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관대한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의 관대함(???)을 엿볼수 있는 일화 하나입니다.

기묘하게도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대부에 동의한 뒤 중국이 이것을 환불하는 문제와 환불 방법에 대한 문제는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환은 이루어 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기 도입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했으나 어떤 경우에는 스탈린이 그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스탈린은 중국이 인민군 2개 사단(1950년 초 북한군에 합류한 2개의 조선계 사단과는 별도로)에 장비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련이 전쟁 중 공급했던 64개 사단 분량의 장비 가격 중 20개 사단 분의 가격을 면제해 주었다. 중국은 나머지 무기에 대한 비용은 분할해서 지급했다. 모든 차관은 연간 10억 위안의 비율로 상환되어 1965년 말에는 모두 청산되었다.

중국 공군의 항공기들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4월 21일)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그 후 인민해방군은 (총 22개 중) 10개 전투기사단을 교대로 전쟁에 투입했다. 초기에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군의 장비에 MiG-15가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는 MiG-9 전투기만을 판매하는데 동의했다. 중국측이 구식인 MiG-9 전투기는 미군의 최신예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침내 스탈린에게 까지 알려지자 스탈린은 중국에게 372대의 MiG-15를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사실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땜빵 포스팅입니다.;;;;;

2009년 6월 8일 월요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군 교육 문제

뉴욕타임즈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증강 문제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Erratic Afghan Security Units Pose Challenge to U.S. Goals

사실 이 기사는 미국이 1945년 이래로 꾸준히 겪어왔던 이야기들의 재탕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교육시켜왔습니다. 한국과 같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던 반면 베트남과 같은 끔찍한 실패도 있었지요. 이라크의 경우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미국 고문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여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낮은 교육수준, 유능한 현지인 장교의 부족 문제 등등.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교육은 같은 이슬람권이었던 이라크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지만 사정은 더 나빠 보입니다.

이라크는 중동국가 치고는 양호한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후세인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국가와 군대체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초기에 저지른 삽질만 아니었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안정화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보다 사정이 더 열악한 곳 입니다. 소련의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역대 군사고문단 활동 중 아프가니스탄이야 말로 최대의 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러나 저러나 뉴욕타임즈가 인터넷 기사를 유료화 해 버린다면 정말 재앙일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이상 공짜로 읽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2009년 6월 7일 일요일

救職의 決斷!

통계는 어떤 문제에 대해 긴 글 보다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아래의 표는 1961년의 육군 장교 전역 통계입니다.


이 통계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가

윤민혁님이 댓글에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표를 하나 더 올립니다. 1962년도의 육군 장교 전역에 대한 자료는 제게 없어서 1960년의 통계만 올립니다. 1960년 또한 4ㆍ19로 인한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해 입니다. 1960년의 통계 또한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감군 계획에 따라 1960년도에 감축할 장교의 숫자입니다. 재미있게도 4ㆍ19이후 원래 예정에 없던 장군 전역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관급과 위관급에서도 원래 계획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교가 전역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9년 6월 5일 금요일

서동만 교수님 별세

슬픈 소식입니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 별세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05년에 출간된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의 저작비평회였습니다. 북한 자료를 이해 하는 문제 부터 대북 정책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군요. 저작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제 어설픈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 주신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가시는군요.

서동만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퍼레이드용 군대

1949년 8월 19일,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육군부 계획작전국(Plans and Operations Division)의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는 광복절 기념식에 대한 로버츠 준장의 짤막한 감상이 실려 있는데 꽤 의미심장합니다.

(광복절도) 다른 “중대한”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열병식은 굉장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치 베테랑 군인들 처럼 보였습니다. 장비, 군복, 차량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열병식을 하는 것 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As is usual on these “critical” days, nothing happened.* The Army parade was a knock-out. They looked like veterans – equipment, uniforms, vehicles all spotless. If they can only fight as well as they parade, we are “in”.

로버츠 준장이 볼테 소장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는 내용.

미국인들은 한국군 장교들이 겉치레를 중시하고 위세를 부리는데 신경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고문관들의 불평 중 하루 종일 훈련은 하지 않고 대대 전체를 동원해 사열준비만 하는 경우도 있는걸 보면 한국 장군들은 사열식 페티쉬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죠.

박정희가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해 사열식을 하는 등 요란한 전역행사를 했던 걸 보면 정말 한국 장군들은 폼 잡는걸 너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2009년 5월 31일 일요일

devil effect

정치 관련 포스팅들을 읽다 보니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면, 후광 효과와 정반대되는 '악마 효과(devil effect)'도 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이기적이라든가 하는 두드러지가 안 좋은 특성 때문에 다른 특성들도 실제보다 더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실제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고 더 우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한번은 어느 미성년자 강간 사건에 배심원으로 출석했다가 악마 효과의 극단적인 예를 보았다. 나와 함께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사람 하나가 피고인 심의를 시작하면서, “저 사람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는 저 자의 죄를 찾아야만 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후광효과의 영향을 받을 때는 자신들이 편견에 치우쳐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 한다.

스튜어트 서덜랜드(Stuart Sutherland)/이재진 옮김, 『비합리성의 심리학(Irrationality)』, 교양인, 2008, 47쪽


우리나라에도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하나 있죠.


“저 사람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는 저 자의 죄를 찾아야만 해요”


이제 가카에게 남은 선택은?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재활용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I hope that it can be impressed upon the Department that here we are not dealing with wealthy U.S. educated Koreans, but with early [sic], poorly trained, and poorly educated Orientals strongly affected by 40 years of Jap control, who stubbornly and fanatically hold to what they like and dislike, who are definitely influenced by direct propaganda and with whom it is almost impossible to reason.

- Lt. Gen. John R. Hodg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Vol.8,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630

세월이 흐르고 교육수준은 높아졌건만 근본적인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는 듯한 느낌.

참 난감하죠.

쩝;;;

2009년 5월 25일 월요일

무안단물?

6년전 빈의 벼룩시장에서 샀던 Division Das Reich 3권의 제본이 일부 뜯어지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산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본이 뜯어지니 약간 기분이 나쁘더군요. 적당한 접착제를 찾아 서랍을 뒤지다 보니 그 이름도 찬란한 "Made in Germany"가 붙은 Uhu 본드가 나왔습니다.


붙여보니 꽤 잘 붙더군요.^^


길바닥에서 사온 책 중 제본이 망가진 책이 조금 더 있었는데 모두 Uhu 본드로 붙여버렸습니다.


냄새가 별로인 점을 제외하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안단물이 따로 없습니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대박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직후,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의 전쟁포로국에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2월 3일 현재까지 관할 수용소와 전선의 임시수용소에 19만6515명의 포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내 : 86,894명
전선임시수용소 내 : 78,951명
보건인민위원회 소속 병원 내 : 11,995명
수용소,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 8,477명
수용소, 이송 중 탈진 또는 질병의 결과로 사망한 자 : 10,198명

이 밖에 각 전선군 및 야전군사령부의 집계중인 보고에 따르면 1만6천명의 포로가 내무인민위원회 관할의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 중 16,059명의 포로는 노동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 2,448명
부사관 18,243명
사병 66,203명

장교 : 장군 4명, 대령 23명, 중령 31명, 소령 68명, 대위 330명, 중위 141명, 소위 625명, 사관후보생 1,078명, 상선단 장교 6명, 기타 간부 141명

이 밖에 돈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전선군 관할지역의 포로 중 장교가 2,500명이고 이 중 장군이 24명 입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öhr 1943-1953, Bechtermünze Verlag, 1996/2000, s.38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 번으로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가 전쟁이 시작된 뒤 1년 반 동안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장군은 여섯배!

그야말로 대박 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스탈린 동지도 꽤나 흐뭇하셨을 듯.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Men on Iron Ponies 라는 단행본이 출간됩니다

아마존 뉴스레터를 받았는데 Matthew Darlington Morton이라는 저자의 Men on Iron Ponies라는 단행본이 나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목과 저자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예전에 읽은 박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Men on Iron Ponies는 2004년 Morton이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입니다. 군사 분야로 센스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논문이 미국 기병대의 기계화를 다룬 것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긴 한데 이미 논문을 가지고 있는지라 책이 출간되더라도 구매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Morton의 논문은 플로리다 주립대학 전자도서관에서 전문을 공개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링크 : Men on "Iron Ponies," The Death and Rebirth of the Modern U. S. Cavalry


예전에 유사한 주제를 다룬 Through Mobility We Conquer: The Mechanization of U.S. Cavalry가 출간 되었을 때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이 책이 비치되어 김이 샜던 기억이 떠오르는 군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경제 사정을 감안해서 책을 사야 되지만 실제로 재미있는 책이 나왔는데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배가 아픕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불황의 한 가운데에 있으니 입맛만 다시는 수 밖에요.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장하준에 대한 단상

sonnet님이 지난 4월 3일에 있었던 SBS 시사토론을 해설과 함께 요약해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onnet님이 인용하신 토론 내용을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토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SBS시사토론: 이창용-장하준(sonnet)


저 또한 다른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창용이 장하준에 대해 우세한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봅니다. 사실 지난 정권에서 장하준이 명성을 떨치다 보니 이 어린양도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국가의 역할’을 모두 돈 주고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장하준이 SBS 시사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니 장하준이 그의 저작들에서 보여준 취약점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창용은 꽤 설득력 있는 사례들을 들고 나오는데 장하준은 왜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질 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장하준이 들고 있는 사례들은 대공황 이전의 세계를 설명할 때는 적절할지 몰라도 대공황 이후의 세계를 설명 하는데는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경우는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장하준은 선진국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주로 19세기와 1차대전 이전의 20세기의 사례를 들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선진국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위상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결과 대공황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된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장하준의 저작들은 재미있긴 하지만 선진국의 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오늘날의 세계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 입니다. SBS 시사토론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됩니다.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봉하마을에 가서 보물찾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뉴스를 보던 중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보이더군요.

盧 "명품시계, 아내가 버렸다" (연합뉴스)

봉하마을 어디인가에 1억짜리 시계가 굴러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봉하마을에 가는 분들은 보물찾기를 해 보는 것도 좋겠군요.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경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지난번에 슈타인호프님이 쓰셨던 ‘한국 군경의 총기 교체(1946~1951), 그리고 최후의 빨치산이 가졌던 총’에 엮어서 씁니다. 지난 번에는 한국전쟁 직전 육군의 소총 부족 문제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국립경찰의 총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죠.

먼저 아래의 표를 보시겠습니다.


출처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이 표는 1949년 말 미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반기보고서(Semi-annual Report)의 부록에 실려있는 도표를 참고로 한 것 입니다. 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느끼실 겁니다. 네, 제주도와 철도경찰의 무장 현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가 참고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본에는 이상하게도 제주도 이하가 잘려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표의 내용으로 돌아가지요.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경우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도 나와 있듯 빨치산이 38식 소총을 많이 보유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에 동원된 경찰이 대량의 38식을 보유했던데 있습니다. 전북과 전남의 경우도 경북 보다는 적지만 역시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의외인 것은 경찰이 보유한 소총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미제 카빈이라는 점 입니다. 빨치산을 다룬 회고록이나 소설 등을 읽다 보면 일본제 소총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후방의 경찰이 사용한 총기는 일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실제 통계를 보면 카빈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빨치산 토벌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일제 소총 보유량이 많고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경찰은 미제 카빈의 보유량이 압도적이라는 점도 역시 의외입니다.

이 밖에 경기도 경찰과 강원도 경찰의 경우 경상도와 전라도 경찰은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은 50구경 중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는 7정, 강원도는 4정을 보유하고 있군요. 다음으로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 경찰이 가장 많은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서울과 경기도 보다도 더 많은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피의 책(The Book of Blood)

오랜만에 소설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상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장르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다 보니 소설을 돈 주고 사는 경우도 매우 드문 편 입니다.

며칠 전 저녁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조금 쌓인 포인트로 어떤 책을 사는게 좋을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가 탄 가장 앞의 칸이 텅 비었고 반사적으로 작년에 재미있게 봤던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이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블로그에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의 영화판 이야기를 했을 때 이준님이 원작 소설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 일도 있고 해서 번역판이라도 구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그날이 되어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국어판 피의 책을 샀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적었습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원작 단편집은 분량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책의 표지 윗 부분에 Book of Blood ‘Best Collection’이라고 인쇄되어 있더군요. 단편 몇 개를 골라서 번역한 것이라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서 피의 책(The Book of Blood), 미드나잇 미트트레인(The Midnight Meat Train), 피그 블러드 블루스(Pig Blood Blues),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Sex, Death and Starshine), 스케이프고트(Scape Goat)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좋은 번역의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소설의 경우는 재미있게 읽히도록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서 번역도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어판을 읽지 않았으니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만.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을 읽으니 영화판과 다른 사소한 점이 몇 가지 있던데 원작의 주인공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더군요. 영화판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자를 추적하다가 점차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식성의 변화를 통해 나타냈는데 원작 소설의 주인공은 그냥 평범한(?) 식성의 소유자입니다. 단편 소설을 장편 영화로 각색하면서 늘어난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내용의 변화를 준 셈인데 꽤 훌륭한 각색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준님이 예전에 설명해 주신 것들이라서 대략적으로 알기는 했지만 직접 읽는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 스케이프고트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헤브리디스 제도(Hebrides) 어딘가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이 풍기는 분위기는 클라이브 바커가 제작에 참여한 게임, 언다잉(Undying)의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엉뚱하긴 하지만 한국 작가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공포 소설을 쓰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더군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단편들도 있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Mission Accomplished???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백악관, 워싱턴
1948년 8월 15일.

친애하는 하지 장군.

남한에 합법적 정부를 건설함으로서 장군에게 부여된 어려운 임무가 완결되었습니다. 귀관의 임무는 크나큰 성공으로서 완료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정권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된 것은 우리 정부가 그렇듯 귀관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귀관은 박해 받는 민족이 자유를 되찾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관은 미합중국 군대를 지휘해 한국을 잔인무도한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장군이 담당한 이 불행한 나라의 국민들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자유 선거를 치렀습니다. 해방된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에게 부여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매우 막중합니다.

장군은 자신의 수완, 솔선, 외교적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들을 극복했으며 미국과 한국 국민은 장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 입니다.

해리 트루먼

********


The White House, Washington,
August 15, 1948

My dear General Hodge

The Achivement of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completes the difficult task that was assigned to you. Your mission has been accomplished with outstanding success.

As the government of this area is turned over to the Korean people, it must be very satisfying to you, as it is to our Government, to know that you have been largely instrumental in restoring freedom to a persecuted nation.

You led United Stataes troops to liberate Korea form the tyranny of a ruthless conqueror. The people of your area of this troubled country have held a free election in which a remarkably high percentage of the qualified voters participated. How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destiny rests with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a free people.

By your skill, initiative and diplomacy you have overcome seemingly insurmountable obstacles and you have earned the gratitude of the people, both of the United States and of Korea.

Very sincerely yours.

Harry Truman

August 17, 1948, Press Release on Replacement of Commanding General, US Armed Forces in Korea,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TS Sec. IV & V Box 22 (Folder #2)

그러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2009년 5월 7일 목요일

Back to the Source 배너를 달았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캠페인이 시작됐습니다.

이름하여 Back to the Source!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가 횡행하는 요즘 참으로 훈훈한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9년 5월 5일 화요일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의 조선 관련 서술

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환빠 장군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라는 긴 제목과 제목에 걸맞게 두툼한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당장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펼쳐보니 역시나 환빠 도서였습니다.

모든 환빠 서적들이 그러하듯 책의 내용은 대부분 정신을 안드로메다 탐사를 보내는 수준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군사안보 문제를 환단고기에 엮어 내는 괴악한 감각의 소유자가 썼다는 점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희한한 취향을 가지셨는지 하도 궁금해서 저자의 약력을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195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14기), 이학사, 보병육군소위
1962년 미 특수전학교 유학
1965년 보병학교 유격학부 교관
1966년 주월 맹호부대 전사(戰史) 장교
1970년 독일군 참모대학 유학

(중략)

1985년 육군본부 작전참모장
1987년 육군 제1군단장
1988년 제1야전군 부사령관
1993년 국가안보회의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후략)

헉.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만 밟은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환빠의 거성 중 한 분인 고(故) 박창암 장군도 미 특수전학교에 유학하신 경력이 있으시지요. 미 특수전학교 교관 중 아틀란티스나 무우제국에 심취한 사람이 없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목차도 환상적입니다. 일부만 살펴보죠.

제 1절. 하느님과 으뜸신의 창세(創世), 개천(開天)시대
1. 하느님과 으뜸신의 우주 만물 창조
2. 광의의 우리민족(동아시아 諸民族) 형성과 발전
3. 평지평원원주민족 최초국가 환웅의 신시(神市)
4. 우리민족(국가)의 국가안보전략사상(사) 태동
5. 환웅천왕의 천명사상(天命思想)과 신정(神政)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기독교+환단고기 세계관을 기초로 여기에 군사학을 뒤섞어 이 괴작을 완성했습니다.

본문 자체가 매우 난감하기 그지 없는데 ‘동아시아 종주민족’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일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책이 기반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지금으로부터 대략 일만년 전 황해바닥(당시로부터 대략 BC4000년에 이르기 까지 황해는 육지였다)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열도의 평원 평지에는 유전인자를 같이 하고 농경생활(일부 북부에서는 반농반목도 하였다)이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동일민족이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 역사활동(석기시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BC300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구상의 대홍수를 비롯하여, 계속된 과우기(寡雨期)를 맞이하면서 황해가 조성되고 대륙과 반도와 열도가 생겨났다.(어떤 이는 이미 1만년 전에 황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럴 때 특히 황해바닥 평지민족은 동서남북방향의 구릉고지로 이주하였는데 오늘날의 한반도와 왜열도에는 당시에는 환경조건이 여의치 않아 당분간 원주민 그대로 소수의 조상들이 비교적 조용하게 그러나 나름대로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굳이 분류한다면 이들이야 말로 순수한 평지 평원의 원주민 이었다.

(중략)

그후 또다시 우리 원주민족의 한 고향, 즉 옛날 우리의 서언왕이 주름잡던 徐帝國이 번성하던 지역, 회대(淮垈) 지방의 초(楚)나라에서 항우와 유방이 그곳 주민들과 궐기하여 한(漢)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오늘까지 대륙의 그 우리 흡수동화민족을 이름하여 한민족(漢民族)이라 한다. 따라서 이 한민족은 바로 조상을 공동으로 하는 광의의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대륙의 우리원주민족적 성향이 강한 이 황해안 지대에 우리의 백제, 신라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전통적으로 주(周)시대에도 허용되었던 원주민 종족들의 종묘사직의 보존, 제사모시기와 함께 우리 평지평원원주민족 특유의 문화와 습성을 국시(國是)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특히 대륙에서 백제보다 북방인 낙랑지역에 자리한 고구려는 이 시점에서 원주민족성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우리 원주민족의 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서방민족이나 유목민족에 의한 민족적 식민이나 국가적 합방에 의한 혼혈과정을 비교적 경험함이 없이 평원평지원주민족의 혈통과 문화전통을 계속 유지해 왔던 역사지리적 안보환경을 가진 우리민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명실공히 우리 종주민족에 의한 우리 종주민족국가로서 새로운 민족부흥의 역사를, 이후 900여년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된다.

문영일,『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7), 187~189쪽

;;;;

넵. 살짝 할 말이 없습니다.

황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 민족의 기원 평원평지 문명이야기는 무슨 아틀란티스 이야기 같군요. 이 세계관을 가지고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를 리메이크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Weinberg의 Hitler's Foreign Policy 개정판을 찾던 중...

Gerhard L. Weinberg가 쓴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의 개정판, Hitler's Foreign Policy 1933-1939: The Road to World War II를 읽어야 할 일이 생겨서 서울 시내의 도서관 중 개정판을 갖춘 곳이 있는지 찾아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검색해 본 도서관 중 개정판을 갖춘 곳은 전혀 없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대 도서관이 구판을 비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 다른 대학들은 Weinberg의 저작 중 World at Arms나 World in the balance의 한국어판인 「히틀러의 오판」정도만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화여대의 경우 1994년에 나온 구판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곳들이 소장한 구판의 경우 1970~80년대에 나온 것들이라 상태가 좋지 않을텐데 개정판을 구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2005년에 나온 개정판의 경우 하드커버가 좀 비싼 편이라 그동안 사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읽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조금 난감하군요. 급박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뭔가 궁금한게 생겼는데 확인할 길이 없으니 엄청나게 찝찝합니다.

잡담 하나. 확실히 연세대학교 도서관은 쓸만한 책이 많습니다. 도서관 상호대차를 할 때 이곳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시사IN 85호 특집과 오늘자 한국일보 사설

시사IN 85호는 커버스토리로 ‘촛불 1년 무엇을 남겼나’라는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특집 치고도 매우 많은 분량을 촛불 1년 기획특집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미네르바 인터뷰’라던가 보수주의 논객들의 촛불 1주년 좌담회 등 흥미로운 기사가 많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제 개인적으로는 작년 촛불시위의 의의에 대해서 정리가 덜 된 상태인데 한 가지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 입니다. 그 방법이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매우 거칠게 표출된 것 도 사실이지만 시민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촛불시위로 촉발된 정치적 관심이 투표 참여 등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로 제대로 전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물론 촛불 시위 과정에서 근거 없는 주장이 횡행하고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이 표출된 사례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시사IN 85호의 특집 기사 중에서 ‘보수주의자 3인 방담 : 촛불이 진보의 성찰 기회 날렸다’라는 대담은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대담에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대변인 변철환, 공정언론시민연대 사무처장 최홍재, 미디어 워치의 변희재(;;;;) 등 세 사람이 참여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최홍재의 지적 중 ‘광우병 대책회의’가 쇠고기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나 진보 진영이 촛불 시위의 성과에 고무되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네르바 박대성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알맹이가 없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박대성의 해명 몇 가지는 꽤나 미심쩍습니다. 특히 미국 금융계에서 일했다는 거짓말을 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자전수필의 내용을 따라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 처럼 만화책 주인공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백기가 분량의 논문 자료를 가지고 공부했다고 자랑을 하면서 검찰이 모든 자료를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정말 거짓말 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국일보 이야기로 넘어가서…

오늘 자 한국일보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이 꽤 재미있는 글을 썼는데 노사모와 박사모를 모두 연예인 팬클럽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노사모에서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을 듯 싶은데 제 생각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의 평가가 적절한 듯 싶더군요.

하지만 오늘 자 한국일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신문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신문 엑스포’라는 사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지난번에 혹평한 동아일보 사설, ‘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와 마찬가지로 신문이 팔리지 않아 힘드니 신문 좀 읽자는 내용이지만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 사설은 좌빨신문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치졸한 중상모략 까지 했지요;;;)

잡담 하나. 1주년을 맞아 다시 촛불을 들자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다시 촛불을 드는 것은 무익한 역량의 낭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의 촛불 시위도 2개월 만에 동력을 소진하고 탄력을 잃었는데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가 불확실한 이 시기에 무리해서 판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갑자기 대중 참여를 촉발할 새로운 사건이 생길수도 있겠습니다만…

잡담 둘. 시사IN의 이번 특집 기사 중 여대생 사망설을 유포해 구속된 ‘또랑에 든 소’라는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아직도 여대생 살해가 은폐 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진실 규명을 위해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도 이 정도면 가히 정신병 수준입니다.

2009년 5월 1일 금요일

모 기관의 어떤 자료집과 경제

술자리에서 모 기관에서 수십년간 내 오던 어떤 자료집의 최신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신판에서는 '경제' 관계 내용이 중점적으로 서술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미확인 이지만 '가카'의 기업인 시절 '활약상'에 대한 내용도 제법 포함될 모양이더군요.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간만에 모형을 만졌습니다.

어제 원고를 마감해서 넘겼습니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주던 물건을 처리하니 마음이 홀가분해 지더군요. 오늘은 책을 읽고 예전에 만들어 둔 모형들을 칠했습니다.


사진으로 찍으니 실제 색 보다는 좀 밝게 나온 것 같군요. AFV클럽에서 발매한 이 티거 I 후기형은 만들때 전차장 큐폴라의 손잡이를 날려 먹어서 대충 비슷한 다른 손잡이 부품을 붙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505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궤도가 말랑말랑한게 한편으론 좋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불안하더군요. 그냥 타미야처럼 반조립식으로 된 궤도를 넣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타미야 티거 I은 세트로 3호전차 N형을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 말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티거도 한 대 있는데 그것은 다른 3호전차와 함께 503중전차대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4호전차는 티거 두대를 칠하고 남은 걸로 칠했습니다. 사실 장포신 4호전차 보다는 단포신을 선호하는데 당분간 제품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듯 싶으니 이정도로 만족해야 겠습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만약 한국에 거대한 화교 공동체가 존속하고 있었다면?

요 며칠간 이글루스를 뜨겁게 달군 '전라도 떡밥'을 보니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청년층이라 하더라고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도 지역감정 문제가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만약 다른 민족집단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할 경우에도 전라도 차별이 심했을까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구 중 한명이 지적하기를, 다민족 사회의 경우 사회 내부의 갈등을 가장 만만한 소수집단에 발산하곤 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전라도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도 대신 두들겨 팰 더 만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그렇다면 상당한 규모의 화교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화교가 그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물론 화교 사회가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다면 그 특성상 경제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했을 테니 전라도 차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사실 한국의 전라도 차별은 흑인차별에 가깝고 동남아시아의 화교는 유태인에 가깝죠. 물론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는 오늘날의 화교는 흑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외국인 이주자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외국인 이주자들이 별로 반가운 입장은 아닙니다만 적개심까지 불태울 필요는 있는가 싶더군요. 전라도를 대체할 새로운 샌드백이 등장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기술의 진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대략 7~8년전(1986~87년)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과 매릴랜드 베데스다(Bethesda) 소재 육군 개념분석국(Concepts Analysis Agency) 국장이었던 밴다이버 3세(Edward B. Vandiver III)와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육군에서 기획(planning) 및 예산편성(budgeting)을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전투 모델 중에서 실증된(validated) 것이 없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모델은 실제 세계의 경험을 안정적으로 모사할 수 있어야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증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모델을 활용한 계획이나 예측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에드 밴다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모델에 입력할 현대 제병협동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세부적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그는 오늘날 사용할 모델이 묘사할 미래의 전쟁에는 대량의 전차가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확보할 대상으로는) 많은 수의 전차가 투입된 전투를 선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만약 중동에서 벌어진 1973년 10월 전쟁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벌지전투는 어때요?”

공동저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밴다이버는 그것이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밴다이버는 그날의 대화에 대해 잊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 제안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게 말하자면, 몇 달 뒤 이 제안서는 밴다이버에게 보내졌고 승인되었으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리 회사는 나중에 공식적으로 “아르덴느 전역 시뮬레이션 데이터 베이스(The Ardennes Campaign Simulation Date Base)” 약자로 ACSDB로 알려진 작업에 들어갔다. 2년 뒤 ACSDB는 공식적으로 밴다이버의 개념분석국에 납품되었다.

ACSDB는 약 39메가바이트의 데이터가 포함된 엄청난(massive)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는 1944년 12월 16일에서 1945년 1월 16일의 32일에 걸친 기간 동안 약 100개의 부대에 대한 매일 매일의 세부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포함된 부대는 1개의 독일군 집단군, 4개의 독일군 야전군, 8개의 독일군 군단, 35개의 독일군 사단, 3개의 독일군 여단과 그외의 소규모 부대, 2개의 연합군 집단군, 2개의 미국 야전군, 6개의 미군 군단, 42개의 미군 사단, 미군의 소규모 부대, 1개의 영국군 군단, 2개의 영국군 사단, 2개의 영국군 여단, 독일공군 부대, 영국공군부대, 미국 육군항공대 부대가 포함되었다.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p.xv-xvi

사실 웃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웃기더군요;;;; 80년대 중반의 39메가바이트라면 확실히 엄청난 용량인데 이걸 21세기에 읽자니;;;;

전자제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은 정말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 정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기술이라서 실제로 와 닫는 정도가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말하길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 지는 관심이 없다

몇 등을 하는지만 관심 있을 뿐이다.

동감.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1942년 8월 28일, 스탈린그라드의 대공황

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의 Stalingrad는 참전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투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는 내용입니다.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은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작전 중심의 딱딱한 내용을 선호하긴 합니다만) 내용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한 62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시기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 오던 1942년 8월부터 독일군이 시가지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펼친 11월 중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격작전 이후의 내용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위 공세에 대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반격능력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 체험 위주의 서술이어서 소련 시절에는 검열 등의 문제로 논의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전장에서의 비겁행위라던가 독일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와 닫는다고 할 수 있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오던 1942년 8월 말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황사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942년 8월 28일, 전후 모든 소련의 역사서술에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일이 일어났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의 피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게이 자차로프는 당시 시내의 레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독일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기능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유지되었다. 그런데 8월 28일에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도 없었고 의사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원 원장이 우리를 돌봐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의 직원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병원 바깥의 불안한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창가 쪽으로 갔다. 우리는 엄청난 혼란을 목격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집단적인 광란에 빠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상점과 건물들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했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도데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시가 텅 비었어’, ‘ 공무원들이 모두 사라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놈들이 온다!’

우리는 창 밖으로 계속해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운송수단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가족이 말 한마리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거리를 지나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모두가 스탈린그라드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동무들을 병원에서 이송할 것이오! 이 도시는 포기되었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모두 불러모았다. 백 명 정도가 병원에서 나왔다. 우리는 시가지를 따라 볼가강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갑자기 여러 대의, 아마도 열 다섯 대에서 스무 대 정도의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독일 비행기들은 병원 쪽으로 가서 연속적으로 병원에 폭탄을 투하했다. 아마도 병원에 남아있던 환자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격이 있기 직전에 빠져 나온 것 이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순간 조용해 졌다.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기력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밤이 되어야 볼가강을 도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지휘관 알렉세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제군들, 보급품을 구해야 겠네’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인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식량을 가져 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우리는 일반 상점으로 갔다. 상점들은 모두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과자, 꿀, 빵, 소시지 같은 각종 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식량을 구한 뒤 강변으로 다시 집합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뒤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탱크 생산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호한 결심을 내린 일부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집단적인 공황이 단호한 저항 의지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살아 남았다.”

발렌티나 크루토바는 이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상점들은 그냥 열린 상태로 방치되었고 수천명의 사람들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스탈린그라드가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의 피난 사태를 촉발한 것은 스탈린그라드 경찰과 민병대가 갑자기 시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Michael K. Jones, 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 Casemate, 2007, pp.59~61

전쟁 이야기에서 제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러한 집단 공황상태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당사자가 된다면 그건 진짜 고역이겠죠. 그런 사태를 제 생전에 겪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1945년 독일이 붕괴될 무렵 동부 독일의 이야기나 1975년 베트남 붕괴시의 이야기도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요즘도 가끔씩 읽는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같은 책은 전체 내용이 이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요.

너무 노골적이잖아!

일하다가 잠시 인터넷을 하는 중인데 이런 재미있는 사설을 봤습니다.

[사설]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

그래도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인데 사설 치고는 너무 천박하군요;;;; 대놓고 배고프다고 악을 쓰는게 안스럽니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겠지만 정론지 행세를 하려거든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지요. 그게 싫으면 그냥 정식 옐로페이퍼로 나가던가.

일 때문에 피곤해서 머리도 멍~한데 이런 사설을 읽으니 정말 안드로메다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타블렛을 샀습니다.

이런 저런 작업에 쓰기 위해서 타블렛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대로 쓸만해 보입니다. 가끔 인식이 잘못되기는 하는데 크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더군요. 지도를 편집하거나 편제표를 그릴 때 써보려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아 어렵군요.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2009년 4월 16일 목요일

별로 좋지 않다

연합뉴스를 보다 보니 찝찝한 소식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 군요.

李대통령 "한국경제, 긴 터널의 중간쯤"

눈꼽만큼 좋은 일이 있어도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가카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앞으로도 짜증나는 일이 많을 듯 싶군요. 약간 면피성 발언으로 들립니다.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부족사회의 폭력성

漁夫님께서 뉴기니의 어떤 부족 촌장들이 새로운 문명을 접한뒤 보여준 놀라운 창의력에 대해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댓글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漁夫님의 답변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예.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漁夫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족사회의 폭력 정도는 현대 사회 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 한 번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했었던 킨리(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라는 책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킨리의 연구에 따르면 야노마뫼(Ya̧nomamö) 족의 경우 전쟁시 남성의 사망률이 전체 남성의 37%에 달하고 에콰도르 등에 거주하는 히바로(Jivaro) 족의 경우 59%라고 합니다. 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통틀어 유럽과 미국의 남성 사망률은 전체 남성의 1%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하지요. 전체 인구집단의 규모나 전쟁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인 것은 사실입니다.

킨리가 책 전체에 걸쳐 주장하듯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 같은 것은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죠.

목수정과 일부 진보신당 당원의 주장은 왜 불편하게 들리는가

목수정 사태(?!)가 예상외로 장기화 되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3월 23일에 진보신당 당원인 목수정이 ‘레디앙’에 올린 정명훈에 대한 비난 기사였으니 이미 20일 째로군요. 이번 사태가 장기화 된 데에는 진보신당 당원이나 진보성향의 블로거들이 꾸준히 목수정의 변론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이 아닌 ‘목수정에 대한 변론’이 이 정도로 질질 끌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참 신기한 일 입니다.

이번 사태는 정명훈의 공식적인 반론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정명훈이 반론을 제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목수정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 뿐이고 그에 대해 판단할 제 3자들은 그 ‘지극히 주관적인 기사’에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만을 뽑아내어 판단해야 할 것 입니다.

목수정의 3월 23일 기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이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1. 2009년 3월 20일, 목수정은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서 정명훈을 만났다.

2. 정명훈은 목수정의 요청을 거부했다.

목수정의 기사에는 정명훈이 엄청난 폭언과 모욕을 가한 것 처럼 되어 있으나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 뿐이니 그대로 믿긴 어렵습니다. 목수정에 대한 일부 변론자들은 ‘정명훈의 폭언’을 언급하면서 목수정의 과격한 반응을 옹호하고 있는데 목수정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제3자를 납득시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A가 한 말이 B를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 전달되는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의 주장을 교차검증 할 방법이 없는 이상 목수정의 기사에 나타난 ‘정명훈의 폭언’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조금 더 합리적일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수정의 기사’에 실린 정명훈에 대한 내용만을 가지고 목수정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 목수정을 옹호하는 당원들을 결집시키기에는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신당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고 말 그대로 서민을 위한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면 이런 자폐적인 태도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목수정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그럴 생각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대략 20일 동안 사태의 전개를 지켜본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목수정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거부감만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 문제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으니 원래 목수정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의 복직을 지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목수정은 기사 하나를 정명훈에 대한 비난에 할애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원의 복직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다른 문제겠지요. 왜 온라인 진보들의 대중을 향한 외침은 정작 그 대상인 대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릴까요?

목수정 사태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capcold님의 경우 이것을 ‘지사정신’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셨고 sonnet님은 ‘길거리 전도에 나선 종교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sonnet님의 종교인에 대한 비유가 흥미롭습니다.

재미있게도 목수정을 변론하는 블로거들은 약자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목수정의 글을 비판하는 제 3자도 언젠가는 ‘자본’의 희생양이 되어 ‘연대’를 필요로 하는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연대’ 하지 않으면 훗날 누가 당신을 위해 ‘연대’에 참여하겠느냐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지옥의 유황불’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을 강요하는 길거리 전도사의 태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상대가 바보라면 모를까, 공공연히 ‘공포’를 조장하는데 누가 기분 좋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목수정의 태도도 매우 우려 스럽습니다. 인터넷 언론의 ‘기사’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목수정의 기사는 정명훈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길거리 전도사가 자신의 신앙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도를 저주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목수정의 글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 입니다. 훗날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될 사람도 있겠지만 ‘연대’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사회적 강자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대’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도 대놓고 협박하면 듣기 싫을 것이고 ‘연대’가 필요 없는 사람은 속으로 비웃겠지요.

현재의 진보신당 지지자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소통방식이 필요합니다. 진보신당 내부의 논리는 진보신당 내부에서나 통할 뿐 입니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싶다면 진보신당 외부의 제 3자도 동의할 수 있는 논리와 소통방법을 강구해야 겠지요. 목수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비판자들이 잘못됐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왜 비판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목수정과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좁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를 목표로 하는 것 이라면 그들의 전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이 아닌 조금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 입니다. 길거리 전도사들이 1년 365일 지옥의 공포를 조장하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왜 호응이 낮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활동이라고 별 다를거 있겠습니까.

2009년 4월 9일 목요일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서 글로 쓰려는데 잘 안 써지는군 요;;;; 땜빵 포스팅 하나를 올립니다.

Steven Zaloga의 Armored Thunderbolt 부록에는 2차대전 중 서유럽 전역에서 미군이 상실한 셔먼 전차의 대수와 손실율이 실려있씁니다. 꽤 재미있어서 표를 만들어 올려봅니다.



역시 압권인 것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전체 대수입니다. 손실 대수 대 손실율은 이 점을 잘 보여주는데 1944년 8월에는 셔먼 557대 손실에 손실율 21.8%인데 1945년 1월에는 이보다 더 많은 585대를 잃고도 손실율은 12.8%로 훨씬 낮습니다;;;;

아무리 쳐부숴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셔먼의 대군이 떠오릅니다;;;;

할 말은 그저 이것 뿐.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그리고 상대를 잘못 만난 총통께 다시한번 위로를.

2009년 4월 5일 일요일

(밥 굶은) 아줌마의 힘!

노서아 천지에 소 잡는 소리와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련의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 심화되어 갔으며 특히 농촌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부의 무거운 징세에 억눌린 농민들은 굶어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집단농장에서 달아났다. 1932년 상반기에 집단농장에 속한 가구의 숫자는 러시아공화국에서 137만800가구, 우크라이나에서는 4만1200가구로 줄어들었다. 농촌지역의 사회적 불안은 심각했다.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 Объединённо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가 작성한 1931년 10월에서 1932년 3월 시기의 자료 중 일부에 따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공화국에서 총 616건의 폭동이 발생했으며 총 5만5400명이 폭동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굶주린 농민들이 곡물의 강제 징발에 저항하고 정부의 곡물 저장소를 습격하는 것 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간부 중 한 명이 인민위원협의회 의장 몰로토프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폴타바 부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1932년 5월 3일 우스티노브치(Устиновцы)에서 여성 300여명 정도가 마을 인민위원장을 사로잡은 뒤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고골레보(Гоголево) 기차역으로 행진한 뒤 그곳의 창고 문을 때려 부쉈다. 처음에는 창고 관리인이 소화기를 뿌려 군중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여자들은 소화기를 뿌리자 유독한 가스라고 오인했다. 그러나 다음날 농민들은 다시 몰려들었다. 무장한 경찰과 정치보안부에서 파견한 인력이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파견되었다. 창고에 있던 곡물들은 다음날 이송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5일, 챠스니코브카(Часниковка) 마을에서 출발한 비슷한 숫자의 여성들이 센챠(Сенча) 기차역의 창고를 습격해 밀가루 서른 일곱 자루를 가져갔다. 5월 6일에는 바로 전날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농민들이 기차역을 다시 습격해 150푸드(пуд, 약 2.5톤)의 밀을 털어갔다. 공산당원들은 허공에 총을 쏘며 농민들을 해산시키려 하다가 그냥 달아나 버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 50명의 무장 경찰과 공산당원들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약 400명의 군중들이 역에 몰려들어 화물차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5월 7일에는 기마 경찰과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더 많은 농민들을 상대해야 했다.

5월 5일 에는 사가이닥(Сагаидак) 기차역에서 약 800명의 군중이 곡물창고를 지키고 있던 경찰 두 명과 마을 당원들을 습격해 창고 문을 열었다. 이들은 약 500푸드의 곡식을 빼앗아 이 중 400푸드를 현장에서 배분한 뒤 나머지 100푸드를 가지고 갔다. 5월 6일에는 리만(Лиман)과 페둔키 마을의 농민 400여명이 곡물을 약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났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42~43

밥 굶은 아줌마는 정말 무섭습니다.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까요?

오늘 북한이 인공위성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고 하지요. 현재 미국과 우리나라의 소식통들은 '광명성 1호'에 이어 '광명성 2호' 또한 궤도 진입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뭐, 그러나 '광명성 1호' 때에도 그랬던 것 처럼 평양에서만은 '광명성 2호'의 신호가 포착될 것 입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광명성 1호'는 지구 궤도를 돌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를 송신했다고 합니다. 북한 말고는 '광명성 1호'가 송신하는 노래를 들은 곳이 없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광명성 2호'는 어떤 노래를 송신할 예정이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일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2009년 4월 2일 목요일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by John A. Lynn II

Women, armies, and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저자 : John A. Lynn II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7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의 군대는 군병력 만큼이나 많은 수의 비전투원을 동반하고 움직였습니다. 규모가 큰 군대는 어지간한 대도시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민간인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재미있지요.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고 그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에 속한 여성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저자인 린(John A. Lynn II)은 근대 초기 유럽군대에서 여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절대왕정의 강화와 함께 군대가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근대 유럽의 군대의 성격과 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인 집단, campaign community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초기 유럽군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 유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민간인 집단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군대는 용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보급의 대부분을 약탈에 의존했습니다. 직업군인인 용병들은 자신의 급여로 부양하는 가족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대가 편성되면 군대의 규모와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상업적 이익, 또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 모여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근대 초기의 유럽군대는 군사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장에서는 군대를 따른 여성들의 성격에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군대에 동반된 여성 집단을 크게 매춘부(Prostitutes), 애인(Whores : 이 글의 저자는 whore를 매춘부가 아니라 미혼이되 한 명의 남자를 따르는 여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인의 부인(Wives)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매춘부와 애인의 경우 17세기 중반까지 많은 수가 군대와 함께 생활했지만 용병군대가 점차 상비군화 되어 가면서 군 규율의 유지를 위해 제도적으로 추방되어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부인들이 부업 차원에서 매춘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군인의 부인들 또한 점차 군대에서 추방되어갔고 많은 유럽군대는 군인의 결혼을 엄격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여성들이 전투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군대 외부의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여성들이 군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하지 않는 ‘여성적인’ 일, 빨래와 바느질, 요리와 청소 등의 일을 수행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부대 내의 상업과 수공업 등의 영역에 종사했으며 전투에서 일어나는 약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힘든 수송, 특히 군인들의 짐꾼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으며 공성전시 참호를 파는 사실상의 ‘공병’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근대 초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군대와 함께 생활한 여성들은 민간 사회의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대의 상비군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체계적인 보급체계가 자리 잡아갔고 동시에 여성들이 수행하는 역할도 축소되어 갔습니다.

4장에서는 여성들의 실제 전투참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대중문화에서는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본 뒤 실제 여성의 전투 참가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17~18세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낮았고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지만 대중문화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은 흥미의 대상으로서 자주 다루어 졌습니다. 반면 실제 군대에서 여성의 전투 참가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장을 하고 정체를 남자로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자로서 군인이 된 여성들 중 동성애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혁명도 전체적인 틀을 바꾸어 놓지는 못 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구체제의 악습을 타파하는 차원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대부분 선전적인 의도에서 이루어 졌으며 결국 혁명의 열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혁명정부는 ‘쓸모 없는’ 여군들을 군대에서 추방했습니다. 저자의 지적 처럼 혁명 군대 또한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제의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초기의 자율적인 용병군대가 점차 절대왕정 아래의 규율 잡힌 상비군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여성이 수행하던 역할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근대국가의 군대로 개편되어 가면서 군대가 국왕의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밖에 없는 약탈 보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보급에 부담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민간인, 특히 여성들은 퇴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근대 초기의 유산인 군대를 따르는 민간인 사회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 저작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까지 전쟁과 여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특히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연구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성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논리적으로 약간의 비약이 있으며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저작입니다.


잡담 하나.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In any case, officer’s wives were at the top of the hierarchy where her husband’s rank determined her position.(p.89)

사단장 마누라는 사단장 행세를 하고 연대장 마누라는 연대장 행세를 한다는 한국 군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잡담 둘. 많은 저작들은 책의 앞 부분에 ‘이 책을 000에게 바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 넣지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손녀인 Helena Grace Lynn에게 바치고 있군요. Miss Lynn,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습니다!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박정희 전역식에 동원된 부대의 규모

박정희는 1963년의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군에서 예편합니다. 군부는 대내외적인 압력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정이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에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국민직선제로 바꿉니다. 이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만약 제2공화국과 같이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한다면 군부출신이 집권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제법 꽃 피었을 것 입니다.

하여튼 군부가 지지하는 유력한 카드인 박정희는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 급히 전역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에 대해서 육군본부가 발간한 『육군발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3년 8월 30일에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5∙16군사혁명을 통수한 박정희 대장의 역사적인 전역식이 당 군단 관할지역인 강원도 철원 지포리의 TCPC사격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전역식에는 제3사단 예하의 3개연대와 포병 11 및 833대대 1개 포대, 제 3전차대대 제 1중대 및 2중대(M-47 27대), 4.2중포 1개 포대, 제 6대전차유도탄 소대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이 식전의 참가인원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 주한 미 8군사령관 외에 6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육군본부, 『육군발전사』2권, 1970, 191쪽

그리고 아래는 전역식 동영상입니다.



인용한 글에 언급된 동원 부대나 링크한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상의 대선출정식을 겸한 행사여서 그런지 군부의 과시욕이 느껴집니다. 거의 사단급 병력이 동원된 셈인데 뉴스를 통해 접하는 외국의 4성급 장성들의 전역식 중에서 저 정도 규모의 전역식은 아직 보지를 못 했습니다.

저런 과시성 행사를 위해 동원된 사병들이 불쌍하군요.

참고로,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버웰 벨(Burwell B. Bell) 대장의 전역식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Tennessee: Gen. Bell changes command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아니! 기린아님 블로그가;;;;

기린아님 블로그를 가 보니 갑자기 모든 글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애독자로서 비통한 심정입니다.

1차5개년 계획과 소련 기계화 부대의 발전

러시아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군사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작전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동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군사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작전술'에 바탕을 둔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이론을 실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1920년대는 혁명과 내전의 피해를 막 복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업화의 수준은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 것 없었으며 군대는 1차대전 당시와 별 다를바 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소련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군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야심차게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기점으로 소련 군사이론가들의 '이론'은 드디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차5개년 계획시기의 전차 생산과 초기 기계화부대 창설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론에서 교리로

1920년대 후반기 기계화부대의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첫번째는 기동전에 대한 이론들이 교리로서 실체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 군사이론가들은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스베친(Александр А. Свечин)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의 논쟁을 시작으로 샤포쉬니코프(Борис М. Шапошников), 트리안다필로프(Владимир К. Триандафиллов)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기동전에 대한 이론을 활발하게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논쟁을 주도한 두 사람 중 스베친의 경우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소모전에 의한 점진적 승리를 제창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장기소모전이 1차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방대한 산업력을 동원하기 이전에 대규모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속한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29~131] 하지만 많은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은 미래의 전쟁은 기동 위주의 전투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스베친 조차 미래의 전쟁에서는 1914~15년 시기의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인 기동전을 예측했습니다.[Harrison, 2001, p.135]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활발한 논쟁을 통해 '작전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제정러시아 말기부터 전략과 전술의 중간단계로서 작전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1차대전과 내전의 경험이 추가되면서 이론적인 정립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술이라는 단어는 1923~24년 붉은군대의 장군참모대학(뒷날의 프룬제 군사대학) 강의에서 스베친이 처음으로 명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작전술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붉은군대 장교단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1928년에 '작전술'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군사사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Harrison, 2001, p.140~141] 작전술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들은 작전술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고 구체화 했습니다.

소련군은 작전술 개념의 도입 등 군사사상에 있어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전차의 사용에 대해서는 2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이었습니다. 1927년 까지도 전차는 참호전 상황에서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전차생산을 증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것은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서방의 전차 보유대수에 대한 과장된 정보 등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88]
새로운 군사이론에 맞는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군사이론가 들이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1928년에 전차의 대규모 생산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운용 방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투하체프스키가 전차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와의 논쟁으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이후였습니다. 투하체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트리안다필로프도 전차의 활용방안을 연구했습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1920년대의 연구를 통해 적의 방어종심을 돌파해 포위하는 것 이외에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반격해 올 적의 예비대의 격파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Harrison, 2001, p.150] 전차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무기체계였습니다.

1928년도 붉은군대야전규범(Полевой Устав Краснои Армий), PU-28은 전차의 활용한 돌파와 포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PU-28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제대 중 하나는 적 방어선을 돌파해 후방의 적 포병을 격멸하거나 기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적 후방이나 측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두 번째 제대는 보병의 지원을 받아 적 주저항선의 방어 거점을 격파하도록 규정했습니다.[Habeck, 2003 p.95~96]
PU-28의 개정판인 1929년도 야전규범, PU-29는 전차, 보병, 포병 부대의 연합작전에 기반한 현대적 기동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PU-29는 투하체프스키, 트리안다필로프 등의 혁신적인 군사이론가들이 서술했는데 특히 트리안다필로프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차와 차량화부대를 이용, 공세 초기에 적 방어선의 방어종심을 일거에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PU-29는 PU-28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차 부대의 역할을 더 이상 보병지원의 단거리 돌파에 묶어 두지 않았습니다. 전차부대는 기병과 함께 기동력을 발휘해 적을 포위하거나 제병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규범은 야전지휘관들이 전차부대를 보병지원전차와 장거리전차로 구분하고 이 중 장거리전차에 적 포병의 격파와 적 후방으로의 돌파임무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전차부대의 동원이 가능할 경우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거나 최소화된 상태에서도 돌파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차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Erickson, 2001, p.307]
이 시기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은 전차를 기능 별로 구분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소련의 낮은 기술수준에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소련의 기술과 산업생산능력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전차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능별로 특화된 전차를 생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Habeck, 2003 p.129]

2. 외국 전차 기술의 도입

PU-29를 통해 기초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대규모 전차부대를 위한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까지 소련 전차부대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던 MS-1 전차는 기본적으로 르노 FT-17의 개량형으로 보병지원 전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PU-29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거리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1920년 후반의 시점에서도 소련은 아직 독자적으로 신형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형전차 개발에 외국의 전차를 참고해야 했습니다. 국방인민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29년 11월에 외국의 장갑차량, 특히 전차를 구매할 위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그 위원단의 단장에는 군사과학지도국의 할렙스키(Иннокентий А. Халепский)를 임명했습니다. 할렙스키의 위원단은 1929년 12월부터 4개월간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전차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은 1930년 1월 독일을 방문해 비밀리에 전차 개발을 하고 있던 독일 기업들과 접촉했습니다. 할렙스키는 독일측과 신형전차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등을 논의했습니다.
독일 다음의 방문지인 영국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위원단은 영국에서 빅커스-암스트롱(Vickers-Armstrong Ltd)으로부터 카든-로이드 소형전차(Tankettes) 20대, 6톤 경전차 15대, Mark-II 중형전차 15대를 구입했습니다. [Habeck, 2003 p.130] 영국에서 구입한 전차들은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 까지 순차적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영국을 시찰한 할렙스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영국이 차량화에 대해서 가장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Hofmann, 1996, p.288]

위원단의 미국 방문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미 1928년 10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바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미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커닝햄(Cunningham) T1을 접했습니다. 할렙스키는 이 두 번째 미국방문에서 커닝햄 T1을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할렙스키 위원단의 미국 방문 이전에도 커닝햄 T1의 수입을 신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아직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커닝햄사에서는 무기의 해외 수출을 관리하는 전쟁부(War Department)에 이 문제를 알렸습니다. 1930년 3월 미국에 도착한 할렙스키는 원래 계획대로 T1을 구입하려 했으나 전쟁부가 외교문제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또 T1의 성능이 당초 기대를 밑돌아 T1의 구입을 취소했습니다.
커닝햄 T1 대신 칼렙스키의 관심을 끈 것은 유명한 크리스티(John Walter Christie)의 경전차였습니다. 칼렙스키는 미국의 군사잡지에서 크리스티가 개발한 전차 차체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크리스티와 접촉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렙스키가 보기에 크리스티의 M1928은 궤도주행방식과 바퀴주행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이론가들이 고민하던 '작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습니다. 1930년 4월 29일 크리스티는 소련에 M1928의 개량형인 M1930을 판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할렙스키는 귀국한 뒤 크리스티 전차를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BT, Быстроходный Танк)의 개발과 대량생산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폴란드도 크리스티 전차를 구매했기 때문에 고속전차의 양산이 폴란드보다 뒤쳐진다면 소련은 폴란드군에게 '작전 기동성'의 우위를 상실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말 까지는 최소한 100대의 고속전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구입한 크리스티 전차가 1930년 9월에는 소련에 인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1년 5월까지는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Hofmann, 1996, p.291] 장차 크리스티 전차와 함께 소련군 기갑부대의 주축이 될 빅커스의 6톤 경전차의 경우는 1931년 8월까지 분석과 시험을 마치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할렙스키의 계획이었습니다.[Stoecker, 1998]

크리스티 M1930을 바탕으로 한 고속전차의 개발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할렙스키는 1931년 6월 3일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에 출두해 고속전차 개발 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할렙스키는 M1930을 바탕으로 14톤급에 37mm포(초기안은 76mm포)와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바퀴 상태로는 시속 70km, 궤도 상태로는 시속 40km의 성능을 가진 전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도 고속전차의 개발을 가속화 했습니다. 1931년 11월 할렙스키가 병에 걸려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스탈린은 직접 할렙스키를 불러 크리스티 전차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Habeck, 2003 p.152] 스탈린의 관심 덕분인지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1월에 원자재, 운송수단, 노동자에 대한 식량배급 등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 받았습니다.[Stone, 2000, p.189]

3. 1차5개년 계획과 전차 생산

기동전에 필요한 이론과 교리의 정립,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전차의 확보가 끝났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차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산업력의 확보였습니다. 소련이 본격적으로 전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MS-1가 처음이었습니다. 1927~28년 사이에 생산된 MS-1은 25대에 불과했습니다. 붉은군대 혁명군사평의회는 1928년 3월에 1933년까지 MS-1을 1,600대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28년 당시 소련이 보유한 전차는 모두 합쳐봐야 92대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73] 그리고 실제로도 이 야심찬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 완성된 군사부문 5개년 생산 계획에서는 전차 생산량을 1929/30년에는 340대로 잡고 이것을 1933년까지 연간 7,000대 수준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잡았습니다.[Simonov, 2000, p.42] 5년만에 전차 생산능력을 20배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때마침 붉은군대의 무장계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강인한 추진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와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투하체프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 이었습니다.[Harrison, 2001, p.130~131] 투하체프스키는 모스크바로 귀환해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과 병기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최종 결정권자인 스탈린도 전차 생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업화가 진행중인 소련에게 현대적 무기체계인 전차의 생산을 단기간에 급증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30년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으로는 전차의 장갑에 필요한 고급 철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는 점 입니다. 낮은 기술수준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토빌리힌스키 기계공장이 생산한 37mm전차포는 100% 모두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Stone, 2000, p.163] 붉은군대의 방대한 전차부대 증강과 전시동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공업생산능력과 기술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931년 7월 말 중공업, 특히 제철업의 신속한 확장을 요구했습니다.

고속전차의 생산은 할렙스키가 제시한 37mm포탑의 생산 지연 때문에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와 고속전차 생산계획을 검토한 뒤 고속전차의 시제품을 생산할 공장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자동차 공장에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변경하고 1931년 10월 15일까지 3대의 시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제품이 완성되면 양산을 개시해 1932년 말 까지 고속전차 2,000대와 T-26 1,600대를 생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리코프 기관차공장은 1931년 11월 1일에야 고속전차 시제품 3대를 완성했으며 1932년 11월까지 당초 계획에 크게 미달한 170대의 고속전차가 붉은군대에 인도되는 것에 그쳤습니다.[Hofmann, 1996, p.298~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군대 수뇌부는 전차 생산계획을 더욱 확대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1932년도 생산계획은 T-26 12,000대와 소형전차 16,000대였습니다.[Habeck, 2003 p.149]
위에서 언급했듯 1932년의 전차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신형 고속전차인 BT-5 또한 45mm전차포의 생산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고 1932년 12월까지 생산된 신형전차는 603대의 고속전차와 1410대의 T-26에 불과했습니다. 이중 고속전차 89대는 전차포의 부족으로 포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포탑이 없거나 기관총만 장비한 BT-2를 1933년까지 모두 37mm포탑으로 교체한 뒤 45mm전차포를 탑재한 BT-5의 생산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T-26, BT의 양산과 함께 중형전차와 중전차 개발도 추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스 Mark II를 기초로 한 중형전차 T-28과 중전차 T-35가 혁명군사평의회로부터 생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중형전차와 중전차의 개발도 앞서 진행된 경전차들의 생산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T-28의 경우 구동계통의 문제와 경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포탑 생산 부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전차 T-35또한 구동계통 문제로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931~1933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 신형 전차 중 제대로 생산된 것은 T-27소형전차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전차 생산은 2,000대에 그쳤습니다.
소련의 전체적인 산업력의 부족은 전차생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속전차 생산을 담당한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BT-5의 초기 생산형에 대해 질 낮은 베어링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45mm포탑을 탑재하면 무리가 갔습니다.[Hofmann, 1996, p.304] 1931년의 전차포 생산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특히 BT-5에 탑재할 신형 45mm 전차포는 1931년에 단 한문도 도입되지 않았습니다.[Stone, 2000, p.169]

1931년의 부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전차생산 증대에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스탈린은 1932년 1월 10일 국방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고속전차 증산을 위해 일반 민수공장들을 전차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고 전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1932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T-27 5,000대, T-26 3,000대, BT전차 2,000대 등 총 1만대로 결정되었습니다.[Stone, 2000, p. 193] 1932년 전차생산계획에 따라 전차를 생산할 공업기지의 대규모 확장이 계속됐습니다. 5월에는 스탈린그라드에 T-26 1만2천대와 6천대분의 예비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1932년까지 건설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산 증대 계획은 차질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민수 공장들을 대거 전차 생산에 돌렸지만 생산에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이었습니다. 생산이 비교적 단순한 T-26 조차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었고 구조가 더 복잡한 BT 전차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주 생산공장인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했고 포탑, 엔진, 구동 계통 등을 생산할 일곱개의 공장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체 개발한 엔진을 탑재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산 계획을 맞추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급히 리버티 엔진을 수입해야 했고 엔진 문제로 생산은 더 지연되었습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생산이 성공적이었던 T-27 조차 갑작스러운 생산계획 상향조정으로 문제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도 전차생산계획도 이전 연도의 생산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까지 5,15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이후 월간 생산량을 1,365대로 끌어올려 1만대 생산을 달성한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실제 10월 1일까지의 생산량은 1,365대에 월간 생산량은 480대를 달성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전차 생산은 T-27 2,100대, T-26 1,600대, BT전차 600대에 그쳤습니다.[Stone, 2000, p.198~201]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45mm 전차포의 생산 차질로 T-26과 BT 전차 중 800대는 포탑이 없는 상태로 계획된 숫자만 채우기 위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32년 생산계획이 실패한 결과 1933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7,000대로 하향조정 되었습니다. 1933년도 생산계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신형전차, T-37 수륙양용전차와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가 포함되었습니다. 기존의 전차 생산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채 보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복잡한 신형전차의 생산이 추진된 것 입니다.

4. 기계화군단의 창설

비록 5개년계획 기간 중 전차 생산 계획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소련의 전차 생산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이제 소련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전술교리, 교리를 기술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차, 그리고 그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만들어질 차례였습니다.

신형전차의 도입은 소련 이론가들이 정립한 전차 운용 교리를 현실화 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T26은 보병지원전차로서, BT 계열 전차들은 고속 전차로서 독립된 기계화부대의 주력 장비가 되었습니다. 투하체프스키와 할렙스키는 신형전차들의 전술임무를 다음과 같이 할당했습니다. T27소형전차와 T37수륙양용전차는 정찰 임무를,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는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돌파를, 그리고 전술적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BT전차와 T26전차가 작전단계의 종심돌파를 수행하는 것 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1929년에 편성된 임시기계화연대를 확대 개편해 1930년 5월 창설되었습니다. 이때 창설된 임시 기계화여단은 66대의 전차와 340대의 각종 차량, 3천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임시 기계화여단은 1930년 가을에는 정식으로 제 1기계화여단(Мехакнизированная Бригада)이 되었고 예하에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대와 기타 지원부대를 두었습니다. 장비는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장갑차, 350대의 각종 차량이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여단은 초기 훈련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가을에 실시된 한 훈련에서 기계화여단은 기병사단을 추격해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기동 도중 연료를 모두 소비해 기병사단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외에 전차연대가 장비한 MS-1 전차의 잦은 고장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MS-1의 느린 속력으로는 PU-29에 명시된 적 방어종심의 신속한 돌파와 적 포병의 격파가 어려웠습니다.[Habeck, 2003 p.133~134] 새로운 교리에 맞는 새로운 전차가 필요했고 그것은 이제 막 대규모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3월, 할렙스키는 붉은군대 총참모부에 전차군단(Танковый Корпус)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총참모장이던 예고로프(Александр И. Егоров)와 투하체프스키는 할렙스키의 건의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계화군단을 포함한 대규모의 기계화부대 창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된 기계화군단의 창설 외에도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TRGK)을 별도로 편성하고, 기병사단 예하에는 기계화연대를, 소총병사단 예하에는 전차대대를 편성하도록 되었습니다.
최초의 기계화군단은 11소총병사단을 개편한 11기계화군단과 45소총병사단을 개편한 45기계화군단이었습니다. 각 기계화군단은 2개 기계화여단과 1개 소총병여단, 기타 직할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두 군단의 예하 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1기계화군단은 31기계화여단(T-26), 32기계화여단(BT전차)과 33소총-기관총여단(Стрелково пулеметная Бригада), 45기계화군단은 133기계화여단(T-26), 134기계화여단(BT전차), 135소총-기관총여단이었습니다.[Дриг, 2005, с.9] 편성 초기 기계화군단의 기갑장비는 전차 500대와 장갑차 200대라는 당시까지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Habeck, 2003, p.168] 1934년 1월까지 붉은군대의 기갑전력은 약 7,900대 수준으로 증강됐습니다. 기계화군단의 추가 창설은 보로실로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밖의 기계화부대 창설은 계속되어 1936년까지 6개의 최고사령부 예비전차여단, 15개의 기병사단 예하 기계화연대, 83개의 소총병사단 예하 전차대대 및 전차중대가 창설되었습니다.[Harrison, 2001, p.176~177]

이것은 당초 투하체프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와 같은 군사이론가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하는 것 이었지만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할렙스키 위원단이 외국의 전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순방길에 오른지 5년 만에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갑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및 산업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2001
Mary R. Habeck, Storm of Steel :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Richard Harrison, The Russian Way of War : Operational Art, 1904-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George F. Hofmann, ‘Doctrine, Tank Technology, and Execution : I. A. Khalepskii and the Red Army’s Fulfillment of Deep Offensive Operation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Nikolai S. Simonov, ‘The War Scare of 1927 and the birth of the defense-industry complex’, The Soviet Defense-Industry Complex from Stalin to Khrushchev, St.Martins Press, 2000
Sally W. Stoecker, Forging Stalins Army : Marshal Tukhachevsky and the Politics of Military Innovation, Westwiew Press, 1998
David Stone, Hammer and Rifle : The Militarization of the Soviet Union 1926-193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Евгений Дриг,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е Корпуса РККА В Бою, Иэдателстьство 2005

소외받는 한국일보

어제 있었던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놓친 것은 꽤 아쉽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 시기의 언론 정책 중에서 ‘신문발전기금’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노무현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 같이 친여당적 성향을 보이는 매체를 지원하기 위한 꼼수라고 비난했지만 한국일보 같이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도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공정하게 운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민주당 측이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한겨레와 경향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언론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일정 부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어제 토론회를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문순 의원의 홈페이지에서 자료집을 다운받았습니다.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은 신문발전위원회의 신학림 위원이 썼는데 역시나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답게 조중동에 대한 비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한겨레와 경향을 띄워주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발행 부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족벌 신문들의 신뢰도는 신문이나 언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나머지 신문들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access)권을 판매 및 배달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08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촛불 집회를 통해 신문과 신문 업계에도 작지만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대한 신뢰도의 폭발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문 전체의 신뢰도 하락 추세가 멈추거나 상승으로 되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신학림,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 2009

이런 식의 편들기는 정말 낮 뜨겁습니다;;;;

신학림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중동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신뢰도가 낮다는 점을 들어 조중동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뒤집어 보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층은 맹목적으로 해당 신문을 믿는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에 별로 좋은 이야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일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다 한국일보 이야기를 한다고 해 봐야 신문시장의 경쟁을 촉발했다는 부정적인 이야기 뿐이더군요. 뭐랄까. 조중동처럼 악의 축이 되어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한겨레나 경향처럼 ‘정론지’로 떠받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아마 최문순이나 신학림과 반대점에 서있는 한나라당 쪽에서도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 한국일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듯 싶습니다;;;; 한국일보가 비교적 보수적 성향이긴 하지만 정파성은 조중동이나 한경에 비해 옅은 편이지요. 사실 그나마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극단의 양 쪽에 있는 쪽에서는 박쥐 정도로 보는 모양입니다.

한국일보를 즐겨 보는 입장에서 매우 씁슬하군요.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AFV클럽의 반가운 신제품

AFV클럽의 슈툼티거가 조만간 출시된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습니다. 1/48 스케일 AFV가 또 하나 발매된다니 아주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거 우리나라엔 언제 수입되는 겁니까?

요즘도 시간이 날 때 마다 조금씩 1/48 AFV를 만들고 있는데 조립이 쉽다 보니 만드는 재미가 참 쏠쏠합니다. 이왕이면 트럼페터같이 물량공세를 펴는 회사들이 1/48 AFV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데 좀 어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