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5일 월요일

뭐냐. 이 '남조선'스러움은???

地方の医師不足対策 医学生に新奨学金検討 文科省

한국어로 옮기고 명사만 바꾸면 한국 이야기라고 해도 믿겠군요.

각 지자체가 의료인력 부족에 대해 자구책에 고심하는 것이나 정부차원에서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야 나쁘진 않지만 지역사회의 공동화가 이정도로 심각하다니 비참한 일입니다. 정말 다른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예전에 채승병님이 블로그에서 다루었던 일본 사회의 '지역격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전 예멘 대사 유지호씨가 쓴 『예멘의 남북통일』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예멘의 통일은 한국의 진보 계열에게는 독일식의 흡수통일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뭐 얼마가지 않아 예멘 내전이 발발해 예멘 통일을 찬양하는 주장들이 쑥 들어가 버렸지만 말입니다. 몇몇 논객들은 예멘의 사례를 모범적으로 치켜세우다가 예멘이 내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자 꽤 당황해 했다고 하지요. 유지호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예멘이 내전에 돌입하자 한국에서는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가 나타난 반면 서방에서는 예상했다는 듯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마냥 비판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일과 관련해서 자신의 실수가 잊혀질 때 까지 잠자코 있다가 슬금슬금 목소리를 높이는 양반들을 보면 난감함을 느끼곤 합니다. 왜이리 다 큰 어른들이 쿨하지 못한 것인지.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휴같지 않은 연휴는 잘들 지내셨습니까?

얼마전 이야기 했듯 그동안 남발한 공수표를 조금씩 수습해 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유명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에 대한 한 논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논쟁은 10년간 계속되면서 매우 재미있는 단행본과 논문들을 생산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이 논쟁의 진행상황과 그 부산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논쟁의 시작

1999년 War in History 6권 3호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학술지에서 거부를 당하고 있었는데 War In History의 공동편집자였던 군사사가 휴 스트라찬(Hew Starchan)은 War in History에 이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버의 이 논문은 매우 엄청난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슐리펜 계획'이란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 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 총참모부 출신의 군인들이 1차대전 직후 군부에 쏟아진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공간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은 전쟁 기간 중 독일군 총참모부의 전쟁지휘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군부에서는 이러한 민간의 비판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후 1차대전 중의 군문서는 기밀로 분류되어 제한적인 장교들만이 접할 수 있었으며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등 이 문서를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장교들은 독일군부의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슐리펜이 훌륭한 전쟁계획을 남겼으나 후임자인 몰트케가 이를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해 전쟁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에 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이 있었으나 원사료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계획이었다는 점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후 1990년대 까지 원사료를 활용한 연구는 1950년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슐리펜의 (실제로는 1906년 1월 경 작성한 된) 1905년 비망록(Denkschrift)을 발굴한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연구가 사실상 유일한 것이었으나 리터 또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연구들은 1920년대에 확립된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된 뒤 냉전기간 동안 기밀로 묶여있던 공산권의 자료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었다. 경제사가이며 군인이었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이 1930년대 후반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연구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기간 중 작성한 작전계획에 대한 여러 비망록을 보여주고 있다. 슐리펜이 1890년대 후반 부터 퇴임 직전까지 작성한 비망록을 분석하면 슐리펜은 다양한 전쟁계획을 검토했으며 서부에 대한 공세 외에도 동부에 대한 공세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1904년에 총참모부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상정하고 실시한 두차례의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은 주공을 우익에 두고있지 않다. 그리고 이 참모부연습에는 실제 편성된 부대 뿐 아니라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다. 슐리펜이 1905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등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병력배치를 하고 있지만 프랑스군의 주력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할 경우 우익에 배치된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슐리펜 계획'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슐리펜은 1905년 겨울에 있었던 그의 마지막 참모부연습에서는 '전략방어'를 취했다.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 중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것은 없다.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면 이 계획에 입각한 훈련이 실시되었어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부대들 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늘날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단지 그가 구상한 여러 '참모부연습' 중 하나일 뿐이다. 슐리펜이 사망하기 직전인 1912년에 작성한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자료로 인용되었으나 이 비망록은 슐리펜이 현역 시절 실시했던 여러 참모부연습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실제 결전은 벨기에에서 벌어질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또한 슐리펜의 후임인 소(小)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전쟁계획으로 넘겨받았다면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이 계획, 즉 1905년 비망록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몰트케는 1906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경우 슐리펜이 1904년 훈련에서 제안한 바 있었던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대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했던 대로 메츠(Metz)를 통한 반격을 실시하고 있다. 몰트케가 실시한 1908년의 참모부연습도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할 경우 반격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방어를 취하고 독일이 전략적인 공세로 나선다는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주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슐리펜과 소 몰트케는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반격으로 이것을 격파하고 프랑스 영내로 침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즉 '슐리펜 계획'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


홈즈의 반론과 주버의 재반론

이렇게 주버가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거대한 떡밥'을 던지자 이 바닥에서 침 좀 뱉는다는 인물들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웨 일즈 대학의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는 같은 학술지의 2001년 8권 2호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홈즈의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주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인 1905년 비망록을 슐리펜의 다른 비망록, 또는 참모부연습과는 매우 다른 돌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버는 당시의 전략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먼저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명백해 졌으며 이것은 슐리펜이 서부 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주버는 이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공세적 작전계획인 12호 계획은 러시아와의 양면 공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원이 완료되기 전에는 실시될 수 없었으며 슐리펜은 이 점을 명백히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한 것 또한 프랑스군의 공세를 분쇄하더라도 단순히 반격을 통해 독일-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 점은 슐리펜이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강조한 바 있다.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이들이 국경지대의 요새로 퇴각해 방어로 전환할 경우, 즉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계획이었다. 주버가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슐리펜은 국경지대의 전투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슐리펜 계획'인 1906년 1월의 비망록이 작성된 배경은 슐리펜이 여러 차례의 도상 훈련과 정보를 종합해 국경지대를 통한 반격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는 데 있다. 슐리펜은 여러차례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조기에 격파하지 못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의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슐리펜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은퇴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주버는 1904년 참모부연습이 주력을 우익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1904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05년의 참모부연습은 주버의 주장과는 달리 '슐리펜 계획'의 요소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의 핵심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은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통해 슐리펜 계획이 될 1905년 비망록을 완성한 것이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주력을 우익에 집중해 최단시일내에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하는데 있었으며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방어를 취하며 단계적 후퇴를 실시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방안이었다. 또한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은 당시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슐리펜이 그 계획을 1906년에 즉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충분히 증강될 장래를 예승하고 작성했기 때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주버는 소 몰트케가 초기에 1905년의 비망록에 따른 훈련 대신 1905년 참모부연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나 소 몰트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초기에는 그가 벨기에를 통한 대규모 우회 기동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에 이르면 소 몰트케도 1905년의 비망록을 다시 검토한 끝에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또한 프랑스가 공세적인 계획을 강화함으로써 슐리펜이 우려한 것 처럼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를 통한 방어를 취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주버의 오류는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포위하는데 있다고 인식한 데 있다. 파리를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단계적 철수에 성공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방안이었으며 슐리펜 계획의 고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주버는 이러한 오류 때문에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비망록을 잘못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주버는 홈즈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War in History 2001년 8권 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투고합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이란 실재로 존재했으나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우익을 강화하여 파리-베르덩을 잇는 중간선에서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으며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포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대안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 강화한 우익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고 있던 부대들을 포함시킨 것은 슐리펜이 앞으로 진행될 독일군의 증강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계획은 그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또한 홈즈는 무리하게 1904년의 참모부연습과 '슐리펜 계획'을 연결하고 있다. 1904년의 참모부연습은 '슐리펜 계획'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홈즈는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건 우익의 주력으로 공세를 강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1938년 독일군 장성이었든 폰 죌너(von Zoellner)가 썼던 글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홈즈는 죌너의 주장에 따라 1905년 참모부연습이 슐리펜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1905년 참모부연습은 주력을 로렌 지방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돌리고 있다. 그리고 홈즈는 슐리펜의 전략 구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홈즈에 따르면 소 몰트케는 1911년 경에는 슐리펜 계획을 재검토하고 수용했다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병력은 슐리펜 계획에 명시된 것에는 한참 미치지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 계획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제1군의 임무는 독일군의 우익인 세느강 하구를 방어하는 것이었지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1904~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 등 핵심적인 사료에 대한 해석을 두고 주버와 홈즈간에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부분은 위에서 진행된 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니 '생략'할까 합니다.

한편,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박사학위를 취득한 주버는 자신의 주장을 더 강화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과 German War Planning

주 버가 2002년에 낸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기본적으로 1999년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을 더 추가한 것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동일한 것 입니다. 중간에 있었던 홈즈와의 논쟁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내용이 풍부해졌습니다.

먼저 1장에서는 1차대전 직후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의 내용을 확대한 것으로 1920~30년대의 여러 논쟁들과 오늘날 알려진 '슐리펜 계획'이 역사적 사실로 확립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슐리펜의 전쟁계획들이 성립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 몰트케의 전쟁 계획들과 1880년대 후반의 군사적 상황의 변화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는 없었던 새로 작성된 부분입니다. 2장에서는 대 몰트케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해 러시아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대 몰트케는 1870년대 후반까지는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강화하고 또 러시아의 군사적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계획을 수정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 몰트케의 재임 말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신속한 승리도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 졌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이 포기되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국경지대의 요새와 기술의 발전으로 포병의 파괴력이 강화되는 등 대 몰트케가 다시금 서부전선으로 관심을 돌리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4장은 1999년 논문의 핵심으로 슐리펜이 취임 이후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그가 작성한 작전계획을 분석하고 있으며 1905년 비망록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5 장은 소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과 작전계획, 그리고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부분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홈즈의 주장에서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1911년 부터 1914년 까지 프랑스, 러시아의 전쟁계획과 이에 대한 독일군의 정보, 그리고 이것이 이 시기 전쟁계획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1999년의 논문에서 다소 미흡했던 부분이 1차대전 직전 소 몰트케의 작전 계획이 어떻게 수립되어 실행되었는가 였는데 단행본에서는 그점이 보충되었습니다. 주버는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각 야전군 사령부 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독일 제 1군의 임무는 프랑스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주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제 2군이 소 몰트케의 1914년 작전계획의 주공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국경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프랑스 영내로 깊숙히 진격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경 지대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이 회복되기 전 까지 프랑스 영토를 최대한 점령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는 기존의 논의를 강화하면서 논문 분량의 제한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9년의 논문은 '슐리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914년에 실행된 작전은 도데체 뭐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단행본에서는 그 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다시 2004년에 German War Planning, 1890~1914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합니다. 이 자료집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에 취임한 다음 부터 1차대전에 발발하는 1914년, 그리고 1차대전 직후 슐리펜의 작전 계획에 대해 전개된 논쟁에 대한 사료를 영어로 번역해 싣고 있으며 각 사료 마다 주버의 간략한 해제가 달려있습니다.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서 언급한 대 몰트케 시기의 작전 계획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기본적으로 논쟁의 핵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존 주장들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계속되는 논쟁

한편, 이 논쟁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참여로 근 10여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주 버와 홈즈의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인 2003년, 역시 1차대전 연구자인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가 War in History 10권 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참여했으며 2005년에는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Of War Plans and War Guilt: The Debate Surrounding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 몸바우어의 논문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가 War in History 15권 4호에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w Sources on the History of German Military Planning"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했습니다. 그로스는 주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작전계획에 대해서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와 해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반면 독일군 총참모부의 기동계획(Aufmarschpläne)은 검토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주버는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격을 가하는 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동원 완료 이전에 선제공격에 나설 경우에 취할 방안이었으며 이 비망록에서는 두번째 방안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 공세에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슐리펜의 구상에서 적의 선제공격에 대해 반격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이 적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 이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을 슐리펜이 선제공격에 대응한 반격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 참모부연습은 단순히 슐리펜이 참모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실시한 것에 불과하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한 주버는 슐리펜이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연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슐리펜은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벨기에를 돌파해 루앙 부근에서 세느강을 도하,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기동을 실시한 바 있다. 주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실제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독일 육군의 증강과 동원태세 강화를 위한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슐리펜은 재임 기간 중 육군의 증강에 과도할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무렵에는 전쟁부의 축소된 방안을 수용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버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제시된 병력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사단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슐리펜은 여러 훈련에서 실제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은 당시 총참모부의 장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 서류상의 사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 작전계획은 될 수 없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다.
그 리고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의 작전계획은 슐리펜의 다른 작전계획이나 훈련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낮다. 슐리펜의 기동계획, 참모부연습, 전쟁연습 등을 검토하면 슐리펜은 비록 위험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항상 포위기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슐리펜은 이미 1897년의 비망록에서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를 돌파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르덩 북쪽으로의 우회기동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이 비망록은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의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벨기에 전체를 침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의 우회 기동은 프랑스군을 국경지대에서 포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약체화 되어 프랑스군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감소하자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벨기에를 돌파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비록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취한 계획은 슐리펜의 1905년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부전선에서 주도적으로 공세를 실시하고 우익을 강화해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슐리펜의 계획을 상당부분 이어받은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주버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10여년간 지속된 이 논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 졌으며 논쟁 참여자 중 한 명인 로버트 폴리의 지적대로 1차대전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논쟁과 관련해 아직 검토하지 못한 논문이 많다 보니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주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직까지는 전통적인 해석이 좀 더 타당성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최근 몇 년간 슐리펜 계획과 관련해 주버의 연구 외에도 흥미로운 저작들이 몇 권 등장했는데 이것들은 뒤에 입수하는 대로 평을 해볼까 합니다.(또 공수표 발행이군요!)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아 웃겨라...

명랑한 미국 소식

People reluctant to book Palin for speaking engagements because ‘they think she is a blithering idiot.’

기사 일부만 인용하자면...

“The big lecture buyers in the US are paralyzed with fear about booking her, basically because they think she is a blithering idiot.”

아. 정말 감동적입니다. 국내 정치인들도 이렇게 깔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를 들어 전모의원이나 나모의원 말이죠.

2009년 9월 30일 수요일

난감한 민간인 사망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약간 황당한 민간인 사망사고가 일어났습니다.

Box of leaflets dropped from RAF plane kills Afghan girl

영국공군 소속 비행기가 전단지를 살포하던 중 전단지 상자 하나가 그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소녀 한명이 그 상자에 맞았는데 결국 그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이탈리아군의 일상적인(?) 굴욕

Karl-Heinz Golla의 'Der Fall Griechenlands 1941'을 읽는 중 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침공 직전 배경 설명을 위해서 1940년 이탈리아군의 그리스 침공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대략적인 흐름은 알고 있지만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초장 부터 돈좌되는 묘사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침공군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이탈리아군 25군단은 공세 초기에 주력이 격파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군단에 소속된 첸타우로(Centauro) 기갑사단은 L3/35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공세 초반에 상당수의 전차를 진창에 빠트려 상실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Ian W. Walker의 'Iron Hulls, Iron Hearts' 58쪽에 약간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는데 첸타우로 사단은 10월 28일 공세를 시작했으나 진창으로 인해 사단의 선두 전차대가 이틀동안 24km(;;;;) 진격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무리하게 공격만 거듭하다가 공세역량을 소진했고 그리스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진창에 빠진 전차들을 내버리고 패주했다고 합니다. 이 단 한번의 전투로 첸타우로 사단의 전력은 큰 타격을 받아서 12월 9일에는 재편성을 위해 예비대로 돌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Golla에 따르면 역시 같은 군단에 소속된 산악부대 줄리아(Julia) 사단도 그리스군이 후방으로 침투하자 큰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고 하는군요. 이탈리아군의 알피니 사단은 이탈리아군 중에서도 나름 정예인데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명색이 산악사단인데 산악지형에서 일반 보병사단에게 우회 포위를 당하질 않나;;;;

뭐랄까. 이탈리아군이 모두 엉터리인 군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실전기록들을 보면 압도적인 황당함을 선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니 나쁜 인상을 벗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이탈리아군이 못 싸운 걸까요 아니면 그리스군이 잘 싸운 걸까요?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공수표 남발;;;;

그러고 보니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쓰겠다는 이야기만 하고 안 쓴 글이 꽤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나씩 정리하긴 해야 할텐데 정말 공수표를 마구 찍어냈다는 느낌입니다. 당장 기억나는 것 만 하더라도 sonnet님께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몇몇 논쟁에 대해서, 라피에사쥬님께는 동독군에 편입된 나치시기 군인들에 대해서 써 보겠다고 했었는데 아직까지 안 쓰고 있군요;;;;

신용을 잃으면 안되니(;;;;) 차근 차근 정리를 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제가 발행한 공수표에 대해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하도 많이 남발해서 기억이 안납니다;;;;

Inside Hitler's High Command 한국어판 출간

간만에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재미있는 책을 몇 권 발견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Geoffrey P. Megargee의 'Inside Hitler's High Command'의 한국어판인『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였습니다. KODEF의 안보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출간일을 확인해 보니 9월 7일이었습니다. 그동안 KODEF의 안보총서는 주로 개설서 위주로 출간되었기에 이런 심도깊은 서적이 출간되었다는데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깊히 관여한 것이 패전의 큰 원인이라는 전후 독일 장군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독일 고위 장교단은 히틀러의 집권 초기에만 어느 정도 저항을 했을 뿐 2차대전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히틀러의 전략적 방침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그때문에 패전의 책임을 히틀러와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고위 사령부는 보급과 정보에서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2차 대전 초기 부터 전략적으로 형편없는 상태에서 작전적, 전술적인 우위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소련에 대한 침공등 심각한 전략적 오류를 저질렀으며 결국 패전으로 다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001년 초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통념들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제 한국어판도 나오게 되었다니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마치 'Blitzkireg Legende'의 한국어판, 『전격전의 전설』이 출간되었을 때 처럼 즐겁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2만5천원으로 매우 착하더군요. 많은 분들이 이 저작을 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KODEF에서 출간한 (별로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의 경우 '리더쉽' 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경영서적(???)으로도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도 조직의 실패사례로 경영인들에게 꽤 많은 시시점을 줄 수 있을테니 잘만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조직이 재앙적인 실패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이지요.

※ 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국어판도 구입해서 원서와 대조해 보고 싶은데 지갑이 가벼워서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분이 군사사적을 전문적으로 번역하신 분이니 번역은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번째는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의 'Geschichte der Kriegskun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의 번역판인『병법사-정치사의 범주 내에서』였습니다. 이 책이 번역된다는 소식은 2007년 말에 처음 들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출간되었더군요. 방대한 저작이라 한국어로 완역되어 소개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원서에 맞춰 총 4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문제라면 각 권의 가격이 후덜덜하다는 것 입니다. 각권은 3만원에서 4만원대를 오가는 데 아무래도 개인이 구매하여 소장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울 듯 싶습니다.
델브뤽은 제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 뛰어난 군사사가 일 뿐 아니라 군사평론가로서 군사사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언제 한번 짤막하게 정리해서 소개를 해 보고 싶은데 그러고 보면 예고만 해 놓고 아직 쓰지 못한 글이 많군요;;;;

두 권 모두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강력히 추천하는 바 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저작들이 한국어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또 어떤 저작이 소개될지 기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읽지 못한 것으로 번역되면 좋겠습니다만.

요가학원

토토로사에서 요가학원을 다운 받아 봤습니다.

천원이라도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정말 돈 아깝습니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Cat Shit One 80

오늘은 만화책을 한 권 샀습니다. 사실 만화책을 돈 주고 산 것이 너무 오랫만이라 얼마만에 사는 것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어쨌든 오늘은 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러 뭘 살까 고민하다가 Cat Shit One 80, 1권을 샀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내용은 심각한데 그것을 동물들이 나와서 하고 있으니 웃기는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군으로 나오는 곰들이 도열해서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은 정말 웃기더군요. 저작권 문제로 그 장면을 블로그에 올릴 수 없는게 아쉽습니다.

다음달에 용역비를 받으면 2권도 마저 사야겠습니다.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김명철의 책이 여전히 돌아다니는군요

얼마전 자주 가는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희대의 괴서, 조총련계 군사평론가(???)라는 김명철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출간 이후 내용이 문제가 되어 판매 금지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서점에는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세권이나 있더군요. 아실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미국이 북한에 굴복하고 한국은 김정일에 의해 통일'당한다'는 것 입니다. 종북저능아들의 단골 메뉴인데 근자에 이글루스에서 비슷한 바보들을 목격했는지라 기묘한 느낌이더군요.

참고로 이 서점에는 역시 괴서인 도서출판615의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팔리는 모양입니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손님 접대?

10월항쟁의 여파로 경상북도가 어수선하던 1946년 10월 14일, 경찰 고문관으로 있던 태프트(John L. Taft) 중위는 고령군으로 파견된 서울 경찰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령면 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태프트 중위는 서울 경찰대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부근의 해인사로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인사에 도착한 태프트 중위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 1946년 10월 14일 1500경에 서명자(본인)는 고령면에 도착해 고령면 경찰서에서 서울에서 파견되어 1946년 10월 6일부터 고령에 주둔해 있던 45명의 경찰관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점검을 했다. 경찰서장은 본인에게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모두 50명의 폭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폭도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온 해인사(1129-1403)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서명자(본인)가 1630경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경찰들과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지도자라는 지역 유지들이 기생(customary female entertainer)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폭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태프트 중위는 즉시 다음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습니다. 태프트 중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a. 1946년 10월 9일을 즈음하여 고령면 경찰서장이 해당 지역 관리들과 만나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을 대접하고 ‘위문(comfort)’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때 보리 세 가마가 경찰에 넘겨졌다.

b. 다음날인 10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지역 관리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면의 유지 60명이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서울 경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50,000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에서 즉시 30,000원이 모금 되었으며 추가로 17,000원이 금융조합을 통해 대출되었다. 고령면에 10,000원 (모금)이 할당되었으며 (고령)군의 다른 면들에는 각각 5,000원이 할당되었다.

c. 1946년 10월 12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면장을 만나 고령면이나 고령군 차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기생 40명 정도를 불러 잔치를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잔치는 1946년 10월 14일에 열리기로 되었으며 소요 비용은 15,000원 이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가뜩이나 국립경찰에 대한 평판이 나쁘던 차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미군정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직후 경상북도 경찰청은 고령 경찰서장을 해임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는 다시 진상 조사를 위해 대구의 99군정단(Military Government Group)에 특별조사를 명령합니다. 99군정단은 1946년 12월 10일, 리치먼드 소령(Fred C. Richmond)을 고령군에 파견했습니다.

조사단은 특별 조사를 통해 고령 경찰서장에게 전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단이 면담한 증인들은 경찰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령 경찰서장이 나서서 서울 경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이 면담한 경상북도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묘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령 경찰서장이 직위에서 해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울 파견대를 위한 기부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능하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해임되었습니다.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1946. 12. 2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공식적인 조사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값

중앙도서관에 가는 길에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의 '터미널 21문고'에서 책 두권을 샀습니다.


두 권 모두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정가는 각각 2만원, 2만5천원이었는데 할인이 되어 두권을 2만2천원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횡재했다는 느낌이더군요.

이 외에 '터미널 21문고'에서는 꽤 많은 학술서적들을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들이 많더군요. 중앙도서관 가시는 분들은 한 번 들러 보십시오. 필요하신 책을 반 값에 구할수 있을지 모릅니다.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트란지스터 걸'

옛날 속어 하나...

(전략)

위에 든 예로 보아 대개 일본어와 영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많이 범람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물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없을 경우 우리는 흔히 외래어로써 표현한다.

가령 학생들이 사용하는 속어 가운데 '트랜지스터 걸'이라는 것을 우리 말로 표현한다면 "진지하게 함께 토론이나 할 만한 위인(爲人)이 아니라 임시적인 노리개(즉 '트란지스터 라디오'와 같은)로 잠간 놀기에 편리한 여학생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트란지스터 걸'이라고 표현한 데에 학생다운 기지(機智)와 유모어가 담겨있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좀 더 언어 표현을 강하게 새롭게 하기 위하여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姜信沆, 「對話속의 '노랑머리'」, 靑脈 第3號(1964. 11), p.52
※ 본문에서 '트랜지스터 걸' '트란지스터 걸' 등으로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데 원문 자체가 이렇습니다. 교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더군요.

당대의 지식층이 읽던 잡지에서도 이렇게 여성비하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하긴 변한 모양입니다. 요즘 저런 글을 썼다가는 당장 여성 단체의 공격에 곤욕을 치를테니 말입니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MRE에 대한 유명한 일화

C 레이션에 대한 아래의 글에서 MRE(Meal Ready-to-Eat) 이야기가 나왔군요. MRE 이야기가 나온 김에 MRE에 대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91년 초, 걸프전 직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구호활동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서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것 같네요.

병사들은 피난민들에게 MRE를 공급했는데 대부분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쿠르드족들 또한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쿠르드 피난민들은 MRE의 내용물을 낯설어 했으며 또한 그 맛에 대해서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아사의 위험을 피한 뒤에는 더 이상 그것을 먹기를 거부했다. 그 무렵 위생과 건강상태가 개선되었고 병사들은 감자, 밀가루, 설탕, 쌀, 그리고 식용유와 같은 식재료들을 보급받아 배급했다. 피난민들은 그 뒤로 자신들의 요리를 만들어 먹을수 있게 되었다.

Robert H. Scales. Jr, Certain Victory : The U.S. Army in the Gulf War, Brassey, 1994/1997, pp.345-347

과연 Meal Rejected by Ethiopians, Meal Rejected by Everyone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일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09년 9월 9일 수요일

한국전쟁 중 미군 전투식량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한국전쟁이 2년 차로 접어든 1951년 8월, 1년 간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의 전투식량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 졌습니다. 재미있는 내용 일부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1. 먼저, C형 전투식량 중 여러 품목이 다양한 이유 때문에 전투 부대로 부터 기피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품목의 전투 식량은 폐기되거나 노무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a. C형 전투식량 중 대부분의 부대에서 기피하는 품목은 다음과 같다.

Corned beef hash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should be deleted)
Beef stew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Beef & Noddle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Meat & Beans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Ham & lima Beans : 지나치게 짜다.
Hamburgers & Gravy : 차가울 경우 (먹기가 곤란함).
Sausage Patties : 차가울 경우 (먹기가 곤란함).

b. 갑작스러운 이동과 일부 전투 상황에서는 항상 식량을 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 그렇기 때문에 Hamburgers & Gravy, Sausage Patties, 그 밖의 기름기가 많은 종류의 식량은 극도로 추운 날씨에서는 먹을 수가 없다.

c. 일부 C형 전투식량 생산업자들이 낮은 질의 식재료(특히 고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로 인해 전투식량의 질이 저하되고 전투식량 중 기피되는 품목이 늘어나게 된다.

Troop Acceptability of Type "C" Rations(1951. 8. 14),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제 관심을 끄는 것은 "should be deleted"라는 평가를 받는 전투식량입니다. 어느 정도 맛이 뭐 같았기에 대부분의 전투 부대에서 만장일치(?!?!)로 퇴출을 요구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먹어 볼 수 만 있다면 정말 먹어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c항목의 내용입니다. 군납업자들이 뭐같은 고기를 써서 맛이 없다는 지적인데 이부분은 꽤 의외더군요. 미서전쟁 당시 불량 통조림이 납품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까지도 이런 불량업자들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덤으로. 미군 병사들이 선호한 전투식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2. C형 전투식량 중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품목은 다음과 같다.

Frankfurters & beans
Beans w/pork & tomato sauce
Ground meat & spaghetti

Troop Acceptability of Type "C" Rations(1951. 8. 14),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기피 식품들과는 달리 왜 선호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하긴, 맛있다는데 달리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이 보고서가 올라가자 얼마 뒤 육군부에 근무하는 장교들을 대상으로 위의 보고서에서 언급한 전투식량들의 시식회가 열립니다. 이 시식회에 참여한 장교들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습니다.

4.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평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식회에 참석한 장교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제기하였다.

a. Beans with pork and tomato sauce: 뻑뻑한 감이 있다. 토마토 소스를 더 넣어야 한다.
b. Hamburgers with Gravy: 육즙(Gravy)이 너무 많으며[육즙을 먹지 않으면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할 수 없다.] 맛이 형편없다.[양파를 더 넣으면 맛이 좋아질 지 모른다.]
c. Sausage Patties with Gravy: 육즙이 너무 많다. 그러나 맛은 매우 좋다.
d. Meat and Beans with Tomato sauce: 고기가 너무 질기고 불규칙하게 썰려있다. 매우 맛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e. Chicken and Vegetables with Broth: 피망(Bell Pepper)맛이 너무 진하다. 닭고기 살은 너무 가늘고 걸쭉하다.
f. Ham and lima Beans: 맛이 너무 짜고 햄은 지나치게 기름지다.

Military Operations Office "C" Ration Luncheon Test(1951. 8. 17),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전투부대가 퇴짜를 놓은 일부 품목은 육군부의 장교들도 비슷한 평을 하는 것으로 봐서 정말 맛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맛이 없었던 것인지 호기심이 생길 지경입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미 육군 최강의 기갑 장비

우리가 가진 최고의 기갑병기는 P-47이다. 이 친구는 우리를 여러번 구해주었다.
(Our best tank weapon, and the boy that has saved us so many times, is the P-47.)

- 미 육군 제 2기갑사단 병장 해롤드 풀턴(Harold E. Fulton)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9

2차대전 중 미 육군의 기갑 장비가 과연 낙후된 것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The Best Tank Weapon Of The U.S. ARMY!!!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가 기대되는군요

北京で建国60年軍事パレードの予行演習

이번 10월 1일은 중국 건국 60주년이지요.

지난 6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전차와 자주포를 동원한 대규모 예행연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이었던 2007년에 베이징에 놀러가서 99식 전차를 구경한 뒤로 인민해방군의 기갑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지라 이번 행사가 꽤 기대됩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 전차처럼 위용을 과시하는데 적당한 장비는 드물지요.

대량학살의 요건

씁슬한 이야기 하나...

르완다는 서구지정학에 대한 비백인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별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인의 목숨의 가치를 서방 또는 백인들의 목숨과 비교할 때 이중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적어도 서방의 일부에서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의 기준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실체가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의 요람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바다를 건너 접하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는 항상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 보다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략)


워싱턴은 르완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 사태의 정치적 결과로 이미 충분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최대한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담당관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의 전임자들이 보스니아 문제를 담당할 때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르완다 사태를 대량학살(Genocide)라고 칭하는 것 조차 꺼렸다. 4월 28일, 한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셀리(Christine Shelly)에게 국무부는 르완다의 폭력사태를 대량학살로 보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기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비록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법률적 개념이 아니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확한 법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요인들도 포함됩니다."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은 관료적 발언의 놀라운 사례로서 어떤 발언을 하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대량학살의 징후는 더욱 더 명확해 졌고 UN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은 물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UN군이 르완다를 이동할 수 있도록 보병수송장갑차가 보내질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물자의 대여 조건, 장갑차의 도색, 그리고 어떠한 표시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천천히 지연되고 있었다. 한 주가 지날 때 마다 사망자가 늘어만 갔다. 어느 순간 사망자의 추정치는 50만명이 되었고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으나 워싱턴에서는 논의만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태가 대량학살이라면 행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은 대량학살이 아니라 '대량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크리스틴 셀리는 국무부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믿을수 있는 모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한 기자는 얼마나 많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야 대량학살이 되는지 질문했다. 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 직위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국무부가 대량학살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대량학살의 앞 부분에 "~적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게 사실입니까?"

셀리의 답변은 정부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반영했다.

"제가 받은 지침은... 즉... 즉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저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데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절대적인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의(定義)는 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선정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지 오웰이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봤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p.273, 276~277

이 당시 미국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비난'만' 받았습니다. 세상일이 대개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 씁슬한 일이지요.


잡담 하나. 크리스틴 셀리는 2005년 1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Brummbär

얼마전에 친구로 부터 모형 하나를 받았습니다. 드래곤에서 예전에 발매한 브룸베어였습니다. 동네 문방구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걸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원고도 대략 마감해서 보냈고 금요일에 급한 업무도 처리해서 주말에는 모형이나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준 브룸베어가 있으니 이 녀석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옛날 물건이어서 그런지 부품 구성도 상대적으로 단촐하고 복잡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런데 몇몇 부품은 밀핀이 황당한 위치에 나 있어서 신경끄고 조립하기로 했습니다.


전투실이 큼지막 해서 밋밋한 감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래도 가분수(?)적인 맛도 나고 나름 육중한 느낌도 있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예전 제품들에 딸려 있는 트랙은 좀 귀찮아 보이더군요.




다듬다가 귀찮아서 이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대략 주포만 달아 놓고 다시 가조립을 한 번 해 봤습니다. 딱딱 잘 맞는게 느낌은 좋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타미야의 1/48 헤처도 조립했습니다. 타미야의 1/48 제품 중 만드는 재미가 가장 쏠쏠했던 물건 같습니다. 한 번 더 만들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공산당(;;;;)의 난행(;;;;)

꽤 유명한 이야기죠. 반공물에서 많이 다루어진 여수 경찰서 여경 살해에 대한 어떤 '반공서적'의 묘사입니다.

폭동지휘자는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또 여자 경찰관은 어떻게 죽였을까?

여수경찰서 보안과 민원담당 정현자(鄭玄子) 순경은 경찰서에 잡혀 온 후 반도들에게 옷을 갈기 갈기 찢겼다.

"하. 고놈의 계집 젖퉁이 좋은데, 죽이기는 아까워...."

반도들은 정순경의 목에 쇠사슬을 매어가지고 역시 시내를 일주하였다. 1시간 후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다.

"너 똑똑히 말해. 고서장 하고는 과거 어떠한 관계였어, 엉!"

정순경은 말이 없었다.

"남조선 경찰은 남자녀석들만 지독한 줄 알았더니 계집은 더 독하구먼...."

"시간없다. 처치해 버려!"

이 말이 떠러지자 마자 여경에게 2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여인이 나체로 넘어진 것을 보자 반도들은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너무 일찍 죽였어."

반도 중 어느 한 녀석이 뒤에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宋孝淳, 『붉은 大虐殺』, 甲子文化社, 1979, 123-124쪽

네. 묘사가 참 저질이죠;;;;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고 싶은 상상력입니다. 저자께서 요즘 활동하신다면 인터넷 야설로 이름 좀 날리셨을 듯.

그리고 백두진(白斗鎭)은 국회의장씩이나 한 양반이면서 이런 덜떨어진 책에 추천사를 써 줬습니다. 사실 책 자체의 내용 보다 이 양반의 추천사가 더 한심합니다.

14연대 반란 당시 여경을 나체로 살해했다는 소문은 반란 당시 부터 돌았는데 이 이야기를 포함해서 여순사건 당시 돌았던 괴소문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포스팅을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문화사는 반공서적을 많이 찍은 출판사인데 이 출판사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북괴 여자 암살공작조의 정체'를 파헤친 『모란꽃 소대』가 있습니다. 이건 소재도 그렇거니와 더 한심합니다. 땜빵 포스팅에 적합한 책이라고나 할까요.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아 짜증나

예전에 썼던 글에 뻘플이 계속 달리고 있다.

난독증 환자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남조선이 실질문맹률은 꽤 높다더니 사실인가보군.

짜증나고 피곤하고 귀찮아서 댓글은 안달란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러시아 국방부의 임금 체불;;;;

러시아 북해함대의 군함들을 수리하는 로슬야코보(Росляково)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Again payment delays for shipyard workers

이 조선소 노동자들의 임금은 러시아 국방부가 직접 지급한다고 하는군요. 이미 올해 초에도 한 차례의 임금 미지불 사태가 있어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했었는데 밀린 임금이 지불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또 임금 체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은 군 간부들의 월급도 충분히 챙겨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어느 정도 예상가능한 일 입니다만 안습이군요.

그리고 이 조선소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을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곳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설 조차도 임금을 지불 못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걸 보면 러시아군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허세를 부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듯 싶습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문제

sonnet님께서 아데나워 총리의 핵무기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저도 독일과 핵무기 문제에 대해서 읽은 것이 조금 있어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생각해 보니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라 원래 읽은 내용과 약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단 내용을 올려봅니다.

1964년 11월에 있었던 미국 국방부장관 맥나마라와 독일연방공화국 국방부장관 하셀(Kai-Uwe von Hassel)간의 회담에서는 소련의 침공시 대응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관련 문서는 1998년에 기밀해제 되었습니다. 이 회담의 요약본에 따르면 독일측은 전술핵 사용을 독일 영토내로만 한정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 Bernd von Freytag-Loringhoven) 장군은 설명을 계속하면서 만약 초기에 ADM(Atomic Demolition Munitions)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군의 공격 작전을 중단시키지 못 한다면 서방측은 방어 지대에서 재래식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침략군의 숫적 우세를 감안한다면 서방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방어군이 격파될 위험에 처한다면 전술핵무기(nuclear battlefield weapons)를 지체없이 선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만약 핵무기의 선별적인 사용으로도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면 확대(escalation)가 불가피해질 것이다.

(중략)


(독일) 국방부장관은 독일측의 개념은 지연지대(Delaying Zone) 내에서는 오직 ADM만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독일측은 ADM의 사용은 서독의 영토내로 한정할 것이기 때문에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ADM을 사용한다면 침략군에게 공격을 계속할 경우 더 높은 단계의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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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inuing with the briefing, Gen von Freytag pointed out that if early firing of ADMs did not force the aggressor to cease his offensive operations the West would have to continue the conventional battle in the defense area. In view of the numercial superiority of aggressor forces, the West must expect heavy losses.

If the defending forces are in danger of destruction, nuclear battlefield weapons must be selectively employed immediately. If selected employment of nuclear weapons does not stop the aggressio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avoid escalation.

(중략)


The Defense Minster summarized the German Concept, stating that in the Delaying Zone the Germans would use only ADMs. The FRG believes this will not lead to escalation because these would be employed on West German Soil. This would also be a clear demonstration to the aggressor that continuation of the attack would result in a Higher Level of Response.

'Memorandum of Conversation : Secretary McNamara's Meeting with FRG MOD von Hassel, 12-13, November', RG 200, Box 133, pp.5-6

독일측의 입장이 안습인 것은 핵무기를 함부로 쓰면 핵보복으로 독일이 쑥대밭이 되겠지만 쓰지 않으면 빨갱이들에게 밀려버린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독일 영토에서만' 전술핵을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초기에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바르사뱌 조약기구의 공세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프라이탁 로링호벤 장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만약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전면 핵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박살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핵무기를 쓰자고 제안해야 하니 안습입니다.

2009년 8월 16일 일요일

[美利堅史] 권42 빌 클린턴 본기

[美利堅史] 권42 빌 클린턴 본기

변화(Change) 원년(오바마 원년) 3월, 북괴가 두만강을 유람하던 '로라 링'과 '유나 리'라는 부녀자 두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끌고 간 일로 천하가 소란스러웠다. 조정에서도 이들을 구할 방도가 없어 근심만 할 뿐이었다.

클린턴 태상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곧 예부(禮部)에 전하여 평양으로 가 부녀자들을 구해 올 뜻을 밝혔다.

변화 원년 8월, 태상황제가 비거(飛車)를 타고 평양에 이르니 추장 김정일이 크게 놀랐다.

"미리견의 태상황제는 호색한이라 들었는데 지금 평양에 온 것을 보니 필히 기쁨조를 취하러 온 것이다."

김정일이 근심하니 여러 두목들이 앞다투어 간하였다.

"미리견의 태상황제는 호색한이라 평양에 오래 머무르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입니다. 평양에 처녀의 씨가 마르기전에 일전에 사로잡은 미리견의 부녀자들을 돌려보내소서."

김정일이 두목들의 말을 옳게 여겨 사로잡은 부녀자들을 돌려보냈다.

클린턴 태상황제가 사로잡힌 부녀자들을 구해 돌아오니 모든 백성들이 그 덕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부녀자의 가족들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니 이웃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기쁜 날에 오히려 수심이 가득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로라 링의 모친이 눈물을 흘리며 말 하였다.

"태상황께서 색을 밝히는것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제 여식이 태상황 폐하와 같은 비거에 탔으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였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미국 정부의 동방부대 소속 포로 처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포로 관리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찾았습니다. 한국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입니다만. 2차 대전 중 동방부대(Osttruppen) 포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격리를 하기 이전인 전쟁 초기에 수많은 독일 포로가 수용을 위해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포로 중 약 4,300명이 뒤에 소련 국적자로 판명되었다.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자 이 포로들은 곧 다른 독일인 포로들과 격리되었으며 소련으로 송환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파견된 소련 대표단의 심사를 받을 특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소련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일반 (독일) 포로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소련은 뒤에 가서야 이들을 소련인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 포로들은 소련 당국이 선박편을 준비하는 것에 맞춰 소련으로 송환되었다.

George G. Lewis and John Mewha(1955), History of Prisoner of War Utilization by the United States Army, 1776-1945, Department of the Army, p.148

소련 국적의 독일군 포로에 대한 내용은 이게 전부여서 매우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이 있긴 합니다. 먼저 미국으로 이송된 동방부대 소속의 포로가 4,300명 정도라는 겁니다.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이고 외교적으로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에 만약 뒤에 관련 연구를 한다면 의외로 수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소련정부와 송환 협상도 이루어 졌으니 관련 문서가 별도로 분류되어 있을 것 같네요.

두 번째는 소련 정부가 초기에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점 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천명의 자국 국민들이 독일군의 편에 서서 총을 들었다는게 알려지면 이래 저래 난감할 것 입니다. 그래도 반역자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빨리 송환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씁슬함

전두환前대통령, DJ 병상찾아 쾌유기원

씁슬한 기사로군요. 기사의 일부만 발췌해 봅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전직 (대통령) 들이 제일 행복했다"며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10년 가까이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치켜세웠다.

예. 전두환은 역사의 승리자는 될 수 없겠지만 인생에서는 승리를 거둔것 같습니다.

우울하군요.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The Ideological Origins of Nazi Imperialism, 그리고 잡담 약간

Woodruff D. Smith의 The Ideological Origins of Nazi Imperialism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읽은지 꽤 돼서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어수선해서 그런지 한 번 더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의 ‘간도떡밥’ 때문인지 재미있게 읽히긴 하더군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파국으로 치닫기 직전인 9장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입니다. 저자인 Smith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제국주의적 정서’가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파고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1920년대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는 1926년에 출간된 그림(Hans Grimm)의 소설 “Volk ohne Raum”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유사한 종류의 소설 중 성공한 작품으로 1926년부터 1935년까지 315,000부가 팔렸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의 저자인 그림은 유럽 외부의 식민지 획득을 옹호하고 Lebensraum을 동유럽에서 찾는 나치에 비판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팽창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Lebensraum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으며 정치적 보수주의를 확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게 읽힌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얼마 전 튀어나온 간도 반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간도 반환 문제는 상식적으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가 간도 회복 캠페인 같은 짓을 앞장서서 하기도 했지요. 2009년이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간도 떡밥은 미래에 다른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런 대책 없는 망상을 무책임하게 유포하고 있는 대중매체들입니다. 한국이야 독일 같은 강대국이 아니니 극우 정당이 집권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념 없는 민족주의 프로파간다가 판을 치는 것은 단순히 웃어 넘길 일은 아닙니다.

독도와 같이 민감한 문제가 튀어 나올 때 마다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호들갑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적인 정서는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입니다. 그리도 한반도 균형자론 같은 외교적 망신사례에서 볼 수 있듯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싸구려 민족주의를 팔어먹으려는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든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 것 입니다. 물론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나치 독일처럼 파국적으로 폭주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스탈린 동지의 농담실력

스탈린 동지는 농담에 일가견이 있으셨다죠.

나는 아첨꾼을 정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찬사의 말을 지나치게 하면 그 사람에게 불쾌감을 느낍니다.

1949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류샤오치에게 스탈린이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and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32

이 말을 믿지 않으면 시베리아 힐튼 장기 투숙객이 됩니다.

2009년 8월 8일 토요일

대륙의 기상

Uncertain Partners을 읽다보니 각주에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있더군요.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뒤 국내의 치안 안정을 위해 대대적인 반혁명진압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의 성과가 꽤 엄청납니다. 류샤오치가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 운동으로 처형된 인원이 71만명, 징역에 처해진 인원이 129만명, 사회교화형에 처해진 인원이 12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뒤에 마오쩌둥이 루산(廬山) 전원회의에서 이 운동기간중 백만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했다고 이야기 한게 과장은 아닌 셈이죠.

The Road to Terror에 따르면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7년 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인원이 68만명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반혁명 진압운동도 1950년 12월 부터 1952년까지 진행되었으니 기간으로 볼때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규모입니다.

게다가 반혁명 진압운동과 함께 토비(土匪)의 토벌도 진행되어 1950년 부터 1952년까지 140개 사단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으니 굉장하지요. 밖으로는 미국과 싸우는 와중에 국내에서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 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인듯. 물론 뒤에 닥칠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예고편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만.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저도 트위터를 시작했습니다.

간혹 링크를 보면 트위터에 걸린 링크를 따라 오시는 분들이 있으시더군요. 왠지 재미있어 보여서 저도 부화뇌동해보기로 했습니다.

주소는 대략 이렇습니다.

http://twitter.com/straylittlelamb

원래는 예전에 漁夫님께서 하사하신 Astray Little Lamb이라는 이름을 쓰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글자수 제한에 걸리더군요. 그 결과 앞의 A를 떼고 Stray Little Lamb이 돼 버렸습니다(;;;;) 뭐 그래도 Astray에서 뒤의 Y가 빠진것 보다는 나았을 듯 싶네요.

그랬다면 Astral-ittle Lamb이 되었을 듯...

방문해주시는 분들 중 트위터 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주소나 이름 좀 알려주십쇼.

2009년 8월 5일 수요일

스탈린의 생일선물

1949년 겨울, 우리의 마오 주석은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앞두고 선배 예우를 위해 작은 성의표시를 하기로 합니다.

산둥분국 :
스탈린 동지께서 올해 12월 21일에 70회 대수(大壽)를 맞이하시오. 당중앙은 산둥산(産) 배추, 무, 골파, 배를 선물로 보내기로 결정했소. 이 전보를 받고나서 3일 이내(즉 12월 4일 이전)에 각각 5천근, 전체 2만근을 구입하면 중앙에서 수송할 비행기를 지난(濟南)으로 보낼 것이오. 비행기는 12월 4일 지난에 도착할 것이오. 시간에 주의하시오. 동지들은 위에서 말한 각 물품(배추, 무, 골파, 배)을 살 때 가장 좋은 것을 고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오.

(당)중앙, 12월 1일 오후 5시

「中央关于为斯大林送寿礼给山东分局的电报」, 『建国以来毛泽东文稿 第一冊』, 中央文獻出版社, 1987, p.172

어딘가 황제가 오랑캐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느낌이 납니다.
어딘가 오랑캐가 황제에게 조공하는 느낌이 납니다.

2009년 8월 4일 화요일

아흙... 나의 소중한 추억이....

지난달에 이준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포스팅이 올라왔습니다.

아아, 마침내 이 책도 나왔구나

저도 국민학교 시절에 계몽사 문고판으로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다고 해서 큰 기대를 했습니다. 읽은지 오래되어 단편적인 구절만 머리에 남아있었지만 압제자 폴란드군대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들의 전쟁은 그 당시 정말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새로 출간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일단 한번 읽어보고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서점에 가서 한 번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읽고 나니 흥이 깨졌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이 폴란드 농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학살행각도 나오더군요;;;; 어릴때는 주인공의 투쟁이 꽤나 낭만적(!!!)이라고 생각됐는데 다시 한번 읽고나서 주인공의 잔인함에 놀랐습니다;;;; 소설 중에서는 여자건 어린아이건 상관없이 주인공의 칼질에 요단강을 건너더군요.

책의 번역도 잘 된 것 같고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가 날아가 버려서 사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습니다;;;;

잡담하나. 어릴때 이 소설을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Cossack라는 게임이 출시됐을 때는 정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카자크를 선택해 폴란드군대를 무찌르고 놀았지요.

2009년 8월 3일 월요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2)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의 2층에는 '동북아자료실'이 있습니다. 이 동북아자료실은 '국가지식포털'에 나와있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동북아관련 정책입안 및 조사ㆍ연구활동을 지원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실에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들이 주로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뭔가 요상한 책들이 끼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것과 같은 책 들이지요.


넵. 체르카시전투에 대한 더글러스 내쉬(Douglas E. Nash)의 역작, Hell's Gate의 일본어판 입니다. 아주 재미있고 좋은 책이긴 합니다만 비치되어 있는 곳이 이 책의 주제와는 뭔가 맞지 않다 보니 참 기묘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국민의 세금이 올바르게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만...

그런데 일본어판은 상,하 양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상권만 있더군요.

반가우면서도 기묘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잡담 하나. Hell's Gate에 대해서는 채승병님 블로그에 좋은 서평이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 헉. 다시 확인해 보니 채승병님 블로그의 링크가 깨져있습니다. 죄송;;;;

잡담 둘. 사실 일본어판을 보고 감동받은 게 작은 판형으로 만들어 두권으로 나누었다는 점 입니다. 영어판은 큼지막해서 한가할 때 뒹굴면서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입니다. 영어판이 왜 이렇게 큼지막 한지는 도데체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추억의 General 시리즈들...

sonnet님 블로그에 달린 답글 중에서...


Peoples General의 국내 발매 금지에 상처받은(?) 분이 계셨다니 이렇게 반가울수가!

저는 Panzer General 2를 너무나 재미있게 한 덕분에 SSI에서 동일한 엔진을 사용한 3차대전을 다룬 게임이 나온다고 하기에 엄청나게 기대를 했었습니다. 아. 그러나 이게 왠일인지.

정권이 교체되자 '남북간의 전쟁'을 다룬 게임이라는 이유로 피플스 제너럴의 국내 발매가 좌절된 것 이었습니다. 상식 이하의 일이다 보니 공무원들에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뱀다리...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용산에서 떨이로 팔고 있는 Panzer General 3D를 구입해서 해 봤는데 너무나 재미가 없었습니다. 최대 100개 까지의 유닛으로 부대를 편성할 수 있던 2편에 비해 규모가 줄어든데다 좀 신통치 않은 3D 그래픽을 사용한 덕에 실망이었습니다. 2편의 수채화같은 배경은 정말 일품이었지요.

Panzer General 1부터 쭉 해본 입장에서 역시 최고로 칠 수 있는 것은 2가 아닌가 싶습니다. Peoples General을 해 봤다면 순위가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약간의 추가 설명

지난번의 글, 몇 가지 궁금한 점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마왕님이 지적하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댓글의 특성상 짤막한 답변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지요. 짧은 답글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인 완결성은 갖춰야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 졌으니 제가 최초의 질문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만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분들이 있으면 곤란할 테니 말입니다.

처음에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마왕님이 기본적인 논지인 전차포 문제에 이외에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추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번 이야기를 오가게 한 ‘우마왕님의 과연 서방 전차포가 소비에트 전차포를 넘어선 적이 있기는 했나?’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우마왕님이 근거로 제시하시는 기술적 문제로는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것 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마왕님께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실제 통계상으로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가 서방의 105mm 탑재 전차를 능가한다는 것과 1960-70년대에 서방측이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와 자신들의 105mm 탑재전차를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우마왕님은 기본적으로 실제 성능을 바탕으로 당시의 서방도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대해 열세를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끌어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실제로 서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례인) 1974년에 미육군의 Dupuy 장군이 M60과 T-62를 fair match로 평가한 사례를 들어 서방이 과연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떡실신’을 당할 정도로 열세를 느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우마왕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번 글에서도 역시 장비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셨습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원문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2-A. 1974년에 Dupuy 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는 평가의 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전- 이후 상황을 돌이켜보면 대략 3가지 정도의 고려가 가능한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1973년 영국에서 105mm L7 전차포를 위한 새로운 APDS-T 포탄인 L52A3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L28과 관통력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1500미터를 넘기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던 L28과 달리 L52A3은 제대로 2km 거리의 목표를 맞출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울러 T62 초기 생산형에선 조준체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탄착 조절이 쉽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봅니다.

(중략)

2-C. 다시 말해 Dupuy 장군이 T62와 M60이 fair match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HEAT 교전 능력은 비슷한데 떨어지는 AP 능력도 신형탄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고, T62의 화기관제 능력이 M60 보단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인용한 Dupuy 장군의 T-62에 대한 평가는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교전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 입니다. Dupuy 장군은 T-62를 상대로 M60을 운용한 이스라엘의 평가를 기초로 두 전차를 fair match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Although the Israelis prefer the Centurion and M-60 tanks to Soviet armor, these differences do not account for the difference in performance on the battlefield. For example, in one action Israeli forces equipped with Soviet tanks, although out numbered at least two to one, reportedly killed 56 Arab tanks without losing one. Israeli tank crews opened fire at ranges out to 4,000 meters and obtained kills at that range. They closed with the enemy and obtained kills at under 200 meters. Their tank crews are generally stabilized and in an extreme case had been together for 14 years. Although there was some scrambling caused by erratic mobilization, the quality of the crews made the main difference. Apparently, the T-62 tank and the M-60 tank are a fair match. Therefore, during the next 10 years battlefield outcome will depend upon the quality of the troops rather than the quality of the tanks.

(중략)

The Israelis rank the M-60 tank above the T-62 in performance but they find three problems with it which they intend to correct in their own tank. The first is that the ammunition storage in the turret of the M-60 causes a much higher percentage of catastrophic losses. More often than not the entire turret was entirely blown off the tank with a turret hit. Secondly, they found the hydraulic fluid to be inflammable causing crew injuries and tank losses by fire. Thirdly, they did not like the mounting or the functioning of the 50 cal machine gun in the cupola.

Dupuy to Abrams(1974. 1. 14),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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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our weapons and the weapons manufactured by the Soviet Union are in many respects very similar. For example, in the middle of this particular chart, and here again we're talking about the probability of hit over range, you can see that the Russians' T62 tank, their new best tank, and our M60A1 tank have similar characteristics. Their tank is a little bit better in close, because it has a higher muzzle velocity. Our tank is just a little bit better at the extended ranges because we have better fire control and range estimating equipment. Our new tank, the M60A3, will have even better effectiveness at the extended ranges.

Implications of the Middle East War on U.S. Army Tactics, Doctrine and Systems,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82

윗 글에서 나타나듯 Dupuy 장군은 M60과 T-62의 전차 자체의 성능은 실전에서 큰 격차를 보일 정도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전차 자체의 성능에서도 주포의 위력이 아니라 사격통제체계 때문에 M60이 T-62에 대해 원거리 교전능력의 우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우마왕님이 포탄의 성능 개선을 주된 근거로 해서 미국측의 판단을 평가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upuy 장군은 우마왕님이 추정하신 요인 중에서 사격통제장치는 언급하고 있지만 주된 논지의 근거인 포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마왕님이 중점을 두신 것 처럼 1973년 영국이 개발한 L52A3등 포탄 문제가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마왕님이 사용하신 방법, 즉 현재 알고 있는 무기의 통계적 성능만으로 당시의 의도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질문을 드렸던 것 입니다.

두 번째로, 역시 제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이 실제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 질문을 드린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그리고 굵게 강조한 부분에 대해 우마왕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우마왕의 의견이 어디까지나 당시 가용하던 전차포탄들의 데이터와 당대에 개발된, 혹은 개발중이던 전차의 ROC등을 비교해서 내린 정황증거에 기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애초의 논제는 서방 전차포는 항상 소비에트보다 우위에 있었는가의 여부, 최소한 당대에 있어선 사실이 아니다."였지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짓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시점에서의 획득여부가 꽤나 의문스러우니 말입니다.

우마왕님께서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까지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 하셨지만 첫 번째 인용문에서 강조한 것 처럼 먼저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서방의 방어 전술에 대한 설명’으로 논지를 확대 하신 것은 우마왕님입니다. 우마왕님께서 먼저 추론에 의거해 서방의 방어전술에 대한 언급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경우에도 실제로 미국 등 서방이 어떤 구상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이런 추정은 논리적으로 무리일 것이고 논지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의 근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 드린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마왕님 께서도 ‘무기의 성능에 바탕을 둔 추정’ 외에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으며 논의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다고 답변 하셨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먼저 약간의 질문을 드린 이유는 실제 병기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인 만큼 ‘과거에 가능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과는 괴리를 보일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마왕님께서 현재 설명하기 어려운 60-70년대 당시 서방측의 판단까지 논지를 확대하지 않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실제 무기의 성능 문제로 이야기를 한정했다면 논리적으로 훨씬 좋은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미 공통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었으니 처음에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만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우마왕님께서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흥미로운 정보들을 소개하신 덕분에 매우 유익한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육군은 배가 고프다!!!

아랫 글에서 듀푸이 장군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나서…

카터 행정부는 엉망이 된 경제 때문에 국방비 감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터는 국방부가 ‘뻥을 쳐서’ 예산을 뜯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자 당장 국방비를 70억 달러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1) 카터의 국방비 삭감계획에 각 군은 바짝 긴장했고 특히나 육군은 카터가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을 통해 육군의 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카터가 주한미군 전투부대를 철수하라는 행정명령 13호에 서명하는 등 육군을 열받게 하고 있던 1977년 5월, 듀푸이 장군은 미육군전력사령부(FORSCOM)와 미육군교육사령부(TRADOC)의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먼저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육군전력사령부와 유럽주둔미군은 모두 내가 ‘집중성’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희생양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집중성’ 때문에 우리는 비용의 상승과 동시에 에너지의 고갈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중략)

두 번째로 닥치고 있는 것이 비용(문제)입니다.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가 종종 이용하는 랭글리(Langley) 공군기지에는 72대의 F-15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즉 1개 비행단 입니다. F-15 한 대는 1800만 달러나 합니다. 한 대당 1백만 달러인 XM-1 18대를 살 수 있는 돈 입니다. (XM-1) 18대에 72를 곱하면 우리 육군이 유럽에 배치한 전차를 비용으로 환산한 것의 80%가 됩니다. 또한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M113 장갑차 보다 여덟 배 비쌉니다.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마더 만큼 비싸지 않으며 영국군의 보병수송장갑차 만큼 비싸지 않지만 M113 보다는 여덟 배가 비쌉니다. 이것은 보병의 편성과 훈련, 전투에 혁명을 가져올 것 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비용 문제는 우리를 육군에서 이상한 위치에 처하게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육군의 예산으로 모든 부대를 이렇게 값이 비싼 무기로 현대화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무기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입니다.


I want to make two points. One is that all of you in FORSCOM and in USAREUR are about to be the victims of what I would call convergence. Now, by that I mean we are faced with a problem similar to running out of energy with the price going up at the same time.



The second thing coming at you is cost. Here is a rather interesting example. Parked over at Langley Air Force Base, from which we depart from time to time, are 72 F-15 fighter aircraft. That's a wing. Each F-15 costs 18 million dollars - that is equivalent to 18 XM-1 tanks, at a million dollars a copy. If you multiply 72 times 18 you have the value of 80% of all the tanks the Army has in Europe. Also the MICV is 8 times more expensive than the M113 Armored Personnel Carrier. It is not as expensive as the Marder, nor is it as expensive as the new British infantry carrier, but it does cost 8 times more than the M113. It is going to revolutionize infantry organization, training and fighting. If you don't believe that, you haven't seen it.

Cost is putting us into a very peculiar position in the United States Army. It is not at all clear to me that the Army's budget is going to permit us to modernize the whole force with such increasingly expensive equipment.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if you asked me my candid opinion, I would say it will not, so we have to make some very tough decisions about where you are going to put that new equipment and how fast you are going to buy it.

Speech of General William Dupuy(1977. 5. 24), Richard M. Swain(199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228-229


한줄요약 : 육군은 공군새퀴들 처럼 돈 처먹는 하마도 아닌데 절라 억울해염.


1) Dale R. Herspring(2005),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 Military Relation from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p.244

잡담 하나. 원래 M60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자료를 읽다보니 이게 더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잡담 둘. 듀푸이 장군이 상원에 XM-1 개발 비용을 늘려보려고 보낸 편지도 있는데 그것도 좀 재미있습니다.

잡담 셋. 레이건 시절에는 국방예산이 크게 증액되는데 그것도 마냥 좋은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더군요.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아아... 허본좌

예전에 박정희를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유한 농담글을 쓰면서 허경영 총재에 대해서는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평을 바친바 있습니다.

[妄想大百科事典]박정희(朴正熙)

그런데 오늘자 언론 기사들을 보니...

허경영 "마이클 잭슨 영혼, 사망 3일 전 찾아왔었다"

왠지 이 기사는 사실로 믿고 싶습니다.

역시 허총재님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듯 싶습니다. 동류이다 보니 서로 통한게지요.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몇 가지 궁금한 점

지난번에 땜빵 포스팅으로 올렸던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에 달린 답글에 우마왕님이 피드백을 해 주셨습니다.

먼저 제가 쓴 댓글의 경우는 현재 시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냉전 전 기간의 경쟁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궁금한 점 몇가지만 질문 드리려고 합니다.

우마왕님의 지적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우마왕님은 T-62의 115mm포를 언급하시면서 1970년대에 신형 APFSDS탄이 도입된 이유가 서방 각국이 소련 전차포에 대한 열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시는데 미국 쪽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말씀하신 115mm 탑재 T-62가 M60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다는 평가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111이 개발된 것은 1978년으로 알고있는데 이미 1974년에 Dupuy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고 평가한 걸 보면 우마왕님이 쓰신 떡실신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MBT 70의 개발도 소련 기갑의 '숫적우위'를 상쇄할 수 있는 '기술적우위'를 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요?

'떡실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는 어떤게 있을까요? 우마왕님이 쓰신 글을 보면 실제 미국측의 판단 보다는 정황증거로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더 직접적인 자료는 없을까요? 제가 기술적인 문제는 잘 모르니 우마왕님께서 관련된 자료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이 부분도 좀 의문인데 NATO가 전술핵과 공격 헬리콥터를 조합한 방어대책을 거론한 것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기갑 전력의 '숫적 우세'를 '기술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마왕님께서는 나토의 방어전술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요인으로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를 꼽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읽었던 냉전기 서유럽 방어 계획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보면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는 숫적 열세에 비해 부차적 문제였던 것으로 이해가 되어서 말입니다. 작전계획에서도 개별 전차의 성능적 열세를 언급하는 것 보다는 압도적 숫적 열세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 보이더군요.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를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셔먼

일요일에 앉아서 일을 하자니 손에 잘 안잡히더군요. 답답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니 슈피겔에 1952년의 이집트 혁명 기록사진이 아홉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아홉장의 사진 중 두 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집트군의 셔먼이 나와있더군요.

사진=AP

사진=Corbis

얼빵하게 생긴 셔먼의 엉덩이를 보니 뭔가 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미야 M4A1셔먼의 포장을 뜯어서 대충 포탑만 맞춰 봤습니다.


타미야 M4A1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포방패가 두가지로 초기형의 M34도 들어있다는 점 입니다. 셔먼 계열은 대부분 얼빵하게 생겼지만 특히 포방패가 M34인 것은 더 얼빵해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포탑을 대충 맞춰놓고 보니 전에 만들다 만 하비보스의 M4가 생각나더군요. 이것도 포방패를 M34로 했는데 동축기관총 부품이 생긴게 마음에 안들어 잠시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하비보스의 셔먼에는 기관총이 두 종류가 들어 있는데 조립하고 남는 cal.30을 동축기관총으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비보스 M4의 M34 포방패는 구멍이 좁아서 기관총이 잘 안들어가더군요. 사포질을 해서 구멍을 조금 넓혔습니다.


주포와 동축기관총이 같이 움직이도록 대충 붙여놨습니다. 하비보스의 M4는 사놓은 것이 더 있는데 다음에 만들때는 좀 더 그럴싸하게 해 봐야 겠습니다.


대략 비슷한 모양이 나오는 것 같군요. 얼빵한 분위기를 잘 풍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데자뷰? - (5)

BigTrain님 블로그에서 불라바 미사일의 실험 실패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전통을 21세기에도 잘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현재의 러시아가 1930년대의 소련 보다 나은 점은 사보타지 혐의자들이 총살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정도같습니다.

민간인 사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조치

Bundeswehr entschädigt Familie des afghanischen Opfers,(2009. 07. 23) Spiegel

지난 번의 총격 사고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15세 소년 한명이 사망하고 소년의 아버지를 포함해 두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최초 보도에서는 세명 사망이다 두명 사망이다 등등 혼란스러웠는데 최종 확인된 바로는 사망자가 한명에 그쳤군요.

독일 연방군은 소년의 부족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할 것이며 구체적인 보상액수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결정될 모양입니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민간인 사살 사건 당시 독일측은 여성 한 명과 그 자녀 두명의 사망에 대해 2만달러를 지급했는데 이번에는 15세의 소년이라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액수는 비슷할 것 같다는 전망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에서는 노동력이 있는 남성의 가치가 여성과 어린이 보다 높기 때문이라는군요.

민주주의와 미디어의 발전으로 비정규전은 매우 골치가 아파졌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독일군이라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민간인이 한 두명 사살된다 해도 신경을 안 썼을테니 말입니다.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20일의 독일연방군 선서식

독일 연방군은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기념해서 이날 신병 선서식을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올해의 선서식은 연방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으며 메르켈 총리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연방군과 시민들을 보다 가깝게 하자는 취지였다고 하는군요.

한편 선서식이 있던 도중 베를린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요구하는 반전시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10대 초반의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세명이나 사살됐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진 직후이기도 하니 올해 선서식은 꼬였다는 느낌입니다.


Budeswehr-Gelöbnis vor Reichstag(Spiegel)

땅크를 샀습니다

일요일에 주문한 모형이 도착했습니다. 아이 좋아라~♬




티거 초기형은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타미야 제품이 하나 있는데 아직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타미야 물건은 시커먼 503 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고 이번에 산 AFV클럽 티거는 다스라이히 사단 차량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슈툼티거도 꽤 기다리던 물건인데 드디어 하나 구하게 됐습니다. 상자에 초판 한정으로 뭘 넣어줬다고 되어 있군요.


찌메리트 코팅할 때 쓰는 도구로군요. 뭔가 대단한게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AFV 중 하나인 sd.kfz 251 C형입니다.

그리고 보니 타미야의 sd.kfz 251 D형도 국내에 수입이 됐던데 이건 다음에 사면되겠군요.


이 3호전차는 다스라이히 사단 차량으로 만들 티거와 짝을 해주려고 샀습니다. 타미야 3호전차 N형을 만들때 쉬르첸을 달지 않아서 쉬르첸이 남으니 이 물건에 달아볼 생각입니다.

스트레스 받을 때 만지작 거릴 물건이 생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2009년 7월 20일 월요일

독일군,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살

아프가니스탄 주둔 독일군이 검문 중 민간인 두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Bundeswehr tötet Zivilisten
-> 새 기사로 대체되어 링크가 깨졌습니다.

독일 연방군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여섯명의 민간인이 탄 차량이 독일군이 있는 곳으로 고속으로 접근해 왔기 때문에 경고사격을 했으나 멈추지 않아 차량을 직접 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당국에 따르면 사망자는 어린이 한 명을 포함해 세 명이라고 합니다.

독일 연방군의 공식 발표가 맞다면 사격을 가한 병사는 교전수칙에 충실했던 것이겠지만 어쨌든 어린이 까지 사살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론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좌파연합의 라퐁텐(Oskar Lafontaine)은 아프가니스탄 파병은 실패이며 즉시 철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ps 1. 새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사살된 게 확인됐다는군요. 첫번째 기사와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독일연방군도 꽤 곤혹스러운 모양입니다.

Deutsche Soldaten töten Jugendlichen

ps 2. 기사가 계속 편집되는군요;;;; 처음 기사는 민간인 사살이 중심이었는데;;;; 정신 없습니다.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 영어판(Crucible of combat) 출간 예정

영국의 군사서적 출판사인 헬리온(Helion&Company Ltd)에서 롤프 힌체(Rolf Hinze)의 저작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를 출간한다고 하는군요. 영어판 제목은 'Crucible of Combat : Germany's Defensive Battles in the Ukraine, 1943-44'입니다.

'Crucible of Combat : Germany's Defensive Battles in the Ukraine, 1943-44'

헬리온에서는 예전에 힌체의 저작인 To the Bitter End : The Final Battles of Army Groups A, North Ukraine, Centre—Eastern Front, 1944-45(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 Kämpfe der Heeresgruppe Nordukraine/A/Mitte)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힌체의 저작을 계속 내는 것으로 보아 힌체의 나머지 저작들도 출간할 계획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존에 올라온 가격을 보니 정가는 59.95달러로 책정되어 있고 할인가 37.77달러입니다.

저도 몇 번 이야기 했지만 헬리온에서 먼저 출간한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는 동부전선을 다룬 힌체의 저작 중 가장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편 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될 Rückzugskämpfe in der Ukraine는 작전 위주의 딱딱한 서술이지만 사단급 제대의 작전을 아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는 수작입니다. 전자의 영어판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이라도 이번에 나올 물건은 기대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책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라면 번역 문제입니다. 사실 헬리온에서 먼저 낸 Letztes Aufgebot zur Verteidigung des Reichsgebiets의 경우 영어판을 읽어본 일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크론(Hermann Cron)의 'Imperial German Army 1914-18'의 경우 몇몇 부분에서는 이해가 잘 안되고 문장도 어색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번역자에 따라 다르니 이 책 한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요즘 경제사정이 나빠서 영어판 까지 구입할 생각은 없지만 어떤 물건일지 꽤 궁금하군요.

한줄로 요약 하자면 '강력 추천'입니다.

ps 1. 사실 제 개인적으로 롤프 힌체의 저작 중 최고로 꼽는 것은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와 Das Ostfront-Drama 1944 : Rückzugskampfe Heeresgruppe Mitte등 바그라티온 작전 2부작인데 후자만 영어판이 나와있고 전자는 아직 나와 있지 않습니다. 조금 아쉽습니다.

ps 2.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영어판도 한번 구입해서 대조해 보고 싶긴 한데 가카 취임 이래로 주머니 사정이 나빠져서 그런 호사는 부리지 못하겠습니다;;;;

2009년 7월 18일 토요일

인터넷을 통해 생산되는 정보의 문제점

이 글은 지난 겨울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열었던 특별전시전 “칼, 실용과 상징”에서 판매한 도록에 수록된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의 에세이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도록에 실린 사진들 보다 더 인상적인 글이었는데 특히 인터넷을 통해 생산되는 정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은 많은 분들이 공감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에서 논하는 것은 도검에 대한 인터넷의 부작용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6. 인터넷으로 심화되는 전통 도검에 대한 오류
인터넷이 등장함에 따라 그 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도검에 관한 정보가 공유되고 있고, 애호가들이 결성한 카페 활동에 의해 도검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칼에 관한 활발한 지식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관련 지식이 늘어난 것은 분명히 인터넷의 공이며 인터넷이란 매체가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동호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인터넷의 도검 관련 카페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도검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정보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는 수많은 도검과 나이프 관련 카페들이 있으며 그 중 한 카페의 회원 수는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활성화 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등을 공유하며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카페들의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그 카페들을 접속해보면, 우리 도검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 깊이가 터무니없이 얕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도검에 대해 공부하길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도검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부족함에 갈증을 느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알고자 하는 심도 있는 정보에의 접근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논하고 있는 피상적인 정보조차도 내용의 상당 부분에서 옥석의 구분이 불가하다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아예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오류가 난무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허위정보의 오류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내용을 대중에게 재전파하고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정설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군사유물 등을 다루는 관련 학계나 국공립박물관 계통의 연구에서는 애초 그러한 근거불명의 외부자료를 공식적으로 논문에 인용하는 일이 없으나, 일반인들은 공인된 이론과 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해 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외부에서 난무하는 추측이 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해도 자료의 취합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우, 앞서 말 한대로 추측은 정설로 둔갑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허위의 정보가 일반 상식처럼 통용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번 상식처럼 통용된 그럴 듯한 허위 정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허위 정보를 유포시킨 수고보다 수십배 이상의 노고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아무런 감수와 근거에 대한 점검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그럴듯한 글재주와 문장으로 허위와 진실이 그럴 듯 하게 배합된 글을 연구자나 호사가들이 참조하는 경우엔 문제는 더욱 커진다. 호사가들은 엉뚱한 정보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케 되고, 만에 하나 그런 자료를 연구자가 정식 논문에 인용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연구의 근간부터 흔들리는 사상 누각을 만들게 된다는 치명적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7. 왜곡과 오류의 첨병인 일부 호사가들
인터넷에서 전통도검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고 기본정보를 대중의 저변으로 확대 시키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을 호사가들이다. 학계가 하기 어려운, 즉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이 호사가들의 초반까지 역할은 매우 긍정적인 면이 많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호회나 카페에서 대접을 받는 위치가 되면서부터 이들 중 상당수가 초심을 잃고 대부분 엉뚱한 행동을 한다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에게 추종자가 생기고 그들이 인터넷상의 권력에 맛 들이는 ‘오만’에 중독된 순간부터 자신이 아는 정보의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독선’이 시작된다.

이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공부는 안하면서 인터넷을 뒤져 그럴 듯한 글을 짜집기하고, 어쩌다가 학계의 논문이라도 얻게 되면, 출처조차 밝히지 않은 채 자구만 바꾸어 자신이 쓴 글 처럼 추종자들에게 제공하면서 ‘찬사’를 받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이들은 매우 영리하여 논문을 교묘하게 짜깁고, 자신이 생각나는 대로 창작한 설 까지 그럴듯하게 중간에 첨부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도주로까지 준비하는 지능적인 행태를 보인다. 솔직히 이것은 일종의 범죄인데 아직 학계에서 인터넷을 뒤져 이런 행태에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호사가들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대표적 사례를 예로 들면 1) 타인의 논문이나, 연구내용의 무단 도용하는 것, 2) 무단도용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창작인양 첨삭하여 내용을 왜곡 변형하는 것, 3) 이에 대한 원저작자의 지적이나 항의에 대해서는 절대로 인정치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양, 원본을 접할 수 없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것 등이다. 헌데 이상한 것은 한국의 전통도검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열정으로 시작했던 초심은 사라지고 이들이 이런 오류와 왜곡의 생산자로 변질되는가 하는 점이다.

도데체 이들은 왜 변했을까?

8. 허위 정보의 생산자가 되는 이유
그 근본이유는 학계의 연구활동과 결과가 관심있는 대중에게 공개된 정보로서 직접 연결될 루트가 없다는 것이고, 관심있는 대중들 또한 도검에 대한 궁금증을 공인된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학업에 열중해야 할 학생들과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들은 시간의 문제 때문에 직접적으로 연구기관이나 박물관에 찾아가 자료나 정보를 얻기는 거의 요원한 일이기에 호사가들이 만든 카페나 동호회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직접 얻지 못한 정보를 대신 전달해 주는 이 호사가들에게 도검이란 분야에 대해 인스트럭터나 멘토mentor로서 경의를 표하며 그들이 주는 자료와 정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호사가가 알고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다. 또한 많은 자료의 DB를 보유했다 해도 그 내용의 옥석을 일일이 구분하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니 답을 요구하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알건 모르건 그때부턴 만들어서라도 답을 생산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므로 이미 진실은 관계없이 자신이 설파하는 주장과 내려주는 정보를 갈망하는 추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도검에 대해선 모든 것을 아는 ‘전능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권위에 중독되고 명예의 노예가 된 것이다.

허나 참으로 우스운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명예, 그들이 추종자들에게 내세우는 권위, 추종자들에게 받는다고 믿는 존경 등은 결코 호사가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닌데도 자아도취 속에 빠져버리는 데 있다. 현실과 인터넷을 구분 못하고 자기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호가가들이 애초의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인터넷 권력의 화신이자, 무불통지의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돌변하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이석재, 「무엇이 한국의 칼인가? – 우리 칼의 정체성 인식을 위한 제언」, 『칼, 실용과 상징』, 고려대학교박물관, 2008, 172~174쪽

인터넷 글쓰기의 문제점을 아주 잘 지적했다는 생각입니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런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심하고 항상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 입니다.

Ps 1.capcold님의 블로그 한 켠에 적힌 "I might be wrong, so prove me wrong"라는 문구도 이런 경우에 인용하면 적절할 듯 싶습니다.

Ps 2. 그러므로 Back to the Source 캠페인이 활성화 되어야 겠습니다.

Ps 3. 부록으로 딸린 에세이에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더군요. 없는 살림에 거금 3만5천원을 들여 구입한 도록인 만큼 뽕을 뽑으려 합니다.

2009년 7월 15일 수요일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

계속 땜빵 포스팅입니다;;;;

지난 번에 sonnet님이 슈트라우스 독일 국방장관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M47 전차를 살펴보는 의미심장한(?) 사진을 한 장 올리셨었죠. 슈트라우스의 표정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아래에서 언급한 Trauschweizer의 책을 읽다 보니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신형 M60 전차에 대해 평을 한 것이 실려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독일과 미국은 신형 주력 전차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M60이 제7군에 배치되자 슈트라우스는 이 전차의 결점에 대해 지적했다. 슈트라우스는 소련의 T-10은 M60의 시야에 들어오기 300야드 앞에서 M60을 먼저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측은 슈트라우스가 M60 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전차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신형 전차는 35톤(M60 보다 거의 10톤 가벼운)의 무게에 800마력 엔진, 200마일의 작전반경, 그리고 높이는 2.4미터(M60은 3.2미터)로 낮았으며 시속 45마일 이상의 고속에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대전차화기의 발전으로 중장갑은 약점을 상쇄하는데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속도와 항속거리, 그리고 낮은 높이가 좋은 전차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미 육군 지휘관들은 M60이 소련 전차보다 열등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M60의 105mm 전차포는 운동에너지탄을 사용해 T-54를 2,900미터에서 격파가 가능했지만 소련 전차가 M60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2,70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했다.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165

슈트라우스가 지적한 M60의 단점은 M47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미국 전차의 특징이었습니다. 게다가 M47은 화력도 M60 보다 떨어지니 슈트라우스가 좋게 봤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정말 그 사진에 찍힌 슈트라우스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