전투에 대한 책인데 의 Gliddon의 책 보다는 평범한 형식입니다.

지난번에도 적었듯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재를 글의 주제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 입니다. 아주 잘 쓸 자신이 없다면 좀 특이한 방식으로 접근하던가 하는 쪽이 덜 위험하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이야기할 프라이어(Robin Prior)와 윌슨(Trevor Wilson)의 The Somme은 아주 과감한 저작입니다. 저자들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솜 전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기존의 연구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국군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료적 토대가 탄탄하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매우 쏠쏠한 좋은 책 입니다. 제가 읽은 솜 전투에 대한 저작 중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라는 점도 언급해야 겠군요.

저자들은 매우 용감한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된 분석대상으로 삼는 것은 솜 전투의 입안과정과 솜 전투 첫날을 포함한 초기의 전투입니다. 전투 첫날에 대해서는 미들브룩(Martin Middlebrook)의 The First Day on the Somme 같은 유명한 저작이 있다 보니 더 쓸만한 것이 있나 싶은데 저자들은 신통하게도 기존 연구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탄탄한 자료에 기반한 글의 강점은 이런 것이다 싶더군요.

솜 전투에 대한 많은 저작들이 독일군의 기관총에 학살당하는 밀집대형의 영국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저자들은 그런 이미지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쟁 중과 전쟁 직후에 출간된 부정확한 저작들의 서술이 과장되게 수용된 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이날 공격에 나선 영국군 보병부대들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공격대형을 훈련 받았습니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솜 전투 초기 영국군의 포병 운용의 실패입니다. 먼저 공격 개시 전에 수일간 계속된 공격준비사격이 매우 형편없이 진행되었고 또 공격 당일의 공격준비사격과 이후 보병의 공격과정에서 진행된 탄막사격이 거의 효과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즉, 영국군의 공격준비사격은 강력한 독일군의 제1방어선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에는 부족했고 또 독일 포병에 대한 제압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또 7월 1일 공격 당일의 포병 운용도 매우 형편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영국 8군단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8군단의 공격을 지원하는 포병은 독일군의 제1방어선이 제압되지 않았는데도 후방의 독일군 진지로 포격을 돌리는 바람에 제1방어선의 독일군은 방어준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격준비사격이 독일포병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포병은 영국군 보병부대가 돌격해 오자 바로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 영국군에 기관총 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영국군의 공격준비사격은 독일군의 제1선 방어진지와 철조망, 후방의 독일 포병 어느 하나에도 충분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그 결과는 공격 첫째 날의 가공할 손실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공격 첫날의 형편없는 포병운용과는 반대의 사례로 제시되는 것은 7월 14일의 공격입니다. 저자들은 이날 영국군의 포격이 독일군의 제2방어선과 후방의 독일 포병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제2방어선이 제1방어선에 비하면 방어력이 취약한 면도 있었지만 포병이 공격에 앞서 2중으로 구축된 철조망선을 뚫은 것은 이날의 공격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 입니다. 저자들은 14일의 전투와 같이 영국군 보병은 충분하고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받았을 때 매우 양호한 전과를 거뒀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1915~16년에 편성된 전투경험이 없는 사단들 조차도 훈련 상태에 비하면 양호한 전투능력을 보여줬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존의 저작들과는 반대되는 평가여서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각 장의 분량이 짧아서 가독성이 매우 좋더군요.

2008년 9월 3일 수요일

이놈들이 거짓말이라니 진짜 같다...

北조평통 "여간첩 사건은 날조 모략극"(종합)

넵. 북조선에서 간첩사건에 대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북조선에서 날조극이라고 하니 오히려 사실 같습니다.

아우. 언제까지 이 거지새끼들을 상대해 줘야 하는건지.

2008년 9월 2일 화요일

The Road

오늘 모처에서 했던 용역일의 한 달이나 밀린 급여가 통장으로 들어왔습니다. 평소였다면 통장을 확인 하는대로 바로 amazon.com이나 기타 유사한 사이트로 이동해 신앙생활을 했겠습니다만… 치솟는 환율을 고려해 일단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어쨌건 또 돈이 들어왔으니 책은 사야겠고 그래서 환율과는 별 상관없는 국내 도서를 사기 위해 반디 앤 루니스를 갔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사야 겠다고 생각하던 책을 두 권 계산한 뒤 귀가하려는 찰나 소설 코너에서 눈에 들어온 책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The Road 번역판이었습니다.

각종 매체에서 요란하게 홍보를 해서 그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평소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좀처럼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온 김에 대충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다 읽어 버렸습니다.

소설의 세계관 자체가 제가 좋아하는 종말적 세계관이고 그 우울한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물론 번역본이라 원문의 맛을 100% 느끼진 못하지만)도 탁월했습니다. 생존자들의 피폐한 모습이나 폐허가 된 황량한 세계에 대한 묘사는 오싹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슴에 와 닫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바다를 향해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은 황량한 세계만큼이나 단조롭고 막막하지만 때때로 닥치는 위태로운 장면은 긴장이 넘칩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총 알 두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 뿐 입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의무에 비해 미약한 힘 때문에 항상 불안해 합니다. 자신이 짊어진 무거운 의무에 대해 항상 고뇌하는 소년의 아버지는 마치 고행하는 수도승 처럼 느껴집니다. 이 두 사람의 여정은 마치 종교적 순례의 여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미국의 평론 중에서 이 책을 성경에 비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여정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작가는 독자의 마음을 쥐어 짜려는지 마지막에는 약간의 장난(???)을 칩니다. 정말 탁월한 글솜씨더군요.

원작을 읽지 못했으니 100% 확신할 수 없지만 번역하신 분의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2008년 8월 31일 일요일

한 베트남 여성의 병역기피에 대한 견해

베트남 전쟁 말기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홍콩 특파원이었던 아놀드 아이작(Arnold R. Isaacs)이 베트남에 취재 갔을 때의 일화라는 군요.

전투에서 한 명의 청년이 죽어갈 때 또 반대편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수년간 잠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부군이 우리 마을에 오는 경우는 병역기피자를 색출할 때 였습니다.” (빈 안 Bihn An)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했다. “정부군은 한 번 왔다가 한참 뒤에 다시 오거나 때로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매일 왔습니다. 보통 한 두 명 정도를 적발하거나 아니면 허탕을 치기도 했지요.” 비록 빈 안 마을의 청년들 중 상당수는 군대에 징집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청년들이 군대를 피해 숨을 때 그들은 집에 숨어야 했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한 여성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빈 안 마을에서 몇 마일 더 떨어진 국경을 인접한 짜우 독(Chau Doc) 주에 위치한 하안(河岸) 지대의 호아 하오(Hoa Hao) 마을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반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청년들은 징병을 거부하려 했고 실제로 병역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아주 가난한 청년들 만이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가 와서 그들을 체포할 때만 군대에 갔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징집하러 오지 않는 이상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대도 병역 기피자들을 모두 잡아들이지는 못 했습니다. 기피자의 수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는 마치 농부들이 호랑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다루는 것 처럼 병역 문제를 이야기 했다. 촌장의 집 1층에서 촌장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그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뒤에 나는 한 베트남인 친구에게 베트남 사람들은 병역을 기피하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병역기피는 밥 먹는 것과 같아. 병역 기피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 그게 다야. 너는 식사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니?”

Arnold R. Isaacs,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298

아이작이 베트남 취재를 갔던 1973년은 미군의 철수 이후 격화된 북베트남의 공세로 전사자가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에만 25,473명의 남베트남군이 전사했는데 이것은 1968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남베트남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 이었습니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판에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병역기피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한 베트남 여성의 말 처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 지니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 이죠. 결국 남베트남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장기전을 수행하면서 국민동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부패한 정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만약 한국전쟁이 베트남 만큼이나 장기화 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생존할 수 있었을 까 의문이 들더군요. 사실 요즘도 사회부조리에 대한 환멸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다 보니 유사시 한국의 생존여부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비록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필요한데 지금 정부는;;;;;;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Midnight Meat Train)

국내 개봉 뒤 예상 보다 호평이 많아서 영화를 직접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걸작 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평을 받을 만 하더군요. 극장에서 공포영화를 본 것은 사일런트 힐 이후 처음인데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심장이 덜덜덜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지껏 봤던 공포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하더군요. 제 옆에서 부부동반으로 관람하던 분들도 계셨는데 부인 분께서 영화 중반 이후 마구 짜증을 내더군요;;;;; 아무래도 귀가한 이후 남편 분이 무사하진 못했을 거라는데 백원을 걸어볼까 합니다. 저는 서울극장 7관에서 봤는데 의외로 부인이나 애인을 동반하고 보러 온 분들이 많더군요. 아니. 하필 이런 영화를?

영화를 본 뒤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생각했지만 역시 이 영화가 덜덜덜 한 이유는 귀신이나 좀비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지만 사람을 식용으로 가공하는 살인마는 있을 법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의 연쇄살인범 중에서는 사람을 꿀꺽한 경우가 더러 있죠. 물론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괴물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만…
듣던 것 만큼 살인이나 시체를 가공하는 장면의 묘사가 잔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설정이나 연출 때문에 매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마지막에 주인공의 애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섬뜩하더군요.
전체적으로는 섬뜩한 영화였는데 영화 중간에 나온 마호가니와 퀸튼 잭슨(Quinton Rampage Jackson)의 격투나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과 마호가니의 결투는 조금 웃겼습니다.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려나… 잭슨은 마호가니와 치고 받고 싸우면서 웃기는 대사를 주절거리는데 그게 정말 웃깁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람의 뼈를 가지고 마호가니와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보다가 무의식 중에 킬킬 거렸더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저를 쳐다보더군요. 조금 뻘쭘 했습니다.
주인공이 살인범 마호가니를 추적하면서 점차 변화해가는 것도 흥미 있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은 마호가니를 추적하다가 식성이 변화해 고기를 먹는 장면은 섬뜩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스테이크의 육즙을 찍어먹는 장면이 정말 덜덜덜 하더군요.

꽤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도시괴담류의 이야기 거리를 아주 그럴싸하게 잘 가공했더군요. 마치 보통 라면으로 만든 근사한 요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원작을 읽어 보지 못했는데 한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겠습니다.

후야오방의 북한에 대한 평가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나카소네 대담록을 읽는 중인데 북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하나 있더군요. 나카소네가 1984년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을 만났을 때 후야오방이 했던 이야기라는데 그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사토 : 이야기가 약간 뒤로 돌아갑니다만, 1984년 3월에 중국에 가셨지요?

나카소네 : 네. 최초의 공식방문이었지요. 그때까지는 호요방 씨가 아직 건재하였으므로 대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학에서 강연까지 했고 그것이 중국 전체에 TV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다음 학생들이 이것저것 의견을 듣고 싶다기에 30명 정도 학생들과 간담을 했는데 일문일답하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 전단도 뿌리고 데모도 하면서 나카소네 반대운동을 했어요.(웃음)

사토 : 중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나카소네 : 그때까지 남북한간의 화합에 대해서는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과 북이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교전국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은 제외시키고 3자회담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호요방 씨에게 “그런 불합리한 억지주장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이 4자회담에 응하도록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로부터 “당신은 미국과 친하고 중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건냈던 것 입니다. 그랬더니 – 이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 호요방 씨가 “북한은 심리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여서 중국도 다루기 힘들다. 그러한 북한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느낌이 그 당시부터 있었어요. 아마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해서 포커게임을 하고 있듯이 중국과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토 : 알만합니다.

나카소네 : 그러므로 중국으로서도 북한문제는 귀찮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토 다카시, 사토 세이사부로, 성완종 번역,『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한송, 1998, 384~385쪽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북한은 확실히 ‘자율성’이 강한 국가입니다. 사실 자폐적이라고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긴 합니다만…. 소련으로부터 복구원조를 받아먹던 50년대 중반에도 소련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천리마운동 이후로는 그야말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지요. 지루한 핵 협상과정을 통해 잘 나타났듯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80년대 초반에는 인용한 글에서 후야오방이 밝혔듯 중국이나 소련의 말이 더욱 더 먹히지 않았을 것 입니다.
북한의 자율성(또는 자폐증)은 북한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처럼 북한과 그럭 저럭 말이 통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높아졌으니 정치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는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또 50년대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겠지만 어떤 때는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종이전화기에 달린 실 밖에 안되는 것 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독일군 6보병사단사 전문이 공개된 사이트

웹서핑을 하다 보니 Horst Grossmann의 독일 제 6보병사단사,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의 전문이 올라와 있는 사이트를 찿았습니다. 1958년판을 그대로 스캔해서 올렸는데 사이트 주인장의 근성은 정말 존경할 만한 수준입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PDF 파일이 아니라 각각의 낱장을 그림파일로 올려놨다는 점 정도가 되겠군요.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

그런데 이 책의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는건지 궁금하군요.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독서생활에 지장이...

환율 폭등 1,079원..3년9개월래 최고(종합) - 연합뉴스

이건 뭐 대책이 없죠;;;;;;

유로도 여전히 강한데다 달러까지 이모양이니 난감합니다. 사야할 책이 산더미 같은데...

빈 - 둘째날 : Naschmarkt,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

빈에서의 둘째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에는 Naschmarkt로 헌책을 사러 나갔습니다. 물론 시장을 돌아다니며 군것질 하는 것도 포함해서...



사실 책을 산다고 나왔으나 막상 시장에 들어오니 먹는 것에 더 정신이 팔립니다. 싱싱한 치즈를 한덩어리 사서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아흥~♪

동양상회는 여전하더군요. 이 가게는 아는 분이 많으 실 것 같습니다.


Naschmarkt는 말 그대로 '먹자시장(?)' 정도 되겠습니다만 이것 저것 다 팝니다. 동대문에 가깝죠.



헌 책을 몇 권 산 뒤 다시 군것질을 조금 한 뒤 바로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5년 전에도 갔었는데 그때 일부 구역이 공사중이어서 모두 관람하지를 못 했거든요.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은 빈 남부역 근처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요.


그런데 빈 남부역에 유로라인 버스가 들어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5년 전에도 그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드디어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병영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남다른 포스(?)를 풍깁니다.


건물 외곽의 회랑과 박물관 정문 바로 앞에는 오스트리아군이 18~19세기에 사용했던 화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00파운드 구포(1751년형)

6파운드 포(1764년형)

6파운드 포(1838년형)

그리고 의외의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니가 왜 여기 있는거야!

이제 표를 사서 본격적으로 박물관 관람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품보관소의 보관표가 좀 허접합니다.


당연히 1층 부터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주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작은 기획전시가 하나 있더군요. 2차대전 당시 공습을 테마로 한 전시였습니다.


먼저 본토방공전에서 독일 정규군을 지원한 다양한 보조인력들의 복장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공군여성보조원 전화교환수와 피난민을 재현한 마네킹이 가장 인상깊더군요.



기획전시실을 지나 1층 주전시실로 들어갑니다. 1층에는 1866년 부터 1차대전 종전까지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야포는 1차대전 중 사용된 10cm Kanone M99 같은데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포병에 대한 사진자료를 찾기가 어렵더군요.



다음은 오스트리아 산악부대의 동계 장비입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I)의 군복입니다.



이외에도 영국군 등 외국군대의 명예연대장 복장이 몇 벌 더 있었는데 사진이 잘못나와서 올리지는 못 합니다.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중기관총. M1907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70~1890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요란한 군복들입니다. 일부분만 올리는게 아쉽군요.


Leibgarde-Reiter의 행사용 제복

제28보병연대 사병

제6울란연대 사병

향토연대(Landesschützenregimet)의 엽병

제5용기병연대의 중위

그리고 1차대전 시기의 전시물로 넘어갑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저격당할 때 탄 승용차


1차대전 관련 전시물 중에서 다양한 선전포스터가 눈에 띄었는데 특히 아래의 전시공채 포스터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기가 좋군요.


그리고 다시 1차대전 시기의 군복들이 이어집니다.

제8용기병연대의 상병(1914/15)

울란연대의 사병(1914/15)

후사르연대의 사병(1914/15)

대전 초기 독일군

대전 초기 세르비아군

대전 초기 이탈리아군 알피니연대원

그리고 대전 후반기 전시실로 넘어가는 중간에 중화기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38cm Haubitze M1916

7.5cm Gebirigskanone M1915

15cm Feldhaubitze M1914

그리고 대전 후반기의 전시물이 이어집니다. 대전 후반기의 군복들은 대전 초기의 군복에 비해 화려함이 줄어들었고 오히려 2차대전 초기의 군복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 보병

오스트리아군 조종사

대전 후기의 보병대위(67보병연대)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의 3톤트럭, A-XII-930

이렇게 대략 1층 관람을 마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원래 2층 관람에 중점을 두려고 했는데 1차대전기 전시물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깜빡 했습니다.

건물 곳곳의 기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배출한 명장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프란츠 요셉 1세의 흉상...


2층에는 16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 까지의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일단 30년 전쟁부터 시작하게 되는 군요. 아직까지 갑옷이 그럭 저럭 효용이 있던 시절의 물건들입니다. 갑옷제작 기술이 완성에 달한 시기의 물건들이라 제법 멋있죠. 드레스덴에서 봤던 갑옷들에 비해서는 덜 화려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습니다.




1620년경의 머스킷티어

1632년경의 보병 부사관

1620년경의 창병

1620년경의 중기병(Kürassier)

1620년경의 Arquebusier

1610년경의 Lanzierer

30년 전쟁기의 전시물 다음에는 17~18세기 터키와의 전쟁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개머리판이 화려하게 장식된 오스만 투르크군의 수발총은 하나 가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음으로는 18세기 전시실로 넘어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부터는 시간도 부족하고 메모리카드 용량도 문제가 있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니까 박물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관람도 다 마치지 못 했습니다.

전시물의 구성은 다른 전시실과 비슷했는데 한 가지 멋진 점이 더 있었습니다. 전시실을 가득 메운 대형 기록화들이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도록을 구매하려 했는데 관람시간이 종료되어 기념품점이 문을 닫는 바람이 실패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돈이 없어 도록을 사지 못 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서는 시간이 없어 실패하네요.;;;; 뭐, 다음에 세번째로 갈 때는 사와야 겠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1759년 11월 21일 막센(Maxen)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항복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화 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에서는 프로이센의 승률이 높은 편이라 이런 그림을 구경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관람에서도 방대한 전시물 덕분에 전체를 다 관람하는데 실패하고 또 기념품 점에서 책을 사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다음에 빈을 세번째 방문할 때는 꼭 전체를 관람해야 겠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남역 근처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식당 주인장이 전직 권투선수였습니다. 잠깐이지만 세계 챔피언도 했더군요. 이 양반의 이야기는 빈의 세번째 날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