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1일 목요일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

이 글은 World War II, 2005 년 11월호의 26~32, 80쪽에 실린 George F. Winter의 글 Panther’s rampage in the Ardenne를 날림으로 번역한 것 입니다. 이미 예전에 채승병님이 바르크만의 시각에서 본 만헤이 전투에 대한 글을 번역하신 적이 있는데 Winter의 글은 미국쪽의 시각도 반영돼 있어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둘러싼 전투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콩떼 뒤부아 생-장(Comte du Bois Saint-Jean)이라는 성은 벨기에의 오데뉴(Odeigne)에서 4마일 떨어진, 바라끄-드-프레뛰르-라-로셰(Banique-de-Fraiture-La-Roche) 가도의 교차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1944년 12월 말, 아돌프 히틀러의 아르덴느 공세가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이 구석진 곳의 작은 성은 제2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의 제2SS기갑연대 1대대 4중대소속 판터전차의 공격을 위한 집결지가 되었다.

4중대는 제6SS기갑군이 뮤즈강을 향해 공세를 펼치면서 계속해서 전력이 소모되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다스라이히 사단이 전투에 투입될 시기가 왔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제2SS기갑군단의 예하 제대로서 만헤이(Manhay) 방면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SS기갑군단장 비트리히(Wilhelm Bittrich)는 리에쥬(Liege)와 바스토뉴(Bastongne)를 잇는 N15도로가 지나가는 만헤이를 점령함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두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만헤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비트리히는 그의 군단을 그대로 리에쥬를 향해 북진시키거나 아니면 바스토뉴로 방향을 돌려 이곳을 방어하는 미 제101공수사단과 그 배속부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제5기갑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12월 24일 오전, 1대대의 3개 전차중대는 오데뉴에서 발진해 오통(Hotton)-만헤이 가도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기갑척탄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그랑므닐(Grandmenil)과 에레제(Erezee)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 두 마을을 함락시키면 만헤이는 고립되기 때문에 미군은 만헤이를 버리고 퇴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은 프레뉘(Freyneux)와 라모르므닐(Lamormenil)에 방어선을 형성한 미 3기갑사단의 TF 케인(Kane) 소속의 셔먼 전차 11대와 지원 보병의 저항을 받아 저지되었다.

그러나 비트리히는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비트리히는 이 지구의 미군은 지난 수일간의 격전으로 전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한번의 결정적인 타격만 가한다면 붕괴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타격”을 가하는 것이 4중대 소속의 판터전차들의 임무였다.
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부대인 다스라이히 사단에서도 제1대대의 4중대는 특히 우수한 부대였다. 4중대는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러시아 전선을 거친 역전의 용사로 1944년 4월 4중대의 중대장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전투에서는 12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의 중대원 중 한명은 폴 대위가 “쾌활한 성격의 지휘관이었으며 중대원들을 잘 배려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한 중대원은 “과묵하지만 병사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폴 대위의 부관은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Oberscharführer) 였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농부의 아들이었던 바르크만은 폴과는 성격이 판이했지만 그 역시 경험많은 전차장이었다. 그의 전우들은 바르크만에 대해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평했으며 “언제 엄폐하고 언제 기동해야 할지 잘 아는” 바르크만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바르크만은 노르망디 전투기간인 7월 27일에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생 로-쿠탕스(Coutances) 가도에서 9대의 셔먼을 격파한 바 있었다. 바르크만은 이 전투의 공적을 인정받아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성 인근의 숲에서 비트리히의 만헤이 공격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며 전투 투입을 고대하던 중대원들은 한 고급 장교의 방문을 받았다. 폴 대위는 새벽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 장군은 나에게 즉시 북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군과 일개 대위와의 대화치고는 특이한 일이었는데 폴은 그 장군에게 자신의 연대장인 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Obertsturmbannführer)과 먼저 상의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지 물었다.
바로 뒤에 폴은 연대장에게 호출되어 오데뉴의 교회에 위치한 연대본부로 갔으며 엔셀링은 폴에게 다시 한번 공격을 지시했다. 엔셀링, 폴, 그리고 바르크만은 만헤이 도로 부근을 정찰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차로 공격하기에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우리쪽은 기동할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데 비해 미군은 고지대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사격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연대장에게 야간 공격을 제안했고 연대장은 나에게 공격에 대한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폴의 공격계획은 그의 중대가 제3SS 기갑척탄병연대 소속의 척탄병의 지원을 받으며 오데뉴에서 만헤이 도로로 진출하는 것 이었다. 일단 고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만헤이로 진격한 뒤 만헤이를 탈취하고 다시 이곳에서 오통 방면으로 진출, 미 3기갑사단의 측면으로 우회해 돌파구를 넓힌 뒤 후속 부대들이 전과를 확대하도록 한 다는 것 이었다. 이 공격은 24일 밤 22시에 예정되었다.

바르크만과 폴은 공격준비를 위해 중대로 돌아갔다. 16시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중대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중대의 3개 소대 모두가 완편상태였고 17대의 판터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 소속의 판터 5대였다. 프라우셔는 1939년에 SS에 입대한 베테랑으로 소련 전선에서 8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했으며 노르망디에서는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 프라우셔의 뒤에는 역시 노르망디 전투의 베테랑인 피셔(Oskar Fischer)의 전차가 따랐으며 피셔의 사수는 비숍(Bischof)이었다.
폴의 402호차는 3소대의 바로 뒤에 후속했으며 폴의 뒤는 바르크만의 401호차가 따랐다. 중대본부의 뒤에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지휘하는 2소대의 판터 5대가 후속했다. 2소대의 뒤는 얼마전 갓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의 1소대가 따랐다.
엔셀링은 폴의 타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2중대 소속의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판터 6대를 배속시켰다. 하게샤이머의 소대는 프레뉘 외곽에서 4중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하게샤이머는 폴의 중대원들과 친숙했는데 그는 동부전선에서 바르크만과 같은 전차를 타면서 19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마지막으로, 폴 SS대위가 지휘하는 23대의 판터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3SS 기갑척탄병연대의 16중대인 돌격공병중대가 배속되었다.

독일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무렵, 오데뉴에서 3/4마일 떨어진 숲에는 미 7기갑사단 제40전차대대의 A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알렌(Malcolm Allen) 대위가 지휘하는 A중대에는 셔먼 전차 6대가 남아 있었으며 A중대는 마을 바깥으로 향하는 도로의 북쪽, 만헤이 도로의 교차점 부근에 포진하고 있었다.이 교차점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서쪽방향으로 도로가 꺾어졌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지는 S자 커브가 있었으며 도로는 양 옆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이 도로의 동쪽 가에는 풀밭이 있었고 여기에는 넬슨(Roy Nelson) 대위가 지휘하는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S커브로 된데다 양 옆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시계가 불량했지만 한편으로는 넬슨의 중대에 엄폐물을 제공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도저를 장착한 전차가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얕은 구덩이를 파 놓았기 때문에 넬슨의 전차들은 포탑만 내밀어 폭로면적이 줄어들었고 또 독일군의 포화로 부터도 어느 정도 방어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C중대의 혼드롭(Donald Hondorp) 하사는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다. “우리는 마치 하얀 바탕의 검은 점 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목표물이었습니다.”
넬슨의 중대가 배치된 풀밭의 동쪽으로는 B중대와 D중대 소속의 전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두 중대의 셔먼과 M5A1경전차들은 말랑프레(Malempre) 마을 주위에 배치되었다.
브라운(Cook Brown) 중령의 제40전차대대 본부는 만헤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전투 초기에 생-비트에서 격전을 치뤘다. 그 결과 16일 전투 시작당시 60대였던 대대의 전차는 32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역시 만헤이에 본부를 둔 로젠바움(Dwight Rosenbaum) 대령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로젠바움 대령의 A전투단은 40전차대대와 48기계화보병대대(Armored Infantry Battalion), 그리고 1개 소대의 구축전차와 전투공병, 포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전투로 소모된 로젠바움의 부대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의 탈진상태였다. 만헤이로 이동한 로젠바움의 전투단은 크리스마스 이브만은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18시, 만헤이에 도착한지 겨우 6시간이 지났을 때 로젠바움 대령은 제18군단을 지휘하는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소장으로부터 다시 만헤이를 버리고 그 북쪽의 고지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0전차대대가 철수의 후위를 맡으며 이동시간은 22시 30분으로 예정되었다.

22시 정각, 폴은 계획대로 오데뉴를 벗어나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뒤 폴의 중대는 알렌 대위의 A중대와 교전했고 이 전투로 셔먼 두 대와 판터 한대가 격파되었다. 프라우셔의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전차로 갈아타고 공격을 지휘했다. 독일군이 재정비 하는 동안 A중대는 만헤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야간 전투 중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바르크만은 북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자신의 중대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바르크만은 만헤이 가도에 도착한 뒤 (원래의 대형대로) 아직도 프라우셔가 자신의 앞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북진하기로 결정했다.
맑은 하늘과 밝은 달이 눈내린 들판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좋았으며 바르크만은 만헤이로 향하는 낮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무전기의 문제 때문에 나머지 중대의 차량들과 교신이 되지 않던 그때, 바르크만은 앞쪽의 길가에 서 있는 한대의 전차를 발견하고 그것이 프라우셔의 전차라고 생각했다.
바르크만은 전우들과 합류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갔고 포탑 위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프라우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차의 승무원은 그대로 해치를 닫아 버렸고 바르크만도 (상황을 깨닫고) 포탑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크만은 즉시 그의 사수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에게 포탑을 돌려 옆의 전차를 쏘라고 명령했다. 두 대의 전차는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포겐도르프는 포탑을 선회할 수가 없었다. 바르크만의 조종수는 명령도 없이 반사적으로 전차를 후진시켜 포겐도르프가 포탑을 돌려 사격할 수 있도록 했다.
판터가 발사한 포탄은 그대로 셔먼의 후부를 관통해 버렸는데 놀랍게도 그 셔먼의 승무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셔먼의 사수인 오스타체브스키(Frank Ostaszewski)가 부상을 입는데 그쳤으며 바르크만이 프라우셔라고 착각했던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다른 승무원을 구출해서 숲 속으로 숨었다.
바르크만의 401호차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운에 감사하면서 그대로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바르크만은 오른쪽을 살펴보다가 셔먼으로 보이는 전차 두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두 대 모두를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격파된 두 대의 장갑차량은 셔먼이 아니라 제814 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이었다.
바르크만은 여전히 본대를 찾지 못한데다가 적의 전차 세대와 맞딱드리게 되자 속도를 줄이고 조금 더 조심해서 전진하기로 했다. 바르크만은 그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우리의 앞에 나무가 없는 개활지,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 앞의 도로는 큰 S자 커브로 꺾여 있었고 그 앞은 나무로 둘러 쌓인 내리막 길 이었다. 순간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그 목초지에는 적의 전차 아홉 대가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바르크만은 이 상황에서는 능청을 떠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조종수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바르크만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 나갔고 도로가 굽어지는 곳 까지 나간 뒤 전차를 멈추게 했다. 이제 한대의 셔먼을 제외하고는 바르크만을 쏠 수 없는 위치였다.
바르크만의 회고는 계속된다.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미군 전차병들이 전차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제 바르크만의 전차가 중대의 선두라는게 확실해 졌고 바르크만은 뒤따라오는 프라우셔가 미군 전차들을 처리해 주기를 바라면서 미군 전차들을 쏘는 대신 전진을 계속했다.

바르크만이 생각했던 대로 그가 떠나고 몇 분 뒤 프라우셔의 전차가 초지에 도착해 미군 전차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모든 미군 승무원들이 숲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 프라우셔의 전차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셔먼이 프라우셔에게 발포를 했는데 그것은 빗나갔다. 프라우셔는 조명탄을 발사해 주변을 밝혔다.
조명탄이 타오르는 동안 프라우셔의 사수는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다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었다. 혼드롭 하사는 자신의 셔먼을 구덩이에서 몰고 나오는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엔진부가 피격되어 전차에 불이 붙었습니다.” T. C. 그레이(Gray) 하사가 전차장인 두번째 셔먼도 구덩이에서 후진해 나왔다. “우리는 두발을 사격했지만 곧 전차포의 제퇴기가 고장나 버렸습니다.” 혼드롭과 그레이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프라우셔와 그의 소대 소속 전차들은 예기치 못하게 미군과 조우했지만 미군 전차들의 뒤로 들어가 S자로 커브가 진 도로 주변의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했으며 다시 만헤이로 향하기 전에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를 모두 격파했다.
한편, 바르크만은 만헤이에 도착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던 찰나 그는 세대의 미군 전차를 발견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대로 만헤이로 들어갔다. 만헤이는 오후에 로젠바움 대령이 받은 철수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미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날이 어두운데다가 미군들은 각자의 임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바르크만의 판터가 독일 전차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언제까지나 미군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곧 미군들은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알게 되었다. 제40전차대대 본부의 골디(William Goldie) 소위는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대로 건물로 뛰어들어와 대령에게 독일 전차가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전차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고 대령은 모두 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였고 나도 마찬가지였지요.”
골디 소위에게 발견 되기 전에 바르크만은 한대의 지프를 깔아 뭉개 버렸다. 바르크만의 판터와 지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은 그때 도로의 바깥에 서 있던 하프트랙의 운전병 파웰(Morris W. Powell) 이었다. “우리는 오른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걸 들었습니다. 한대의 탱크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섬광이 번쩍였고 곧이어 충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큰 탱크는 처음 봤습니다. 아마도 88mm 포 같았는데 그거 전봇대 처럼 큼지막 하더군요. 지프는 두 명의 사람을 태운 채로 뒤집어져 그대로 그 괴물에게 뭉개졌습니다.”
운전병들이 바르크만의 전차를 피하려고 운전을 하는 통에 로젠바움 대령이 계획한 질서정연한 후퇴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바르크만은 마을을 벗어난 뒤 포탑 밖으로 나와 마을쪽을 바라봤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 차량 중에는 셔먼도 있었다.” 바르크만은 포탑을 6시 방향으로 돌려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이제 도로는 완만한 오르막 길이었다. 포겐도르프는 이동하는 와중에 마을을 향해 포격을 계속했다. 스튜어트 경전차 세대와 하프트랙 한대, 그리고 셔먼 한대가 더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제 판터의 엔진도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더 이상 운이 따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바르크만은 전차를 숲으로 이동시켜 숨은 뒤 중대장과 나머지 전차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만헤이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를 빠져나가고 얼마 뒤 프라우셔가 만헤이에 도착했다. 프라우셔는 “뒤에 매복해 있던 한대의 셔먼이 내 전차의 왼쪽 측면을 명중시켰고 내 전차는 그대로 기동불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격은 A중대의 셔먼이 발사한 것이었고 이것을 발사한 사수 코소브스키(Nicholas Kosowsky)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선두의 적 전차가 집 바로 옆에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뒤의 두 번째 적 전차가 조명탄을 발사한 뒤 우리 전차의 왼쪽 구동륜을 파괴했지요.” 셔먼의 승무원들은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기동불능이 된 전차에서 탈출했다.
프라우셔는 그날 밤 두 번째로 다른 판터로 갈아타고 지휘를 계속했다. 프라우셔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셔먼 한대를 더 격파했다. 이제 미군은 만헤이에서 밀려났는데 폴 대위는 마을 북쪽으로 더 나가는 대신 만헤이에서 빠져나와 그랑므닐 방향인 서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도로는 북쪽과 남쪽의 숲으로 경계지어 있었으며 그 뒤로는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개울이 보말(Bomal) 북서쪽으로 향하는 하수도의 위를 지나 흐르고 있었다. 판터들이 진격하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1소대를 지휘하는 크노케 소위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포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차를 좌측으로 회피시켰고 동시에 숲속을 향해 대응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길 가장자리와 경사면을 살펴보지도 않은채 전차를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포탑과 포신이 그대로 초지에 처박히게 됐고 전차는 그대로 멈춰 버렸습니다.” 크노케는 포탑 밖으로 나와 조종수가 뒤로 빠져나가도록 유도했고 그의 전차는 다시 도로로 올라섰다. 하지만 크노케는 어두운 가운데 포구를 살펴보고 진흙으로 막혀버려 사격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전우들을 놔두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탑과 차체의 기관총은 사용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랑므닐 근처에서 나는 중대장의 전차를 만났습니다.” 폴 대위는 포탄의 파편에 머리를 크게 다쳐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크노케의 사수가 폴 대위의 차량에 대신 탑승해 전차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무렵 프라우셔는 보말의 도로 교차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랑므닐로 진입한 상태였다. 프라우셔는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포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내 뒤를 따르던 내 소대의 네번째 전차가 화염에 휩싸인 채 멈춰섰습니다.” 그 전차는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피셔와 사수인 비숍, 장전수와 조종수 등 네 명은 그대로 타 죽었다. 무전수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프라우셔는 그의 우측 150m 떨어진 곳에서 피셔의 전차를 격파한 셔먼으로 생각되는 차량을 발견했다. 피셔의 판터가 불타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기 때문에 프라우셔는 미군의 전차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사수에게 포탑을 세시 방향으로 돌리라고 명령하고 목표를 확인한 뒤 발사명령을 내렸다. 미군의 전차는 순식간에 격파되었다. 첫번째 전차를 격파한 직후, 프라우셔는 셔먼으로 생각되는 두번째 차량을 발견했고 그 것 또한 격파했다. 프라우셔가 셔먼이라고 착각한 그 두대의 차량은 제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이었다.
뒤를 따르던 2소대의 판터들은 격파된 피셔의 전차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정지해야 했다. 비스만은 조종수에게 왼쪽으로 선회해 도로 옆의 초지로 우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비스만의 전차를 따랐다. 그러나 얼마 뒤 다섯대의 판터들은 제238공병대대가 매설한 지뢰지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뢰폭발로 구동륜과 궤도가 파괴되었다. 네대가 가동 불능이 되었으며 다섯 번째 차량은 길 가에 멈춰섰다.
이제 프라우셔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의 뒤는 격파된 판터와 지뢰밭에 의해 차단된데다 사방은 미군 천지였다. 프라우셔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지났습니다. 나는 홀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끄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한편, 비스만은 전차에서 탈출해 지뢰밭을 건너 도로로 올라왔고 근처의 집으로 피했다. 그리고 잠시 뒤 1소대장 크노케가 합류했다. 두 사람이 다음 단계를 의논하고 있을 때 프라우셔도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의논을 한 뒤 세 사람은 에레제까지 가기로 하고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했다.
의논을 마친 뒤 후속하는 크노케의 전차는 격파된 피셔의 판터를 피해서 집 앞의 정원으로 우회해 앞으로 나갔다. 크노케의 전차는 이 장애물을 통과해 프라우셔의 전차와 합류했고 그곳에서 5마일 떨어진 에레제를 향해 나갔다.

에레제에 도착한 그들은 2중대의 하게샤이머와 합류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하게샤이머는 폴이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그가 공격을 지휘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공격을 지휘하게 된 하게샤이머는 프라우셔와 문제를 상의했다. 하게샤이머는 미군의 방어외에도 이제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군의 공습에 대해서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격하는 와중에 전차를 지원할 보병들과도 접촉이 끊어졌다.
하게샤이머는 자기 전차로 돌아가다가 길 가장자리의 구덩이에 미군 두세명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게샤이머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총을 빼앗으려 했지요. 그러자 갑자기 그들 중 한명이 내 어깨를 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미군들은 달아났다. 하게샤이머에게 있어 전쟁은 끝났다. 하게샤이머는 만헤이로 후송됐고 나머지 전차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전차들은 그랑므닐에 도착해 그곳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날이 밝아오자 미군의 비행기들이 나타났다. 프라우셔는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항공우세는 엄청났습니다. 도로로 나가는 차량들은 하늘 위를 계속 선회하고 있는 세대의 적기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4중대원들은 최선을 다해 엄폐했지만 그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크노케는 이렇게 회상했다. “25일 내내 미군의 포화는 격렬했습니다. 이른 오후 무렵 내가 탄 411호차는 두 발의 포탄을 맞았습니다. 나는 내 승무원들에게 해치를 열라고 했는데 잠시 뒤 내 차량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였습니다. 결국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랑므닐의 판터들이 지독한 포격에 시달린 이유는 4중대의 나머지 전차들이 만헤이를 떠난 뒤에 있었던 일의 결과였다. 그날 아침,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숲에서 나와 만헤이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파괴되거나 뒤집어진 지프, 트럭, 하프트랙, 전차들을 목격했다. 미군들은 철수했고 기갑척탄병들이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폴 대위가 탑승하던 판터를 만날 수 있었다. 두대의 전차는 마을의 북쪽 방향으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오전 늦게 미군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마을 북쪽의 고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31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가 마을을 탈환하려 했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셔먼 전차들은 은폐하고 있던 곳에서 나와 지원하는 보병들과 함께 만헤이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곧 판터 두대의 사거리안에 들어왔고 독일군은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선 셔먼의 장전수였던 놀티(John Naulty) 상병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그날의 임무를 받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버려진 아군의 차량들을 지나쳤습니다.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두발의 포탄은 피했지만 결국 차체 전면 좌측에 한발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따르던 네대의 셔먼도 모두 격파됐다.
그리고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10대의 셔먼이 도착했다. 클라크(Bruce Clarke)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올프 대위는 심하게 주저했다. 올프 대위는 클라크 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있는 곳에서 만헤이 사이에 대여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어 흩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헤이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진격하는 도중) 만헤이 북단에 위치한 적의 포화에 취약해 집니다. 이건 자살행위입니다.” 올프 대위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긴 제7기갑사단 B전투단의 지휘관 클라크 준장은 만헤이 공격을 지켜보기 위해 근처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에게 갔다. 두 장군은 30분 정도 상의를 한 뒤 올프 대위에게 그의 중대를 후퇴시키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전차로 공격하는 대신에 8개 대대의 포병을 동원해 만헤이 일대를 포격했다. 포격은 꾸준히 계속됐으며 포격이 끝난 27일까지 총 8,600발의 포탄이 독일군을 강타했다.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방어하던 독일군 척탄병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두 마을의 건물 중 멀쩡한 것은 단 한채도 없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인 25일 저녁, 폴의 중대원들은 그랑므닐에서 철수했다. 이틀 뒤, 4중대는 사단 본대의 철수에 따라 이 지역을 벗어났다.

폴의 중대는 수많은 미군 전차와 차량을 격파하고 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더 이상 전진할 수 는 없었다. 만헤이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비트리히가 그의 부대를 북쪽의 리에쥬로 전진시키지도 못하고 또 남쪽의 바스토뉴로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중대는 그들의 공격력을 서부전선의 마지막 대공세에서 소진한 뒤 점점 줄어드는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전투에 휩쓸렸다. 4중대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날 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마지막 포탄을 발사한 뒤 중대장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중대원들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중대를 해산했다.

2007년 10월 8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공산주의관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김규식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만 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뭐랄까, 언뜻 보면 대단히 극우적인 인사의 발언 같은데 김규식 박사와 같이 온건하고 중립적인 지식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데 한민족이 대단히 잔인하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되면 러시아 보다 더 잔인해 질 것이라는 예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실제로 입증되었으니 김박사의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

노아의 방주

"한 사람이 열 명씩만... <노아의 방주>로 탑승합시다"


별로 타고 싶지 않다....

2007년 10월 3일 수요일

David M. Glantz의 새 저작

독소전쟁사(When Titans Clashed)와 관련된 문제로 David Glantz씨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에 꽤 재미있는 소식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차기작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을 준비중이라는 것 입니다.


편지내용만 놓고 보면 두 권 이상으로 이뤄진 대작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저작입니다. 물론 출간은 2009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기다릴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스탈린의 1941년 7월 3일 라디오연설

독소전쟁 발발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우 유명한 이 연설을 합니다. 스탈린의 다른 연설들은 매우 재미가 없고 지루한데 비해 이 7월 3일의 연설은 매우 비장하고 감동적이어서 이 어린양과 같은 반공청년의 마음 조차 움직이는 걸작(?!)입니다.

아래에 인용한 내용은 소련정부가 1947년에 조선어로 번역 출간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요즘 문법과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고 원 번역이 딱딱해서 문체도 좀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동지들이여! 인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육해군 병사들이여!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국에 대해 6월 22일에 개시한 히틀러 독일의 배신적 기습공격은 의연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의 용맹한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적군의 정예 사단들과 그 우수한 공군 부대들이 격멸되어 전장에 매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전장에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면서 계속 전진해 오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군대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대부분, 벨로루시아의 서부, 서우크라이나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파쇼의 공군은 그 폭격기의 활동구역을 넓히면서 무르만스크, 오르샤,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키예프, 오데사, 세바스토폴리에 폭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중대한 위협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광스러운 붉은군대가 파쇼군대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내주게 됨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독일 파쇼군대가 허세를 부리는 파쇼 선전자들이 떠들듯이 정말로 무적의 군대이기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가 없으며 또 최근에도 없었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과거 무적의 군대로 생각됐지만 그 군대는 러시아군, 영국군, 프로이센군에게 연달아 패배했습니다. 제 1차 제국주의전쟁시기에 있어서 빌헬름의 군대도 역시 무적의 군대로 인정되었지만 그 군대 조차도 러시아군 및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수차 패배를 맛보았고 결국에는 영불군에게 격파되었습니다. 지금 히틀러의 독일 파쇼군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군대는 아직까지 유럽 대륙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소련에서만이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그러면 이 항전의 결과로 독일 파쇼군대의 우월한 사단들이 우리 붉은군대에게 격파되었는즉 이는 나폴레옹 및 빌헬름 군대가 분쇄되었던 바와 같이 히틀러 파쇼군대도 분쇄될 수 있음 또는 당장이라도 분쇄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조국의 일부가 독일 파쇼군대에 의해 점령된데 관해서는 그것이 주로 파쇼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쟁이 독일군대에 대해 유리한 조건에서, 소련군대에 대해서는 불리한 조건에서 개시된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독일군대는 전시 동원을 끝내고 소련을 대치한 170개 사단이 독일에서 파견되어 소련국경에 도착해 만전의 준비상태에 돌입한 상태에서 오직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련군대는 아직 군사동원을 해서 국경에 집결하는 도중에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있어 파쇼독일은 불원간 전 세계가 독일을 침략국으로 공인할 것도 개의치 않고 1939년에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을 돌연히, 배신적으로 위반한 사실이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나라는 조약 위반에 대한 발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배신적 길에 들어설 수 없었던 것은 가히 알만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소련정부가 히틀러 및 리벤트로프 따위의 배신자와 원흉과 더불어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가? 이 점에서 소련 정부에서 과오를 범한 것은 아닌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불가침조약이란 양국간의 평화조약입니다. 1939년에 독일은 이런 조약을 우리에게 제의했던 것입니다. 소련 정부가 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평화를 애호하는 나라라면 설사 이웃 국가에 히틀러나 리벤트로프와 같은 원흉과 식인귀가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 이웃나라와의 평화조약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물론 평화조약이 평화애호국가의 전일(全一), 독립 및 영예를 직접 혹은 간접 훼손하지 않는 이상 일정한 필수조건만 충족된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일년 반 동안 우리나라에 평화를 보장했으며 또는 파쇼독일이 조약을 위반하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시도할 경우 반격에 필요한 역량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의 이익이며 파쇼 독일의 손해입니다.

파쇼독일이 배신을 하고 조약을 파기한 채 소련을 침공하여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습니까? 독일은 이렇게 해서 단기간 자국의 군대에 유리한 정세를 어느 정도 확보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은 그 자신을 전세계의 눈 앞에 탐욕스러운 침략국가로 드러내 정치상으로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단기간의 군사적 이익이 독일에 있어서는 오직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 거대한 정치상 이익은 소련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장구한 동인(動因)이 되는 바 이에 근거하야 파쇼독일과의 전쟁에서 붉은군대의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가 반드시 전개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용감한 전 육군, 우리의 용감한 전 해군, 우리의 독수리 같은 모든 조종사, 우리나라의 전체 인민, 유럽,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우수한 인물, 나아가서는 독일의 우수한 인물들 까지도 다 독일 파쇼들의 배신적 행동을 꾸짖고 소련 정부에 동정을 표하며 소련 정부의 행위를 찬동하며 또는 우리의 사업이 정당한 것과 적들이 파멸할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지극히 잔인하고 교활한 원수, 독일 파시즘과의 결사적 전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우리군대는 전차와 비행기로 무장한 적군과 함께 용맹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와 붉은해군은 무수한 난관을 물리치면서 한치의 소련 영토도 희생적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 전사들의 용맹은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가하는 우리의 타격은 견실한 것이고 가혹(원 번역문에는 重杖)할 것입니다. 전 소련인민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붉은군대와 함께 일어서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적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엇 보다도 우리 인사(人士)들, 즉 소련 인사들은 우리나라에 닥쳐온 온갖 위험의 깊은 의의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연함과 무관심을 버리며 전쟁전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었지만 전쟁이 근본적으로 정세를 변화시킨 지금에는 일을 망쳐버리는 평화건설론을 버려야 합니다. 원수들은 포악하고 완강합니다. 놈들은 우리의 피땀이 묻은 우리의 땅을 빼앗으며 우리 노력으로 얻은 우리의 곡식과 석유를 빼앗으려 합니다. 놈들은 대지주의 정권을 회복시키고 짜르 제도를 회복시키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우즈벡인, 타타르인, 몰다비아인, 그루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및 기타 소련 자유인민의 민족문화와 민족국체를 말살하고 그들을 독일인화 시키며 그들을 독일의 공작 및 남작의 노예로 만들려 합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는 소련국가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인민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민족이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속박에 얽매일 것인가의 것이 되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이 점을 깨닫고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며 스스로를 동원하고 개인의 사업을 원수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새 전시궤범에 맞게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의 대열에 비관론자, 비겁자, 낙망자(落望者), 도피분자들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인민들은 투쟁에서 공포를 느끼지 아니하고 파쇼 압제자를 대항하여 우리의 조국 해방전쟁이 몸바쳐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세운 위대한 레닌 동지께서는 소련 인민들의 기본적인 품성에는 용감함, 굳셈(원 번역문에는 剛毅), 전투에서의 담대함, 우리 조국의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훌륭한 볼세비키적 품성이 붉은군대, 붉은해군의 수백만 명과 소련의 각 민족의 품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작전상의 목적과 적군의 격멸이라는 조직임무에 종속시키도록 하루 바삐 모든 사업을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의 인민들은 독일의 파시즘이 모든 근로인민들에게 자유 노동과 복지를 보장한 우리 조국에 대해 광신적 증오와 적개심을 도발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반드시 원수들에 대항하여 자기의 권리, 자기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해야 합니다.

붉은군대 육해군과 소련의 전 인민은 소련의 강토의 한 뼘이라도 사수하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을 흘릴때 까지 싸울 것이며 우리 인민의 본래 품성인 용맹, 창의성,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을 조직하고 그 대열에 보충병을 보내며 군대에 일체의 필수품을 공급하고 군대 및 군수품의 긴급수송, 부상병에 대한 광범위한 구호를 조직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의 후방을 공고히 하되 이 사업의 필요에 모든 일을 맞추며 전기 업소가 힘차게 일하도록 보장하고 소총, 기관총, 대포, 탄환, 포탄, 비행기를 보다 더 생산하며 공장, 발전소, 전화전신상 연락을 보관하고 지방의 방공시설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후방의 온갖 와해분자, 도피분자, 낙망자, 유언비어 유포자들과 무자비하게 투쟁할 것이며 밀정, 게릴라, 적의 공수부대를 일망타진하는 이 모든 방편에 있어서 우리의 박멸단을 신속히 조직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교활하고 음험한 기만과 유언비어 유포에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헤아려 악선동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낙망비겁으로 국방사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다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야 할 것입니다.

붉은군대가 부득이 퇴각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전반적인 철도 교통수단을 옮겨 가면서 원수들에게 한 대의 기관차, 한 대의 차량도 남기지 말고 원수들에게 1킬로그램의 빵, 1리터의 기름도 남겨놓지 말아야 합니다. 콜호즈원들은 모든 가축을 몰아가며 곡물은 후방지역에 옮기기 위하여 국가기관에 넘겨주어 보관해야 합니다. 운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일체의 값어치 있는 재산, 즉 귀금속과 곡물 및 연료를 모두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기병 및 보병 빨치산 부대를 편성할 것이며 적군과 투쟁하기 위하여 방방곳곳에서 게릴라전을 일으켜 도로, 교량을 폭파하고 전화전신연락망을 파괴하며 산림, 창고, 화물에 불을 질러야 할 것입니다. 점령지에는 적군과 그 앞잡이들이 견디지 못하도록 하고 적들을 모든 곳에서 추격, 섬멸하여 그들의 모든 수단을 파탄시켜야 할 것입니다.

파쇼독일과의 전쟁을 그냥 보통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군대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군대간의 전쟁인) 동시에 독일 파쇼군대에 대항하는 전 소련 인민의 위대한 전쟁입니다. 파쇼 압제자들과 대항하는 이 전 인민적 조국수호전쟁의 목적은 우리나라에 떠돌고 있는 위험만을 소멸할 것이 아니오 독일 파시즘의 압제에 신음하는 유럽의 전체 인민을 돕는 것입니다. 이 해방전쟁에 우리만이 외롭게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위대한 전쟁에서 우리는 구미(歐米, 美자를 안 쓰더군요)의 각국 인민들, 그리고 히틀러의 주구들에게 압제받는 독일인민들과 같은 성실한 동맹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전쟁은 구미 각국 인민들의 독립, 민주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는 히틀러 파쇼군대의 압박 또는 그 위협에 반대하는 영국 수상 처칠씨의 역사적인 연설과 우리나라를 원조할 결단에 대한 미국정부의 선언을 통해 십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동지들!

우리의 힘은 무한합니다. 오만한 적들은 곧 이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천명의 노동자, 콜호즈원, 인텔리겐차가 붉은군대와 함께 우리를 침공하는 적과의 전쟁에 궐기하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우리 인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근로대중은 붉은군대를 지원하려고 어느덧 수천명의 인민지원병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우리가 독일 파시즘을 상대하여 벌이는 조국수호전쟁에 있어서, 적군의 침략 위험에 시달리는 각 도시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지원병을 창설할 것이며 희생적으로 자유, 명예,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일반 근로대중을 일으킬 것입니다.

소련 인민의 일체 역량을 급히 동원하며 우리 조국을 배신하고 침공한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국방위원회를 설립하였는 바 지금 국내의 모든 정권은 전적으로 이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국방위원회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붉은육해군을 헌신적으로 도우며 적을 때려 부수고 승리하기 위하여 레닌-스탈린의 당 주위에, 소련 정부의 주위에 모이라고 전체 인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우리의 용감한 붉은군대, 우리의 용감한 해군을 돕는데 돌립시다!

인민의 일체 역량을 원수의 박멸에 돌립시다!

우리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앞으로!

2007년 9월 26일 수요일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 John Buckley


이 녀석은 필요 이상으로 비싼 Frank&Cass에서 나온 책 입니다.

이 책의 전반적인 인상은 “꽤 재미있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인걸” 입니다.

저자인 Buckley는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영국 육군 기갑부대의 전술적 실패와 전차의 열악한 성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기갑부대가 고전을 거듭한 원인을 단순히 전차의 성능적 열세와 전술단위의 역량 부족에만 돌리는 것으로는 노르망디 전역의 기갑전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의 영국 기갑부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육군 기갑부대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수행했으며 1944년 8월 이후로는 전술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이 뚜렷했다는 것 입니다. 또 전후 독일군의 회고나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영국군의 우수한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에 주목한 나머지 전차부대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는데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을 담당한 것은 전차와 보병이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는 티거와 판터를 제외한 다른 독일군의 기갑차량에 대해서 동등하거나 우세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한 4호전차와 돌격포의 경우 화력면에서 다소 우수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셔먼이나 크롬웰 보다 부족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여기에 대해 Buckley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점은 작전과 전술교리, 방어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노르망디의 지형,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입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영국군의 고급 지휘관들과 사단장 급 지휘관들의 역량 부족을 심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특히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상당히 좋은 지휘를 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꼽는 몽고메리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는 ‘당연히(?)’도 Goodwood 작전입니다. Buckley는 영국군 고급지휘관들은 전반적으로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전술과 교리도 영국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입은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영국군은 1944년까지도 제대로 된 보전협동 전술이나 교리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노르망디 같은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야 겨우 보전협동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격자에게 불리한 노르망디의 지형도 영국 기갑부대에 큰 손실을 강요한 요인 중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독일군의 기갑부대 역시 방어가 아닌 제한적인 반격 작전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 만큼이나 큰 손실을 입었다고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몇몇 작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전차개발자들이 아프리카 전선의 경험에 주목해 전차의 화력은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 1944년의 실패를 불러온 요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아프리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갑자기 독일군의 정예 기갑사단들과 대규모로 맞닥뜨리게 됐는데 정착 영국군 전차들의 화력은 대전차포를 상대할 경우를 상정한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노르망디의 지형에서는 방어력 보다는 화력이 중요했고 방어력이 비교적 우수한 처칠 전차 조차도 이 점에서 문제였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는 우수한 화력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 매복에 유리한 4호전차와 돌격포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쭉 읽고 나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는데 정리해 보면 다 한번씩은 들어 봤던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책의 앞부분에서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이 수행한 중요한 작전들에 대해 잘 정리해 놓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펌] 심형래 감독 신작영화 M-War

펌글입니다. 퍼온 곳은 여기...

심감독 이번엔 자연주의로 돌아왔다 - 심감독 새영화 매-워

전작에서 용으로 한국의 전설을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심감독이 이번엔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돌아왔다. 본보는 16년만에 최신개봉작 매-워 를 갖고 돌아온 심감독과 단독인터뷰를 가졌다.


기자: 오랜만이란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 1-2년도 아닌 16년만에 만났다 그간 영화제작외엔 한것이 없는가.

심: 영화제작외엔 이라고 표현하니 불쾌하다. 영화제작을 하면서 영화의 배우처럼 여러 역할을 했다. 제작비도 긁어모으고, 영화도 찍고, 편집하고 밤무대도 뛰는등 일이 많았다

기자: 이번 영화는 유달리 길게 걸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심: 전작을 만드는데 7-8년이 소요되어서 그정도 결과물이 나왔다. 그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려면 당연히 더 오래 걸리지 않겠는가

기자 : 그러면 다음영화는 대를 물려가면서 제작해야겠다(웃음) 이번영화의 소재가 특이한데 매미를 선택한 이유와 이 영 화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 달라

심: 한마디로 한국적 스토리로 미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이야기이다. 최근 트렌드인 환경주의와 한국적 스토리가 결합된 이야기를 찾다가 한국적 소재인 매미를 소재로 하면 이 둘을 다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용은 수년간 LA가로수아래에 있던 굼벵이가 매미로 변태하려는 순간 악한 굼벵이와 악한시청 방역과 직원들의 위험에 직면한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는 영화를 보라.

기자: 이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것은?

심: 언제나 세상엔 선 악이 존재한다. 내가 전작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선은 항상 이긴다는 것이었고 이번 영화에도 표현하려고 했다.

기자: 전작은 시나리오가 않좋다는 평이 많았다. 이번에는 어떠한가

심 : 그 비평은 나도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이번엔 시나리오 부분에 투자를 많이 했다.

기자: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심: 돈을 많이썼다. 전보다 시나리오 투자비율이 증가했다.

기자: 아주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라도 영입했는가?

심: 굳이 그럴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썼다.

기자: 전작에 비하여 CG는 어떠한가. 전작이 그나마 그정도라도 벌어들인건 CG라는 역할이 크다고 하는 평이 많지 않았는가?

심: 시나리오와 더불어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도심의 가로수에서 굼벵이가 싸우는 신을 표현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걸 순수 한국기술로 제작했다. 특히 굼벵이가 기어갈 때 잔디와 흙이 쓸리는 모습은 압권이라 자평한다.

기자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심: 한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겠다. 이번영화도 만드는데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굼벵이의 격투씬, 쏟아지는 비난들 점차 촬영에 회의가 들무렵 매 -워의 대목중 주인공이 “이건 한국의 곤충이야”라고 여주인공에게 이야기 해주는 장면을 촬영하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물이 매-워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선진국도 못하는 굼벵이의 격투씬을 순수 우리기술 CG로 만들어냈다. 부족해도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다시한번 확인해 달라.

기자 : 바쁜데 시간내줘서 감사하다. 영화의 성공을 바란다.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S대인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부작용도 있는 법.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던 저능아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입어 양지로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21세기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저능아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의 한 가운데 바로 도서출판 615라는 괴이한 출판사가 있습니다.(이 출판사는 홈페이지가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 제가 본 것은 아래의 세 종류입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 전영호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선군정치와 북한경제 – 전영호

핵과 한반도 – 최한욱

특히 전영호가 쓴 두 권의 책은 ZRYB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 적은 종이낭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에서는 북한의 과학기술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봉쇄만 풀리면 두자리 수의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라던가 북한의 교육 제도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데 남한의 그것은 입시위주의 저급한 교육이라던가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그냥 실려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또한 황당하기로는 감히 대적할 책이 마땅치 않은 쓰레기입니다. 대포동이 미사일이라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모략이며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이은 세계 4대 우주기술 강국(!!!!) 이라는 헛소리를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놓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런 책이 팔리긴 팔리는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은 교보에서는 무려 품절(!!!!) 이라는군요.
‘핵과 한반도’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해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이 당당히 굴러다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방적이고 열린 사회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쓰레기들 때문에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1970년대 남북한의 2차대전사 인식 - 아주 단적인 예 하나

꽤 많은 분들이 김일성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나 폐쇄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급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개인적으로는 개방성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오십 보 백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사소한 예 하나.

노르망디 작전

제2차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프랑스의 서북쪽 노르망디에서 진행한 미영제국주의 련합군의 상륙작전.

6월 6일부터 7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쏘련과의 국제협약에 의하여 1942년에 구라파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제2전선의 형성을 2년동안 태공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키며 쏘련의 약화를 기도하였다.

쏘련군대가 능히 단독으로 파쏘독일을 쳐부시고 구라파인민들을 파쑈독일의 기반으로부터 해방시킬수 있게 된 1944년에 이르러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전후 구라파에서의 제놈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작전을 조직하였다. 당시 파쑈독일은 쏘독전선에 기본력량을 투입한 관계로 프랑스 북부 연안지대방어에는 한 개 집단군만이 동원되였고 상륙지대에는 다만 3개 보병사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쏘독전선에서 쏘련군대의 결정적인 진출과 프랑스에서의 항쟁운동의 강화, 독일무력의 상대적인 약화는 미영제국주의군대로 하여금 이 작전을 비교적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구라파에서의 반파쑈전쟁행정에서 그 어떤 본질적인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력사사전, 1971년판, 상권 433쪽

왜곡으로 가득찬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력사사전 1971년 판에는 독소전쟁 관련 전투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만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반면 김일성의 빨치산 전쟁은 전투라고 할 수 없는 보천보전투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북조선과 비교하면 게임 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이 고작 이 정도의 저급한 역사 인식만 가지고 있던 반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는 비록 미국을 거쳐 들어온 것일 망정 소련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서적들이 합법적으로 유통이 되고 있었거든요.

1973년에 출간된 발렌타인 2차대전사 시리즈, 즉 승리와 패배의 6권 스탈린그라드와 11권 쿠르스크는 미국인 저자인 제프리 쥬크스가 썼지만 기본적인 서술은 소련의 공식 역사서술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쿠르스크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 공간사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지요.

박정희가 독재자인 것은 맞지만 김일성 정권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소한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생각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있었지만 북조선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게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모든 출판물을 통제하는 국가와 제약은 있을 망정 출판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1차대전 이후로 프로이센 하면 보수 반동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한때는 프로이센의 군대 조차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곳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전 략)

비록 그랜트 행정부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 자신과 유럽 각국의 미국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북독일연방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시민”으로 이뤄진 그 군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주미 프랑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북독일 연방은 내전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또 연방의 공채를 구매해 주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들어 전세가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기울자 주불 대사에게 “사실 나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이센의 군사제도는 너무 완벽하네”라고 털어놓았다.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반 언론들과 정치, 문화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독일은 『전제군주정이며 제국주의적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와는 달리 (비록 프로이센도 군주정이기는 했으나) 지방 분권적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지방 분권과는 다소 일치하지 않긴 하지만) 또 독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가이며 또 비스마르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독일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무기를 든 인민들이 전제왕정의 타락한 무리들을 쳐부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는 뒤에 국무장관 피쉬(Hamilton Fish)에게 “우리 나라가 유럽 대륙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국가 제도와 우리의 그것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독일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 독일 제국이 앞으로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강력한 공화적 연방국가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2월 상원 연설에서 미국과 독일 민족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일부 미국인들은 단순히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대한 혐오감에서 프로이센을 지지했지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비록 매우 깊지는 않더라도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독일을 “지적이며 근면한 인민들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독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국가이며 국민들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문학, 음악,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에 대해서도 개별 인물들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은 나라인 프로이센을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폰 스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남작은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고 또 뷜로우(Friedrich von Bülow)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을 도와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식이었다.

또 미국언론들은 북독일 연방과 개별 가맹국들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독일의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연방 정부를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또 현재의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연방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듯 독일 민족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는 이 매체가 종종 그랬듯 과장적인 어조로 “미국인들은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수상이 그동안 분열되었던 위대한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융커 지주층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머지 않아 독일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진보가 이뤄지면 자연히 정치적 자유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한 유력 일간지는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인민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에 대한 지지 여론의 배후에는 독일인들이 19세기에 미국에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민족집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1870년 당시 외국에서 이주해온 1세대 미국시민 중 30%가 독일계였다. 186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또 강력한 연방 지지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1870년에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많은 외국어 언론이었던 독일어 신문들은 앞다투어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고 독일 연방의 승리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을 찬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독일에서 군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이민 온 하인첸(Kark Heinzen)은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848년 혁명당시 바덴(Baden)의 혁명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헤커(Friedrich Hecker)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871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있었던 독일의 승전 축하 행사에서 주 연설자로 나선 그는 독일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찬양하고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개병제야 말로 독일 군대가 진정한 평등적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정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내의 사회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빈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주아브나 투르코)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사거리가 긴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우수한 훈련과 애국심,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지휘관들에 의해 압도되었다.(그리고 포병의 경우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전쟁이 벌어진지 겨우 한달도 채 안된 1870년 9월 1일의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 10만과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3일뒤 파리의 민중은 봉기를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후 략)

John Whiteclay Chambers II, 『American View of Conscription』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i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82~85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오늘 산 책 한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범한서적이라는 서적 수입회사에서 책을 저가에 처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뭘 팔고 있나 해서 가 보니 주로 해리포터같은 것들이 많이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튀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을 잠깐 뒤적이고 있으니 책 파는 아주머니(?)가 "5,000원에 드릴테니 사가세요" 라고 하시더군요.

헉. 5,000원? 아무리 페이퍼백이라지만 깨끗한 새책을 이정도 가격에 구할 기회가 또 오기는 쉽지 않을터.

그래서 얼씨구나~ 하고 샀습니다.

지도도 충실하고 내용도 재미있게 서술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리견 태조 폐하의 치적을 담고 있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일독할 생각입니다. 히히히.

2007년 9월 12일 수요일

로마군의 중장기병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번동아제님이 쓰신 고수전쟁 당시 수나라 기병 부대의 편성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로마의 경우는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로마군과 관련된 책을 몇 권 뒤져서 계산을 대략 한 번 해 봤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의 2차 문헌을 가지고 대략 추정한, 정확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글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그냥 재미삼아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로마군에 중기병이라는 병과가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는 제법 이른 시기입니다. 이르면 1세기 중엽(68년, 유대전쟁 당시)에서 늦어도 2세기 초 사이에는 로마군에도 중기병창(kontos)를 장비한 기병부대가 확인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로마군에는 지속적으로 중기병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숫자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종류도 제법 다양해졌던 모양입니다. 로마군을 연구하는 군사사가들은 문헌상에 남아있는 로마군의 기병 병과가 보병 보다 다양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3~4세기 경에 이르면 로마군의 중기병 부대는 scutarii, promoti, stablesiani, 그리고 clibanarii와 cataphracti 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장기병, 즉 말갑옷 까지 완벽하게 갖춘 기병은 clibanarii와 cataphracti 두 종류 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기병에서 중장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됐을까요? Hugh Elton의 Warfare in Roman Europe AD 350~425에서는 clibanarii와 cataphracti, 이 두 병과의 기병이 로마군의 전체 기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comtatenses에서는 대략 15%, 지방군에 해당되는 limitanei에서는 2%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pp.106~107)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의 총 병력 중 기병은 얼마나 됐는가가 되겠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로마군의 전체 기병 숫자에다가 위에서 언급한 Elton의 추정치를 곱해서 중장기병의 숫자를 산출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기병은 대충 어느 정도였을까요?

4~5세기경 동로마와 서로마의 중앙군 및 지방군의 병력 규모는 당연히 학자들 마다 추정치가 차이가 납니다. (로마사 전공자가 아니긴 하지만)Edward N Luttwak의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에는 후기 로마군의 규모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추정치를 정리해서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서로마군은 최저(J. Szilagyi의 추정) 226,000(중앙군 94,000/지방군 122,000) 최대(A. H. M. Jones의 추정) 311,000(중앙군 111,000/지방군 200,000)이고 동로마군은 최저(Varady의 추정) 262,000(중앙군 96,300/지방군 165,700) 최대(E. Nischer의 추정) 426,500(중앙군 94,500/지방군 332,000)입니다.

문제는 총 병력에서 기병이 어느 정도냐 인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Luttwak의 책에는 보병대 기병의 비중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서적에 실린 통계를 이용해 봤습니다.
Warren Tredagold의 Byzantium and Its Army 284~1081에는 Notitia Dignitatum에서 인용한 395년경의 동로마군 편제가 실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전체 병력 중 기병의 비중이 나와 있군요. 여기에 따르면 중앙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7%(104,000명 중 21,500명)이고 지방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부군이 49.9%(병력 195,500명 중 97,500명), 서일리리쿰군이 44.4%(병력 63,000명 중 28,000명)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기다가 위에서 언급한 중장기병의 비중을 넣어서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중앙군 : 21,500 ⅹ 0.15 = 3225
지방군 동부군 : 97,500 ⅹ 0.02 = 1950
지방군 서일리리쿰군 : 28,000 ⅹ 0.02 = 560

395년경 동로마군의 중장기병은 대략 5,735명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위에서 언급한 Luttwak의 저서에 실린 수치를 가지고 Notitia Dignitatum의 기병 비율과 Elton이 추정한 기병 중 중장기병의 비중을 가지고 계산하면 대략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동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426,500 기준 : 중앙군 2,977 지방군 3,320
총 병력 262,000 기준 : 중앙군 3,033 지방군 1,657

서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311,000 기준 : 중앙군 3,497 지방군 2,000
총 병력 226,000 기준 : 중앙군 2,961 지방군 1,220

신뢰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심심풀이 수준의 계산이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이현상 평전 - 안재성

얼마전에 이준님의 블로그에서 이현상 평전과 관련된 글을 읽고 시간이 나는대로 이 책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종각역의 반디 앤 루니스에 들렀는데 인문서적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확 띄더군요.

책 디자인도 예쁘게 잘 되어 있고 저자도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경성 트로이카의 안재성씨 인지라 어떤 내용인가 보자 하고 집어서 쭉 훑어 봤는데…

아아. 대 실망입니다.

대한민국의 평전 문화가 너무 수준이 낮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열심히 쓰신 저자 분께 죄송하지만 이 책의 수준은 그저 분량만 많은 아동용 위인전에 불과했습니다.

경성 트로이카나 이관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안재성씨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평전을 쓸 때는 그 애정을 자제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이현상 평전은 그 도가 지나쳤습니다. 내용 중 상당수가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아니냐 싶을 정도로 유치한 표현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하도 한심한 문장이 많아서 여기다가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책 부록으로 딸려 있는 이현상 약력을 보니 1950년 여름에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미군 수백명을 사살(!)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별다른 교차 검증 없이 실어 놓았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기에는 책의 수준이 낮았습니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연예인 팬클럽의 오빠 찬양글과 거의 다를바가 없더군요.

책을 읽다 보니 저자는 빨치산 활동에 대해 약간의 낭만 같은 것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앞으로 책을 쓸 때는 그런 망상은 버리고 썼으면 싶습니다. 하긴, 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이 없었다면 이현상 같은 인물의 평전을 쓰기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 특성상 이현상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평전이 많을 수는 없으니 이 책은 최소한 그 희소성으로는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전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별히 한국전쟁이나 이현상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면 비추입니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Löwen von Carentan - Volker Griesser


제 나쁜 습성 중 하나는 표지 디자인이 촌스러우면 책 내용도 신통치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표지 디자인이 신통치 않은 책은 더 신경써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오는 책이라면 이것이 가능하지만 외국 서적이라면 어렵습니다. 특히 아마존 같은 곳에서 미리 보기를 지원하는 책이 아닌, 작은 출판사의 책이라면 외국 포럼의 서평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런 것 조차도 없을 때는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쪼들릴 때에는…

이번에 도착한 책 중 하나인 Löwen von Carentan도 뭔가 촌스러운(또는 오덕스러운?) 표지 때문에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큰 마음을 먹고 지른 물건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번 훑어 보니 표지의 촌스러움을 훌륭한 내용으로 완벽히 커버하고 있어 안심이 됩니다.

이 책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쓰던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의 수정판을 쓰려고 산 책입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Willi Kammann의 제 2강하엽병사단사인 Der Weg der 2. Fallschirmjagerdivision과 Hans-Martin Stimpel의,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제 2권을 기반을 썼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Stimpel의 책에는 제 6강하엽병연대의 작전이 카랑탕 전투까지는 잘 서술된 편이지만 이후 제 2SS 기갑사단에 배속되어 벌인 7월~8월의 방어전은 부실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쓰기도 곤란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조금 더 보강해서 다시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6강하엽병연대 부대사가 나오다니 매우 즐겁습니다. 추가로 이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하이테의 회고록을 입수하는 대로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를 다시 쓸 생각입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

그러나 과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들이었을까? 또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을까? 또는 리델 하트에게 한 말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었을까?

(리델 하트와의 대화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은 독일 장군들이 리델 하트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했는지 보여준다. 그리즈데일(Grizedale)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장교 중 한 명인 헨리 펄크(Henry Faulk) 중령의 회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5년 12월 28일에 리델 하트가 독일 장군들에게 면담을 신청했을 때 펄크 중령은 그들에게 리델 하트가 찾아 왔으니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독일 장군들은 모여서 리델 하트와 이야기 할 때 어느 정도 선 까지 정보를 알려 줄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어가 유창했던 펄크 중령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리델 하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리델 하트는 펄크 중령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펄크 중령은 아마도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은 엘리트적이고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집단이므로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정말 리델 하트가 펄크 중령의 말대로 독일 장군들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면? 전범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1945/46년 겨울에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인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델하트 자신도 영국측의 전범 기소 책임자인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를 만난 1945년 9월 무렵부터 전범재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리델하트는 자신이 전쟁성과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독일 장군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laric Searle, "A Very Special Relationship :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1953", War in History Vol 5 Issue 3,(1998), pp.332~333

이 이야기는 리델 하트가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을 면담하면서 The Other side of the Hill의 저술을 준비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The Other side of the Hill은 2차대전 초기 아주 큰 삽질로 거의 매장(???) 당할 뻔 한 리델 하트가 다시금 명성을 되찾도록 해 준 저작이고 또 냉전시기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한 저작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Alaric Searle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군사이론가와 군사사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펄크 중령의 증언은 리델 하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리델 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를 이용해 독일 장교단은 나치나 히틀러의 범죄와는 무관한 애국적인 집단이었다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퍼트릴 수 있었습니다. 리델 하트는 지속적으로 독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만토이펠은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무장친위대 장군 비트리히를 구하기 위해서 리델 하트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지요.

사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어떤 승려와 목사의 말싸움 중에서

좀 오래전에 어떤 목사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종교 토론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토론에 나온 승려 한명이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실론의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여호와의 전지전능을 자랑하는 영국 목사 데이비드 데 실바를 조롱하면서

석오진 편역, 『파아나두라 대논쟁 :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운주사, 2001), 202쪽

과연, 전지전능한 것이 다 좋은건 아닌가 봅니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 히틀러에게 보낸 비망록

알베르트 슈페어, 베를린 W 8, 1945년 3월 18일

경제의 붕괴가 기정 사실화 된데다 국토가 적에게 함락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합니다.
라인강과 오데르강 양 쪽이 돌파된 상황에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무장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면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장비와 연료가 부족한 아군은 속수무책이 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8주간의 전투에는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있는 모든 병력 자원을 투입하는데 전권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만약 병력 동원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많은 수의 아군 병력이 여전히 편성 지역에서 훈련중인 상태에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해 공세로 나올 경우에는 1940년에 프랑스군이 아군에게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재앙이 벌어질 것 입니다.
또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원 가능한 각 지역의 국민돌격대도 모두 투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국의 모든 병력을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는데 투입해야 합니다.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관할구역에 있는 모든 군 병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져야 하며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전선에 배치된 대공포 부대들은 반드시 단일한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휘 범위가 너무 넓어져 신속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기반은 현 상황에서는 교통망의 문제로 전혀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부대들을 차출해 독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야 라인강과 오데르강의 상황을 어느정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 입니다.
한 걸음의 후퇴만으로도 패배는 가속화 될 것 입니다. 몇주만이라도 현재의 전선을 사수하는데 총력을 다 한다면 적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슈페어

Heinrich Schwendemann, ‘Drastic Measures to Defend the Reich at the Oder and the Rhine…’ A Forgotten Memorandum of Albert Speer of 18 March 1945,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8, 2003, pp.605~606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에 히틀러에게 보낸 이 글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말기에 히틀러의 초토화 명령에 반대했다는 점을 강조해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슈페어는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가 패배에 직면해 독일 전체를 초토화시키려 했지만 자신은 전후 독일의 재건을 위해 히틀러에게 반대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문건들을 놓고 보면 1945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슈페어 자신도 연합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 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글에서 나타나듯 슈페어 자신도 총통 만큼이나 유리한 조건에서의 종전 가능성을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연합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올 무렵에는 슈페어의 생각도 상당히 바뀐것 같긴 합니다만.

각 지역의 군지휘관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던가 아직 훈련도 마치지 못 한 병력이나 국민돌격대까지도 모두 전선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완전한 패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슈페어의 정신적 공황이 느껴집니다.

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이탈리아 공군의 지브롤터 폭격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주 전장은 “당연히” 지중해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치열한 공중전이 펼쳐진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몰타” 입니다. 몰타는 1943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와 독일공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지요. 그런데 몰타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중해의 영국해군 거점 중 하나인 “지브롤터”였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지브롤터에 대해 15회의 폭격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차례도 아니고 무려 15회에 걸쳐 꾸준한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같은 중요한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래의 내용을 보시죠.

지브롤터에 대한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1940~1943년)

1940년 7월 17/18일 : SM.82 3대 출격 : 민간인 3명 포함 4명 사망
1940년 7월 25/26일 : SM.82 3대 출격 : SM.82 1대 파손(대공포)
1940년 8월 20/21일 : SM.82 2대 출격 : SM.82 1대 격추(대공포)
1941년 6월 6일 : SM.82 2대 출격 : 1대는 이륙 후 다시 귀환, 1대는 지브롤터를 찾지 못하고 돌아옴
1941년 6월 13일 : SM.82 1대 출격 : 스페인의 La Linea 폭격, 스페인 민간인 4명 사망
1941년 7월 11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3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4일 : SM.82 1대 출격
1942년 4월 1일 : SM.82 3대 출격
1942년 6월 28/29일 : P.108B 5대 출격 : 4대가 지브롤터 도착, 3대는 연료 부족으로 스페인에 불시착
1942년 7월 3일 : P.108B 1대 출격 : 중간에 추락
1942년 9월 24일 : P.108B 2대 출격 : 아무 전과 없음
1942년 10월 20일 : P.108B 4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2년 10월 21일 : P.108B 3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3년 6월 19일 : SM.79 9대 출격 : SM.79 5대 엔진고장으로 귀환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r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s.31

최대 출격 기수는 9대이고 전과는 민간인 7명(이 중 4명은 중립국 민간인)을 포함해 8명 사망에 불과합니다. 손실은 완전손실 2기, 대파 3기로 전과에 비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관심을 가져달라 하기가 난감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후대에 알려지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2007년 8월 29일 수요일

나는 통일 정치쇼의 들러리였다 - 권오홍

가끔가다가 한심한 제목을 달았지만 내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통일정치쇼의 들러리였다」역시 제목은 매우 한심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인 책입니다. 출판사도 동아일보사이기 때문에 보수 언론을 혐오하시는 분들은 편견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목과 출판사만 보고 읽지 않기에는 아까운 책 입니다.

(약력만 가지고 판단하면) 책의 저자인 권오홍씨는 대북사업에 초창기부터 관여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장 전문가의 눈으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자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특히 지난 2006년의 핵위기부터 이해찬 총리의 방북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있었던 북한과의 협상과정을 회고하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양측(주로 한국정부)의 과오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책 초반에 나오는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물러난 사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자는 북한측의 평가를 빌어 이종석 장관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이종석이란 한 인물을 두고 나온 평가는 여러 갈래다. 결론은 “그는 학자(아마추어)다”라는 말이다. 그쪽 식으로 볼 때는 “꾼”이 아닌 사람이 처리하기에는 남북한 양자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능을 보였다. 그러나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39쪽)

이종석 전통일부장관이 현실감각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그 동안 간간히 나오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품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니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안희정으로 대표되는 대통령 심복들의 능력 부족과 무지함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 정부의 실세들이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의욕 과잉으로 일만 벌이는 통에 대북정책이 엉망으로 표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화영의원(현 민주신당)에 대한 비난은 굉장히 신랄합니다.

결국 안희정이나 이화영, 이호철을 통해서 본 그들의 세계관, 시대관, 한반도관, 나아가 처세하는 방식은 과거의 정치인보다 더 몹쓸 여지가 많다는 게 개인적 결론이다.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난 몇 년 동안 국가 정책의 저변에 흐른 게 아니었나 싶어 마음 한 편이 씁슬하다.(279쪽)

이 책에서는 정치 흥행을 목표로 한 기존의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냉철하게 계산된 경제중심의 협력만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회고록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매우 많아 충분히 읽을 만 한 책 입니다. 물론 노빠 같은 부류들은 동아일보사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을 불신할게 뻔하긴 합니다만.

저자는 앞으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상당히 기대가 되는 책 입니다.

2007년 8월 28일 화요일

최지룡 만화 실사 버전 주인공

오마이뉴스에 들어가니 아주 재미있는 기사와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놀라게 한 '주한미군 철수' 기습시위


이 친구를 보니 최지룡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가 생각납니다.

바로 이 친구...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건 이 어린양 혼자만이었을까요?

오마이뉴스 기사에 달린 동영상을 보니 참 쌀이 아까운 찌질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런 정박아들이야 말로 명랑사회의 적입니다.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2007년 8월 25일 토요일

드라마 한편이 여러 사람 바보 만드는군요


다물군이랍니다... 이 양반 MBC 주몽을 너무 많이 보신 모양이네요. 뭐, 정치하는 분들이 종종 드라마와 역사를 구분 못하신다는 것은 용의 눈물 시절 부터 알고 있었지만 판타지 아동극 주몽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2007년 8월 19일 일요일

중국 항공박물관

중국 항공박물관은 꽤 전시물이 많은 편이지만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먼저 버스로 베이징 외곽의 샤허까지 나간 뒤에 샤허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샤허까지 나가려면 보통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택시를 잡아타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 수백미터를 더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이 썰렁한 건물이 매표소입니다. 원래 입장료는 50원인데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2원에 들여보내주더군요.

야외 전시물의 상당수가 중국제 Mig-19였습니다. 다양한 파생형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Mig-19가 너무 많아 박물관이 아니라 퇴역장비 폐기장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Mig-19 떼샷!



실내 전시관은 과거에 격납고(?)로 쓰이던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좋은 전시물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사진이 제대로 안 찍혀서 쓸만한 사진을 별로 못 건졌습니다.


역시 박물관에는 모형이 있어야 합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Bf-109와 P-38 같은 2차대전 항공기 모형이 있더군요.


그리고 라이벌인 F-86과 Mig-15입니다. F-86은 당연히 노획한 것일리는 없고 파키스탄 공군이 기증한 기체입니다.




국민당 공군이 사용한 I-16과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P-40은 실물크기 목업이더군요.




격추당한 대만공군 U-2의 잔해입니다.



다시 야외 전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동지의 전용기를 구경하는 광영(???)을 누렸습니다.

마오주석 전용기입니다. 마오주석 전용기는 한 대가 더 있더군요.

주은래 동지 전용기입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 상당수는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대부분 이 85mm 대공포와 비슷하게 녹이 잔뜩 슬어 있더군요.


레이더 같은 대형 장비도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도 굉장히 방대했습니다.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사진도 조금 밖에 찍지 못 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가면 그때는 사진을 많이 찍을 생각입니다.

2007년 8월 16일 목요일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위대한 USA! 400대의 트럭으로 모스크바를 구하다!

3일전에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어이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물론 미국이 1941년에 소련으로 보낸 원조 물자 중에는 트럭이 있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랑 400대라는 점이지요. 고작 400대의 트럭으로 서부전선군 예하 사단들의 기동력을 높일 수 있다니 미국 자동차들은 무안단물이라도 발랐나 봅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부품상태로 도착해서 소련에서 조립을 했기 때문에 부대에 지급된 것은 1942년 1월이 넘어서 였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리는군요.


거참. 남의 블로그에 맞춤법도 틀린 헛소리나 늘어놓는 주제에 예의를 찾다니 어이가 화성탐사 나갈 지경입니다.

게다가 논리도 엉망이지요. 결국 증원군을 극동에서 러시아 서부까지 이동시킨게 철도라고 시인을 했는데 그렇다면 자동차는 별 도움이 안됐다는 결론아닙니까.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도 무지한 주제에 맞춤법도 틀리고 논리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남의 블로그에다 예의를 논하니 뭐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낮짝도 두껍습니다.

2007년 8월 14일 화요일

NATO의 군사력에 대한 소련의 추정

아래의 글은 소련이 분석한 NATO 회원국의 군사력 현황 중 일부로 1984년 12월 3일에서 4일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방장관 회의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전략]

최근 수년간 NATO 회원국들은 이미 자국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위협적인 수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증강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르샤바 조약국들에 대한 전략 핵공격 위협을 높이고 있다. NATO 회원국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1993년을 목표로 한 장기 군사력 강화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17억달러에 달했다. NATO 조약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크게 증가했으며 미국 국방비의 50% 수준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출은 80% 증가했으며 서독은 40%,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2.5배 증가했고 터키는 9배나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NATO의 유럽지역 핵전력은 더욱 발전했다. 유럽전역의 병력도 크게 증강됐다. NATO군은 새롭고 현대화된 무기체계로 개편 중이며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고 있다. 조직구조와 지휘통제 체계, 그리고 군사기술 지원체계도 개선되고 있다. 동원 기반도 확충되고 있으며 참모조직과 군부대의 작전 훈련은 횟수도 늘어나고 더욱 심화되었다.

[중략]

1. (서부전역)의 NATO측 핵전력을 살펴보면 핵미사일 운용가능 한 차량이 25% 이상 증가했으며 약 3,600대에 달한다. 이것으로 총 4,200발의 핵탄두를 운용할 수 있다.
2. 새로 증강된 병력은 6개 사단(프랑스 3개 사단,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각 1개 사단)이며 여기에 따로 에스파냐군도 5개 사단이 증강됐다. 이들 국가의 사단별 전투력은 거의 1.5배 늘어났으며 신형 전차와 야포, 미사일, 대전차화기, 신형 지휘통제 체계의 도입으로 질, 양적으로 확충됐다.
[중략]
3. 전투기의 숫자는 1.8배 증가했으며 이중 거의 25%가 신형 전투기이다. 전투기 중 2/3 이상이 다목적 전투기이며 이중 절반은 핵병기 운용이 가능하다. 공군의 전투력은 60% 이상 증가했다.
4. 대서양 동부와 지중해 지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의 전력은 신형 수상전투함과 잠수함, 현대화 개장을 받은 전함의 배치, 그리고 핵 및 재래식 대함미사일의 배치로 강화되었다. NATO 가맹국의 해군 중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신형 함대공 미사일과 항공모함의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5. 유럽 전역의 전자전 부문, 특히 공군과 지상군은 신호 및 무선 정보 능력을 확충함과 동시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전망을 모든 주파수에 걸쳐 교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6. 유럽 전역의 방공 체계 중 호크(Hawk) 방공시스템은 개량에 들어갔다. 요격기 중 1/3이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방공 능력은 2~2.5배 이상 강화되었으며 동시에 1,000대의 항공기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7.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기초로 할 때 서부 전역의 NATO군은 총 46개 사단, 51개 독립 부대, 핵탄두 3,600발, 전차 11,000대, 야포 및 박격포, 방사포 9,800문, 대전차 무기 11,500개, 공군의 고정익항공기 2,870대, 육군항공대의 헬리콥터 및 고정익항공기 3,000대, 일선 전투함 480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략 60%의 전력이 서유럽 전역에 집중되어 있다.
동원에 들어갈 경우 지상군의 전투력은 보병 사단들의 증강에 의해 두 배 이상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서독, 영국, 프랑스 지상군의 전력은 30% 이상 증강될 것이다. 서유럽 전역의 NATO군은 높은 수준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상비 사단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으며 최대 48시간 이내에 전투 태세를 완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군 또한 지상군과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공군은 12시간 이내에 완벽히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Simple Alert”에서 “Reinforced Alert”단계로 전환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6일에서 4일로 단축되었다.
서유럽 전역에는 30일분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며 미군의 경우 60일분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 그러나 NATO 공군은 탄약의 경우 90일치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8. 서부 전역의 NATO 군은 작전 및 전술 훈련을 강화, 심화 함으로서 매우 높은 수준의 대비 태세를 확보했다.

[중략]

서부 전역 NATO군의 전투력

서부 전역의 NATO군은 1990년까지 전투 대비 태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질적인 향상을 이룩하려 하고 있다.
1990년까지 서부 전역에서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NATO의 전체적인 핵 전력은 40%(6,000발의 핵탄두)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핵미사일 발사 차량을 14%(3,660대에서 4,150대) 이상 증강할 계획이 세워져 있다.
서부 전역의 전략적 상황은 매우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NATO의 핵 전력은 서부 전역은 물론 소련의 상당 지역에 걸쳐서 강력히 방어되는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서부 전역의 NATO 지상군의 전투력은 새롭고 고성능인 장비를 받아 증가하고 있다.
기갑 장비의 45%가 M 1 및 레오파르트 2, 챌린저, AMX 30B로 구성될 것이며 신형 보병 수송장갑차와 정찰용 항공기가 배치될 계획이다.
포병의 사거리는 30km에서 40km 대로 늘어날 것이며 사거리 연장탄과 유도 포탄, 다탄두식 포탄과 신형 미사일의 도입에 의해 발사 속도는 1.5~2배, 화력의 효율성은 3~5배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상군 군단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Assault Breaker” 정찰-통제 체계를 도입해 최대 200km 거리에서 기갑 장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미육군의 제 5군단과 제 7군단의 예하 사단들은 1986년형 사단으로 편제개편을 마쳤으며 우리측의 추정에 따르면 기계화보병사단의 전투력은 70%, 기갑사단의 전투력은 40% 이상 증강되었다.
1990년에 이르면 서부전역의 NATO 지상군 전투력은 1984년과 비교해 50% 이상 증강될 것이다.
1990년까지 서부전역의 NATO 공군의 45%가 F-16, F-15, A-10, 토네이도, 미라지 2000및 기타 신형 항공기로 구성될 것이며 이들 신형 항공기는 그 이전 세대의 항공기에 비해 전투력, 특히 무장 탑재 능력이 2~3배 이상 늘어났다. 공군의 전투력은 거의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다.

[후략]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500~502

러시아어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중역했는지라 문장이 좀 기묘합니다만 전체적인 논조는 NATO의 군사력 증강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것 입니다. 특히 신형장비의 도입에 따른 기술력 격차를 우려하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2007년 8월 13일 월요일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

이번에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왜 질렀느냐면 가격이 한국과 비교해 너무나 싸더군요. 처음에는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싸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타미야의 3호전차 75mm 탑재형은 대충 14,000원 정도입니다. 국내에서는 20,000원이 넘지요.


KV중전차는 대충 13,500원 정도입니다. 이것도 국내에서는 19,000원을 넘습니다.

중국의 모형점을 처음 갔을 때는 수입 모형 가격이 한국 보다도 훨씬 싸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순간 지름 충동이 일었더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중국에서 사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지막날 남은 돈으로 질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좋아하는 하비보스의 물건들은 제가 가본 베이징의 모형점들에서는 취급하지 않더군요.

중국이 한국보다 일제 모형이 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환율문제인지 아니면 한국이 쓸데없이 바가지가 심한건지...

2007년 8월 12일 일요일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

참으로 오래된 퀴퀴하고 눅눅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낡은 떡밥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