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발상의 전환? : 모스크바 전투당시 소련군의 영국제 전차 운용

미국과 영국의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승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렌드-리스로 원조된 물품 중에서 전차와 항공기 같은 전투장비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중 소련이 생산한 전차의 대수와 렌드-리스로 제공된 전차의 대수를 비교해 본다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입니다. 소련이 생산한 기갑차량을 모두 합치면 11만대에 달하는데 영국이 원조한 전차는 4,542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게 그렇게 당연하다면 세상은 정말 심심하겠지요.

캘거리 대학 교수인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관점을 살짝 바꿔 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 전 기간 동안 원조된 전차의 대수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의 전차가 원조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기준을 그렇게 바꿔본다면 의외의 결론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힐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호 2권(2006)에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for Moscow, November-December 1941—A Research Note라는 제목의 짤막한 논문을 기고 했고 이어서 22호 4권(2009)에 이것을 수정 보완한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of Moscow, November-December 1941 — Revisit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힐이 이 두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영국이 원조한 영국제 전차는 소련군 기갑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주요 공업지대에서는 생산설비의 소개를 시작했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군수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위해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각종 군사장비를 원조했고 여기에는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750대의 전차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이 중 466대가 12월까지 소련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 원조된 영국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발렌타인으로 총 259대가 보내졌고 마틸다(A12)는 187대, 그리고 나머지는 테트라크(Tetrarch, A17) 경전차 였습니다. 이중 소련군 부대에서 인수한 것은 발렌타인이 216대, 마틸다가 145대 였습니다. 영국제 전차가 처음 소련군에 인도된 것은 10월 28일로 이날 20대 가량의 발렌타인이 카잔 전차학교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영국제 전차를 인도받은 부대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목전으로 쇄도하고 있던 11월 20일에 영국제 전차를 장비한 소련군 부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대
마틸다
발렌타인
146전차여단 137전차대대
21
146전차여단 139전차대대
21
131독립전차대대
21
132독립전차대대
2
19
136독립전차대대
3
9
138독립전차대대
15
6

이 중 132독립전차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총 96대가 투입된 셈인데 이것을 당시 소련군이 모스크바 축선에 투입하고 있던 기갑전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은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해 11월 말에 모스크바 방면에 배치된 소련군의 기갑전력은 영국제 전차를 포함하여 670대, 그리고 이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중형 이상의 전차는 205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방면 소련군의 중형전차가 205대로 집계되었던 것이 정확하게 11월 20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결정적이었던 시점에서 영국제 전차는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영국제 전차들은 신통치 않은 성능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렌타인이나 마틸다는 최고 35~40cm의 눈이 덮인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었는데 이건 고작 T-60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T-34는 70cm 정도의 눈이 덮힌 야지에서도 거뜬히 움직였으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죠. 게다가 2파운드 포는 전차포로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고약한 물건이었고;;;; 하지만 당시 소련측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소련은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T-30이나 T-40 같은 경전차도 12월까지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국제 전차들이 T-34나 KV 계열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소련이 생산하고 있던 경전차들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제 전차를 받은 부대는 15일 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선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성능 고약한 영국 전차에 훈련 부족한 전차병들이 탔으니 뒷 이야기는 대략 상상이 가능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의 전차 운용 방식은 영국제 전차들의 운용방식과도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기갑부대는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때문에 대규모 전차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거나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 당시에는 전차여단이나 독립전차대대 단위로 분산 운용되면서 보병부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와 발렌타인은 바로 '보병전차'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영국이 제공한 전차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중요한 '머릿수'를 채우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동부전선에서 운용하기에는 성능도 부족하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은데다 승무원들의 훈련 수준도 낮았지만 있어줘야 할 시점과 장소에 존재했다는 것 입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책 몇 권

지난주에 주문한 책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유로화가 비싸서 독일 책은 많이 사지 못하는 터라 책 상자를 받아 드니 즐겁더군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라면 포장이 부실했다는 겁니다.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을 때 완충제 대신 종이를 구겨넣은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집어 넣은 게 아니라서 상자 아랫 부분은 모두 젖어 있었습니다. 책들은 비닐로 밀봉포장 해 놓아 전혀 상하지 않았지만 영수증이 젖어서 너덜너덜해 졌더군요.


그런데 영수증이 걸레가된 와중에도 포도주 광고가 실린 전단지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신기하여라...


 이번에 받은 책 중 군사사와 관계된 것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의 두 녀석 중 오른쪽에 있는 Österreich-Ungarns Kraftfahrformationen im Weltkrieg 1914-1918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차량부대의 편성과 장비, 운용을 다루고 있는데 방대한 1차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책의 뒷부분에서 장갑차 부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히 오스트리아군의 장갑차 부대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이었던 이탈리아군과 동맹군이었던 독일군의 장갑차 운용에 대해서도 비교해서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산업화 시대의 전쟁, 특히 1차대전 시기의 기계화이다 보니 아주 좋은 물건을 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 있는 Österreicher in der Deutschen Wehrmacht: Soldatenalltag im Zweiten Weltkrieg는 2차대전 중 독일군에 복무한 오스트리아 인들의 군사 경험에 대한 내용인데 예상했던 것 보다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군들의 군사경험, 전쟁범죄, 나치 체제에 대한 순응 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서술하고 있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그런지 서술의 밀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통독을 해 보면 평가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Pflicht zum Untergang: Die deutsche Kriegs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은 Schönigh 출판사가 내고 있는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네번째 책 입니다.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수행을 분석하고 있는데 특히 전쟁 말기 부대편성과 병력수급, 장비문제를 다룬 3장 1절과 전쟁 말기 서부전선의 경험이 전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부분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Der Schlieffenplan: Analysen und Dokumente은 역시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란 글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서구 군사학계의 논쟁에 대해쓴 일이 있지요.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 다소 산만한 글이 되었는지라 독일쪽 견해도 참고해서 다시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이책을 그 이유에서 사게 됐습니다. 이책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문과 슐리펜 계획에 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테렌스 주버의 슐리펜 계획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은 주버의 논문과 주버를 반박하는 논문을 합쳐 네편이 실려있고 나머지 논문들은 슐리펜 계획에 관련된 다른 주제의 논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꽤 근사한 부록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언급된 작전안의 지도입니다.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을 쓰려면 자주 봐야 할 테니 같은 크기로 복사를 할 생각입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서부전선으로의 차출에 반대한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들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면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들은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명령을 자신들의 부대에 대한 처벌행위로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바깥에 "플랑드르에서 도축할 소떼"나 "동부에서 온 죄수들" 같은 낙서를 했다. 약삭빠른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미 1917년 중반 부터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병력의 10% 가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소규모 수송부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것, 수상한 병사들을 체포하는 것, 병사들을 무장해제해서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기차안에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열차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는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렸다. 1918년, 드빈스크에서는 5천명의 병사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거부해 처벌 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하리코프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2천명의 병사가 폭동을 일으켰다. 예비병력을 필요로 하던 최고사령부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병사들이 한참 뒤에 신뢰하기 어려운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볼셰비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 까지는 이들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제 동부전선에는 나이 많은 예비역이나 향토방위대,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알자스 출신이나 폴란드계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13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2010년 3월 7일 일요일

土産品

어떤 결혼식 때문에 대구에 다녀왔는데 대구까지 간 김에 그냥 오긴 그래서 토산품을 조금 사왔습니다.


대구지역에서 발행되는 어제 일자 일간지들입니다. 가판대에서 지역언론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게 꽤 마음에 들더군요. 물론 논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마침 제가 산 신문들은 모두 가카의 대구 R&D특구지정을 대서특필하고 있군요.

요즘은 지역색이라는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지역색이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랄까. 정론지를 자칭하는 소위 중앙일간지들만 지역 신문가판대까지 점령하고 있다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소위 중앙일간지들은 서울이라는 중심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언론의 논조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할수 있는 언론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어떤 학자의 연구노트

어떤 책의 서문에 있는 구절입니다. 아마 여기에 공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꽤 많을 듯 싶군요.

나는 얼마전에 내가 아직 학부생이던 15년 전에 작성한 아직 끝내지 못한 연구 과제들의 목록을 찾아냈다. 목록의 열 번째 줄에는 "성과 전쟁"이라는 주제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렇지만 내 경력을 말아먹을 수 있다. 테뉴어를 받을 때 까진 기다리자"라고 적혀있었다.

Recently, I discovered a list of unfinished research projects, which I had made fifteen years ago at the end of graduate school. About ten lines down is "gender and war", with the notation "most interesting of all; will ruin career -wait until tenure."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xiii

저도 이 구절을 읽고 살짝 웃었답니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1/48이 아닌게 아쉽군

조만간 발매된다는 타미야 신제품 중 꽤 근사한게 있더군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35...




물론 저는 얼빵하게 생긴 75mm 탑재형 셔먼을 선호합니다만 76mm 탑재형들도 나름 좋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개량한 셔먼만 빼면 셔먼은 거의 다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을 1/48로 뽑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장의 미식가들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인류학과 관련된 글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관찰자들이 자신들이 보기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특이한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쓰는 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류학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학문인 만큼 관찰자인 '우리'와는 다른 뭔가 특이한 것을 잡아내는게 특출나죠. 그리고 후진적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창기의 인류학자들은 그런 경향이 아주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올리는 불법 날림 번역글도 특이한 대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데 이 글에서는 피지, 그리고 볼리비아의 카우카 계곡(Valle del Cauca)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특이한 식성을 가진 전쟁터의 미식가들에 관한 이야기 이지요.

이 절에서 살펴보게 될 피지와 카쿠아 계곡 지역에서 일어나는 관행은 아마 전쟁 중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일 것이다. 바로 식인 풍습이다.

식인행위는 전쟁에서 부터 다른 생활 양상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윌리엄스(Thomas Williams)는 피지인들을 관찰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식인 풍습은 피지인들의 관습 중 하나이다. 식인 풍습은 사회의 여러 요소들과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다. 식인은 피지인들이 추구하는 일 중 하나이며 그들 대부분은 식인 풍습이 고상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의 식인 풍습은 이미 유럽인들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오래된 관습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이 지역에서 식인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가 없다. 그렇지만 잡아먹는 대상이 주로 증오하는 적이라는 점을 보면 식인 풍습이 처음에는 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이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피지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주된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시체를 먹음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적을 잡아 먹는 것 행동 보다 더 증오와 경멸감을 보여줄 수 있는 행동도 없을 것이다. 이제 두 사회에서 일어나는 식인 풍습의 양상을 살펴보자.

카우카 계곡 지대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갈 때 포로들을 묶기 위해 특별히 밧줄을 준비해 간다. 물론 사로잡혀 꽁꽁 묶인 포로들이 목숨이 붙은 채로 그들을 잡은 자들의 마을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사들은 포로를 묶을 밧줄과 함께 목을 벨 돌칼을 함께 가지고 나가며 종종 전장에서 곧바로 적을 요리해 먹었다.
반면 피지인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포로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잡아먹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전사들은 바콜로(bakolo - 잡아먹을 사람)가 있을 경우 마을에 들어서기 전 북을 쳐서 포로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북소리를 듣는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주로 여자들)은 북 소리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즐거움에 겨워 광란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숙이고 정신을 잃을 때 까지 곤봉으로 얻어 맞은 뒤 목이 잘렸다. 그 다음에는 요리를 위해 잘게 토막이 났다. 피지에서 포로를 도살할 때는 칼질에 숙달된 남자가 희생자를 '관절 별로 여러 토막을 냈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종종 더 끔찍한 방법도 사용됐는데 희생자가 살아있는 상태로 토막을 내고 희생자가 보는 상태에서 갈비살을 베어 먹었다. 이것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은 희생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그의 몸 일부, 특히 갈비뼈를 잘라내서 희생자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 먹어치우거나 때로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두 지역 모두 희생자의 피를 받아 마셨다. 카우카 계곡 지방의 어떤 군장국가에서는 시체의 지방을 녹여 광산용 램프를 켤 때 쓰는 연료로 만들었다고 한다.

피지인들은 바콜로를 요리하기 위해 주로 특수한 화덕을 만들었으나 동시에 삶아 먹는 경우도 많았다.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시체를 굽거나 삶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 고기를 날 것으로 먹기도 했다. 피지인들은 사람 고기를 날로 먹는 경우가 없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시체를 통째로 화덕에 넣어 요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 모두 시체를 토막 내서 요리했다.

두 지역 모두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사로 잡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먹어치웠다. 카우카 계곡 지역의 여자들은 종종 남자들과 함께 식인 축제에 참여했으나 윌리엄스에 따르면 피지에서는 "여자들은 바콜로를 잘 먹지 않았다."

시체는 대부분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는 사람의 갈비살을 가장 즐겨 먹었지만 내장, 예를 들어 심장, 간, 창자도 먹었다. 내장을 발라낸 몸통은 그냥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피지인들은 "심장, 허벅지, 팔꿈치 윗 부분의 팔을 진미로 여겼다." 피지인들은 사람을 먹을 때 그 유명한 '식인용 포크'를 사용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피지의 한 추장은 적의 해골로 그릇이나 컵을 만들고 정강이 뼈는 바늘로 쓰게 했다. 그렇지만 피지에서는 카우카 계곡 지역의 뛰어난 전사들이 잘라낸 적의 시체를 전리품으로 잔뜩 쌓아둔 것과 달리 시체를 전리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추장들은 적의 해골이나 말린 머리를 대나무 장대에 꽂아 자신의 집 밖에 세워두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장식품은 가까운 방문객들이 그 추장의 위대한 힘을 느끼고 공포와 존경심을 가지도록 했다.

최소한 카우카 계곡의 한 군장국가에서는 적의 시체를 통째로 훈제해서 장기간 보관했다. 이 집단의 가장 강한 추장은 시체를 훈제하기 위해 아주 큰 건물을 만들었는데 스페인 인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건물에는 약 400명의 적 전사들의 시체가 무기를 손에 쥐고 다양한 자세로 훈제된 채 빽빽하게 차 있었다.

이 두 지역에서는 식인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 졌을까? 그 규모가 상당했음은 확실하다. 윌리엄스는 1860년대에 피지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전사자는 1,500명에서 2,000명 정도라고 추산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솥이나 화덕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피지보다 인구가 더 많았던 카우카 계곡에서는 잡아먹힌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정복 초기 스페인 연대기 작가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인 치에자 데 레온(Cieza de Leon)에 따르면 1538년의 대기근 당시 포파야얀의 주민 중 상당수는 "죽은 사람을 자신의 위장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그 해에 약 5만 명이 살해되어 먹혔다고 한다. 트림본(Hermann Trimborn)은 이 추정치가 과장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한 특수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식인 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헤레라 (Herrera)에 의하면 카우카 계곡의 집단 중 하나인 아르마(Arma) 에서는 1년 동안 8천명이 잡아먹혔다. 트림본은 역시 이 추정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으나 설사 희생자의 숫자를 줄여 잡는다 하더라도 대규모 식인 행위임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정확할 가능성이 높은 치에자의 기록에 따르면 카라파(Carrapa)와 피카라(Picara) 두 부족은 그들의 숙적인 포조(Pozo) 족을 무찌른 뒤 300명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뒤에 전세가 역전되어 포조족이 카라파, 피카라, 그리고 파우쿠라(Paucura) 족을 무찔렀을 때는 페레키타(Perequita)라는 포조족의 추장과 그의 수하들은 단 하룻동안 100명의 적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사람을 잡아먹는 잔치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주로 참여한 것은 바로 추장들이었다. 피지의 추장들은 그들이 먹어치운 사람 고기의 무게로 유명했다. 이 중에서 라 운드로인데(Ra Undreundre)라는 추장은 다른 추장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 추장은 자신의 집 뒤에 먹어치운 사람의 숫자 만큼 돌을 쌓았는데 돌 한개 당 사람 한 명을 먹은 것 이었다. 당대의 한 목격자에 따르면 라 운드로이네의 집 뒷 마당은 쌓인 돌이 232 걸음에 돌의 숫자는 872개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돌이 중간에 없어졌다고 하니 이것들 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가 먹은 사람의 수는 900명은 되었을 것이다.

Robert Carneir, 'Warfare in Fiji and the Cauca Valley', Jonathan Hass(ed), The Anthropology of War(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p.202~205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미식가들입니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미국쪽 기록

슈타인호프님이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글을 하나 써 주셔서 저도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1950년 4월 28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 사건은 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순 중위는 월남한 뒤 북한의 남침 의도와 북한 공군의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남침에 대한 경고가 많았지만 바로 남침 직전에 북한군의 장교가 월남해서 남침에 대한 정보를 알린 것은 파급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미국쪽 반응은 살짝 심드렁 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대리 드럼라이트(Drumright)가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말입니다.

1950년 5월 11일 오후 6시 서울.

대사관전문 683호. 대사관전문 675호 참조. 5월 11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북한의 군사력1)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한미대사관은 현재 북한의 군사력 수준에 대해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통계와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총 병력은 103,000명으로 여기에는 "인민군", 만주에서 귀환한 조선인 의용군 부대, 국경경비대, 공군 항공사단, 기갑부대와 해군이 포함됩니다. 여기에 대해 지방의 경찰력이 약 25,000명으로 판단됩니다. 북한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은 한개의 여단규모 부대로 총 6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은 소련제 T-34입니다. 북한군의 포병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76.2mm 보병포와 유탄포 224문, 122mm 유탄포 72문, 82mm 박격포 637문, 120mm 박격포 120mm문, 45mm 대전차포 356문, 경기관 총 및 중기관총 6,032정.

4월 28일 이건순 중위가 귀순하기 직전까지 북한 공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Yak 전투기 35대, 쌍발 폭격기 3대, 쌍발수송기 2대, 훈련기 35대.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F-3 등급2)으로 이 정보에 따르면 북한공군은 훈련용 전투기를 포함해 Yak 전투기 100대, IL-10 공격기 70대, PO-2 정찰기 8대, 미제 연락기 2대 입니다.

만약 본 대사관의 추정치가 정확하다면 한국측이 주장한 추정치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측이 정보를 과장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우방국, 특히 미국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군사력 격차를 납득하도록 만들어 군사원조를 더 받아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있었던 면담을 포함해 최근 면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추가적인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의 성명은 한국 언론인들을 외국 언론인들과의 회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 언론인들에게만 별도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보다 상세한 보고서를 제공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북한 군사력에 대한 일부 추정치가 한국의 일반 대중들의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게는 자세한 보고서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드럼라이트.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 VII. Korea(Washington, USGPO, 1976), pp.84~85

이건순 중위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문제는 미국측에서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전쟁이 임박한 시점이라 한국군의 증강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어쩔 방법이 없지만 말입니다.




1) 위에서 인용한 같은 책의 pp.83~84에 따르면 신성모가 발표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방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 병력 183,000명, 준군사조직을 합하면 30만명. 인민군 정규사단 6개 및 보안대 3개 여단 118,000명, 여군을 포함한 보조 인력을 포함할 경우 여기에 37,000명이 더 추가됨. 1개 전차 여단 1만명, 해군 15,000명, 공군 2,500명.

기계화 부대는 경전차 18대와 중형전차 155대 등 총 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30대, 오토바이 300대로 편성.

북한군의 포병전력은 76mm포와 122mm포를 합쳐 총 609문, 82mm 박격포와 120mm 박격포를 합쳐 총 1,16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627문,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9,728정.

해군은 총 32척의 함정 보유.

공군은 총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1개 항공사단으로 편성.

2) 위에서 인용한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 등급이 F-3 이란 것은 이건순 중위가 정보제공자로서의 신뢰도가 F, 아직 판단할 수 없으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정보로서의 신뢰도가 3,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1995년에 출간한 『미군정기정보자료집 1-3 : CIC(방첩대) 보고서(1945.9~1949.1)』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및 정보 등급 분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공원(Source)
A. 완전히 믿을 만함(completely reliable)
B. 통상 믿을 만함(usually reliable)
C. 꽤 믿을 만함(fairly reliable)
D. 통상 믿을 만하지 않음(not usually reliable)
E. 믿을 수 없음(improbable)
F. 판단할 수 없음(cannot be judged)

정보(Information)
1. 다른 원천에서 확인(confirmed by other source)
2. 아마 사실이다(probably true)
3. 사실일 수 있다(possibly true)
4. 사실인지 의심된다(doubtfully true)
5. 사실같지 않다(improbable)
6. 판단할 수 없다(cannot be judged)

MGFA 도서관

일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옛날 사진을 뒤적이던 중 2003년에 찍었던 독일군사사연구소(MGFA)의 도서관 사진을 한 장 찾아서 한번 올려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 독일에서 뒹굴거리던 2003년 여름은 정말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세 달 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책 읽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먹는 일만 했으니 말입니다.


구식 필름카메라로 찍어서 사진이 좀 별로입니다. 이때 디카가 있었다면 사진도 많이 찍고 복사비도 아낄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잡담 하나

아래 글에 달린 좀 기묘한 논쟁 때문에.

당연히 창군 초기~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장교단이 모두 부패하거나 무능하진 않았겠지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싸운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까지 한데 묶어 무능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훌륭한 분 들 보다 무능하고 썩어빠진데다 잔인한 인간들의 기록이 더 많이 눈에 띄이더란 말입니다. 좌익 토벌한다고 출동해서 민간인이나 학살하고 원조 받은 물자를 빼돌리는데 어찌나 지독하게 빼돌리는지 어떤 품목은 원조 받은지 1년도 안되어 80% 이상이 사라지질 않나. 전투에 나가서 병사들에게 자폭 공격이나 시키니 '북괴군'에 투항해서 개망신이나 당하고 부대가 무너지는데 장교들이 먼저 군복 벗고 도망가서 조롱이나 받고. 훈련할 때 병사들이나 구타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우회기동이건 뭐건 없이 닥치고 돌격이나 시켜 병사들이나 개죽음 시키고.

제정신이라면 이런 기록들을 접하고 국민당 군대나 남베트남 군대보다 낫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할겁니다.

제 블로그에 창군 초기 한국군의 문제점에 대한 글들이 가끔 올라가는데 관련 기록들이 많으니 앞으로도 계속 올라가게 될 겁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들도 포함되겠지요.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식민통치의 폐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계급이 높아질 수록 더 심해졌는데 한국군 장교단이 한국전쟁 이전 부터 급속하게 증가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게중에는 꽤 재미있는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장교단의 자질 부족의 원인을 식민통치의 악영향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The Korean Army does not have adequate leadership. The major factor to be considered here is the lack of potential leaders. Korea has had its position of leadershp filled by foreign elements for many years. Develpoment of indigenous leadership was forcefully discourged.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 미 제8군 부참모장에게(1951. 5. 25),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Korea Army

꽤 일리있는 말 같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겨우 세자리 숫자를 넘기는 수준이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량으로 양산된 조선인 장교단도 기껏해야 위관급이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처형당했으니;;;; 그 밖에 김석원 같이 제법 높은 지위로 올라간 장교들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은 야전에서 대대를 지휘한 정도가 고작이죠.

어쩌면 국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것이야 말로 식민통치의 가장 지독한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군대의 동성애 혐오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

Nimishel님의 블로그에서 미군의 동성애자 관련 규정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난 글이 하나 있어서 불법날림번역을 조금 해 봅니다. 왜 군대가 동성애자, 특히 게이에게 적대적인가에 대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설명한 글인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군대가 동성애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원인은 아마도 적을 '여성화'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동성애자는 이 책의 3장과 4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게이들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들고 체구가 크며 강한 존재들이다. 게이 군인들이 일반 군인들과 다른 점은 성과 지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군대 내의 게이는 군인을 군대 외부의 여성, 즉 고향이나 부대 인근의 사창가, 항구의 여성, 또는 핀업(pin up) 사진이나 지갑속 사진으로 존재하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에 대해 지배적인 성적 행위자로써 만드는 것을 애매하게 만드는 존재다. "남자간의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동성애자로 알려진 남성의 존재는 ... 남성이 아닌, 즉 여성으로 상징되는 적에 대해 폭력을 가해야 하는 ... 남자로 이루어진 집단의 사회적 동질성을 흔들어 놓는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군대는 계급을 넘어서는 친교에 대해 규제를 가하고 금지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병사들이 가져야 할 호전적인 '남자다움'에 대한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남성의 가치 중 으뜸으로 치는 정력은 "동성애자에게는 해당 되는 것이 아니며" 동성애자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여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남자, 즉 '두 영혼의 사람들(berdache)'이 전쟁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평생을 여자 옷을 입고 여자의 역할(성적으로도)을 하는 남자들은 체구도 크고 강하지만 관습적으로는 여자로 취급받는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들은 생물학적 성에 따라 일반적인 전사로 취급 받았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는데 제약을 받았다. 두 영혼의 사람들은 보통 보급품과 무기를 운반했으며 전사자들을 매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17세기 일리노이 부족의 경우와 같이 두 영혼의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하더라도 활과 화살은 사용하지 못 했으며 곤봉만을 써야 했다. 여자들이 전투나 사냥에 쓰이는 특정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서 그들의 육체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여성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남성성과 반대되고 상무정신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자면 1967년 당시 반전 시위대들은 보통 절반 정도가 여성이고 나머지는 "남성적인 근육질의 사내"나 "긴 머리의 히피", 또는 언제라도 경찰과 맞서 싸울 "군복을 걸친 남자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거의 모든 반전시위에서" 남성 반대자들로 부터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faggot"나 "queer"라는 조롱을 받았다. 반전시위대가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들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게이 군인들에게 덧씌워진 오늘날의 동성애 혐오자들의 인식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동성애자 혐오는 "동성애가 남성의 여성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문화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남자간의 동성애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성을 강화하고" 이것을 통해 "군사적 동원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의 신성대(神聖隊)에서는 병사들간의 동성애가 공개적으로 장려되었다. 남자들을 그들의 애인들과 같은 열에 배치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있기 때문에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남자 병사들간의 성적인 관계는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기능을 했다. 이성애자인 병사가 자신의 전우에게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우를 위해 싸울 동기를 만들었고 그리스의 군인들은 이러한 동기에 성적인 결속을 추가했다.

테베의 경우는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흔치 않은 경우이다. 군대 내에서 게이 병사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은 각 나라의 군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20세기 미군은 전시(병사의 필요는 높지만 인적 자원은 부족한)에는 게이 병사들을 용인하고 평시에는 용인하지 않는 것을 반복해왔다. 이런 경향은 여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시에는 이상적인 군대에 부합되도록 규칙이 강화되었지만 전쟁이 되면 규칙은 유연해졌다. (현재 미군은 완전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병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병사의 필요성이 아주 절박한 것도 아니어서 어정쩡하다고 할 수 있다.)

간혹 게이 병사에 대한 불관용 정책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해 사형을 부과하는 것이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 친위대의 장교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영국 해군에서도 19세기 초 까지 동성애 행위를 한 장교는 돛대에서 목을 매달았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중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놈의 해군 전통은 입에 담지도 말게. 해군의 전통이래 봤자 럼주나 처먹고 남색질에 채찍질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나?[Don't talk to me about naval tradition. It's nothing but rum, sodomy, and the lash])"

역 설적이게도 오늘날 서구의 전쟁에서 병사가 전우에게 느끼는 격한 사랑의 감정은 근대 사상에서 여성성으로 간주하는 정서적인 유대를 만들기도 한다.(이 경우에는 군대가 필요로 한다) 이러한 유대감은 쉽게 성적인 것으로 바뀐다. 1차대전 당시 시에서는 남자간의 사랑을 이렇게 찬양했다. "남자간의 사랑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네."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는 (자신의 자서전과 작품에서) 그가 21세 이전까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삭제했다. 히르쉬펠트에 따르면 1차대전 중 지휘관들은 군대내의 동성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동성애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면" 독일군 병사 중 게이는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1차대전 당시 "적지 않은 수의" 게이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독일의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를 피해 망명했던 사람들 이었다. 히르쉬펠트는 독일의 게이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되찾거나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1차대전 장시 영국 "젊은이들(lads)"에게 인기를 끌었던 동성애를 다룬 문학작품이 나타나지 않았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74-376

이 글의 저자인 골드스타인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전쟁이란 폭력적이 남성성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쟁 중 적군에 대한 강간이 자행되는 경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적군에 대한 동성애적 강간이 이루어지는 배경에도 적군에게 굴복시켜야 할 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문화적인 의미가 깔려 있다는 것 입니다.(대표적인 예로 들은 것이 잔뜩 발기한 성기를 곧추세우고 페르시아군을 뒤쫓는 그리스 병사를 묘사한 도기이죠) 꽤 잘 들어맞는 설명같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잡담 하나. 본문에 언급된 히르쉬펠트의 저작은 1934년에 출간된 The sexual history of the world war인데 2006년에 University Press of Pacific에서 복간해 쉽게 구해볼 수 있습니다.

북버지니아군의 보급 문제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Edward Hagerman의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origins of modern warfare가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미국 남북전쟁에서 소모전, 참호전과 같은 근대적 전쟁의 요소가 등장했고 남북 양측의 군대가 모두 새롭게 변화한 전쟁 상황에 맞춰 지휘구조와 전략 전술 등을 재정립해 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조금씩 읽고 있어서 이제야 게티즈버그 전역을 다룬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이부분이 아주 재미있는데 저자는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 야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이 챈슬러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보급품의 부족 뿐 아니라 철도, 마차와 같은 수송수단 자체의 부족이 북버지니아군의 공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북버지니아군의 보급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급에 필요한 마필의 부족입니다. 말의 부족이 심각하다 보니 1863년 봄에 대규모 편제 개편을 통해 보급부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그런 조치를 취하고도 편제를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상봉쇄 때문에 말을 수입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또는 멕시코를 통해 마필을 수입해야 했는데 이곳에서 조달하는 말은 질이 좋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전투에서 소모하는 말이 더 많았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말의 부족으로 정찰과 보급로 경비를 담당할 기병도 부족했으니 포병이나 기타 지원부대의 상황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지요. 다음으로는 남부연합의 고질적 약점인 철도 문제를 꼽고 있습니다. 1863년 봄이 되면 철도의 연장은 커녕 기존 철도의 유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을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작전 지역에서 대규모 야전군의 보급에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대도시가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향한 진격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보급에 필요한 대도시가 드문 만큼 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징발을 실시해야 하고 이 경우 마필 부족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때문에 리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철도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수행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극도로 제한적인 보급능력이 작전행동의 자유까지 제약하게 된 셈입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남부연합의 총체적인 전쟁수행 역량이 그야말로 안습이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엄청난 설득력

미국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어떤 군사사학자의 논평.

미국은 1941년 부터 1945년 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글자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엄청난 설득력이죠. 쇼왈터의 이 글을 읽으면 무신론자도 천조국의 힘을 숭배하는 물신론자로 바뀌게 된다는;;;;;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기분전환

어제는 너무 우울하다 보니 일이 잘 안되더군요. 할 일도 있고 하니 바람쐬러 나돌아다닐 팔자도 아니어서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기분전환을 할 방법을 찾아 봤습니다.

그래서 모니터 바탕화면을 이것으로 교체했습니다.




바탕화면을 교체하니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에바 파 DVD 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대원수 동지의 편지

스탈린이 다른 인간을 신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간혹 예외도 있었다고 합니다. 몰로토프가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지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일대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Annals of Communism Series 중에는 바로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낸 것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은 1936년까지의 편지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은 주로 1930년 까지의 편지에 많고 1931년 부터 1936년까지의 편지들은 매우 적은 분량만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가 편지들을 잘 선정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오늘 읽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봤습니다.

몰로트슈타인(Молотштейн)*, 잘 지내고 있나?

도데체 거기서 뭘 하고 있길래 아무 소식도 없는겐가? 자네가 있는 곳의 사정은 어떤가? 잘 돌아가고 있나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뭔가 좀 써서 보내주게나.

이곳은 잘 돌아가고 있네.

1) 곡물 징발은 꾸준히 진행중이네. 오늘 우리는 비상시를 대비해 곡물 비축량을 1억2천만 푸드(пуд, 1푸드는 약16.38kg)로 높여잡았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하리코프와 같은 공업도시에 대한 배급량을 높였다네.
2) 집단농장 운동도 급속히 고조되고 있네. 물론 농업용 기계와 트랙터가 부족해서 달리 방법이 없다보니 보통 농기구를 긁어모아 사용해야 했는데 파종 면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네.(어떤 지역은 50퍼센트나 증가했네!) 볼가강 하류 지방에서는 전체 농민 중 60퍼센트가 집단농장에 가입했네.(이미 가입했단 말이지!) 우리 당내의 우파 녀석들은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어.

3) 대외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중국 문제를 처리해야 하네. 우리 극동군의 동지들이 중국인들에게 충분한 경고를 주었을 거야. 얼마전에 장쉐량(張學良)이 차이(蔡)와 시마노프스키 동지가 만나서 합의한 사안에 동의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네.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서는 거칠게 대응하지 않고 그냥 거절만 했네. 우리는 이정도만 할 수 있었으니까. 볼셰비키가 뭘 원하는지 그들도 알게 해 줘야지! 중국의 지주들은 우리의 극동군이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내건 조건들이 이행되기 전에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네. 리트비노프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했던 연설을 한 번 읽어보게. 꽤 괞찮은 연설이었어.
4) 아마 자네도 신문을 통해 이번 인사이동에 대해 알고 있을것 같네. 이번 인사이동에서 새롭게 바뀐 것은 톰스키(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를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의 보좌역으로 임명한 것(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쿠이비셰프는 이 조치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슈바르츠를 석탄협회 회장으로 임명한 걸세.(이 경우에는 더 나은 사람이 없었네)
5) (세명의) 우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네만 별다른 진척을 거두지 못하고 있네. 릐코프(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는 야코블레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우리가 미리 손을 써 놓았지.

그래. 이제 때가 되었네.

1929 년 12월 5일

Lars T. Lih, Oleg V. Naumov, and Oleg V. Khlevniuk(ed.), Stalin's Letters to Molotov 1925-1936(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pp.183-184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부를때 쓴 애칭 중 하나로 몰로토프가 유태인이란 걸 농담삼아 비꼰 것 입니다.
** 세명의 우파는 편지에 언급된 릐코프와 톰스키, 그리고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입니다.

이 편지에서 역시 후덜덜한 부분은 농업 집단화의 성과를 자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지만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과 그의 정적들을 엿먹인 것에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초딩마인드이지요.

그런데 이게 도통 남의 일 같지만 않은게, 높은 자리에 초딩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들어앉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1954년에 제안된 어떤 한국군 해병대 개편안

한국전쟁 직후 한국군의 재편성 시기의 기록을 보면 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미국측이 검토하다가 폐기한 한국군 편제를 보면 아주 재미있지요. 여기서는 1954년에 검토되었던 한국군 해병사단 창설안 중 하나를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17일자로 되어 있는 미해군 군사고문단 소속의 해병대 군수고문관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미군 해병사단의 편제에 근접하는 규모로 확대개편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편성할 경우 필요한 군수지원품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전투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빈(M2) : 876정
소총 (M1) : 2,206정
자동소총(M1918A2) : 212정
권총(M1911A1) : 1,247정
기관총 (M1917A1) : 118정
기관총(50구경 M2) : 87정
유탄발사기 : 1,400정
105mm 유탄포 : 42문
155mm 유탄포 : 18문
3.5인치 바주카포 : 320문
60mm 박격포 : 53문
81mm 박격포 : 89문
4.2인치 박격포 : 30문
75mm 무반동포 : 15문
화염방사기 : 188대
전차 (M26/M4A3 105mm) : 85대
40mm 대공포 : 32문
LVT-A : 18대
LVT-4 : 224대

이 안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대를 사단급으로 확대개편하고 지원부대를 증편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총 2786만6452달러가 소요되었고 여기에 1년치의 군수품을 합하면 총 비용은 8500만3349달러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배정한 비용이 1천만 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아닐수 없었습니다.(그 사이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지원내역에 들어있는 장비를 보면 M-26전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 육군에 배치되고 있던 전차가 M4A3E8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원조안 대로 한국 해병사단을 편성했다면 장비상으로 한국군 최강의 전력이 되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여기에 언급된 원조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 육군 20개 사단 계획에 필요한 예산만 해도 막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해병대까지 요란하게 무장시킬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실현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계획들은 실제로 실행되는 계획보다 근사한 법이지요.

*'Expansion Program for the Korean Marine Corps plus support for one(1) year, Cost of',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Korean War Corps Expansion Program

2010년 2월 8일 월요일

대북정책에 대한 융통성 있는 접근에 대한 희망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마디. 제가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보니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중에서 저를 한나라당 지지자로 오인하시는 사례가 종종있습니다. 제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특히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와 노무현 정부 전기간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해서 극도로 부정적이긴 합니다만 한나라당 지지자는 아닙니다. 강인덕 같은 보수적인 인사를 통일부 수장에 임명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대북정책을 시사했던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꽤 기대감이 크기도 했지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원래는 작년 연말에 쓰려고 했는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다 보니 좀 많이 밀리게 됐군요.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면서 개별 정당은 물론 정당 지지자들 간에도 대립각이 극단적으로 날카로워진다는 느낌입니다. 상대 정당, 정파의 정책은 무조건 틀린 것이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주장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 입니다. 저와 같은 당을 지지하시는 분들은 불쾌하시겠지만 김대중의 대북정책이 무조건 옳은 것이며 그것을 계승해 발전시킨 노무현도 당연히 옳은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북정책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명백해 졌으며 민주당-열린우리당이 집권한 10년 동안 북한은 남한의 유화적인 정책에 상응하는 대응을 사실상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제한적인 이산가족 방문이나 제한적인 정치사회단체들의 활동같은 통일쇼를 예로 들진 맙시다) 한계점이 명백히 드러난 상황에서도 한나라당의 공세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느라 정책에 대한 반성을 거의 하지 못한 점은 부메랑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는 보수층의 파상적인 공세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화정책 만으로는 북한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개혁진영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북정책을 옹호하는데 주력했지만 이것은 한나라당에 비해 훨씬 적은 개혁진영의 고정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역할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대북유화정책이 조건만 갖춰진다면 충분한 효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통일을 고려하고 있다면 북한과의 교류 필요성을 절대 부정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공개적으로 실시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는 마당에 그것은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하는 식으로 어설픈 물타기를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낯뜨거운 것은 노무현 정부당시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했을 때는 미국의 압박정책이 문제라고 합리화하기 바쁘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들어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자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비슷한 사례는 셀수 없이 많습니다. 2002년 북한과의 교전으로 한국 해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을 때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옹호하느라 바쁘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객이 한명 살해당했을 때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지요. 북한이 유화정책을 해도 도발하고 강경정책, 또는 무시하는 정책을 해도 도발한다면 도데체 유화정책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의 대북정책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성적인 자기성찰이란 불가능해 지고 융통성마저 잃게 됩니다.

만약 북한이 개혁진영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준다면 대북유화정책을 굳건히 견지해 나간 것이 결과적으로 큰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개혁진영이 주도권을 쥐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할 것 입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경우 정치적으로 체력이 약한 개혁진영이 입게될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989~1990년 동독이 붕괴될 당시 서독의 사민당(SPD)는 동독과의 점진적 통일을 주장했지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치닫자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기민-기사당 측은 동독의 혼란이 가속화 되자 동방정책의 틀을 깨고 적극적인 흡수통일로 노선을 전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민당은 동방정책의 연장선 상에서 온건한 정책을 고수한 까닭에 동독의 붕괴를 일관적으로 추진한 기민-기사당이 외교안보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사태에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래는 불확실 한 것 입니다. 민주당 측이 원하는 것 처럼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 연착륙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북한이 체제유지를 고수하다가 갑자기 붕괴하는 급변사태를 맞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혁진영이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을 고수한 것이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지기반이 한나라당에 비해 취약한 민주당과 그 밖의 진보정당들이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흡수통일이라는 상황이 닥칠 경우 한나라당에게 수동적으로 말려들어가고 결과적으로 외교안보분야에서 장기적으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 입니다.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보수정당에게 수동적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했으면 하는게 저의 작은 기대입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10년 2월 2일 화요일

이것 저것

1. 지난번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 들 중에서 오프에 나오지 못한 분들께 책을 택배로 보내드렸습니다. (Matthias님, 데키에로님, 윤현철님, 이준교님)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메일을 보내주십시오.

2. 귀가하는 길에 책을 50% 할인해 판매하는 곳이 있길래 두 권을 샀습니다.


연초라 돈 들어갈 곳이 많아 책을 거의 못 사고 있던 터라 기분전환이 조금 되었습니다. 아마 3월쯤 되면 좀 여유가 생길 듯 하니 본격적인 지름질은 그때 가서나 해야 겠습니다.

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어떤 포로의 편지

1943년 4월 5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이것을 도쿄에 있는 독일 대사관 무관 크레치머(Alfred Kretschmer) 소장에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친애하는 크레치머!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제6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네. 나는 지금 겨우 내 한몸을 챙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부탁을 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구만.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보내줄 수 있겠나?

1. 긴 팔 스웨터 한벌, 될 수 있다면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내 키는 자네도 대략 알고 있을 걸세.(파울루스의 키는 187cm)
2. 긴 양말(Wadenstrümpfe) 한 짝, 치수는 11½,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3. 양말 세 짝, 치수는 11½, 색은 자네가 편한 대로 해 주게.
4. 비단 셔츠 두 벌, 목 둘레는 38, 카라 치수는 39, 소매는 긴 것으로 해 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셔츠와 같은 색(특히 어두운 녹색)의 넥타이도 하나 부탁하네.
5. 멜빵 하나.
6. 종이 한 통과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이것도 보내줄 수 있겠나?

7. 초콜렛과 쿠키(Kekse).
8. 잼(Marmelade) 한통.
9. 커피와 차.
10. 담배와 시거.
11. 향수(Eau de Cologne)
12. 화장품.

그리고 자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년 전 부터 위와 장에 문제가 있었네. 위에 적은 목록 중 7번과 8번에 적은 기호품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도움이 된다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7번에서 12번까지의 물품은 매달 한 번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100루블 정도 송금해 주었으면 좋겠네.
지출되는 비용은 나중에 정산할 때 까지 당분간 자네가 부담해 줄 수 있겠나?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2000, ss.47~48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파울루스가 보낸 편지는 독일 대사관 쪽에서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파울루스의 편지는 이래저래 재미있는데 특히 포로가 된 고급장교를 우대하는 유럽 전쟁문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고급장교는 사병들과는 달리 꽤 근사한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장교처럼 팔자좋은 인생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파울루스가 병사들 걱정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이 영양실조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마당에 초콜렛 타령을 하고 있는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점은 잘 느끼고 있었겠지요.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어제의 득템

그러고 보니 어제 모임에서 득템한 이야기를 깜빡했군요. 어제 참석하신 슈타인호프님께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이글루스 역밸을 따끈따끈하게 달구었던 화제의 저작!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였습니다.


여기에 슈타인호프님의 친필서명도 받았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슈타인호프님.

그리고 어제 모임에서는 이른바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 이라는 즉석 이벤트를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슈타인호프님이 나쁜 책과 이상한 책을 쓸어가셨지요. 책과 관련해서 복이 많으신 듯.

당첨된 나쁜책을 들고 포즈를 취해주신 슈타인호프님

오프에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프에 참석해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주말이 아닌 평일 저녁에 일정을 잡게 된 점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오랫만에 뵌 분들도 많아서 서로 나누실 말씀도 많았을 텐데 부득이하게 중간에 마무리하게 된 점은 정말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출근하실 직장이 있으신데도 귀한 시간을 내주신 분들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피곤한 퇴근길에 일부러 들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온라인에서만 뵙다가 처음으로 오프에서 뵌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능한 빨리 다음 번 모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일인지라 시간에 쫒기는 느낌이 적지 않았는데 다음번에는 좀 더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즐거운 대화가 더 많이 오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프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께는 택배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직 주소를 보내주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제 이메일, panzerbear@지메일.com으로 주소를 보내주십시오.

귀한 시간 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오프모임을 28일 목요일로 결정했습니다.

공지가 약간 늦었습니다. 오프모임 일정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일시 :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강남역 옥토버페스트
회비 : 1만 5천원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기분나쁜 추억 하나

구글리더를 읽던 중 나이지리아의 종교간 충돌에 대한 소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의 종교간 갈등이야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 이지만 제목이 눈길을 끌더군요.


국민학교 시절 반공서적에서 가장 공포감을 자극한 것은 학살된 시신을 우물에서 끄집어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골에 내려갈 때 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나곤 했을 정도지요.

머나먼 이국에서 일어난 학살이 국민학교 시절의 불쾌한 추억을 끌어내는군요.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수령님의 경제관;;;;

최근 sonnet님이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에 대해 전망하는 글을 통해 김정일 체제의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적했습니다. 저 또한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이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른 데서 나온다는 점이 체제의 융통성을 제약한다는 sonnet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편 입니다.

김일성은 살아있는 동안 북한 체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한 인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일성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으며 그 점은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중공업화와 이에 기초한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중공업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당연히 걸어야 할 것이었고 경공업 부터 시작해 중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나라들의 공업 발전 력사를 보면 많은 나라들에서는 우선 일정한 기간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킨 다음 경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켜 돈을 모아가지고 중공업을 건설하였습니다.

량현갑 편, 『전후 우리 당 경제 건설의 기본 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1), 4쪽

김일성은 이렇게 중공업화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기 부터 중공업 위주의 경제건설에 집착했습니다. 그런 점은 1950년대에 김일성이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1957년 인민경제계획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마차가지로 다음해에도 중공업부문에 투자를 집중하고 많은 힘을 돌릴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조치입니다.

지금 일부 나라들에서는 중공업을 좀 죽이자거니 살리자거니 하는 론의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전반적인 인민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할 수 없으며 인민생활도 높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경제건설의 객관적 요구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이런 큰 힘과 튼튼한 밑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로선이 옳았으며 당의 령도밑에 전체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투쟁하여 이 로선을 훌륭히 관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3개년 계획기간에 당의 방침대로 중공업발전에 힘을 넣지 않았더라면, 인민생활을 높인다고 하여 형제나라들의 원조 같은 것도 그대로 다 때려먹었더라면 그때 한 두해 동안은 잘 살수 있었을지 몰라도 오늘에 와서 아무것도 자체로 할 수 없는 곤난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을 것 입니다.

김일성,「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6년 12월 13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4쪽

********

만약 전후시기에 우리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지 않고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의 내부원천을 주로 인민들의 개인적 소비에만 돌렸더라면 우리는 자체의 경제토대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울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전후시기에 있어서의 우리 당 경제정책의 커다란 의의는 그것이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 나라 내부원천을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인민생활을 높일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립적 토대를 기본적으로 닦을 수 있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김일성,「모든것을 조국의 륭성발전을 위하여 :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회의에서 한 연설, 1958년 6월 11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5~16쪽

김일성에게 있어 중공업은 민족적 자립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생각한 민족적 자립경제는 대외무역으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정치적인 자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자립적 민족 경제의 기본 내용에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제에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제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서는 경제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고 부문들 간의 유기적인 련계를 확고히 보장하는 종합적인 경제 체계를 형성하여야 하며 인민 경제를 현대적 기술로 장비하고 자체의 원료 기지 등 생산의 물질적 요인을 자체로 튼튼히 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자체의 기술, 자체의 자원, 자체의 간부와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며 생산 수단과 소비재에 대한 국내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중략)

대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경제 발전의 일면성과 기형적인 구조를 면할 수 없으며 국내 수요의 원만한 충족을 보장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예속 경제의 참혹한 처지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게 한다.

정태식,『우리 당의 자립적 민족 경제 건설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9~11쪽

********

자력갱생. 이것은 자기 나라 혁명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완수하려는 철저한 혁명적 립장이며 자기 나라 건설은 자기 인민의 로동과 자기 나라의 부원으로 진행하려는 자주적 립장입니다.

이러한 혁명적 립장과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여야만 우리는 어떠한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에서도 혁명적 절개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으며 전진도상에서 제기되는 난관과 애로를 용감하게 이겨내고 혁명투쟁의 승리와 건설사업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없으면 자기의 힘을 믿지 않게 되고 자기 나라의 내부원천을 동원하기 위하여 노력도 하지 않게 되며 안일성과 해이성에 사로잡히고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여야만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나라의 부강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은 정치적 독립의 물질적 기초입니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추종 국가로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도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쌓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317~318쪽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교류가 북한의 '민족경제 수립'에 있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었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김일성의 생각은 다음의 인용문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시장을 공고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개 형제나라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의 공동위업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리익으로 부터 출발하여 경제적 호상관계에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발휘하여 협애한 민족리기주의를 철저히 없애는 것 입니다. 특히 발전된 사회주의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들에 어떠한 정치적 부대조건도 아무런 사심도 없는 더 많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렬강들의 경제 봉쇄를 성과적으로 물리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과의 거래를 적게 하고 사회주의 시장에 의거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외무역관계에서도 결코 계급적 립장을 떠나거나 공산주의적 도덕과 동지적 의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김일성,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앞의 책 362쪽

********

발전한 형제 국가가 뒤떨어진 나라에 대하여 사심 없는 원조를 제공하여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최대한으로 촉진하며 락후한 나라는 자력 갱생의 정신으로 부터 출발하여 최단 기간에 나라의 경제력을 강화하여 형제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정태식, 위의 책 31쪽

위의 인용문은 '외국의 간섭은 귀찮으니 경제적 지원은 아무 조건 없이 날로먹게 해주세요' 정도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입니다.

김일성은 정치적 자립(=고립)을 위해 자체 완결적인 산업 구조를 필요로 했으며 외국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교류 또한 북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선에서 용인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북한은 전후복구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막대한 원조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김일성은 대외 원조보다는 북한의 자체적인 역량을 과신했습니다. 동시에 대외지향적인 공업화를 외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의 길로 보았다는 점은 북한경제가 1960년대 남한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오프 모임 일자를 조정해 보려 합니다

신년 인사도 드리고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들께 책도 나눠드릴 겸 해서 다음주에 오프 모임을 가질 계획입니다. 지금 생각중인 장소와 날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자 : 1월 28일(목) 또는 1월 29일(금)
시간 : 오후 7시 또는 7시 30분
장소 : 강남역 옥토버페스트
기타 : 회비 1만5천원

참석하실 분들께서 의견을 주시면 최종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군의 M-24 경전차 운용과 관련된 의문 하나

한국군이 한국전쟁 기간 중 잠시 M-24 경전차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1952년에 보병학교 전차교육대의 교육용으로 20여대의 M-24를 도입하여 사용하다가 같은해 말 다시 대만으로 양도했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미국 국방부장관실 문서 중에서 한국군이 1954년에도 M-24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54년 4월 30일자로 되어 있는 한국군 장비목록표에는 한국군의 기갑장비에 77대의 M4A3E8 중형전차 외에 21대의 M-24 경전차가 있는 것으로(In Hands of Troops)로 나타나 있습니다.* 보고서의 성격상 오타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1952년에 대만군에 M-24를 양도한 뒤 다시 도입된 기록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Assets of selected items of equipment available to ROKA as of 30 April 1954',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Tentative Proposal for Support of ROK Army, etc.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이벤트 공지 - 당첨자 발표

책 나눠드리는 이벤트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죄송)

추첨은 the Hat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했습니다. 추첨을 돌리는것도 살짝 귀찮더군요.

책을 신청하신 분과 당첨되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청자 항목에서 이름 뒤에 괄호와 숫자가 표시된 분은 저에게 에반게리온 영화표를 인증해 주신 분 들입니다. 예를들어 카린트세이님의 이름 뒤에 (+6)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카린트세이님이 제게 에반게리온 영화표 여섯장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셨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카린트세이님은 추첨할 때 7표로 계산되었습니다. 카린트세이님과 oldman님은 신앙심이 돈독하셔서 대부분의 추첨에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사를 추첨할 때는 신기하게도 불리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漁夫님이 선정되셨습니다.



진리의 에바 신앙을 뛰어넘은 漁夫님의 행운에 경의를 표하는 바 입니다.

책을 나눠드리는 방식은 두 가지로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1월 말에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서 나눠드리는 것 입니다. 그냥 책만 나눠드리면 재미가 없으니 신년인사(?)를 겸해 한번 얼굴도 뵙고 덕담(!?)도 나누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술자리는 1월 29일에서 1월 31일 사이로 정할려고 생각 중 입니다. 이 어린양의 느글느글한 면상을 마주하고 맥주한잔 하시면서 책을 받으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십시오.

두 번째는 지방에 계신 분들, 특히 경상도나 전라도 등 먼 곳에 계신분들에게 택배로 보내드리는 것 입니다. 이벤트에서 나눠드릴 책 중에는 제 친구가 드리는 것도 있으니 택배로 보내드리는 것은 신년 술자리가 끝난 다음이 될 것 입니다.

당첨되신 분들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받고 싶으신지 댓글에 달아 주십시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 - 안방전선 방어작전???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과 엮은 글 입니다.

즉 날로 먹자는 포스팅이지요;;;;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날림번역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전쟁에서 안방전선의 중요성이 어떤 방식으로 강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입니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Defending "our" women)

성 (性)은 민족주의에서도 이용된다. 민족은 여성화하고 국가는 남성화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여성은 의미에 따라 민족으로 상징되며 백여년 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여성과 (민주화 된)남성 대중은 정치적 맥락으로 포섭되었다. 여성의 모습은 19세기 벵갈 민족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상징적인 의미와 같이 혼란스러운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떤 집단을 통합하거나 또는 축출하기 위해 영토의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육체를 민족의 상징, 집단 내부의 표식, 또는 남성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국가적 '자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것은 적국의 남자들이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은유 방식이 되기도 했다. 한 인종 집단이 "민족의 영역이 위협받거나 위태롭다고" 느꼈을 때 이것은 노래나 전설을 통해 적들이 어린 여자를 납치하거나 유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영웅이 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과 전후 남부의 복구 시기에 남부 백인 여성이 흑인과 섹스를 한다는 상징은 남부 백인 남성들을 동원하는 기제가 되었다. 2차대전 초기 독일의 폴란드나 폴란드 침공, 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같은 군사적 침략은 "강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양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선전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간이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독일군의 강간에 대해 선전하면서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나라의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통해 전쟁을 상기시키고 묘사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에게 그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러시아군이 그들의 고향을 점령하고 그들의 여자를 강간할 것이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들에게 미군이 그들의 여자와 놀아나고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선전을 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 여자들이 프랑스 식민지군대의 흑인들과 섹스를 하고 영국 여자들이 미군의 흑인 병사들과 섹스를 한다는 선전을 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각 민족 상호간의 강간이 "민족의 표식"이 되었으며 다른 민족집단을 위협적인 강간마들로 묘사하는 선전을 통해 각 민족집단 내부의 단합을 강화했다.

민족을 여성화 하는 방식은 (강간 피해자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성적 유동성을 제약하면서 전통적인 성차별을 강화했다.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행위, 그중에서도 특히 낙태를 비난했다.(크로아티아의 집권당은 '태아도 크로아티아 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는 전쟁에서 하나 뿐인 자녀를 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했다. 여성들은 사회적 재상산이라는 역할 외에도 "고장의 전통을 보존하고 ....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미덕을 발휘" 하기 위해 집단의 문화를 수호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우리" 여자들에 대한 적들의 위협이라는 상징은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997년에 팔레스타인 내에서 판매되는 이스라엘의 껌에는 아랍 여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동시에 아랍인의 출산률을 낮추기 위해서 소녀와 소년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 성분이 첨가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이런 소문 중에는 이슬람 도덕을 약화시키고 여성들을 성적으로 속박해 정보원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 괴소문은 널리 확산되었는데 사실 그 껌들의 원산지는 스페인이었으며 독립된 기관에서 분석한 결과 프로게스테론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게스테론은 여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다소 감소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이 성분이 피임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69-371

언제나 그렇듯 잘사는 양키의 존재는 잘 살지 못하는 남자들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애낳는 기계로 여기는 것은 남의 일도 아닌 것이 남조선의 보수반동집단(?!)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요. 물론 한국은 전쟁 상황은 아닙니다만 사회적으로 위기를 느낄 정도로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고 희한하게도 이런 상황에 맞춰 여자들을 갈궈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 보수적인 남성들은 여자들의 성적 방종과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나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이 한국여자와 자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지요. 어떻게 보면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는 돈 많은 GI에,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은 식민지군대의 흑인이나 강간마 러시아군과 유사한 이미지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요상한 소문이 뒤섞여 야릇한 괴담으로 진화하기도 하지요.

한국의 가부장적인 민족주의가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리면서 전쟁에서나 나타날 법한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야 말로 진짜 전쟁인지도;;;;

용서는 없다

시간을 내서 '용서는 없다'를 봤습니다. 그동안 에반게리온만 보느라 다른 영화는 거의 보질 못했는데 '용서는 없다'가 2010년 들어 처음 본 한국영화가 되었군요.

사실 용서가 안되는 영화라는 가혹한 혹평이 있길래 호기심이 동하더군요. 그래서 주말 오후에 롯데시네마에 가서 거금 9000원을 들여 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용서가 안될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으나 어쨌든 좋은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줄거리가 퍼질 대로 퍼져있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영화는 매우 비극적으로 마무리 되고 이야기의 진행도 다소 엉성합니다. 스릴러가 되기에는 좀 모자란 영화라고 해야 할까요? 논리적으로 허술한 장면이 한 두군데가 아닌데다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멍청합니다. 비극적인 결론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서 진행과정들을 지나치게 억지로 끌어맞췄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독창적이지도 않습니다. 한국영화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범죄자와 거래한다는 방식은 이미 세븐데이즈에서 한 번 봤고 영화가 준비한 반전이라는 것은 올드보이에서도 본 것 같은 구조입니다. 게다가 결말부분은 데이빗 핀처의 세븐의 결말을 보는 것 같더군요. 물론 천지개벽이래 세상에 독창적인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습니다. 짬뽕도 잘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네요.

게다가 한혜진이 연기한 여형사는 너무 뻔해빠진 등장인물이라 없는게 나을 뻔 했습니다. 물론 한혜진이 나쁘진 않습니다. 아주 아주 예쁘잖아요. 하지만 남자들로 가득찬 조직에서 꼴마초에게 시달림 받는 유능한 여자라니, 이건 너무 흔해빠진 캐릭터 아닙니까. 물론 묘사가 좋았다면 나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한혜진의 연기가 너무 어색합니다. 대사도 문어투인데 한혜진의 연기는 그걸 그대로 받아 읽는 수준이라. 차라리 한혜진이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나가요 언니라던가 아니면 부검대 위의 시체를 연기하는 쪽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약 한혜진이 부검대 위의 시체였다면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었을지도;;;; 오오. 예쁜 시체다!) 게다가 한혜진이 연기한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인지는 몰라도 극중에서 한혜진을 괴롭히는 선배 형사(성지루)가 아주 무능하고 멍청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성지루 같이 괜찮은 배우를 이런 멍청한 역할로 소모하다니.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설경구는 좀 불쌍했습니다. 비극적인 영화에 아주 잘 맞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꽝이었고 연출도 별로였다는 겁니다. 어쨌든 설경구는 괜찮았습니다.

살인범 역할을 맡은 류승범도 괜찮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류승범이 맡은 등장인물이 더럽게 재미없는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좋은 배우가 아깝게 소비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스릴러라기에는 너무 맥빠지는 영화였습니다. 차라리 잔인한 장면을 더 많이 늘렸다면 개인적으로 좋은 점수를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년 1월 14일 목요일

남자사냥;;;;

얼마전에 썼던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이라는 글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nimishel님 말씀 마따나 소련 여군의 후덜덜한 남자 사냥에 대한 괴소문은 꽤 유명한 편이라서 대중매체에도 간혹 나타나곤 합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접한것은 1990년대인데 바로 반공의 횃불(;;;;) 한국논단에서 출간한 서적을 통해서 였습니다. 반공청소년 어린양은 1995년 어느날 한국논단을 보다가 일본공산당 당원 하기와라 료(萩原遼)라는 사람이 쓴 『한국전쟁』이라는 책이 번역출간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뭔가 솔깃해 이 책을 거금 7천원을 들여 샀는데 의외로 물건이더군요(;;;;) 반공서적 답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온갖 난행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이게 꽤나 재미있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 소련 여군의 남자 사냥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서술이 아주 재미있으니 원문을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죠.

소련군 여군병사에 의한 조선인 남자사냥도 있었다.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장건섭(張健燮)씨. 장씨는 1924년 생으로 68세. 일본군에 징병되어 8.15해방은 평양에서 맞았다. 21세였다.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장씨를 만나 그의 저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얻었는데 그 속에 쓰여있다. 장씨 친구의 체험이라고 되어 있는 소련군 여군 병사에 의한 강간사건은....

어느날 평양 거리에서 갑자기 소련군 지프차가 섰다. 한 여군병사가 내리더니 권총을 대고는 "타라"한다. 차안에 있던 또 하나의 여군이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지프차는 여기 저기를 빙빙 돌다가 한 건물에 닿았다. 소련군 병영이었다.

눈 가리개를 풀고 끌려간 방에서 5명의 여군병사가 차례 차례로 덤벼들어서 욕정을 채웠다. 그날 중으로 집에 돌려보내 주려니 생각했는데 사흘이나 감금당했다. 덩치 큰 풍만한 육체의 젊은 여군이 쉴새없이 차례로 덮쳐 거친 숨소리로 '할러쇼 할러쇼' 하며 헐떡인다.

청년의 두 눈은 쑥 들어가고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을때 겨우 석방되었다. 또 눈 가리개를 한 뒤 시내의 한 모퉁이에 내려주었다.

나는 장씨에게 물었다.

"이건 친구의 이야기로 쓰셨습니다만 굉장히 리얼한데, 혹시 선생님 자신의 체험이 아닙니까?"

장건섭씨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와라 료(萩原遼)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서울, 한국논단, 1995), 53~54쪽

이래서 반공서적이 재미있지요(;;;;)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이벤트 공지 - 나눠드릴 책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넵. 제목 그대로 입니다.

이벤트를 통해 나눠드릴 책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처분하다가 남은 책들을 저를 통해 나눠드리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책들이 이번에 나눠드릴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기동전이란 무엇인가 / 박기련 지음 / 일조각 / 1998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2,3 / 박세길 지음 / 돌배게 / 1994

무사와 디지털 전사 / 이준철 지음 / 북랜드 / 2001

산업혁명사 상,하 / 뽈 망뚜 지음, 정윤형, 김종철 공역 / 창작과 비평사 / 1992

알라모 / 장우룡 지음 / 새만화책 / 2004

영웅 김영옥 / 한우성 저 / 북스토리 / 2006

중국의 붉은별 / 에드가 스노우 지음 / 두레 / 1985

첩보전쟁 / 윌리엄 V. 케네디 지음 권재상 옮김 / 자작나무 / 1999

페르시아 신화 / 편집부 편역 / 글사랑 / 1995

Pirates terror on the high seas / Angus konstam / Osprey / 2001

the vital guide to military aircraft / ? / airlife / 1994

war on the eastern front / James Lucas / military bookclub / ?

새로운 책이 목록에 추가되었으니 이벤트를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벤트 공지를 이번 일요일, 즉 1월 17일에 하는 것으로 변경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벤트는 이쪽으로.

어떤 예측

1958년, 북한 정부는 전후복구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원조가 밑바탕에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견지한 '당의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 이지요.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혼란을 겪고 있는 남한에 대해 우월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러한 경향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쏘베트 군대의 결정적 역할에 의하여 한날 한시에 해방된 공화국 남반부에 기여든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일제를 대신하여 그 보다도 더욱 악랄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8.15 해방후 우리나라 남반부에서는 어떠한 민주주의적 사회-경제 개혁도 실시되지 않았다. 우리 인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으며 8.15 해방 직후 일제의 패잔 무리들과의 결사적 투쟁에서 우리의 로동자들이 확보하였던 공장과 광산들은 미제 독점 자본에 의하여 횡탈되였거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의 수중에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남반부 공업은 미제의 식민지 략탈 정책에 의하여 파탄과 파멸의 구렁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늘 남조선에서는 풍부한 전략 자원의 략탈과 관련되는 일부 공업 부문들, 례컨데 중석, 흑연, 동광과 기타 일부 섬유 제품의 생산이 극이 파동적인 곡선을 그리면서 그 생산을 풍전 등화의 운명으로 간신히 지속할 뿐 기계 제작, 야금, 화학 공업 및 기타 중요 공업 생산 부문은 전면적으로 파탄되고 있다.

8.15 해방전에 남조선에 집중되였던 일제의 식민지적 기계 제작공업 마저도 완전히 파괴되였다. 뿐만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계 수입조차 억제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남조선 경제는 기계에 대한 초보적인 수요조차 충족시킬 수 업는 형편에 처하였다.

제철 공업에서 본다면 그의 대표적인 기업체들인 '대한 중공업' '삼화 제철'에서 생산되던 극소량의 선철류조차 국내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생산비 이하의 렴가로써 일본에 공급되였었는데 최근에는 이것마자 증가되는 적자에 못이겨 조업을 중단하고 있다.

남조선 전체 공장수의 33%, 종업원 수의 38.8%를 점하고 있는 방적 공업에서는 1956년 8월 현재로 '대한방적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면방직 공장의 조업률이 62%에 불과하며 특히 중소 직물공장에서의 조업중단률은 95%이고 전체 기업체의 82%가 조업 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다.

1955년에 남조선 제조 공업 총생산액 중에서 36%, 기업체 수의 22%를 차지한 식료품 공업은 그 대부분이 미제의 잉여 생산물인 소맥과 당밀을 원료로 하는 밀가루 제조 공업과 제탕 공업, 미국의 수입 원료로써 그들의 리윤 찌끼를 얻어 먹는 예속 자본가를 육성하는 부문으로 되고 있다.

오늘 남조선의 공업은 이와 같이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의 일로를 걷고 있으며 다시 소생할 아무런 전망도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미제국주의자들의 소위 '원조'의 '혜택'이며 그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김정일,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 『우리 나라의 인민 경제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58), 139-140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이 북한 공업은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묘하지요.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 북한측이 비판한 남한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이 전후복구시기 기초적인 자본을 축적하여 1960년대 공업화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예속 자본가'들의 후계자들 중 몇몇을 '민족 자본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지요.

북한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중공업화는 자체적인 자본 축적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까닭에 지속적인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고착화 시켰고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단초가 됩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식의 중공업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남북간의 경제가 역전된 1970년대 까지도 남한 경제의 붕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부럽지 않은 낯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 1월 12일 화요일

이벤트 공지를 조금 늦추겠습니다

이벤트를 신청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벤트 공지를 조금 늦추려고 합니다.

원래 어제 저녁에 결과를 공지하고 책을 나눠드릴 날자와 장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주말에 급한일이 생겨서 강원도에 다녀오게 됐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더 있어서 이것이 정리되는 대로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즉 화요일이나 수요일 중에는 정리가 될 것 입니다.

2010년 1월 7일 목요일

중앙시네마에서 에반게리온을 연장상영합니다.

중앙시네마에서 에반게리온 序와 破를 다음주 수요일까지 연장상영합니다.

만세!!!

내일까지 해야할 일이 있어서 1월 1일에 본 것이 마지막 극장관람이 되나 했는데 다행히 더 볼 수 있게 됐군요.

제가 나눠드리는 책의 추첨은 에반게리온 상영이 종료되는 주의 일요일에 하겠다고 공지를 드렸는데 에반게리온이 연장상영에 들어갔으니 다음주 월요일 저녁에 공지 하는 것으로 변경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

넵. 많은 분들이 눈치 채셨겠지만 불법날림번역 땜빵포스팅입니다. 그래도 살짝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인 '안방전선'의 이야기 이지요.

독일과 영국 여성들의 생활은 두 나라의 전세가 점차 변화해가면서 총력전의 다섯가지 요소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대규모의 전시 동원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남성들이 군대나 공장에 징집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잠시 남성들과 떨어져 지내거나, 또는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독일과 영국 모두 자국의 군인이나 외국군인, 전쟁포로, (독일의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남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민간인을 목표로 한 폭격으로 대규모의 구호업무와 소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경제적인 총력전으로 물자의 부족과 배급, 그리고 암시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섯번째는 남성들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민간 업무나 군대의 보조적인 업무에 투입되거나 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여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라마다 달랐으며 또한 개인의 환경별로도 달랐다. 특히 독일의 경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처우는 "인종적인 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독일의 "가치있는" 여성들이 총력전으로 부터 받은 영향은 비슷한 면이 많았으며 또한 다른 점도 많았다. 현지 여성들과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점이 많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들을 동원한 지역에서는 다른 점 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일의 경우 남성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점령지역에 배치되어 가정을 비우는 경우가 영국 보다 많았고 그 기간도 더 길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숫자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 남성 중 300만명이 전사한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독일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독일은 영국보다 과부,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딸, 형제를 잃은 여성, 애인을 잃은 여성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남성들의 사망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941년 11월 부터 약혼한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가 전사했을 때 "영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태어나게 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도록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에서는 전사자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전쟁포로와 실종자도 영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는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독신을 택했다. 자신의 남자가 북아프리카나 중동, 극동 전선에 배치된 영국 여성들의 경우 불안감이 심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군대에 징집된 영국 남성의 상당수는 영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루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장기간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 떨어지게 되면서 가정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익숙하지 않은 책임을 떠맏아야 했다. 여성들은 상점이라던가 독일에서는 작은 농장(여성들은 전쟁전에는 남편의 지도하에 가끔씩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과 같은 가업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재주껏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어머니가 노동을 하는 경우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포이커트(Deltlev J. K. Peukert)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반체제 청소년 조직이었던 에델바이스 해적단(Edelweißpiraten)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전사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부부나 연인들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평화시에는 안정적이었던 관계들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의 남성들이 군대나 산업계에 동원된 상태에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남성들이 쏟아져 들어온 곳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영국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외국 군대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독일도 1944년 말 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 기간 중 군부대의 이동이 빈번했으며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 징집된 신병들이 자국 내의 군부대로 입소했다. 영국은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군, 네덜란드군, 폴란드 군 등 약 50만명 정도의 외국군대가 주둔했으며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그 숫자가 거의 150만명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을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종 이들로 부터 성병을 옮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성행위를 매개로 한 질병이 1941년 부터 1942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는 1942년에 질병에 걸린 여성의 3분의 2가 군인들로 부터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한 여성들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이곳의 군인들과 접촉했으며 정부는 10대 소녀들이 군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기차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 출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포명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많은 독일 여성들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생과부로 지내는 기간이 늘어났으며 군인들이 독일 본토나 외국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비슷한 쾌락을 즐기려 했다. 독일 정부는 여성들의 문란한 행위에 대해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42년에는 "전선의 병사들에 대한 모욕죄"를 도입한 데 이어 다시 간통한 여성은 가족수당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고 1943년 3월에는 전사한 군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연금 지금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을 합법화 했다.

한편 영국과 독일은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다.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Christabel Bielenberg)는 독일에서 만난 미군 조종사의 "건강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며 또한 풍요로운"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성들은 미군의 "멋진 군복과 .... 많은 돈, 그리고 자잘한 사치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독일 여성들의 곤경은 심각했으며 독일의 공공시설들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 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점령군인 연합군, 특히 미군과 관계를 가지면서 초콜렛이나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구했으며 이것들을 직접 쓰거나 식량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하일브론(Heilbronn)에 진주한 미군들은 "얼마 안가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피난온 문란한 여자나 초콜렛으로 유혹한 슈바벤(Schwaben) 여자들을 자신의 여자친구로 삼았다." 영국에서도 물자 부족은 심각했다. "우리는 자크마(Jacqmar) 스카프나 나일론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그 여자들이 (미군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국 군인들을 사귀고 싶어하는 젊은 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나일론 스타킹, 그리고 초콜렛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외국 군인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그리고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크랭(J. A. Crang)은 "멋진데다 돈 많은 캐나다군과 미군이 (영국 본토에) 주둔하게 되면서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잘 서술했다. 영국군은 이 문제에 크게 신경썼으며 공무원들을 동원해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하도록 했다. 외국군대가 떠나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 아이를 가진 채 남겨진 많은 독신여성들은 외국 군인들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원망했다."

당당하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외국군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여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 성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군 전쟁포로들은 공식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접촉했으며 음식이나 다른 물품들을 얻기도 했다. 또한 영국 여자와 전쟁 포로간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부터 영국으로 이송된 전쟁 포로가 급증했으며 이중 일부는 농가에 배치되어 일을 거들었지만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게다가 연합군, 특히 미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은 1939년 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많았으며 이 숫자는 1944년에 7백만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 많은 포로들이, 특히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포로들이 독일의 농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은 가족 농장에 함께 살았는데 전쟁 후반기에는 가정의 유일한 남성 노동력인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영국에 비해 여성들이 노동력을 의존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동기(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거나 도는 농장일을 돕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거나)와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치욕적이게도 이탈리아 포로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녀들은 매우 심한 도덕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는데 그쳤으나 독일에서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인" 여성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독일에서는 지역의 나치당 간부들이 여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공개적으로 삭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전쟁포로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성적 도덕의 문제였으나 독일에서는 정권의 과도한 인종적 정책으로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Jill Stephenson, "The Home Front in "Total War" : Women in Germany and Britain in the Second World War",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13~217

인용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총력전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서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2차대전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총력전 체제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데다 패전으로 인해 수백만의 외국군대가 쏟아져들어오는 사상초유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여성의 역할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인용한 글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이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특히나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강구한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여성역할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겨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이미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도덕이 위태위태해진 독일 사회에 미국이라는 재미있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콩가루로 변해갑니다. 윌러비(John Willoughby)는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라 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점령 초기 미군 당국이 독일 민간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이 인기가 많다보니 점령초기 부터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남자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마치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수적 성향의 남자들이 여성들의 허영심이나 성적인 방종을 비난하는 것 처럼 점령초기의 독일에서도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약간 더 골때리는 것은 미국쪽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독일 여자들이 순진한 미군 병사들을 사냥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점은 한국전쟁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춘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인 비난이 꽤 심했다고 하지요.(한국전쟁기 매춘과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전쟁포로가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는 경우입니다. 연합군에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보다 독일군에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가 이 점에서 유리했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물론 전쟁초기 소련군 포로의 경우는 독일의 농장에 배치받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갈 확률이 더 높긴 했습니다만. 토마스 크레취만이 주연으로 나온 독일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마누라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포로 중에서도 현지 여성을 꼬셔서 눌러 앉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크놉(Guido Knopp)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게오르그 게르트너(George Gärtner)가 있을 겁니다. 이 양반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다죠;;;; 하지만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 여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풍족한 양키들이 있었던 까닭에 독일군 포로들은 여자 문제에서는 독일 본토의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보다 더 못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2010년 1월 2일 토요일

이벤트(를 빙자한 창고정리)

저의 비실용적이고 시시껄렁한 블로그를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작은 이벤트를 해 볼까 합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말씀 드렸듯 새해 벽두부터 에반게리온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 기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벤트를 빙자한 재고방출(;;;;) 정도 되겠습니다. 그저 그런 책들을 나눠드리는 것이라 무진장 찔리는군요;;;

아래에 책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올리니 가지고 싶으신 책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그 책을 드리겠습니다.

단. 혹시라도 같은 책에 신청자가 겹칠 경우 추첨을 할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는 에반게리온 극장판(序와 破 모두)을 많이 보신 분이 유리해 집니다. 예를들어 에반게리온을 안보신 분이 '한표'라면 에반게리온을 보신 분은 '한표+에반게리온 관람 회수 만큼의 표'를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으나 만약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수십번 보신 분이 있다면 그분이 책을 다 쓸어가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반게리온 영화표를 찍어서 제 메일(panzerbear@지메일.com)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추첨(???)은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서울 상영관에서 최종적으로 내려간 주의 일요일에 하고 공지는 곧바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West Point Military History Series - Ancient and Medieval Warfare : 제목대로 평이한 개설서 입니다. 제목은 중세전쟁사 까지 다루는 것 처럼 되어있으나 대부분의 내용이 그리스와 로마 전쟁사입니다. 그럭저럭 읽을 만 합니다.



서양문명의 역사 1~3권 : 4권이 없긴 합니다만 상태는 나쁘지 않습니다.



Retreat to the Reich - The German Defeat in France 1944 : 아마 이번에 공짜로 드리는 책 중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책이 아닐까 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주하는 독일군의 상황을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한국의 군제사 : 역시 평이한 개설서 입니다. 무난하게 읽을만 합니다.



Clash of Wings - World War II in the Air : 2차대전 항공전역에 대한 개설서 입니다. 역시나 무난하게 정리를 해 놓았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중국근현대사 : 일반적인 개설서라 딱히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군요.



Fighting Aircraft of World War II - 사실 이런걸 드리는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생때 영어공부를 해 보겠다고 산 책인데 사실 요즘은 위키만 뒤져봐도 이 책 보다는 훨씬 알찬 내용이 많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가져가실 분이 있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스크린 밖의 한국영화사 : 친일파가 영화계에 있어서도 만악의 근원이라고 성토하는 좀 뷁스러운 책입니다. 1권을 읽고 무지막지 실망했는지라 1권밖에 없습니다;;;



가미카제 : 괴악한 번역이 일품(?)인 군사소설입니다. 역시 가져가실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Ostfront - Hitler's War on Russia 1941-45 : 오스프리에서 내 놓는 적당히 잘 정리된 개설서 중 하나입니다. 글도 적당하고 지도도 적당하고 도판도 적당한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한국의 귀신 : 무라야마 지준의 역작 '조선의 귀신'을 베껴서 잡스러운 괴담집으로 다운그레이드한 잡스러운 책입니다. 고등학생 때 여행을 떠나면서 고속버스터미널 서점에서 산 책인데 그럭저럭 읽을 만 했습니다. 역시나 가져가시겠다는 분만 있으시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우와 62년 : 설명이 필요없는 복슨상님의 대표작(?) 입니다.


이 외에도 정리하다가 나오는 책이 있으면 더 추가해서 올리겠습니다.


※ 조금 더 추가합니다.


Wehrmacht - The Illustrated History of the German Army in WW II : 독일군의 시점에서 바라본 아주 간략한 2차대전사 개설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공부한다고 샀다가 부실한 내용에 잔뜩 실망한 한 책 입니다. 이 책 또한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타임라이프 인간세계사 - 탐험시대



타임라이프 인간세계사 - 근대유럽



한국전쟁 : 전쟁기념관이 처음 열었을 때 가서 산 책 입니다. 사실 내용은 정말 별 것 없죠;;;;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정치와 전쟁 - 20세기의 주요 전쟁을 중심으로 : 사실 이 책도 썩 좋은 책은 아닙니다;;;;



Hell on the Eastern Front - The Waffen-SS War in Russia 1941-1945 : 무장친위대가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작전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1월 3일 추가



20세기 결전 30장면 : 싸게 팔길래 한권 샀는데 나쁘지는 않았던 책 입니다. 세부적으로 약간의 문제도 있지만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 사극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씨의 책 입니다. 재미있게 착착 잘 읽히는 괜찮은 대중서적 입니다.



독일무장친위대 군장가이드




독일군 보병병기 대백과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 작년에 개봉해 쪽박찬 T4의 프리퀼입니다. 잔뜩 기대하고 샀다가 근검절약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 물건입니다. 가져가시겠다는 분이 있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일본전통사회의 이해 : 대학교에 있을 때 교재로 썼던 책인데 개설서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책 입니다. 제가 수업들으면서 표시한 자국이 조금 있습니다.



임진왜란 -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 민중사적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괴작'입니다. 네. 정말 설명이 필요없는 괴작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멋 모르고 샀다가 쓴맛을 보게 해 준 멋진 책 이지요.



Das Reich - The Military Role of the 2nd SS Division : 무난한 개설서 입니다. Otto Weidinger의 걸작인 다스 라이히 사단사를 적당히 잘 편집해서 요약한 물건입니다.

중앙시네마에서의 에바 序, 破 연속관람

새해 첫 날인 어제는 중앙시네마에서 느긋하게 에반게리온 序와 破를 관람하며 즐겁게 보냈습니다.메가박스에서 破를 개봉할 때 이벤트로 序와 함께 심야상영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개인 사정으로 그 기회를 놓쳐 아쉽게 생각하던 터였습니다. CGV와 메가박스 등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破가 상영중단됨과 동시에 중앙시네마가 에반게리온의 상영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일주일은 상영할 예정이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불만이라면 중앙시네마에서는 필름으로 상영을 해서 화질이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디지털 상영으로만 보다가 갑자기 필름으로 보니 화질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더군요. 디지털 상영관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보였던 세부적인 묘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들어 아스카가 3호기 실험장에서 미사토와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을 보면 미사토가 3호기를 바라볼 때 아스카가 타고 있는 케이블카가 올라가는 모습이 필름 상영판에서는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소소한 재미가 스크린 구석에 묘사된 세부 묘사를 찾아내는 것인데 그 점에서 불합격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살짝 좋지 않은 화질이 상태나쁜 복사판 비디오로 에반게리온을 처음 봤을때 같은 느낌을 줘서 나름대로 즐겁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약간 이상했던 점은 破를 먼저 상영하고 그 다음에 序를 상영하는 구성을 취했다는 것 입니다. 1월 4일 부터는 序를 먼저 상영하고 破를 다음에 상영하는 방식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군요.

잡담하나 더. 새해 첫날을 에바 감상을 하면서 즐겁게 시작했으니 기념삼아 작은 이벤트를 하나 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