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8일 수요일

아뉘(Hannut)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페리스코프 포럼에 deSaxe란 분이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분이 질문하신 페리스코프 포럼에 답글을 다는게 예의 인데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로그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 주신 위키피디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 글을 조금 적어둘까 합니다.

deSaxe란 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뉘 전투에 대한 글,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가 위키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hen Erich Hoepner's XVI Panzer Corps, consisting of 3rd and 4th Panzer Divisions was over the bridges launched in the direction of the Gembloux Gap, this seemed to confirm the expectations of the French Supreme Command that here would be the German Schwerpunkt. The two French Cavalry armoured divisions, the 2nd DLM and 3rd DLMs (Division Légère Mécanique, "Mechanised Light Division") were ordered forward to meet the German armour and cover the entrenchment of 1st Army. The resulting Battle of Hannut on 12 May-13 May was, with about 1,500 AFVs participating, the largest tank battle until that date. The French lost about a hundred tanks, the Germans lost over 160 but managed on the second day to breach the screen of French tanks, which on 14 May were successfully withdrawn after having gained enough time for the 1st Army to dig in.

이 글에서는 독일군이 160대의 전차를 잃었다(lost)고 적고 있습니다. lost란 단어는 풍기는 뉘앙스가 "완전손실"에 가깝지요.

그런데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제가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수리가능한 피해까지 합산한 것 입니다.

아뉘전투와 장블뢰전투가 사실상 끝난 5월 16일까지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의 전차 완전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 3기갑사단 : 1호전차 10대, 2호전차 6대, 3호전차 2대, 4호전차 1대, 지휘전차 1대
제 4기갑사단 : 1호전차 15대, 2호전차 5대, 3호전차 4대, 4호전차 5대

두개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인 16일 까지 두 기갑사단을 합쳐서 49대의 전차를 잃은 것 입니다. 게다가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 이기때문에 12~13일의 아뉘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당연히 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 피해를 집계할 때 언제나 혼동되는 것 이지만 완전손실과 수리가능한 손실을 혼동할 경우에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위키에서 사용한 "lost over 160"은 약간 무리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2007년 8월 7일 화요일

탈레반의 센스도 제법이군요

이번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언론과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 문제가 TV에 나오면 인질들을 비웃는 정도로 그치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연합뉴스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탈레반, 인질처리 고심..이슬람 개종 권고"<외신>

기독교 선교를 하러 간 사람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고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이렇게 골탕먹이는 것이 가능하군요.

전도하러 간 자매님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베이징 군사박물관

저는 관심사가 관심사이다 보니 어디를 여행하건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 기념관이 있으면 최대한 관람을 하는 편 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인민해방군 창군 80주년이니 군사박물관에 뭔가 더 재미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보다 사람이 많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통에 가뜩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 박물관에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은 멋진 일 이었지만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금속탐지기로 소지품 검사 같은 것은 일일이 다 하더군요. 그 덕분에 사람도 많은데 대기하는 줄은 더욱 길었습니다.


들어서니 위대하신 마오 주석께서 맞이하시는 군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제대로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전시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의 97식 전차도 이렇게 보니 그럭 저럭 봐 줄만 하더군요. 역시 배경화면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도데체 뭘까요?


이건 당나라 기병이랍니다.


중국군함 중에서는 가장 유명할 듯한 정원(定遠)의 모형입니다. 사진이 잘 안 나왔지만 모형은 꽤 괜찮게 만들었더군요.


신해혁명때 봉기군이 사용한 대포와 같은 모델이랍니다. 관람객들이 열심히 만지고 가동되는 부분은 움직여 대서 불쌍하더군요.


항일전쟁 전시관의 이 조형물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망나니칼(???) 휘두르는 홍군이 전혀 뻥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긴 1차대전 때는 철퇴도 만들어 썼으니 현대전에서 망나니칼(???) 휘두르지 말라는 법은 없겠네요.


이건 그 북새통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한가했던 해방군 장군 서화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볼만하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쉬었습니다. 사람이 득시글 대는 건물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야외에는 80주년 특별 전시인지 99식 전차 같은 현용 장비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99식을 실제로 보니 사진 보다는 포탑이 조금 더 길어 보이더군요. 물론 그래도 포탑이 너무 작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보니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같이 전시된 장비중에서 99식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전차팬이 많은가 봅니다.


이건 해방군 창군 80주년 특별 전시실에 있던 물건인데 미육군 31보병연대의 연대기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독하게 많아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가할 때 천천히 관람해 보면 좋겠더군요.

2007년 8월 5일 일요일

중국군사서점과 일반 서점의 군사관련 코너

중국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징에 있다는 인민해방군 직영서점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말은 안 통하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이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찾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나가서 베이징 시내를 세시간 정도 걸어 다니다가 해방군 직영서점을 발견했습니다!


서점은 핑안리(平安里)라는 곳에 있는데 인민해방군 문예출판사와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서점의 첫 인상은 조금 별로였습니다. 일단 짧은 중국어로 훑어보니 군사 이론과 관련된 서적과 외국 저작의 번역물이 많이 보이더군요. 제법 유명한 저작들은 번역되어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보신 것들이지요?

1층은 군사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2층에는 좀 요상한(?) 책들이 같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건 1층입니다.


조금 썰렁한 여기가 2층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세 번 더 가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학습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하더군요.

해방군 직영서점이 좋은 점은 모든 서적을 10% 할인해 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영수증을 출력해주는 도트 프린터의 출력음도 정겹더군요.

그 외에 베이징 시내의 대형 서점들은 모두 규모가 제법 있는 군사서적 코너를 갖추고 있어서 군사관련 서적을 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몇몇 서점은 회원카드가 있으면 책에 따라 20% 까지 할인을 해 주더군요.


그리고 중국은 일반 대학에서도 군사사 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에 해방군 서점에서는 못 구하고 일반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군사서적도 제법 있었습니다.

일반 대학 출판부에서도 군사사 서적을 많이 출간할 정도로 연구가 활발하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 아닐까 싶군요. 앞으로는 중국어를 더 공부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책을 사러 중국에 갈 계획입니다.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귀국했습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멋진 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역시 편견은 좋지 않은 것이더군요.

중국에 있는 동안 Blogspot이 전혀 접속이 되지 않아 뭔가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귀국을 했으니 썰렁한 글로 도배질을 재개할까 합니다.

2007년 7월 8일 일요일

중국에 갔다 오겠습니다

이 어린양이 중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사적으로는 그다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니지만 공적으로 갈 일이 생기더군요.

가는 김에 뭐 재미있는게 없나 잘 찾아 보고 오겠습니다.

2007년 7월 7일 토요일

검은집

얼마전에 CGV 무료초대권을 몇 장 얻었는데 정작 CGV에는 트랜스포머와 기타 몇 개의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고 있더군요. 트랜스포머도 무료초대권으로 이미 봤기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영화 중 아직 안 본 영화를 찾다 보니 결국 "검은집"을 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재미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 주인공과 살인범을 너무 재미없게 묘사했습니다. 배우들은 열심히 연기했지만 주인공은 너무 착하기만 해서 짜증이 나고 살인범은 조용히 있다가 영화 후반부터 갑자기 미쳐 돌아가 황당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착하기만 한 주인공은 최악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남 걱정이나 하고 자빠졌으니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감정 이입이 되겠습니까! 주연 배우인 황정민의 연기는 좋았지만 그가 연기하는 인물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살인범을 연기한 유하의 연기도 역시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황정민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꽝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잔인한 신체훼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지겹습니다. 이야기 전개상 납득할 만한 피칠갑장면은 그럭 저럭 봐 줄 수 있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멀쩡한 사람 눈을 꿰메고 보험금을 받기 위해 두 팔목을 절단하는 장면은 끔찍하다기 보다는 짜증을 돋궜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지하실에서의 대결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무 이유 없이 살인범을 상대로 도망만 다닙니다! 다리를 저는 30대 여자를 상대로 도망만 다니는 남자 주인공이라니! 게다가 살인범은 격투 와중에 한쪽 눈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역시 주인공은 애인을 데리고 도망만 칩니다. 물론 도망조차 제대로 못 가니 구경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습니다. 만약 미저리에 나온 우락 부락한 여자였다면 공감을 해 줄 수 도 있지만 얼굴도 곱상하게 생긴데다 호리호리하고 한 쪽 다리를 절며 또 한 쪽 눈도 없는 여자를 상대로 도망만 다니니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비현실적인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제외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은 더 있습니다. 이야기를 주인공과 살인자 두 명을 중심으로 압축했다면 좀 더 좋았을 듯 싶은데 특히 주인공의 애인은 납치되는 것 말고는 별로 쓸 데가 없는 등장인물이었습니다. 애인이 소개시켜준 정신과 의사도 뜬금없이 나왔다가 뜬금없이 시체가 되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별로 필요한 장면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관객의 등골을 서늘하게 해 주겠다고 넣은 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결말은 다른 영화에서 너무 지겹게 봐 왔습니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너무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소재는 무난했지만 그것을 잘 다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짜로 본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2007년 7월 4일 수요일

[번역글][재탕]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이 글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불법 날림번역물입니다. 하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김에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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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6-4(1993년 12월)에 실린 러시아 군사 전문가 "스티븐 잘로가"가 쓴 Technological Surprise and the Initial Period of War : The Case of the T-34 Tank in 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12년이나 된 오래된 글 이긴 한데 짧고 재미도 있습니다. 각주도 생략한 불법 번역이라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현대 무기는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투입으로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최신일수록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미 공군의F-117 스텔스 전투기의 사용이 있다. 그렇지만 첨단무기를 기습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과거의 사례를 들자면 T-34전차의 사례가 있다. T-34는 흔히 전차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1941년 바바로사 작전 기간동안에는 별다른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기술적 요소는 실전에서 중요한 다른 두가지 요소의 뒷 받침이 없이 성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운용할 전술과 승무원의 훈련도이다. 
T-34의 개발은 1937년에 BT기병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붉은군대 기갑국은 A-20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이것은 BT기병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아주 약간 향상된 것에 불과했다. A-20의 주 무장과 엔진은 BT-7M과 동일한 것 이었다. A-20의 설계팀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부대로 부터 올라온 BT전차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붉은 군대 기갑국이 요구하는 사양 이상으로 장갑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설계국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A-32는 기갑국에서 승인하지 않았지만 스딸린의 승인을 받아서 개발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A-20과 A-32의 시제품은 1939년 여름에 모스끄바 근교의 꾸빈까 시험장에서 시험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A-32가 A-20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9일에 A-32는 T-34라는 명칭을 부여 받고 붉은군대의 신형 기병 전차로 채택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늘날 T-34의 혁신적인 장점으로 평가 되는 76mm 주포와 강력한 장갑은 당시 붉은 군대 기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세 종류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T-50은 T-26보병전차를 대체할 것 이었고 T-34는BT계열의 기병전차를, KV 중전차는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이중 T-50은 기술적 결함과 기타 지연 요인으로 1941년 8월에야 비로서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여름에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KV와T-34 두 종류의 전차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독일군이 1941년에 전투에서 마주치기 전 까지는 T-34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비록 일선 부대는 몰랐다 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의 정보기관은 T-34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독일과 소련간에 있었던 군사 기술 교류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소련측에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3호 전차를 수 대 제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소련은 무엇을 답례로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자인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부대에 배치된 T-34의 사진을 촬영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본 필자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T-34를 설계한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제공받은 전차를 우습게 봤다는 것인데 3호전차를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T-34의 출현에 대한 정보는 독일측에서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0년 5월~6월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Char-1bis 와 S-35를 상대했다. 독일측은 프랑스 전역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기술적 열세를 만회했으며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기 만족에 빠져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50mm Pak 38의 채용등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국방군은 프랑스 전역당시 보병들이 프랑스군의 Char-1bis전차와 마주친 뒤 전차 공황에 빠졌던 경험을 무시했다. 독일 국방군은 전차의 주무장을 강화하거나 보병 중대의 대전차 화력을 증대 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전차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소전 개전당시 독일 육군이 보유한 전차들은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것들에 비해 기술적 진보가 별로 없었다. 
사실 독일측이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소련이 초기의 전차 개발 과정에서 서방측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T-26은 영국의 경전차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BT-7은 미국의 크리스티 전차의 개량형에 불과했다. 독일은 스페인 내전당시 소련 전차와 교전한 사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련전차들이 영국과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복제품 수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명백히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1호 전차 보다 우수했다.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소련 기계화 부대와 접촉한 경험은 소련의 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더 키웠으며 핀란드 전역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가 보인 전과는 그런 시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1941년 소련군의 전차 배치

전쟁 직전 붉은군대는 1861대의 KV와 T-34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막 공장에서 출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508대의 KV와 967대의 T-34만이 전쟁 개시당시 서부 지역의 군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육군은 불과 1449대의 3호 전차와 517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T-34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었다. 
최근(1993년)까지 실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는 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도 T-34는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반격을 위해서 후방의 예비 부대 위주로 배치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러시아 사료의 공개로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 특히 T-34와 KV의 배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태까지는 신형전차들이 29개의 기계화군단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형전차들은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중점적으로 배치 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신형전차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군단은 5개 군단에 불과했다. 끼예프 특별 군관구 예하 제 4 기계화 군단과 서부 특별 군관구 예하 제 6 기계화 군단이 신형 전차의 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3, 8, 15 기계화 군단이 각각 100대 이상의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대량의 신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잘 장비된 부대는 제 4 기계화 군단 예하 32 전차 사단으로 리보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 32 전차 사단은 1941년 4월에 30 경전차 여단을 개편하여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은 42세의 예핌 뿌쉬낀 대령, 사단 정치위원은 체삐가였다. 뿌쉬낀 대령은 적백 내전에도 참전한 고참군인으로 1932년부터 기갑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0 경전차 여단은 사단급 부대에 못 미치는 규모여서 32 전차사단으로 개편될 당시 고급 지휘관(영관급)은 편제의 50%, 초급지휘관(위관급)은 편제의 43%를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병의 대다수가 1941년 봄에 징집되어 4월과 5월에 걸쳐 사단에 배속된 신병들 이었다. 사단의 최초의 임무는 이들 신병에게 전차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가르치는 것 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훈련조차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마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사단이 최초로 T-34를 지급 받은 것은 4월 25일이었고 마지막 차량이 5월 25일에 수령 되었다. 사단은 총 173대의 T-34와 49대의 KV를 보유해서 전쟁 발발 당시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잘 장비된 부대였다. 편제상 1941년의 소련 전차 사단은 210대의 T-34 와 63대의 KV를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단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용 무전기는 편제수량의 30%에 불과했으며 사단 공병과 교량 부설 장비는 28%, 사단의 차량은 22%, 전차 수리용 장비는 13%, 전차의 예비 부품은 2%에 불과했다. 사단의 전차병들 중 많은 숫자가 5시간 미만의 조종 시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수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 실탄 사격을 해 보지도 못 했다. 전차병들은 신형 전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 했으며 사단의 정비병들도 어떻게 신형 전차를 정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32 전차사단만 이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940년에 불과 115대의 T-34를 생산해서 부대로 보냈으며 1941년 1월 까지 T-34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부대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붉은 군대에서 가장 잘 준비가 된 부대도 겨우 6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가졌다는 것 이다. 1941년 5월 1일까지 생산된 T-34는 655대에 불과했으며 아무리 높게 추정치를 잡더라도 부대에 배치되어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은 500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전쟁 발발 당시 T-34 승무원의 절반 가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점은 KV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T-34와 KV 전차포에서 사용할 대전차 철갑탄의 생산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전차용 탄약은 규정량의 12%정도만 겨우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중 대다수가 고폭탄이어서 대전차 능력이 거의 없었다. 예비 부품은 크게 부족했다. 신형 전차들은 특히 클러치와 기어박스등 동력 계통에서 심각한 기계적 결함이 있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부족한 전차병들과 맞물려 도로 행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KV전차를 위해 새로 생산된 신형 보로쉴로베츠 전차 회수차는 배치량이 크게 부족했다. 만약 전차가 도로 행군 중 고장이 나 버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대의 내부적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1941년의 대 재앙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었다. 부대단위 훈련은커녕 전차병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소련 군대의 기갑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소련 기계화 군단의 실전 사례

북부전선에서 꾸르낀 장군이 지휘하는 제 3 기계화군단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109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단 예하 제 5 전차 사단은 6월 22일에 니멘강의 일리투스 다리를 건너려는 독일 제 7 기갑사단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T-34는 확실히 체코에서 개발한 38(t)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제 5 전차 사단은 격퇴되었다. 사단의 T-34 일부는 니멘강 동안에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토치카로 이용되었다. 1941년 6월에 상실된 38(t)는 총 33대였으니 독일측은 매우 적은 손실을 입은 셈 이었다. 다음날 라쎄냐이에서 개시하기로한 소련측의 반격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시도되지도 못 했다. 6월 24일에 제 2 전차사단 의 잔존 병력은 제 6 기갑사단의 100 차량화 소총연대를 공격해서 독일측의 진격에 약간의 차질을 입혔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뒤 이틀간 전차전이 계속됐지만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의 T-34는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벨로루시아에 배치된 소련군 기계화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인 하츠낄례비치 장군의 제 6 기계화 군단은 총 238대의 T-34와 114대의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6월 24일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 했다. 24일에 투입된 제 6 군단은 그로드노 서부에서 기갑집단을 후속하던 제 20 군단의 보병 사단들과 격돌했다. 독일측은 순식간에 탄약을 소모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6월 25일에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서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하츠낄례비치 자신도 전사했다. 헤르만 호트의 제 3 기갑집단은 6월 26일에 벨로루시아의 수도인 민스끄에 도착했으며 그동안 소련 제 6 기계화 군단의 저항은 미미했다. 제 6 기계화군단은 제 10군 예하의 부대들과 함께 그로드노 남서쪽에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군단소속의 전차 중 소수만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군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으며 전선에 배치된 T-34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던 제 6 기계화 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전멸 당했다. 
T-34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부대는 우끄라이나에 배치된 3개 기계화 군단이었다. 리보프에 배치된 블라소프 장군의 4 기계화 군단, 두브노에 배치된 랴비체프 장군의 8 기계화 군단, 지토미르 근교에 배치된 까르뻬조 장군의 15 기계화 군단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중에서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제 4 기계화 군단이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군단은 총 414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단 예하 제 8 전차 사단은 가장 잘 훈련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전진하는 독일군은 블라소프의 군단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까르페조의 제 15 기계화군단은 135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 투입되었고 군단이 보유한 많은 전차를 도하점과 습지대에서 사고로 상실했다. 
독일군은 6월 22일에 우끄라이나 전선에서 최초로 T-34와 격돌했다. 독일 제 11 기갑사단 예하 제 11 기갑연대는 이날 리보프 전차 훈련 연대 소속의 T-34 30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교전에서 세대의 4호 전차와 두대의 3호 전차가 격파 당했다. 이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교전은 라제쿠프 근교에서 6월 23일에 벌어졌다. 3호 전차를 장비한 11 기갑사단의 2개 기갑 대대는 제 10 전차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측은 46대의 BT-7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 32 전차사단 소속의 T-34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를 잃었다. 6월 26일에 소련군은 끼예프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반격을 시도했다. 1941년에 벌어진 최대규모의 기갑전에서 랴비셰프의 제 8 기계화 군단과 까르페조의 15 기계화 군단의 잔존 전력, 블라소프의 제 4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 그리고 꼰드루셰프의 22 기계화군단은 브로디와 두브노일대에서 독일 11 기갑사단과 16 기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전력이 약한 로꼬소프스끼의 제 9 기계화 군단과 페끌렌꼬의 19 기계화군단, 치스챠꼬프의 24 기계화 군단은 대부분 주무장으로 “새총”을 달고 있는 구식 T-26과 BT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측방을 엄호하는 독일 보병사단들을 상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의 사단사는 이날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T-34와KV는 특히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한 독일 보병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독일군의 37mm 포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 했으며 신통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사단 포병의 대구경 유탄포와 88mm 고사포로 대응했다. 독일 기갑부대역시 보병부대와 유사한 곤란을 겪었다. 이때문에 독일 전차병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공격했다. 3호전차의 주포는 T-34를 측면에서 300~400m정도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실패했다. 독일측은 16 기갑사단만 단독으로 293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뒤 소련군 기계화 군단은 전투 시작당시의 20% 정도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우끄라이나의 붉은 군대 기갑국 감독관인 모르구노프 소장은 이 브로디 전투가 끝난지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차 회수차량과 예비부품의 부족에 T-34와 KV의 기계적 결함, 승무원의 훈련 부족이 결합합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적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정찰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행군중에도, 전투중에도 끊임 없이 적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을 향해 800~900km 씩 이동하면서 우리 공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병과의 합동 작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숲과 습지로 전차의 기동에 불리했습니다. 적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T-34와 KV전차는 대전차 철갑탄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손실이 매우 높았으며 막대한 장비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194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었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의 부품 수명은 매우 낮았다. 소련의 전차 엔진은 평균 100시간 정도 사용하면 교체해야 했다. T-34전차는 800km정도 도로주행을 하면 기계적 한계에 도달했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화군단은 이 이상의 거리를 주행해야 했다. 이런 기계적 결함은 정비 인력의 부족으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형 전차를 제대로 다루는 인원은 대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의 전투에서는 경험 많은 장교가 많이 전사했다. 소련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전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많은 수가 전사했다.
다시 제 32 전차 사단의 사례를 보면 그들이 전투 중에 겪은 문제는 새로 편성된 부대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단은 두브노-브로디 전투 이전에는 이렇다 할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지만 매우 빨리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 사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전쟁 첫번째 달에 32 전차 사단은 49대의 KV전차중 32대를 잃었고 173대의 T-34 전차중 146대를 잃었으며 전차병중 103명이 전사하고 259명이 부상당했다. 전차 손실중 거의 절반이 기계적 결함이나 부품 부족, 전차 회수 차량의 부족으로 인한 것 이었으며 손실된 전차중 10% 미만이 회수되어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전체 손실중 불과 30% 만이 전투로 인한 손실이었으며 10%는 수렁에 처박혀서 상실되었다. 사단은 총 113대의 독일 전차와 96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독일군의 전투 보고와 대조해 볼때 이건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이 사단의 전력과 이 사단이 거둔 성과를 비교해 보면 당황스럽다. 이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형편 없었다. 소련 기갑부대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바바로사 작전 기간중 T-34를 날이 무딘 칼로 만들어 버렸다. 

미숙한 기술

1941년에 T-34가 보인 많은 문제점은 확실히 이 시기 소련군의 전차 사단과 기계화 군단 전체어 만연해 있던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T-3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이 Char B-1과 T-34, KV에 대해 우세했던 이유는 독일 전차의 포탑 배치였다. 3호나 4호 전차 같은 독일 전차는 3인용 포탑이었다. 각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장전수가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Char B-1은 1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해야 했다. 소련군의 전차는 둘다 2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포수를 겸해야 했다. T-34의 2인용 포탑은 실전에서, 특히 전차끼리의 격돌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프랑스나 소련은 소형 포탑이 무게를 줄이면서도 방어력을 높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탑이 크다면 방어해야할 면적이 많이지기는 한다. 이런 소형 포탑은 순전히 기술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었으며 일선 부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대규모 전차전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련 전차의 전차장들은 포탑내의 전투 배치와 형편없는 시야, 포수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것때문에 상황 판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전에서 전차장들은 사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때문에 전차장이 해야할 목표 탐색, 다른 전차와의 합동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소대, 나가서 중대급 작전이 된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전차장에게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 졌다. T-34의 광학 장비는 독일군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 졌다. T-34의 전차장은 독일 전차에 있는 우수한 큐폴라가 없어서 차내에서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 전차와 달리 포탑 해치가 너무 커서 관측을 위해 차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위험했다. T-34의 해치는 앞으로 열게 되어 있어서 전차장은 몸 전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포탑에 걸쳐 앉아야 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에는 소수의 소련 전차만이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모든 중형 전차가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 소련군은 중대장 전차 까지만 무전기를 지급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은 신뢰성 높은 무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 전차 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사실상 그의 중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정상으론느 깃발을 이용해서 신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건 거의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T-34는 시야가 불량한데다가 전차장들은 포를 사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포탑이 2인용이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차체에 탑재해야 했으며 전차장이 무전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실전에서 소련 전차와 교전해 본 뒤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독일 전차병들이 보기에 소련 전차 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전투를 하거나 엄마닭과 병아리 처럼 옹기 종기 몰려 다녔다. 소련 전차 소대는 소대장의 지휘하에 단일 목표를 집중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결과 소련 전차 소대는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전투시 반응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종종 지적했다. 1941년 여름의 전차전에서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한발 발사할때 세발 이상을 쏠 수 있었다. 소련이 이때의 문제점을 수정하는데는 거의 2년이 넘게 걸렸다. 
바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T-34가 보인 실망스러운 전과는 2차 대전당시 다른 신무기들과 비교해 특별히 구별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우수한 지휘관, 뛰어난 전술이 없다면 신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Leaping Horsman Books에서 나올 새책

오늘 Leaping Horsman Books에서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다음달 중에 An Artilleryman in Stalingrad가 출간된다는 군요.

이 책은 제 71보병사단 소속의 포병장교의 회고록인데 264쪽의 책에 사진이 160장 이상이나 되는군요.사진과 부록도 충실한 것 같으니 나오는 대로 질러야 겠습니다.

2007년 7월 3일 화요일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 인터뷰 사건

애치슨 국무장관의 극동방위선 관련 발언으로 한국이 어수선하던 1950년 5월 5일,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장 코낼리 의원은 U.S. News & World Report와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코낼리 의원은 한국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Q - 의원께서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A - 저는 우리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국은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돕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부 지역은 아시아 본토, 즉 소련과 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 소련이 한국을 정복하려는 의도만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Q - 그렇지만 한국은 미국의 방위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요?

A - 물론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가장 중요한 지역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국무부는 당황합니다. 애치슨 라인 덕분에 이 박사로부터 별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던 국무부는 코낼리 상원의원의 인터뷰가 한국 내에서 일으킬 반향을 걱정하게 됩니다.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대략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합니다.

극동차관보(러스크)가 국무부차관(웹)께

대외비 워싱턴 1950년 5월 2일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코낼리(Connally) 상원의원의 발언

이 문서에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1950년 5월 5일자 U.S. News and World Report에 실린 “국제 정책과 초당파적단결”이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 대답한 두 개의 문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차관께서는 주말로 예정된 코낼리 상원의원과의 면담에서 코낼리 의원의 발언이 미칠 파급효과, 특히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제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무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1) 코낼리 의원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무부의 기본 입장과는 무관한 패배주의적 경향을 드러낸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반박해야 합니다.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국무부의 기본 입장은 1950년 3월 7일에 국무부장관이 코낼리 의원도 참석한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한 발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습니다. :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최근 있은 논의에서 많은 의원들이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기 위해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했습니다. 저는 미국의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대신 성공하겠다는 결의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대내외적 문제와 한국의 자치 경험의 부족과 기술적, 행정적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안정성과 공공질서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도 일시적이나마 효과적으로 차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원조에 힘입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될 만큼 충분한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물론 100%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원조가 없다면 이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코낼리 의원의 답변은 대한민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문제입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있는 “방위권(Defense Perimeter)"에 대한 국무장관의 프레스 클럽 연설 이후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외교관과 미국의 극동방위권에 한국까지 포함시켜야 된다는 (미국 내의) 집단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 행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대한민국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포함시키는) 공약을 제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론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위선에 대해 보도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와 지속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것입니다.
코낼리 의원의 발언과 관련해서, 만약 언론기자들이 국무장관께 코낼리 의원의 인터뷰에서한국에 대한 발언에 대해 질문한다면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대답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과 관련해서 코낼리 의원 및 코낼리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상원외교위원회와 많은 의견을 나눴으며 또한 하원외교위원회(House Foreign Affairs Commitee)와도 의견을 나눴습니다. 저는 의회와 국무부간에는 어떤 의견이나 견해 차이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서 생존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미국정부는 직간접적으로 국제연합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저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말한 것은 한국과 사실상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압제로부터 독립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미국에게 있어 극도로 중요한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회가 군사원조나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USGPO 1976, pp.64~65

당연히 한국의 언론들은 이 심각한 발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리대사(드럼라이트)가 국무부 장관께

코넬리 의원의 한국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언론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은 5월 5일에 코낼리 의원의 발언에 대한 소식을 추가적인 설명 없이 전송 받았습니다.
5월 6일자 석간 신문 두 곳(서울, 경향)은 AP통신이 보도한 무초대사의 발언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경향신문의 “코낼리의 어리석은 발상을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한국은 미국의 소련에 대한 투쟁의 동반자이며 특히 한국이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단호한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경향신문 사설은) 코낼리 의원이 상원 외교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미국 국민과 민주당의 영향이 강한 국무부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코낼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설은 미국의 대한 원조 공약을 언급하면서 만약 한국이 공산화 된다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어선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 략)

Ibid, pp.66~67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박사는 심기가 아주 불편하셨습니다.

드럼라이트 대리대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록

2급비밀, 1950년 5월 9일, 서울

주제 : 코낼리 상원의원의 한국 관련 발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


오늘 아침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의원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한국관련 발언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매우 분노에 찬 목소리와 냉소적인 태도로 한국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한국과 3,000만의 한국인이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가치가 별로, 아니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고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공산당에게 대한민국을 쳐들어와도 좋다고 초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수 있겠냐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매우 해로운 것이며 코낼리 의원이 국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상 그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후 략)

Ibid. p.77

그리고 대략 한 달 뒤에 수령님께서는 스탈린 동지가 하사하신 땅크를 몰고 진짜로 쳐 내려왔지요. 전쟁이 터지기는 했지만 이 전쟁은 이 박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없도록 해 줬습니다. 이박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2007년 7월 2일 월요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입니다.

○○○○년 11월 14일, ○○ 장군이 ○○에서 쓴 편지에는 ○○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연대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연대는 ○○○○년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에 ○○을 ○○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 중대 중 일부는 ○○ 카빈, ○○ 소총이나 ○○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를 사용하는 소총을 장비하고 ○○로 만든 ○○를 지급받았는데 이 ○○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의 ○○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리고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둔채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도데체 어느나라 군대일까요? 1945년의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70년의 프랑스군이라는군요.

원래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종이탄포를 사용하는 소총(Percussion Rifle)을 장비하고 마분지로 만든 군모를 지급받았는데 이 모자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뒤리외의 45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프랑스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린뒤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268~269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섬멸되자 프랑스는 황급히 예비군을 긁어 모으고 해군 병사들도 보병으로 전환했는데 전쟁 초기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기본 장비인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야포 부족으로 해군에서 차출한 120mm 해안포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프로이센군 조차 전쟁 초반보다는 프랑스군 포병이 나아졌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와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씩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120mm포의 이야기를 읽을땐 마치 독일 국민돌격대의 판저파우스트가 연상되더군요.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인배의 본산지 노서아 천지에 "소잡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합니다!

2007년 6월 24일 일요일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한달 반 만에 집에 내려와서 그 동안 주문했던 책 들을 정리하는 중 입니다.

이번에 온 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놈은 Melchior Verlag에서 출간한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입니다. 이 책은 1927~1930년에 Gerhard Stalling 출판사에서 Schlachten des Weltkrieges 시리즈로 나온 책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책을 1차대전을 다룬 다른 책 들의 각주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Melchior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험삼아 먼저 탄넨베르크 전투를 주문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D. Showalter의 꽤 재미있는 책이 있긴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의 독일인들의 시각도 매우 궁금하더군요.

이 책을 훑어 보니 좋은 점과 난감한 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먼저 좋은 점은 책에 들어 있는 15개의 지도가 모두 낱장으로 분리되어 스캔하기 편하다는 점 입니다.

난감한 점 이라면 본문의 활자체 까지 1927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입니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활자체가 아니라 Blackletter, 즉 고딕폰트로 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저는 이런 활자체는 별로 익숙치 않아서 읽기가 난감하더군요.

책 자체가 1927년판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서 그런지 펜화로 된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데 꽤 마음에 듭니다. 물론 당시의 사진자료들도 꽤 많이 실려있습니다.

이 출판사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다른 시리즈들은 분량이 150~200쪽 정도로 내용이 다소 빈약해 보입니다. 일단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고 나서 나머지 시리즈들을 구매할지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는 이 것 외에 Daniel Niemetz의 Das feldgraue Erbe도 꽤 흥미있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이 동독군에 끼친 인적 유산에 대해 다룬 책인데 과거 청산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독일의 사례는 어떨까 싶어 산 책 입니다. 대충 훑어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는 국방군 출신의 부사관 계층이 동독군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 잠시 TV를 보니 故 이은주씨가 나오는 영화를 해 주는군요. 목소리만 빼면 아주 멋진 배우인데 참 아깝게 일찍 갔습니다.

2007년 6월 23일 토요일

1차대전 말기 영국육군의 규율과 사기문제 : 1917~1918

David Englander의 에세이, Discipline and morale in the British Army를 읽다 보니 1차 대전 당시 영국 육군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꽤 흥미롭습니다. 전쟁 이전의 영국 육군은 사병들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데 노력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참전한 이후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고위장성들이 물리적 징계가 군대의 규율을 잡고 전투 집단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했던 점은 의외입니다. Englander의 글에 따르면 헤이그의 경우 전쟁이 끝난 뒤 “야전징계 1호(Field Punishment No.1)"가 없었다면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육군은 높은 수준의 규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이런 고위 장성들의 주장에 대해서 Englander는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17~1918년 기간 동안 영국군 야전부대내의 범죄율을 보면 부대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어 전투 능력을 감퇴시키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1918년 독일군의 춘계대공세에서 영국 제5군이 초기에 붕괴된 요인은 독일군의 병력 및 전술적 우위도 있지만 부대의 사기가 극히 위험한 수준까지 저하됐던 것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Englander가 제시한 통계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동시기의 프랑스 육군, 독일 육군과 비교해 봐야 할 수 있겠지만 결론 자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국 육군이 이런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1차 대전 이전까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해 본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표를 html로 그려 넣는 것 보다는 그냥 워드로 작성해서 그림파일로 만드는게 더 편한것 같군요. 앞으로 html로 표 만들일은 거의 없을 듯 싶습니다.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신뢰도 높은 러시아 인터넷 서점 Ozon

채승병님께서 러시아 인터넷 서점오존을 추천하신 댓글을 읽었습니다. 확실히 오존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안정성 면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러시아 인터넷 서점입니다.

러시아와 관련된 분야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러시아에 가지 않고 러시아 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시신 분들이 많으실 것 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가 한국과는 거리가 있는(???) 국가이다 보니 이쪽 물건들을 구한다는게 약간 불편한게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러시아라면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도 들고 안정성이 의심도 가니 말 다했지요. 저도 안정성의 문제 때문에 작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지독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Eastview의 러시아 서적 구매대행 서비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은 바가지가 너무 지독하니 애용하기는 부담이 많이 가더군요.

그러던 차에 작년 말 쯤 아는 선배에게서 추천 받은 곳이 바로 오존 입니다. 올해 초에 이곳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확인 삼아 주문을 조금 더 해 본 뒤 듣던대로 믿을만 하다고 생각되던 차에 마침 채승병님도 이 사이트를 추천하시는군요.
저도 러시아어는 겨우 겨우 배우고 있는 수준이라 이런 글을 쓰는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혹시라도 필요하신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 씁니다.

일단 오존 또한 다른 영어권이나 독일어권 인터넷 서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처음 사용하시는 분 들은 오른쪽 메뉴에 이름과 이메일주소, 비밀번호를 넣고 가입하시면 됩니다.

오존의 배송체계는 아래에서 보시듯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우편(2-10주), 항공우편(1-5주), TNT(5-10일) 입니다.


저는 2-10주 배송만 써 봤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잘 도착합니다. 5-10일짜리를 선택하면 책값 보다 배송료가 3-4배는 높게 나오더군요. 저는 가난한지라 당연히 이건 써 본 일이 없습니다. 제 주변의 다른 분들도 오존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호평하시는지라 믿고 쓰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적는 건데 주문 메뉴에 корея와 같이 뜨는 корея кндр는 북한이랍니다...

2007년 6월 20일 수요일

싸이의 병역 비리 문제에 대한 잡상

싸이의 병역 비리 연루 문제가 터지니 군대 다녀오신 분들께서 다시 한번 분통을 터뜨리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분통이 터집니다. 싸이가 아니라 국가에게 말입니다.

예. 이것 참 골머리 아픈 문제이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의무”로서의 병역은 아주 골머리 아픈 문제입니다. 사실 말이좋아서 의무이지 언제 대한민국 역사상 병역의 의무라는 것이 모든 계층에게 공정히 부과된 적이 있긴 했답니까?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헌법을 가진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병역의무라는 걸 부과한다는 건 뭔가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특히 그 의무라는 것이 공정히 부과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있다면 당연히 그 반대급부인 “권리”라는게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병역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간주 할 만한 그런 “권리”로 간주할 만한 것이 없거든요. 선거권은 19세기~20세기 초반 유럽 국가들이 병역의무의 반대급부로 내놓은 당근이지만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부터 투표의 권리가 있었으니 이건 언급 대상이 아니지요.

결국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라는 것은 시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국가는 시민들에게 의무를 이행한 대가로 어떤 혜택을 베풀었습니까?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요. 뭐가 떠오르십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나는게 있으신 분들은 제게 좀 알려주십시오.
놀랍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의무에 대한 대가는 없으면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물리적 처벌과 윤리적 비난만 있을 뿐 입니다. 의무를 이행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제대로 납득시키지도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대한민국입니다. 단순히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냐고 묻지 말란 말 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나라를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안 지켜도 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있던가 내가 나라를 지키면 뭘 해 줄 건지에 대해 답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 심심하면 연예인 병역 비리를 터트리는 것도 매우 욕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난 60년간 병역비리는 계속돼 왔고 빠질 인간들은 다 빠졌는데 어떻게 병역 비리로 걸려드는 건 연예인 뿐일까요? 국가에서 마음만 먹고 조사하면 그 이상의 병역 비리도 적발해서 처벌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왜 항상 만만한 연예인만 잡을까요?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잔챙이들에 대해 분노만 하고 마는 것 일까요?
그리고 언론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터질 때 마다 가쉽거리로만 다루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가 아깝습니다.

이 따위 것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차라리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국주의 국가인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사례를 한번 볼까요? 1차 대전 당시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국가 총동원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독일의 지배층은 단순한 애국심과 국민의 의무만 가지고는 동원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바이에른 전쟁성장관인 크레슈타인(Kreß von Kressenstein)은 국민들은 국가가 더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거기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언명하기 조차 했습니다! 전쟁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보수층은 사민주의적 개혁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국민에 대한 동의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자 그 결과 독일 보수층은 1917년부터 사민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전쟁 이후의 국가 개혁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1916~17년의 식량부족 사태 이후 독일 보수층들은 “국민”들에게 공짜로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것은 이런 확신을 더 강화하는데 일조합니다. 그 결과 독일 제국의회에서는 전쟁 이후의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물론 가장 보수적인 독일 군부, 특히 프로이센 장교단은 계속해서 이런 개혁 움직임에 제동을 걸긴 했습니다.)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기에 이런 개혁은 시행되지 못 했지만 최소한 유럽에서 가장 보수, 반동적이라는 독일에서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들이 국가에게 그 동안 치른 병역 의무의 대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성인 남성 대부분은 건국 이후 수 십년간 분명히 희생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뭔가 혜택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게 현실입니다. 이건 뭔가 이상한 게 아닐까요? 최소한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꼴로 봐서는 뭐든 하나 달라고 요구하는게 정상인데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잔챙이에 불과한 연예인 한 두 명 따위에 분노하지 말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에 뭔가 이야기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한줄 요약 : 국가는 병역비리 적발했답시고 연예인 조지는 건 작작하고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2007년 6월 19일 화요일

허접한 "대운하" 지지 기사

놀랍게도 대운하를 지지하는 기사를 내는 "언론(?)"도 있긴 있었습니다.

‘대운하’에 대한 단상 -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독립신문"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대운하를 지지하는 이유가 기묘하군요. 예전에는 대운하 지지자들이 물류효과를 선전했는데 그쪽이 현실성이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서 그런지 새로운(???) 논리를 개발한 모양입니다. 최소한 대운하 지지자들도 초기에 주장하던 사실들이 대중적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인식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글의 마지막 부분은 매우 배꼽이 빠지는 군요.

마지막으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운하의 건설은 국민적 선택의 문제이지 과학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계산해서는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명품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다른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운하를 단지 다른 한 수송로로서 다룬다거나 또는 건설비용대 이익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단견이다. 사회적 효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판단할 문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필수품보다는 사치품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듯이 사회가 발전하게 되면 단지 필수기능에만 비중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미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선택할 수도 있다. 가난한 시절에는 단지 비와 눈만 피할 수 있다면 훌륭한 집이지만 소득이 높아지면 정원에 나무도 심고 잔디도 깔고 화단에 꽃도 피우게 되는 법이다.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운하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아무리 봐도 궤변입니다. 궁색하기 짝이 없군요. 수조원이 소요될 문제가 과학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수조원을 들여 화단의 역할 밖에 안될 운하를 만들자는 이런 얼간이 같은 주장을 인터넷에다 할 수 있다는게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멍청한 글을 보는 것도 매우 진귀한 경험이니 일기에 적어도 될 것 같습니다.

2007년 6월 18일 월요일

흐루쇼프 대왕

주호 흐루쇼프 - sonnet

소련의 야담 속에 등장하는 흐루쇼프 동지의 술버릇 - 채승병

흐루쇼프에 관한 농담 하나 - 슈타인호프


여러 대인들의 흐루쇼프 전하의 덕을 찬미하는 글을 보니 이 어린양도 새삼 전하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나옵니다. 전하에 대한 고사는 끝이 없으니 이 어린양은 그림으로 전하의 덕을 기릴까 합니다.


2007년 6월 16일 토요일

황제폐하의 음주생활


그리고 닉슨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닉슨의 좋지 않은 음주 습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가먼트Leonard Garment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닉슨이 자신의 만성적인 불면증에 어떤 방법으로 대처했는가에 대한 비화를 털어놓았다. (닉슨은 잠이 오지 않을 때) 진정제와 술을 마시고 나서 전화로 두서 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는 것이다. 키신저도 종종 자신의 참모들에게 닉슨이 술에 취한 채 흐리멍텅한 상태로 회의나 전화 통화를 한다고 투덜거렸다. 키신저가 닉슨을 조롱한 것 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참모들도 닉슨이 술 때문에 문제를 겪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것은 닉슨이 의학적인 알코올 중독(alcoholic) 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술을 마시면 너무 잘 취했다는 것이다. 할더만Harry R. Haldeman은 “(닉슨이) 맥주 한잔만 마셔도 정상적인 연설은 싸구려 술집의 주정뱅이가 주절거리는 것처럼 됐다”고 회고했다. 할더맨과 마찬가지로 에리히만John Ehrlichman은 “닉슨은 피로할 때는 맥주 한잔만 마셔도 맛이 가 버렸다(knock him gallery west)”고 했고 닉슨의 스피치라이터 중 하나였던 프라이스(Ray Price)는 (대통령이) “수면제라도 먹고 나온 것 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러니 외교적 위기 상황에서 술을 한잔 혹은 그 이상 마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닉슨은 1970년의 캄보디아 침공 때 처럼 자신의 주량 이상으로 술을 마셔 더 난폭해 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Jeffrey Kimball, Nixon’s Vietnam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8), p.14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 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인간들도 별 수 없구만 하는 생각과 함께 저런 인간들이 핵공격을 명령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핵무기의 등장 이후 60억 인류가 이런 화상들과 함께 60년이 넘게 공존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중국공군항전사 - 唐學鋒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화문서적에 갔다가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도로 구매한 책 입니다. 가격은 22위안인데 4,500원에 샀습니다. 이 책은 중일전쟁 발발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국민당 공군의 작전과 편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관심은 있으되 아는게 없는 분야고 가격도 5,000원이 안되는지라 바로 질렀는데 조금 훑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이 없습니다! 맙소사. 명색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인데 이럴수가! 경악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이런 경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독의 군사사가인 그뢸러(Olaf Groehler)도 자신의 저작에 각주를 달지 않았지요. 물론 이 사람은 참고문헌 목록까지 빼 먹진 않았습니다만.... 이 당학봉이란 양반은 더 대인배로군요.

다음으로는 제본 상태가 불안합니다. 이거 몇년이나 더 갈런지... 물론 중국책이 러시아 책 보다는 더 잘만들긴 하는데 아직 평균적으로는 한국 만큼 잘 만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에 쓰는 종이도 질이 약간 낮은 것 같고...

이것을 제외하면 개설서로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중국공군(국민당공군)의 주요 작전을 잘 다루고 있으며 일본측 자료도 많이 참고한 듯 일본측에 대한 서술도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 전선에서 작전한 미육군항공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대략 훑어본 느낌으로는 개설서로서 상당히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초기 공군발전과정에 대해서도 앞 부분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도 좋은 점 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von Hardesty의 Red Phoenix에 비교할 만한 저작 같습니다.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죠.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SS가 아니에요!

“You SS? You SS?”

하이트(Heinz Heidt)는 겁에 질려 뒤를 돌아봤다. 그는 자기 뒤에 있는 미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이트는 자신으로부터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미군 병사는 위장포를 덮은 철모를 쓰고 털 달린 가죽 자켓과 위장무늬 바지를 입었고 아주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탄환이 끼워진 탄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병사의 길다란 소총은 하이트가 아니라 슈타이어에 타고 있는 검은색 전차병 유니폼을 입은 젊은 소위를 겨누고 있었다. 하이트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발 앞으로 나가 학교에서 배운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No SS! Armoured Division! Panzer Troopers wear black uniform too.( SS 아니에요! 기갑사단! 전차부대도 검은 유니폼을 입어요!)”

그리고 제복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독수리 문장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육군은 독수리를 가슴에만 달아요! SS처럼 팔에도 달진 않아요!”

미군 병사는 씨익 하며 미소를 지었다.

“It’s OK. Boy.”

미군 병사는 소위를 겨눴던 총을 거두고 가늠쇠를 쓰다듬으며 주위의 포로들에게 말했다.

“If I see SS, I kill them all.(SS가 눈에 띄면 모조리 죽여버린다)”

위험 천만한 순간이 지나가자 미군 병사는 포로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총을 치운 뒤 포로들에게 카멜 담배와 껌을 나눠줬다.

Guido Knopp, Die Gefangenen, (Goldmann Verlag, 2005), s.265.

전쟁이 끝날 무렵에 SS라고 하면 미군이건 소련군이건 간에 좋은 꼴을 못 당했다고 하지요. 종종 SS가 아닌 병사들도 SS로 오인받아 사살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던 모양입니다. 전에 인용했었던 Hungary at War에는 헝가리군 포로들이 무장친위대로 오인돼 소련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증언도 실려 있지요. 전쟁 말기에 재수없게 SS로 편입된 병사들은 얼떨결에 공공의 적이 됐을 테니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참전자들의 이런 저런 증언을 듣다 보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사람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습니다.

2007년 6월 11일 월요일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의 출간이 조금 더 연기될 것 같습니다.

올해 국내에서 출간될 2차대전 서적 중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을 듯한 Blitzkrieg-Legende. Der Westfeldzug 1940의 한국어판 출간이 더 연기될 듯 싶습니다. 현재 지도 작업 및 번역 교정이 진행 중이라는데 올해 초만 하더라도 6월이면 출간 될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로 봐서는 6월 출간은 어렵고 더 연기될 것으로 보입니다.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된 만큼 더 좋은 책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2007년 6월 9일 토요일

줄기의 권능은 무한하기도 하여라...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2005)라는 영화의 한장면 입니다.


핵심 부분을 확대하면...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것이 2005년이니 줄기세포의 허무개그적 성격을 파악하고 넣은 장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웃겼습니다. 영화 자체는 별로였으나 이런 자잘한 요소들은 마음에 들더군요.

이 영화는 DVD도 동대문에서 3,000원 정도에 팔리고 있으니 한번 사 보셔도 경제적 부담은 되지 않을 성 싶습니다. 씨네 21에 관련 기사가 하나 더 있더군요.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2007년 6월 3일 일요일

[妄想大百科事典] 독서

[妄想大百科事典] 독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취미 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취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에 일인당 연간 독서량은 계속해서 하락하는 추세에 있다.

2007년 6월 1일 금요일

캔자스주립대 출판부에서 나올 2007년 하반기 기대작

재미있는 군사서적을 많이 출간하는 캔자스 대학 출판부에서는 꾸준히 재미있어 보이는 서적을 내놓고 있습니다. 2007년 3/4분기에 나올 서적들을 보니 꽤 재미있어 보이는게 두 권 보이는군요.

한권은 일전에 채승병님이 "전격전의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 소개한 Robert M. Citino의 신간 Death of the Wehrmacht: The German Campaigns of 1942입니다. 독일군의 1942년 전역에 대해 분석한 서적이로군요. 이건 지름 1순위로 넣어야 겠습니다. 2007년 10월 출간예정이라는군요.

두번째 녀석은 미육군 제1보병사단사, The Big Red One
America’s Legendary 1st Infantry Division from World War I to Desert Storm
입니다. 워낙 유명한 부대라 사단사가 많긴 한데 이것도 나름대로 쓸만하지 않을까 싶군요. 출간되고 서평을 본 뒤에 결정해야 겠습니다. 이건 2007년 11월 출간예정이랍니다.

지름신께서는 항상 지갑의 충만함을 시험하시니 역시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잠시라도 나태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년 5월 29일 화요일

192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 설정 문제

sonnet님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글에 첨부된 마지막 지도를 보니 꽤 재미있는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잠시 언급했었던 F. Hirsh의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을 보면 소연방의 형성 초기 연방 내 각 공화국간의 경계 확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꽤 재미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북카프카즈 지방(край)과 돈 주(타간로그~샤흐티를 포함하는 지역)가 어느 쪽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인종적으로 돈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게 맞긴 했는데 러시아 사회주의공화국의 주장은 돈 주의 주민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계가 맞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에 포함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북카프카즈와 더 가깝다는 논리를 폅니다.
소연방 중앙정부는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압력을 넣는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반대 급부로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를 우크라이나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지역도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 인이라는 논리였지요. 그러자 당연히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여기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 결과 소련방 중앙집행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СССР) 지역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게 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대표 볼디레프(Михаил Болдырев)는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의 거주민들에게서 우크라이나 인으로 간주할 만한 문화적 특성이 전혀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극 소수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발언은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을 합니다.(여기에 대부분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러시아로 남아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여 집니다) 여기에 러시아 경제학자들이 가세하는데 이들은 쿠르스크와 보로네시가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특히 모스크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곡창지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주장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어 딱히 어느 인종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접경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죠. 우크라이나의 경우가 문제가 됐던 것은 벨라루스와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그러니 벨라루스같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약하고 모스크바에 비교적 순종적인 곳과는 달리 최대한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아예 러시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켜 버리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 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사는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안을 내 놓았고 우크라이나는 돈 주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러시아로부터 일부 지역을 양도 받는 것으로 문제는 마무리 됩니다.

민족문제란 이래 저래 골치 아픈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일본어나 중국어만 쓰는 "한국계"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나라꼴이 볼만할 것 입니다. 그 점에서 언어와 인종이 단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복 받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2007년 5월 26일 토요일

전투에서의 기만술 - 1870년 마 라 투르 전투의 사례

웹 서핑을 하다 보니 이런 농담이 있더군요.

여기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대치한 전선. 양군 모두 참호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은 참호에 틀어박힌 이탈리아군을 저격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중에 흔히 있는 이름을 외쳐서 머리를 내밀게 한 후 그것을 저격하는 잔꾀를 발휘했다.

독일 병사 「어이, 마르코! 마르코 어디있어?」

이탈리아 병사 「여기야―」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당했다.
그 방법으로 많은 손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간신히 그 잔꾀을 깨닫고 똑같은 수법을 독일군에게 시도했다.

이탈리아 병사 「어이, 아돌프! 아돌프 어디야?」

독일 병사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누구냐!」

이탈리아 병사 「네? 아, 접니다!」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 당했다.

그런데 이게 웃기기만 하는게 아닌 것이 실제로 독일군은 이런 방법을 꽤 썼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명 단위의 저격이 아닌, 연대 급 전투에서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만술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Geoffrey Wawro의 The Franco-Prussian War에 나와 있는 1870년 8월 16일에 벌어진 마-라-투르(Mars-la-Tour)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잘 아시다 시피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군의 제 3군단과 제 10군단이 베르됭 방면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라인군(Armée du Rhin)의 5개 군단을 포착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프로이센군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오후 까지 프랑스군 주력이 베르됭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오후 3시30분~오후 4시경 제 10군단이 증원되면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오후에 증원된 제 10군단은 프랑스군 우익의 제 4군단을 공격해 퇴각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 됩니다.
저녁 전투에서 프로이센 6보병사단 병력은 프랑스군 제 4보병사단 70연대(제 6군단 소속)에 접근한 뒤 프랑스어로 아군이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이 아군으로 착각하고 소총을 내리자 프로이센군은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 제 70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프로이센 기병이 가세해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 황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자 프랑스 제 6군단전체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마-라-투르 전투에서 있었다는 이 사례는 단순한 기만도 실전에서 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덤으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는군요.

2007년 5월 23일 수요일

남한의 병역 의무에 대한 잡상

잡설입니다.

이승만 담화집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군사 문제와 관련된 담화나 연설에서 전통적인 역할모델을 찾는 경향이 보였다는 점 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의 사례와 국민 개병제를 연결 짓는 과감한(!) 발상입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도덕 교과서가 민주주의의 원형을 “화백제도”에서 찾듯 국민개병제의 원형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 이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왜 고구려는 이승만에게 있어 한국적 국민개병제(?)의 역할이 됐을까요? 이점은 꽤 흥미로운 문제인데 아마도 유럽식의 국민개병제, 즉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개념이 기본으로 탑재된 유럽식의 국민개병제라는 것이 1950년대의 남한 실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을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통치의 대상정도로 봤던 이승만이니 만큼 근대유럽의 사례를 들기 보다는 고대 왕조국가의 사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아마도 남한의 국민들이 병역에 따르는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승만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방위군 같은 개념없는 사고를 내던 것이 이승만 정권이니 만큼 유럽식의 의무와 권리가 결합된 개병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을 것 같기도 하군요.

이승만 뿐만 아니라 박정희 막부에서도 국민을 동원하는 논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그것 보다는 왕조시대의 논리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진지하게 고찰한 것이 아니라 근거도 빈약하고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이박사나 박장군이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왕조시대의 전통을 억지로 현대에 끌어다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이박사나 박장군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전통왕조의 국왕에 가까운 통치자였으니까요.

남한의 병역 의무라는 것이 서구사회의 병역 의무 보다는 왕조시대의 부역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선대의 훌륭한(?) 지도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징병제도를 개선하려면 이런 부역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2007년 5월 19일 토요일

각하의 찬란한 존안 - (2)

어제 명동에 나갔다가 입수했습니다.


각하의 전 재산 290,000원의 600분의 1을 넘는 5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입수한 각하의 찬란한 존안입니다. 그러나 무려 레이건 선황폐하까지 덤으로 영접하는 영광을 안았으니 어찌 500원이 아깝다 하겠습니까.

이 어린양 앞으로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크하하핳

각하의 찬란한 존안
전략우표 비축계획 - sonnet

2007년 5월 16일 수요일

The Wages of Destruction - Adam Tooze

이 책은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녀석입니다.

대략 한번 훑어 본 느낌은 약간 별로입니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서평들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서평들은 이 책이 히틀러 시기 독일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고 좋은 평을 하고 있더군요.

Bertrand Benoit의 서평(파이낸셜 타임즈)

Bruce Ramsey의 서평(시애틀 타임즈)

Simon Williams의 서평

아직 통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기는 조금 그런데 전반적으로는 1차사료 보다는 기존의 저작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통계들이 기존의 저작들, 예를들어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같은 저작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물론 2차사료를 가지고 쓴 책 중에도 훌륭한 책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1차사료의 활용이 부족한 저작에 믿음이 안가는지라 첫 인상은 별로입니다.

물론 좋은책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한 번 읽어 본 뒤에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다 읽고 나면 전반적인 인상을 한번 올려 볼까 합니다.(그 전에 밀린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난감하군요)

2007년 5월 13일 일요일

자칭 민족주의자의 이중 플레이

다음은 1950년 4월 28일에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 입니다.

한국 국회의 반응 :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의 번역본은 4월 7일, 헌법수정안 표결 다음날 개회 직후에 배부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사전 통보 없이 의회에 참석했으며 만약 국회의원들이 정부가 미국에게서 받은 경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경제협력처나 미국 대사에게 문의한다면” 미국의 원조가 삭감되거나 철회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래티모어(Owen Lattimore)와 미국에 거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한국인들을 비난한 뒤 1950/51년도 예산안으로 이야기를 옮겨서 의원들이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총선을 5월 25일에서 30일 사이에 실시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이전에 총선의 연기를 요청한 것은 (국회의원들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중요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을 하고 사과했습니다. 부록 2(Enclosure 2)은 4월 7일 국회 회의의 요약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부장관 각서에 대해서 언급하자 대한국민당 당수인 윤치영 국회부의장이 즉각 발언을 했습니다. 윤치영은 자신의 생각에는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국무부장관 각서 뿐 아니라 이전에 번스 박사가 의회에 발언한 내용도 함께 비난했는데 이것은 마치 1920년 하니하라 주미 일본대사가 일본 의회에서 발언한 이후 있었던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윤치영은 “우리는 다시는 외국인들로부터 이런 문서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우방 미국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국가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평상시 보다 선동적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부록 2에는 국회속기록에서 발췌 번역한 윤치영 부의장의 발언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민족주의자” 윤치영 선생께서는 국회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존엄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반 미국인들을 만나시더니 말씀이 이렇게 돌변하시네요.

부록 3의 윤치영과 대사관 직원과의 대화에 나타나 있듯 윤치영은 “국회의원 대부분은 한국이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생존 여부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방침을 따를 것 이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는 미국의 방침에 따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가의 입법부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윤치영은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이 미국정부에 의해 발표됐다는 점이 유감이라고 지적한 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언론 매체들이 국무부장관 각서의 전문을 직접 보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과 윤치영 자신이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을 비판했다는 내용, 워싱턴의 특파원들이 송고한 내용 정도나 보도하는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Drumright, Everret. F, 'Reaction to the Secretary’s Aide-memoire, April 28, 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 (Washington DC: USGPO, 1976), 54~55

이래서 민족 팔아먹는 정치인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도 목청 높이며 민족 외치는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런 짓을 하신다지요.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대통령 리박사 화법....

이박사 화법에 대한 Sonnet님 글에서 트랙백
(전략)

동시에 우리 우방들은 이 반대분자들의 선전을 기왕에도 많이 들었을 것이요 지금에도 또 연속 부언낭설로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비치어 보아서 한국대통령이 독재정권을 갖기 위해서 국회를 병력으로 압박한다, 국회의원을 이유없이 가둔 것을 석방해야 된다, 헌법을 무시하고 국회를 위협한다는 등 말의 공문으로 공화정체를 말살시킨다는 요구가 각처에서 연속내도하였으나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서 별로 고려할 점이 없었으며 오직 공산당의 음모만을 우리가 심상히 여길 수 없는 것 이므로 아직까지 침묵하고 재판으로 판결되기 만을 기다려 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음모사건의 조사가 거의 다 마치게 되었으나 오직 정범인 두 사람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까닭으로 재판이 며칠 지체되어 오는 것이니 이 사람들을 쾌히 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지금 조사된 공범만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할 것이니 얼마 안에 이 일의 사실유무가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후략)

정치음모사건에 관하여, 1952년 6월 15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1권, 공보처, 1953년

(전략)

그런데 어찌해서 사욕을 도모하는 정치객들이 국가안위와 민족의 화복을 생각지 못하고 어떤 분자는 정당명색을 띄고 공산에 내응이 되어 타국의 재정을 얻어다가 정치상 음모로 자기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북 괴뢰군과 합동해서 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진행하다가 발각이 되어 재판을 당하여 모든 죄상이 들어 났으나 이 음모를 행하든 정범이 외국으로 다라나서 잡지 못하게 됨에 아직도 결말을 못 내고 있는 중이며 근일에 와서는 또 어떤 사람은 정당의 지도자란 명의를 가지고 외국 신문상에 선전하기를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리대통령의 배일 정책을 고쳐서 일본과 협의로 친선을 이루겠다고 하는 이런 망설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참 놀라운 일이다.

(후략)

친일 친공한다는 것은 망언이다, 1956년 4월 12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3권, 공보처 1959년

위의 담화는 1952년 소위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을 잡아 넣고 나서 한 것이고 아래의 담화는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것입니다. 음모는 밝혀 졌지만 정작 그 음모의 실체는 없다는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이박사 화법의 핵심이 아닐까 싶군요. 아무나 따라하다간 왕따 등의 부작용이 있으니 함부로 따라 하지 마세요.

독일 육군의 기관총 도입과 운용 : 1894~1914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 농담거리가 생각이 안 나다 보니 이런 글이라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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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이 처음 선을 보이자 많은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유럽의 일류 육군국인 독일 또한 이 새로운 물건에 큰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1894년에 맥심 기관총의 실험을 참관한 빌헬름 2세는 기관총의 성능에 크게 감명을 받아 전쟁성에 기관총의 추가 시험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제의 취향 탓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독일 육군은 1895년에 기관총을 정식 채용합니다.

일선 부대가 기동훈련에서 기관총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8년이라고 합니다. 이 해에 동프로이센 제 1 군단의 엽병(Jäger) 대대는 기동 훈련에서 기관총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동훈련에서는 기관총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들은 기관총이 사격 시 총열의 과열 문제가 있고 기동 시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의 결과 엽병대대는 물론 정규 보병 연대 조차 기관총의 도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규 직업군인들 보다는 아마추어인 독일 황제가 기관총의 잠재력을 더 잘 파악 하고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군부에 기관총의 운용을 확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900년 9월의 기동훈련에서는 기병부대가 기관총을 운용했으나 기병 장교들 역시 기관총은 기동전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황제가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인 독일 보병 장교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 했으며 그 결과 1904년 까지도 독일 육군은 기관총을 독립 부대로 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총이 쓸만한 물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독일육군의 기관총 옹호자들은 기관총이 가진 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크레취마르(Kretzschmar), 플렉(A. Fleck), 메르카츠(Friedrich von Merkatz) 대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이 대표적인 기관총 옹호자였는데 이들은 기관총은 공격시 특정 지점에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플렉은 4정으로 이뤄진 기관총대(Maschinengewehr-abteilung : 대대가 아님)와 소총으로 무장한 100명의 보병(정면 80m로 산개)의 사격실험 결과를 통해 기관총 팀은 한 목표에 대해 5분간 3,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데 반해 보병 100명은 500발 내외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기관총의 유용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운용 시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 됐는데 가장 큰 문제는 보병부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기관총이 아군의 등 뒤에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점은 기관총 도입 초기에 빈번히 나타났으며 기관총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일본군의 경우 러일전쟁 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의 군인들은 기관총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 이전 까지 기관총의 화력은 포병의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규정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포병운용은 여전히 직접 사격을 통한 화력지원을 중요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병은 직접 화력지원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에 이동 및 사격 준비 사이가 매우 취약했는데 기관총은 바로 이 시점에서 포병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일 육군의 보수적인 장교들 마저 기관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기관총이 괴력을 발휘한 이후 였습니다. 독일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대량의 기관총을 운용해 효과를 거두자 기관총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 됐습니다.
독일은 1907년에 기관총 부대의 단위를 중대급으로 확대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4정에서 6정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에 총 12개의 기관총 부대가 중대급으로 확대되었고 1914년 발발 이전까지 현역 보병연대는 모두 기관총 중대를 가지게 됐으며 엽병 대대도 바이에른 1엽병대대와 바이에른 2엽병대대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총 중대를 배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기관총을 불신하던 보병과 기병 장교들 조차 기관총을 보병 및 기병연대의 편제에 넣어 줄 것을 전쟁성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사단마다 기관총대대(3개 중대 편성)을 넣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각편제 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각 연대별로 기관총 중대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1907년에는 기관총 팀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관총 1정 당 견인용 마필을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관총 1정 당 말 여섯 마리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성은 높였지만 전장에서는 적의 목표가 될 확률을 높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기관총의 소형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비록 일선 부대의 요구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MG 08이 도입됩니다. MG 08의 도입 이후 기관총 1정당 견인용 마필은 여섯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어 듭니다.(기병 사단 소속의 기관총대는 1정당 네 마리)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는 정규 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219개 중대, 엽병 대대에 배치된 것이 16개 중대, 예비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88개 중대, 기병 사단에 배치된 것이 11개 대(Abteilung), 보충사단에 배치된 것이 43개 대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향토연대(Landwehr-regiment)는 기관총 중대가 없었는데 사실 향토연대 급의 예비부대는 전쟁 와중에 소총부족으로 1916년까지 Gew 88을 지급 받을 정도였으니 기관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예비 사단 중에서는 제 1근위예비사단(Garde-reserve-division)이 좀 별종인데 이놈의 사단은 이름만 예비사단이었고 전쟁 발발 당시 정규 보병사단 편제를 갖춰 4개 기관총 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예비사단은 아니고 “근위(Garde)” 예비사단 이로군요. 그리고 제 1예비사단(Reserve-division)은 훨씬 더 해괴한 녀석인데 이 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예비 사단 주제에 예하 4개 보병연대 중 3개 연대가 기관총 중대를 2개씩 가지고 있어 기관총 중대가 7개나 됐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보병연대와 엽병대대에 배속된 일반적인 기관총 중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교 2명
부사관 및 사병 95명
말 45마리
기관총 7정(1정은 예비용)
탄약 수송용 마차 3대
야전 취사차 1대
장비 수송용 마차 1대
건초 수송용 마차 1대
화물 수송용 마차 1대

참고서적

Brose, Eric D.,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Cron, Hermann, Imperial German Army 1914~19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2001)
Echevarria Jr, Antulio J,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Stevenson , David,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Europe 1904~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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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8일 화요일

독서문답

sonnet 대인의 블로그에서 트랙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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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2. 독서 좋아하시는 지요?

그럼요!



3.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잠자는 걸 제외하면 제일 편한 일 중 하나거든요.


4.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전공 이외의 책만 따지면 한 달에 5~7권 정도 읽습니다. 갈수록 독서량이 떨어지고 있어 이정도 선을 사수하는 것도 어려울 지 모르겠군요. 2006년 1/4분기 까지는 한 달에 10권 정도 읽었습니다.


5.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옛날 이야기들입니다. 가끔 요즘 이야기들에 대한 책도 읽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살벌한 이야기 들이지요.


6.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제가 가장 취약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7.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8.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데요…


9.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10.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한민국에 많이 살고 있는 가방 끈만 길다란 자칭 “진보” 얼간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만약 기회만 된다면 이 책을 번역해 보고 싶을 정도이죠.


11.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책이 아니면 뭘까요?


12.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문학은 가뭄에 콩 나듯 읽습니다. 원래 문학 체질이 아닌 듯 싶습니다.


13.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당히 재미있는 분류군요. 그런 분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14.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얼떨결에 번역은 한 번 해 봤군요.


15.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책이 안팔리면 열받지요. 크하하하


16.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Douglas Adams


17.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양이란 동물은 선생의 생각 만큼 한심하지 않아요!

2007년 5월 7일 월요일

1차대전 당시 독일육군의 포병 지휘 구조

불법 날림 번역으로 땜빵하는 것은 계속 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은 야전포병(Feldartillerie)과 중포병(Fußartillerie)을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전포병 내에서도 중야전포대대는 기동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쟁 초기의 경험을 통해 잘못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전투의 주역인 보병지휘관들의 견해가 가장 존중됐는데 이들은 중포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무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급 포병지휘관들도 점차 보병 전투의 양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포병지휘관들은 중포와 경야포의 화력 통제를 담당할 책임을 지게 됐다. 이 때문에 각 포병부대를 통합해서 지휘할 수 있는 통일된 고급포병지휘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대적인 개편을 담당하는 것은 힌덴부르크 체제하에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야전포병의 경우 가장 높은 지휘부는 보병사단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Kommandeur der Feldartillerie-brigade)였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육군에는 총 52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1914~1916년 사이에 신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중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18개, 예비포병지휘부가 14개, 향토야전포병지휘부가 1개, 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4개 였다.1)

중포병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군단의 경우 동원 개시 당시 단 한 개의 중야전포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단포병의 경우 고급포병지휘부가 없었다. 대신 야전군 사령부나 육군총사령부 직속 예비대로 1~3 중포병사령부(General der Fußartillerie)2)와 1~9 중포병여단지휘부(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3)가 있었다. 야전군급 부대는 강력한 공성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고급중포병지휘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 2군의 경우 제 3중포병사령부를, 제 4군과 제 6군은 각각 제 1중포병여단지휘부와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Königlich Bayerisches 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 2)를, 제 5군은 제 1중포병사령부와 제 6중포병여단지휘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장기화 되자 전 전선에 걸쳐 중포병의 수요가 증가했고 육군총사령부는 각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중포병부대를 총괄 지휘할 사령부를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또한 필요에 따라 투입할 수 있도록 동급의 사령부를 예비로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마침내 1915년 가을, 독일군은 모든 야전군급 포병 사령부의 명칭을 “중포병사령부”로 통일함과 동시에 20개의 사령부를 신설했다.4) 이후 야전군 예하 포병부대의 화력분배 및 사격통제는 중포병사령부과 총괄하게 됐다. 베르됭 전투에서 중포병 부대를 집중운용 한 결과 중요한 전역에 추가로 투입할 수 있도록 고급포병지휘부를 추가로 편성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결과 중포병사령부는 37개로 늘어났다.

그 결과 힌덴부르크 체제에서 고급포병지휘부는 총 89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37개의 중포병사령부로 증가했다. 포병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과 중포병과 야전포병의 효과적인 협동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조직이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육군총사령부는 이것을 위해서 통합된 포병 지휘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17년 2월 독일 전쟁성(Kriegsministerium) 명령에 따라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중포병사령부를 통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제 1~13 포병사령부(General der artillerie)를 창설하고 (2) 각 사단에 배속된 경포병대대와 중포병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포병지휘부(ArKo, Artillerie Kommandeur)를 둔다.

13개의 포병사령부 사령관 중 단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중포병사령부 출신이었다. 이 중 제 9포병사령부는 1917년 3월 해체됐다. 그리고 다시 1917년 7월 6일 이것을 대신해 제 14포병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8년 7월 14일에 제 15, 16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각 포병사령부를 상황에 따라 강력한 포병 전력을 필요로 하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당연히 포병사령부가 주로 투입된 곳은 서부전선이었다.

포병사령부의 지휘관은 보통 여단장이나 연대장급이었으며 두 명의 부관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포병사령부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되면 두 명의 참모 장교와 함께 야전군 소속의 통신반을 배속 받았다. 제 1포병참모장교(StOArt, Stabsoffizier der Artillerie)는 모든 전술, 조직문제와 가스탄, 고폭탄 사격 훈련과 매일 발생하는 문제의 교정 등을 담당했다. 제 2포병참모장교는 포병에 대한 보급 및 정비반에 대한 보급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통신반은 포병관측기구반, 사진반, 포병조사반과 연계해 적 부대의 배치에 대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했다. 또한 정보반은 포병용 지도의 작성을 책임졌다.

이쯤에서 1916년 4월 29일 동부전선의 나로치(Нароч) 호수 전투에서 강력한 포병부대를 통합 운용해 큰 성과를 거둔 포병 지휘관 한명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브루흐뮐러(Georg Bruchmüller) 중령은 전쟁 이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포병 지휘체계의 대대적인 개편 이후 제 86포병지휘부(ArKo 86)의 지휘관이 됐다. 이동탄막사격, 즉 포격을 보병의 전진에 맞춰 수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모든 포병 지휘관 보직에 충분히 경험 있는 장교들을 충원할 수는 없었다.

브루흐뮐러는 초기부터 야전군 사령부의 중앙 통제하에 실시되는 포격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의 서부전선에서는 이동탄막사격을 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브루흐뮐러는 동부전선에서 이동탄막사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브루흐뮐러를 서부전선으로 배속시켜 1918년 춘계대공세 준비를 담당하게 했다. 브루흐뮐러의 방식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다. 부르크 호에넥(Burg Hoheneck)에 있는 브루흐뮐러의 조각상 밑에는 기념비가 있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 [돌파 브루흐뮐러 Durchbruchmüller라는 별명을 가진 브루흐뮐러 대령은 1918년 3월 21일 제 18군의 포병을 지휘해 성공적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실시해 아미앵 방면으로 대규모 돌파를 성공시켰다.]

1918년의 대공세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포병사격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실시됐다. 이 사격은 이른바 풀코프스키(Pulkovski) 방식에 의한 훈련을 통해 가능했다. 이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오차를 없앴으며 신속한 수정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

포병지휘부(ArKo)는 포병사령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 졌으며 기존에 있던 야전포병여단을 대체했다. 이 중 27개는 기존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를 개편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규편성 되거나 다른 야전포병이나 중포병 부대를 개편해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단포병지휘부의 단대호는 제 1~8근위, 제 1~23바이에른, 제 1~255(중간에 65개가 빠진)였다. 새로 개편된 단대호에서는 예비 또는 향토 부대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총 221개의 Arko가 편성되었다. 포병지휘부의 지휘관은 계급상 연대장 이하였다. 포병지휘부의 참모진은 한명의 부관, 두 명의 연락장교, 한 명의 통신 장교로 구성됐다.

ArKo의 지휘관은 실제 전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병 지휘관이었다. 포병지휘부의 명령하에 사단 편제 포병과 상급 부대에서 배속된 수많은 야전포병 및 중포병 부대가 움직였다. Arko는 부여된 임무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인접 사단의 포병과 배속된 독립 포병부대간의 조율도 책밈 져야 했다.
원거리의 목표에 대한 포격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야전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 Company, 2002, pp.131~134

각주

1) 새로 편성된 지휘부는 제 5근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0바이에른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50, 52, 54, 56, 58~67, 123, 220야전포병여단지휘부(이 중에서 61, 65, 66포병여단지휘부는 육군총사령부 직할이었다.), 제 23, 24, 26, 28, 75~82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 8 바이에른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바이에른향토야전포병여단지휘부, 그리고 제 4, 8, 10, 19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2) 이와 함께 세 개의 중포병총감부(Fußartillerieinspektion)가 있었다.
3) 전쟁 이전에는 8개의 중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으며 1914년 8월 새로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가 편성됐다.
4) 1917년 9월 17일자 전쟁성 명령에 따라 제 1~6중포병사령부와 제 1~3바이에른중포병사령부, 바르샤바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벨기에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마지막으로 해안방어사령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이번에 베낀 책은 193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인데 그다지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ArKo는 사단급 포병을 지휘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점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ArKo는 군단급 포병 지휘부였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병부대의 구조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의 글, 2차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독립 포병부대를 참고하십시오.

어떤 우익 성향의 서점

이 바닥에 계시는 많은 분들께서 이미 경험하셨겠지만 군사 서적을 구매하다 보면 종종 우익 성향의 서점들과 엮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층 중에서 우익들이 많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무장친위대와 관련된 서적을 몇 권 구매했던 Buchdienst Kaden도 역시 우익 성향의 서점인데 며칠전에 여기서 우편으로 카탈로그를 보내왔더군요. 카탈로그를 보니 저 같은 Untermensch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Joachim Nolywaika라는 사람이 쓴 Polen-nicht nur Opfer와 Jürgen Riehl의 Funkenflug이었습니다. 대충 살펴보니 전자는 폴란드가 독일의 동부 지역을 집어삼킨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인 듯 싶고 후자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맑시즘, 세계화, 다문화주의 등의 사상에 대해 자~알 설명(또는 규탄) 해주겠다는 내용 같습니다.

아시아 동쪽 구석의 Untermensch에게도 이런 책을 권하는 것을 보면 요즘 서양의 극우들은 융통성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하긴, 거래한 지 꽤 된 어떤 서점은 데이빗 어빙의 구명운동을 위한 모금 메일을 열심히 보내기도 하더군요.

하여간 왜 이런걸 보내는지 갈수록 궁금해 지는군요.

2007년 5월 3일 목요일

닭과 달걀 중 어떤게 먼지인지...

근래에 주요 일간지들이 앞 다투어 F-22건으로 낚시를 한 것은 상당히 민망한 일 이었습니다. 군사 전문기자를 가지고 있다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의 보도 행태도 다른 신문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을 보면 상당히 난감하더군요. 이 난감한 사태를 지켜보다 보니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일반적인 뉴스 소비자층이 자극적인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신문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뽑아내는 것 일까요? 아니면 신문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뽑아대다 보니 뉴스 소비자들이 자극적인 기사에 익숙해 지는 것 일까요?

매우 궁금하더군요. 답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The Age of Battles - Russel F. Weigley

대략 1~2년 전 쯤 어떤 분으로 부터 유럽의 근대 전쟁사에 대한 쓸만한 개설서가 없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도 특별히 공부를 제대로 한 게 아니다 보니 제대로 대답을 못 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근대 유럽전쟁사에 관심이 있긴 있습니다. 2차대전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동적으로 그 이전 전쟁인 1차세계대전에도 관심이 가게 되고 1차대전에 대한 관심은 다시 유럽의 근대전쟁으로 쏠리게 되더군요.

그러나 수백년에 걸친 군사사를 달랑 책 몇 권만 가지고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간간히 그럭 저럭 유명한 저작들을 한 두권 찿아서 읽긴 했는데 체계적으로 독서를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아주 두리뭉실한 상 밖에는 안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 역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포괄하는 쓸만한 개설서가 뭐 없나 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걸린 녀석이 바로 이 책 입니다.

저자인 Russel F. Weigley는 미국 군사사와 관련해서 꽤 이름있는 저작들을 출간한 군사사가입니다. 예전에 이 사람이 쓴 The American Way of War를 조금 읽어 본 적이 있어서 이 책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개설서로서 상당히 무난하다고 생각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30년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까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유럽인들의 전쟁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도는 꽤 많이 실려있는 편이고 지도의 수준도 개설서로서는 합격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요 전투에 대한 서술 역시 짧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잘 설명해 놓았다는 느낌입니다. 개설서로서는 매우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페이퍼백으로 출간 돼 있기 때문에 가격도 적절합니다.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주요 전투의 경우 전투서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입니다. 개별 전투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저작은 아니지만 전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군단급 수준의 전투 서열을 실어 주는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7년 4월 29일 일요일

보불전쟁 이전 프랑스군의 기강 해이 문제

계속 해서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Louis Jules Trochu)장군은 1864년 메츠(Metz)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트로슈는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남긴 프로이센 장교는 프랑스군의 신형 소총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에 주목했다. 한 부사관이 소총을 보여주고 분해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동안 병사들의 잡담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마침내 한 장교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내무반이 아니다!(Silence! Vous n’êtes pas à la foire!)”

파리 근교의 부대를 방문한 다른 프로이센 참관인은 프랑스 군의 훈련은 매우 늦게 시작되고 종종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 장교들은 부대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쪽에서 남긴 기록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육군의 감찰관은 1896년 7월 엑스-앙-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한 뒤 소총, 총기 수입도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병사들은 체육시간에 여기 저기 늘어져 빈둥거리며 군악대원은 군가를 모르고 펜싱 교관은 펜싱을 제대로 못 하며 또 많은 수의 부사관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병들을 잡아 넣느라고 영창이나 군교도소를 들락 거린다고 지적했다. 앙드레라는 상병은 감옥에서 도둑 한명을 탈옥시켜 주둔지에서 그 도둑과 함께 훔친 돈으로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감찰관은 제 99보병연대의 시찰을 마친 뒤 장교들이 “건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감찰관이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하고 기록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사병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프랑스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군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격 뿐이었다. 장기간의 군복무와 믿고 본받을 만한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은 제멋대로에 기강이 엉망이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요소가 없었다. 그러니 1840년대에 프랑스군의 개편을 주도한 뷔고(Thomas Bugeaud) 원수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한 점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명령 받는 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것은 못 참는 다는 점이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3~44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광경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볼 수 있지요.

2007년 4월 26일 목요일

소련의 대독 선제공격론에 대한 반론 : 1941년 5월 계획안을 중심으로

오늘도 역시 불법 날림 번역글 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과 소련 고위 장성들이 남부 지구에 병력을 집중 시킨 이유가 독일을 선제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남부 폴란드의 평원은 동 프로이센의 강과 호수, 습지와 숲으로 둘러쌓인 지형 보다 공세 작전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소련이 독일을 선제공격하려 했다는 이론의 주요 근거는 1941년 5월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이다. 러시아에 많은 논쟁을 불러온 이 문서가 어느 정도의 자료적 가치가 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이것은 당시 작전국 부국장으로 있던 바실렙프스키가 필기로 작성한 문서이며 주코프와 티모센코의 서명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서명은 없다. 그리고 스탈린이 이 문서를 검토했거나 여기에 대해 언급했는가도 확실치 않다.
1941년 5월에 작성된 이 문서는 이전의 전쟁 계획들과 비교하면 개괄적이며 대략적인 개요정도에 불과하다. 로버츠(Cynthia A. Roberts)는 1941년 5월 계획안은 “실제 계획안이라기 보다는 구상 초기단계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는 총 240개 사단을 투입하고 이중 주력인 독일군 100개 사단은 코벨, 로브노, 키예프 축선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군은 동원 단계에 있으며 아마도 “아군 보다 먼저 배치를 완료해 언제든지 기습을 감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독일군의 기습을 방지하고 (또 독일군의 전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독일군에게 주도권을 줘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보다 먼저 동원을 완료한 뒤 독일군이 아직 병력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각 집단군 및 병종간 협동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일 때 선제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 붉은군대의 주요 전략 목표는 데블린 남쪽에 전개한 적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다. (중략) 주력인 남서전선군은 크라쿠프-카토비체 지구의 독일군을 공격해 독일군을 남부의 동맹군과 절단시킨다. 그리고 서부전선군 좌익은 조공으로 세들레츠-데블린 방면으로 공격, 바르샤바 지구의 적을 포위해 남서전선군이 루블린 지구에 전개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핀란드, 동 프로이센, 헝가리, 루마니아 지구에서는 능동방어를 실시하고 우세한 환경이 조성되면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갖춘다.]

이 문서는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병력 배치를 실시하고 총 사령부 직할 예비전선군들의 동원을 비밀리에 실시하도록 허가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전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1941년 5월 문서를 읽는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다. 붉은 군대가 남부 지구에 전개할 독일군 주공을 타격해야 한다는 내용은 기존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자연히 도출될 수 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이 문서에서 주장하고 있듯 전개 완료 단계에 있는 독일군에 대해 선제 공격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1941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이 감지되어 전쟁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폴란드 남부에 대한 선제 공격의 형태로 (적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자는 것은 기존의 계획안들과 같은 것 이었고 예비 야전군의 비밀 동원역시 기존에 실시하고 있던 병력 증강의 연장선에 있는 것 이었으며 비밀 동원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 문서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가장 먼저 이 문서에는 선제 공격 시점이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독일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 목표라면 가장 좋은 공격 시점은 독일군이 동원과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집중과 부대간 조율이 원활하지 못한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두 번째 문제는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하면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어 여전히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계획은 실천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 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련 군부내에서 선제 공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근거도 없다. 1941년 6월 22일 전쟁이 개시된 뒤 다시 전쟁이 종결되고 또 스탈린이 숨을 거둔 이후에야 소련의 고위 군장성들은 방어 준비에 좀더 심혈을 기울여 독일의 기습에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Geoffrey Roberts, Stalin’s Wars :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 (Yale University Press, 2006), pp.76~77


요즘도 가끔씩 스탈린이 독일을 선제 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설들은 위에서 Roberts가 지적 했듯 핵심적인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이 오히려 그 가설이 잘못 됐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41년 5월 계획안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사관학교 연설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인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25일 수요일

[妄想大百科事典]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2004년 새롭게 여의도 차트에 진입한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밴드

여의도 차트 진입 당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성공 신화가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메이저 진출 이후 계속되는 부진으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민노당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국제 연예계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철 지난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민노당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고정 팬이 적었기 때문에 일종의 신비감이 작용했으나 메이저로 진출한 이후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신비감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밴드도 위기를 맞고 있다.

민노당은 대중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스타일을 고수할 계획이다. 연예계 소식통에 따르면 일부 멤버는 과거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시기 북조선의 4류 그룹 “조선로동당”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민노당의 음악적 수준이 낮은 이유가 언더밴드로 활동하면서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하지 않고 이런 저급한 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연예 분야 전문가들은 민노당의 스타일은 이미 20세기 초중반 동유럽과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시도되다 대중의 철저한 외면으로 소멸된 “민주적 집중제”로서 대중성은 물론 예술적 가치도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자신들이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할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당분간 고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민노당이 메이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악적 기초를 튼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The God Delusion - 리처드 도킨스

이 책은 채승병님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지른 물건인데 읽을 책들이 밀려 있어 한동안 못 읽다가 도착한지 한달이 넘어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도킨스의 책 중에서는 국내에 번역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이 있는데 특히 눈 먼 시계공은 제법 유쾌(???) 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처음 책을 훑어 보니 속 표지에는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는 문구를 넣은 것을 보니 이거 엄청 웃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31쪽을 보니 아주 멋진 구절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in arguably the "most unpleasant character in all Fiction".

철십자 훈장에서 슈타이너 선생이 말씀하신 "I believe God is a sadist."라는 대사와 쌍벽을 이룰만합니다. 흐흐흐.

현재 2장을 읽는 중인데 제법 배꼽 빠지는 구절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삐딱한 종교문화를 혐오하는 터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게 국내에 번역되면 출판사 하나가 불타는건 아닐까 걱정(???)이 듭니다.

2007년 4월 23일 월요일

폴란드군의 하노버 점령 통치 계획 - 1971년 들소작전 계획 중

전선군 사령부는 하노버 수비대의 항복에 따라 제 5군 사령부에 도시 기능의 회복을 위한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폴란드군은 제 5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서 다음의 인력을 배속받는다.

1.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동독군) 헌병 1개 중대
2.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군 방첩부대 1개 중대
3.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 (20명)
4. 독일민주공화국의 방송 언론인 (8명)
5. 타자 및 통신 담당 (12명)
6. 특별 선전대 (장교 및 부사관 24명)

이상의 인력은 오늘 오후 6시를 기해 제 5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다음날부터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 요원이 하노버에 투입될 예정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요원이 하노버에 도착하는 것은 사전에 통보될 것이다.

제 5군 사령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a.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 6전차사단의 선임장교를 주둔군 사령관으로 둔다.
b. 위에서 언급한 인력과 필요한 장비는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의 통제하에 둔다. 국가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 정규 경찰을 편성한다.
c. 인민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언론 보도를 한다.
d. 항복한 적군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건설한다.
e. 병기고 및 물류시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f. 상수도, 발전시설, 난방시설을 정상화 한다.
g. 식량 및 필수품 배급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
h.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일공산당(DKP)과 사회민주당(SPD)으로 합작 지방 정부를 만든다.
i. 파괴된 공장을 복구해 최대한 빨리 생산을 재개 할 수 있도록 한다.

(중 략)

하노버 시의 민간인과 포로에게 공급할 식량 비축량 및 의약품 재고량을 확인한 뒤 1971년 4월 29일 오전 11시까지 전선군 참모부에 보고할 것.

실롱스크 군관구 정치국 문서 152448/74/42

Vojtech Mastby and Malcome Byrne,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380-381

1971년 4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 실시된 들소작전에 포함된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폴란드군이 하노버를 점령한 후 취해야 할 행동 이라는군요. 이 시기의 바르샤바 조약군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령지역에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리고 합작 대상으로는 서독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이 언급 돼 있고 우익 정당은 언급이 없습니다. 독일공산당은 서독에서 불법화 된 이래 아주 세력이 죽었고 이 시점에서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걸 읽다 보니 60~70년대 북한애들은 서울을 확보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남쪽에는 합작할 만한 진보적 정당이 없었으니 합작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통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요. 통일이 될 때 까지 살아야 겠습니다.

2007년 4월 20일 금요일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 언론의 히스테리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언론의 반응은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주요 일간지들이 웹사이트의 대문에 큼지막하게 특집 기사를 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즐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도하게 이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서 미국 영주권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미국의 살인사건인데 이게 과연 한국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중국계가 이 사건을 저질렀다면 이 정도로 요란하게 다룰지는 의문입니다. 말 그대로 한국계가 살인범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이정도로 난리를 치는 것 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내문제인데 한국계가 개입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언론들이 이 사건을 울궈 먹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점 입니다. 사실 미국에서 터진 사건이니 별도로 취재할 필요 없이 미국내 반응, 한국내 반응, 네티즌들의 반응 이런 것들로도 충분히 지면과 웹사이트를 도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군요. 물론 '민족'이라면 반사적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 소비자들의 성향도 여기에 한 몫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나마 사건이 터진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언론 마다 자성(?) 적인 기사를 하나 씩 싣고 있긴 하지만 그나마 이것도 구색 맞추기로 집어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국내의 소위 유명인사라는 자들이 기고하는 칼럼은 왜 이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지.

[시론] '조승희 개인' 문제 라곤 하지만…

이 정신나간 교수는 주요일간지에 사과를 하자고 난리를 치는군요. 이런 멍청한 논리로 따지면 9.11 테러 때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 공식 사죄를 했어야 겠지요. 이런 교수에게 교육받는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갈수록 글발이 떨어지고 계신 이문열 선생께서도 한마디 하십니다.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 예수 흉내냈지만 종교성 빈약`

참 할일이 없으시군요.

김지하 시인께서는 추모시를 바치셨답니다.

김지하 시인 참사 추모시

이래서 이 어린양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 사건에 대해서 국내 언론에 실린 글 중 그럭 저럭 쓸만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인은 한국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보다 한국이 더 시끄럽다` `천박한 민족주의` 논란

그나마 한겨레가 나은 편 입니다. 솔직히 이번 사건으로 가장 놀랐던 건 그동안 매우 중립적이고 쓸만한 기사를 싣던 한국일보가 맛이 갔다는 점 입니다. 한국일보가 사옥을 옮기더니 이상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이 사건을 우려먹을지 궁금합니다만 6개월 쯤 지나면 언제 이런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잠잠해 질 것입니다. 뭐, 모든 일이 다 그렇지요.

덤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최악의 만평은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입니다. 조선일보의 만평이 주요 일간지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허접하다니. 도데체 이렇게 수준낮은 사람에게 만평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

계속해서 날림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쓸만한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시간도 잘 안나고 그렇습니다. 당분간 쓸만한 저작들에서 발췌한 날림 번역글이 계속 올라갈 듯 싶습니다.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The legacy of failed mobilization)

1차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를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사상 – 즉 우익사상이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전후 20년간 이탈리아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었다. 우익사상은 국민동원의 실패에 대한 반동이었고 특히 1920년 이후 시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전무했으며 이탈리아 정부가 전시동원을 통해 만들려 했던 국민적 단합을 우익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개인에게)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바로 국가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박멸하는 것 이었다. 독일과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1920년대 독일의 우익 “호교론자”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1918년 11월에 노동자들이 “등 뒤에 칼을 꽃았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등 뒤의 칼”에 대한 주장이 이미 전쟁 중인 1916년에 등장했는데 전쟁 초반부터 연달아 터진 참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적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충원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은 이런 소문을 더 부채질 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군사적 전통이 일천한 까닭에 수준 높은 장교집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의 분열은 상처로 남았다. 전쟁으로 각인된 야심과 적개심은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에서 얻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쳐부숴야 했지만 쳐부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총력 동원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처럼 비춰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극성을 부린 지역은 전쟁 중에 동원체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새로우며 진정한 동원체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이 꿈꾸는 이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용맹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완벽하게 동원된 전사였다.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패배주의자, 탈영병, 병역기피자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사실 “믿음, 복종, 투쟁”은 파시스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따르게 하려 했던 것 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쟁을 수행할 때와 같은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창설될 당시부터 군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자본가들이 구사대로 고용하던 깡패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파시스트들은 “행동대(squadrismo)”의 폭력행위에서 전우애 같은 안도감과 참호전투 같은 흥분을 전시 보다 “훨씬 안전한” 조건에서 체험했다. 파시스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병대(Milizia Volontaria di Sicurezza Nazionale)를 만들었고 이와 유사한 준군사조직이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됐다. 제복, 경례, 제식훈련, 목총(으로 하는 총검술) 그리고 행군은 이런 조직의 하루 일과였다. 파시즘은 이렇게 전쟁을 흉내내면서 전쟁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 냈다. 이러한 영속적인 동원체제는 결코 동원해제 될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이 만들어낸 전쟁에 대한 패러디였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많아졌다. 파시즘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이것을 “전투”라고 칭했다.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밀과의 전투”, 1927년의 화폐 개혁은 “리라와의 전투”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미래의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출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군사적 비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계속해서 언급됐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문제였다. 파시즘은 그 특성 대문에 평화시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의 사상에 전쟁의 심리적 긴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이유는 단지 전쟁이 평화시에는 얻을 수 없는 심리적 의무감을 불어넣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 환기해야만 파시즘이 가지는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들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애국적이고 국가적인 목표가 있으면 사회에 대한 억압과 전제적인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의 적”들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호한 수단을 통해 박멸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박멸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지속적인 전시 체제 속에서 박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강요된 애국심”은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변혁기에 “강요된 애국심”은 사회적 투쟁과 기술적 진보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는데 이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규율, 사회의 위계질서, 가부장적 질서, 애국심 등의 사회적 가치들은 전쟁 그 자체를 재정의 함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도 “총력전” – 제대로 말하면 “총력전”을 펼치는데 실패한 – 의 트라우마는 평화에 대한 관념을 제약했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분열돼 있었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전에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은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었으나 전쟁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보다 체계적이고 극도로 조직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을 통해 국가총동원의 경험으로 드러난 이탈리아 사회의 분열과 나약함을 극복하려 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약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번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적, 애국적 이상은 무솔리니의 통치기간 동안 파시즘의 지배 원리로 작용했다. 애국심은 정권의 목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가 가진 정당성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동적으로 국가와 국가적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파시스트들이 1차세계대전의 국가 총동원 경험을 통해 만든 파시즘의 내부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러 면에서 전쟁을 위한 “총동원”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개념의 어설픈 전주곡이었다. 전쟁 시기에나 일어나야 할 일들이 평화시에도 일어난 것 이었다.

Paul Corner and Giovanna Procacci,『The Italian experience of ‘total’ mobilization 1915~1920』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237~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