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카이텔에 대한 어떤 미국인의 호의

예전에 카이텔의 마지막 편지를 번역하면서 의외로 담담하고 자기 확신에 찬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전통 있는 독일 장교단의 일원이었으니 비록 패장이고 전범일 망정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었겠지요. 이런 모습은 연합국 측에도 영향을 줘서 독일에 우호적인 인사들의 동정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오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자문단장(Chief of Counsel for the Prosecution of Axis Criminality) 이었던 도드(Thomas Joseph Dodd)의 편지를 읽다 보니 카이텔의 평소 태도가 미국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뉘른베르크, 독일, 1946년 4월 3일

내 사랑 그레이스(도드의 아내),

리벤트로프의 차례는 끝났고 카이텔의 차례야. (중략) 카이텔은 이날 아침에 재판정에 섰고 나는 그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라고 말해야 했어. 무슨 까닭인지 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거든. 나는 카이텔이 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서 매우 기뻤어. 물론 카이텔은 유죄가 분명하지만 내 생각에는 다른 전범들에 비하면 가벼운 죄일 뿐이야. 카이텔은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재판에 나와야 할 것 같아. (후략)

Christopher J. Dodd, Letters from Nuremberg : My father’s narrative of a quest for justice, Crown Publishing, 2007, pp.278~279

도드가 공정한 재판을 주장하고 또 독일측에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카이텔은 상당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카이텔의 마지막 편지를 보더라도 그는 최후까지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2007년 12월 30일 일요일

드디어 나왔습니다!

오래 전 부터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Blitzkrieg -Legende의 한국어판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독소전쟁사를 번역하신 권도승 선생님이 번역판의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셔서 번역자인 진중근 대위님을 모셨는데 이 어린양은 여기에 꼽사리를 끼었다가 대위님으로 부터 책을 선물 받는 팔자에도 없는 호강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어 판의 표지 디자인이 독일어판 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책 크기는 한국어 판이 가로로 조금 더 큰 것 같은 느낌이군요.

이 책의 독일어 판에 대한 서평으로는 채승병님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독일어 판이나 영어판에 대한 서평은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것 입니다. 한국어 판에 대한 감상은 책을 정독하며 차근 차근 쓰려고 합니다. 엄청난 저작이 나왔으니 만큼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께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2차세계대전의 작전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적이 국내에 출간되기는 사실상 이 책이 거의 처음이라고 할 만한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수한 저작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이 책은 워낙 유명하다보니 국내에서도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이것이 한국어로 옮겨지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조각의 특성상 꾸준히 나가는 스테디 셀러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한국어로 나오기 까지 수고하신 진중근 대위님과 일조각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1940년 5월~9월 독일공군의 항공기 손실율

아래 글과 관련해서 1940년 5월 부터 9월까지 독일 공군이 입은 항공기 손실에 대해 올려 봅니다. Williamson Murray의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54쪽에 잘 정리된 표가 있군요.


실제 1개월 평균 손실율은 피해가 가장 막심한 Bf-110의 경우 19% 정도입니다. 피해가 가장 적은 단거리 정찰기들은 5%대군요. 평균 손실율은 5개월간 57%인데 1개월 평균 11%를 조금 넘는 규모입니다. 그렇다면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된 시기의 손실율은 어떨까요? 같은 책 53쪽에는 영국 본토 방공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7월 부터 9월까지의 손실율이 나와 있습니다.


영국 본토 방공전이 전개된 시기의 손실율은 총 37%로 1개 월 평균 12% 정도입니다. 즉 5~9월의 전체 평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예측한 1개월 평균 30%의 손실 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손실율이 굉장히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Bf-110의 손실율은 가공할 수준이군요.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2차대전 초기 항공전 양상에 대한 당시의 분석

항공기와 조종사의 소모율이 생산량과 보충되는 규모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침공한 이후 벌어진 규모의 공중전이 계속된다면 양군의 공군력은 수개월 이내에 항공 관계자들이 예상한 한계점 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치 공군은 개전 첫 날에만 100대의 항공기를 격추당했다. 신뢰도 있는 손실 집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항공기 손실율(ship mortality rate)은 위에서 주장한 수치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항공기 100대와 함께 조종사 150명도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손실율은 독일의 일일 최대 항공기 및 엔진 생산량을 상회하는 것인데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한달 평균 2,500대 또는 일일 평균 80~85대로 추정되며 조종사 보충율도 손실보다는 낮을 것이다. 전투기를 생산하는 데는 수일이면 충분하고 폭격기는 몇 주면 충분하다. 하지만 독일이 조종사 교육기간을 아무리 단축한다 하더라도 최소 5개월 미만으로 단축하기는 불가능하다.
영국군의 손실은 아직 알려지 있지 않으나 영국의 일일 항공기 생산량은 45대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국공군의 손실이 높지 않더라도 이것은 영국공군이 독일공군 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으며 영국공군은 아직 가용 가능한 항공기를 총 동원한 것이 아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 벨기에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곳을 기지로 영국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예비 기체를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항공전은 기술 한계의 측면에서 얼마나 항공기를 빨리 만드느냐 그리고 인적 한계의 측면에서는 얼마나 빨리 조종사를 교육시킬 수 있느냐의 양상으로 기울고 있다.
조종사의 교육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종사 보충이 좀 더 심한 제약을 받는다. 독일에 있어서는 연료 문제가 전격전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다.
현재 연합군은 조종사가 15,000명에 불과하다. 만약 하루 평균 50대의 항공기를 잃는다면 연합군은 하루 평균 75명의 조종사를 잃는 것이며 한 달이면 2200명에 달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 교육시켜 배출하는 조종사의 숫자를 초과하는 것이다. 영국의 항공 교육 체계는 충분한 항공인력(조종사, 방어기총사수, 관측사 등)을 배출할 수 없으며 조종사의 경우만 따로 보면 교육이 최고로 이뤄지더라도 다음 해에는 조종사가 부족할 것이다. 또한 독일도 하루 최대 75명 이상의 조종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각 다른 공군의 감소율은 항공기 손실과 생산량의 차이에 달려있다. 현재 독일공군의 전력은 11,000대에서 20,000대 사이로 추정된다. 비록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이 많더라도 하루 평균 100대의 손실이 계속 누적된다면 몇 달 안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될 것이며 조종사의 손실은 그보다 더 빠를 것이다. 연합군도 비슷한 비율로 손실을 입는다면 한달 이내에 전력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현재 연합군의 공군력은 영국 공군이 8,000~11,000대 정도이며 프랑스 공군은 3,500~6,000대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중 많은 수는 중동과 기타 식민지에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손실율은 전문가들이 1939년 9월 3일 이전에 예측하던 것 보다 더 높다. 미국 육군항공대는 월 손실율을 25%로 잡고 있었고 영국공군은 30%, 독일공군과 이탈리아 공군은 각각 50%와 80%로 잡고 있었다. 이 손실율은 공군의 총 전력에 대한 비율이었다. 간단히 말해 손실율이 100%라면 한 달에 필요한 보충용 항공기는 공군 전체 보유량과 같다는 뜻이며 이것은 현재의 공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다. 독일이 현재 하루 평균 100대의 항공기 손실을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은 즉 독일이 월 평균 30%의 손실율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종사와 항공기의 손실은 얼마 안 있어 공군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것을 사치로 만들 것이다. 공군력은 보충이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각 국이 보유한 공군력 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 될 것이며 교전국들은 많아야 수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일선 전력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항공기 생산공장에 대한 폭격은 분석요소에서 제외했음을 밝힌다. 그 이유는 현재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이 항공기 생산에 어느 정도 지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폭격이 항공기 생산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것이 없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은 유지할 수 있는 공군력의 규모를 더 줄이겠지만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Science News Letter 1940년 5월 25일

결론은 맞는데 그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근거로 든 사실들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특히 독일공군에 대한 과대평가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참고로 서부 전역 개시 당시 독일 공군의 총 보유 기체는 5500대 가량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개전 당시 3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니 이 글에서 추정한 최저치를 적용할 경우 얼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과장이 좀 심한 편 입니다. 손실율의 경우도 황당할 정도로 높게 잡고 있지요.

엉터리 자료를 가지고도 그럭 저럭 말이 되는 결론이 도출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 입니다.

2007년 12월 25일 화요일

Letzte Divisionen : Die Panzerdivision Clausewitz / Die Infanteriedivision Schill – Klaus Voss / Paul Kehlenbeck


어제 도착한 책 중 한 놈 입니다.

책 제목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이 책은 독일이 말 그대로 막장에 치달은 1945년 전쟁 말기에 편성한 이름만 거창한 사단 두 개의 사단사입니다. Klaus Voss가 클라우제비츠 사단사를 집필했고 Paul Kehlenbeck이 이보다 분량이 더 적은 쉴 사단사를 집필했습니다. 원래 이 사단사를 산 이유는 쉴 사단쪽에 더 관심이 있어서 산 것인데 실제 내용은 클라우제비츠 사단사가 더 많고 충실한 편입니다.

클라우제비츠 사단사는 자료의 부족을 감안하면 상당히 잘 집필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1945년 봄의 절망적인 전황과 전반적인 물자상황(전차, 중화기, 연료)에 대해 설명을 한 뒤 클라우제비츠 사단의 편제였던 45년형 기갑사단 편제에 대해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모아 클라우제비츠 사단이 편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어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수행한 첼레(Celle)와 윌첸(Uelzen), 라우엔부르크(Lauenburg)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편적인 문서자료와 독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한계를 피하기 위해서 맞서 싸운 영국 참전자들의 증언도 함께 인용하고 있으며 영국측의 시각에서 바라본 전투의 상황도 함께 서술되어 있습니다.

쉴 사단사는 분량이 적습니다. 책 전체는 부록까지 포함해 375쪽인데 쉴 사단사는 이 중에서 249~308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만들기는 턱없이 적은 분량이지요.
클라우제비츠 사단사와 비교하면 서술이 상당히 부실합니다. 실제 남은 기록도 거의 없는 것 같아서 16페이지 정도는 참전자들의 일기로 때우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쉴 사단사 때문에 샀는데 쓸만한 건 클라우제비츠 사단사였습니다. 그래도 쉴 사단에 대한 정보라고는 겔러만(Gellermann)이나 티케(Tieke)의 책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것이나 다른 개설서들에 정리된 정도 밖에 없었는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 하나 생겼으니 썩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2007년 12월 23일 일요일

지나치게 심각한 영국인들 - 1941년 듀잉(Dewing) 위원회가 예상한 독일군의 영국상륙계획

좀 황당하더라도 웃진 마세요.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2007년 12월 21일 금요일

연개소문=뭇솔리니???

조광(朝光) 창간호를 보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나당(羅唐)이 백제를 멸하고나서는 다시 마수(馬首)를 고구려에게 돌리어 해마다 평양성을 진공(進攻)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드니 고구려의 大‘뭇소리니’인 개소문이 죽고 그 제자(諸子) 사이에 권력 사움이 일어나매 기회를 타서 나당이 또다시 출병하야 평양성을 에우니 고구려는 이에 그 칠백년의 빛나는 역사가 막을 마치고 말었다.

문일평(文一平) 掌篇新羅史, 朝光, 창간호, 1935년 11월, 275쪽.

푸하하. 이때는 연개소문=독재자=뭇솔리니 였던 모양입니다. 연개소문을 뭇솔리니에 비교하다니 이 양반은 미래의 국수주의적인 후손들이 두렵지 않았나 봅니다. 조광 창간호에는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침공에 대한 분석기사도 실려 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가 그렇게 한심한 나라일 것이라고는 대부분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 연개소문의 강인한 인상을 뭇솔리니와 비교할 법도 하군요.

2007년 12월 18일 화요일

[妄想大百科事典] 파란잠바단

한나라당의 준군사조직(paramilitary organization). 당의 상징색인 파란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졌다.


2007년 12월 16일에 일어난 여의도 폭동 당시 국회의사당 무력진입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난전을 벌여 대내외적인 명성을 떨쳤다. 법과 공권력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이 높으며 특유의 파란 점퍼 유니폼으로 저능아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들의 과격함에 충격을 받은 FBI가 ‘파란잠바단’을 국제테러조직 명단에 추가한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다.

2007년 12월 17일 월요일

성지 순례 결과

오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름신께서 이런 축복을 내려 주시더군요.


HMSO에서 펴낸 영국군의 한국전쟁 공간사 입니다. 표지만 약간 상했을 뿐 접착제 냄새까지 풍기는 거의 새 책 이더군요. 유감스럽게도 2권 밖에 없었습니다만....


가격이 고작 5,000원이었습니다!

이토록 지름신의 은혜는 무한하니 이 어린양 그저 찬양, 또 찬양할 뿐입니다.

전쟁은 운빨이다! - 수도사단 기갑연대 1대대의 원산비행장 전투(?)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원산에 입성했을 때 제 1대대장이었던 정세진(丁世鎭) 선생의 회고입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잘 아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1대대는 비행장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대대 보급관이 시내에서 막걸리를 찾아내어 휘발유 드럼통에서 휘발유를 쏟아버리고 9드럼의 술을 가져왔다.
나는 각 중대에 2드럼씩 나누어 주게 하여 오랜만에 쇠고기를 곁들여 소대별로 회식하도록 하였다. 북한의 10월은 저녁이 되자 날씨가 추워지는데다 행군과 전투에 지친 대대 장병들이 술에 곤드레 취했을 때 였다.

‘적이 역습하고 있으니 대대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해있어 부대행동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다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이 실정을 그대로 보고할 수 없었다.
‘여기를 사수하겠습니다’고 白연대장에게 보고하고 말았다. 백연대장은 ‘1개 대대가 빠지지 못하고 적중에 고립되면 곤란하니 즉각 철수하라’고 재차 엄명하여 내가 송요찬 사단장에게 ‘사수하겠습니다’고 보고했더니 ‘빨리 철수하라. 사단이 모두 나왔는데 너희 대대만 안나오면 안돼’하여 ‘사수할 자신 있습니다. 적이 근접해와 전화를 끊겠습니다’고 한 후 아예 모든 유무선을 끊어버렸다.
그런 후 나는 각 중대장에게 ‘종교인이나 술 먹지 않은 사병을 뽑아 경계병으로 배치하되 적이 근접하여도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 적이 사격해와도 응전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비행장 2층 건물에서 보았더니 몇 대의 적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비행장으로 들어오더니 연속적으로 사격을 가한다. 그러나 대대에서는 누구도 응사를 하지 않아 얼마 후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아군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적이 그대로 돌아서 비행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긴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아침에 사단이 재 공격해 올 때 나는 대대를 철도 옆에 배치하여 측방에서 엄호사격하여 사단공격에 기여했다. 비행장에는 적 전차 3대가 들어왔던 흔적이 있었다. 곧 송요찬 사단장은 비행장에 들어오자마자 나의 손을 잡으며 ‘너는 용감했다. 전 사단이 빠지는데 너만 남아서 사수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사수해 주었구나. 대대장병들에게 나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하면서 몇 번이고 악수하고 돌아갔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다고 ‘실상은 대대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말은 송장군께서 돌아갈 때 까지 못 했다.

漢南戰友會,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 육군독립 기갑연대사』(漢南戰友會,1997), 302~303쪽

독소전쟁 당시 독일측의 기록을 보면 도시나 마을을 점령한 소련군들이 술만 발견하면 일단 먹고 뻗어버리는 통에 역습을 들어가면 어이없게 승리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해도 그려려니 하는데… 문제는 북한군이 공격을 해 오고도 그냥 지나가서 무사했다는 것 입니다.

과연 전쟁에는 운이 따라야 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12월 16일 일요일

대선후보 도우미를 해본 결과...

어부님과 Bigtrain님 블로그에 가 보니 대선후보 도우미라는게 링크되어 있더군요. 좀 뒷북이긴 한데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상당히 보수 우익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요. 아니. 문국현이 보수우익인가...

2007년 12월 15일 토요일

조선일보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서평

허헛. 간만에 컴퓨터 앞에 진득허니 앉아서 블로그 질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이 취소되긴 했지만 좋은 점이 있긴 있군요.

오늘 자 조선일보를 읽고서 Adrian Goldsworthy의 Caesar : Life of a Colossus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번역본이 864쪽이나 되는군요. 제가 가진 하드커버 영어판은 각주와 색인을 합쳐 583쪽인데 확실히 알파벳으로 된 언어를 우리 말로 옮기면 분량이 확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평을 쓴 기자가 책을 읽지 않았거나 대충 읽고 쓴 모양입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거든요.

조선일보 서평 - 아내에게 불성실했던 ‘유혹의 달인’

Goldworthy의 이 책은 카이사르의 전기이긴 하지만 그의 군사적 행적에 초점을 둔 책이거든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Goldworthy는 로마군을 연구하는 군사사가 입니다. 이 책의 내용 상당수는 갈리아전쟁과 내전 등 카이사르가 치른 군사작전에 관한 것인데 서평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군요. 책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니 굉장히 유감입니다.

한마디로 아주 형편없는 서평입니다. 변죽만 울리는군요.

주말 오전의 상황

1. 어떤 책이 어떤 인터넷 서점에 들어와서 얼씨구나 하고 지르려니 그 서점의 사이트가 갑자기 먹통.

2. 일을 하나 끝냈는데 또 다른 일이 하나 떨어짐. 귀찮긴 한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

3. 새로 떨어진 일 때문에 여행 계획을 접었음. 약간 우울함.

4. 갑자기 밀려드는 공황감. 이유는 모름.

5. 심각한 기억력 감퇴를 경험함. 벌써 치매인가...

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임시정부의 임시군제에 규정된 독립군의 병과색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했습니다. 여기에는 군 편제와 계급, 참모조직, 병력 동원 등 다양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는데 당연히 복장 규정도 있습니다. 제 5장 14조를 보면 군복의 카라 부분에 병과색을 넣도록 되어 있더군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보병 : 붉은색(紅)
기병 : 남색(藍)
포병 : 회색(灰)
공병 : 자주색(紫)
치중병(輜重兵) : 검은색(黑)
헌병 : 흰색(白)

보병 병과가 붉은 색이었다니. 어쩌면 독립군은 행군속도와 사격속도가 일본군 보다 세 배 빠르게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히히.

2007년 12월 12일 수요일

한국군의 M8 운용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한국전쟁에서 M8의 운용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아래의 보고서는 한국군이 M8을 실전에서 1년 이상 운용한 결과 미군측이 이 물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갑차(M8) 조달 문제

수신 : 군사고문단 본부 / 발신 : G-4 고문단 / 날자 : 1951년 9월 6일

1. 다음과 같은 이유로 통신 내용에 동의 하지 않는 바임.

a. 장갑차는 정비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한국군의 정비 부대는 훈련 받은 정비병의 부족과 특수한 부품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장갑차를 원활히 유지할 수 없는 상태임. 부품의 부족은 장비의 가동율을 저해시키고 (부품 조달을 위해) 고장난 차량을 분해하도록 만들 것 임.
b. M8장갑차는 한국육군에게 인가 되어 있지 않으며 본 사령부는 미국 장비를 국립경찰에 지급할 권한이 없음
c. 기존의 전투 경험에 따르면 이 장갑차는 소화기 공격에 조차 취약하며 무장도 빈약함. 과거 한국군은 장갑차의 정비와 운용에 있어 극도로 무신경 했기 때문에 (한국군에 장갑차를 계속 지급하는 것은) 값비싼 장비를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것에 불과함.
d. 한국군 사단에 배치된 선임 고문관들은 이 장갑차를 부대에 남겨두도록 조언해야 하는 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들의 경험에 따르면 잘못된 운용 때문에 이 장갑차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고 모든 전투 부대로부터 퇴역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었음. G-3와 정비부는 일선 고문관들의 조언에 따라 판단한 결과 해당 차량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했음.
e. 이 장갑차의 유일한 장점은 민간인들에게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 임.

2. M8 장갑차를 보유한 부대는 다음과 같음
-정비학교 1
-헌병사령부 1
-보병학교 2

3. 위에서 언급된 이외의 M8장갑차들은 모든 일선 부대에서 회수되었으며 한국군의 정비 계통을 통해 미국 내 병기창으로 이동 중에 있음. 현재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네 대도 회수해서 미군 물자로 돌려 놓는 것을 추천함.

RG338, KMAG, Adjutant General, Decimal File, File No. 400.73, 451, Box 58

어쩔 수 없는 일 이지만 한국군의 정비능력 부족은 한국 전쟁 이전부터 누누히 지적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은 1950년 초에 독립기갑연대의 장갑대대도 기병으로 개편하자는 건의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이 문서를 보면 전쟁이 터진 지 1년이 넘었지만 정비 능력 부족은 개선이 전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대자연을 떡실신 시키는 위대한 마오주석의 한마디

주말에는 블랙코메디를..

참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어린이 전사들이 자연과의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며 특히 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해악’에 대한 공세의 주력군이었다. 마오는 1958년 5월 18일에 열린 제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할 최저 연령대를 설정했다.

“다섯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민은 ‘네 가지 해악을 격멸(除四害)’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는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사천지방의 한 사람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참새 박멸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네 가지 해악을 격멸’하는 것은 너무 신났습니다. 학교의 학생 전체가 참새를 죽이기 위해 동원되었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참새 둥지를 부수고 참새들이 쉬기 위해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종을 쳐댔습니다. 참새가 유익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합동 전술이 기본이었다. 참가자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고 참새들은 보다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 수백만명이 온 들판에 산개해 동시에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에 참새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을 수 없었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보인 동시성은 이 전쟁의 결과만큼이나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중경의 남서농업대학에 재직하던 한 농업화학 전문가는 베이베이(北碚)구의 모든 인민들이 야간에 소집되어 언덕에 투입됐던 때를 회고했다.

우리는 불쌍한 참새들이 지쳐 떨어질 때 까지 솥을 두들겼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새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한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당의 별미는 소금에 절인 참새 두 마리를 꼬치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해악을 박멸’하는 투쟁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요리를 맛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이 되자 더 많은 해충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 했지만 우리 대학의 농작물보호연구소에 따르면 곡식에 대한 병충해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중략)

농부들은 뒤늦게야 참새야 말로 병충해 퇴치에 있어 가장 큰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월에는 참새를 대신해서 빈대가 네 가지 해악 중 하나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참새의 씨가 마르고 말았다. 운남지역의 한 식물학자는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는 선동을 한 뒤 갑자기 이것을 중단하라고 한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참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 버리고 새끼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야 과학자들은 참새가 벌레도 먹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중국과학원은 참새가 먹는 벌레와 곡식의 비율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새 사냥을 멈췄습니다. 마오 주석은 그냥 ‘이제 그만하면 됐어(算了)'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는 이 한 사람의 말이 모든 것을 규정하던 때였지요.”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86~88

과연. '마오주석의 말은 매 구절이 진리이고 한 구절이 우리의 일만 구절을 초월한다'는 린뱌오 동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한 생물종을 멸종의 위기로 몰고가는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랍니까.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무능함으로 적을 괴롭힌 사나이 - 비스마르크도 벌벌 떨게한 나폴레옹 3세

Cato님의 글에서 트랙백합니다.

유능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반대로 무능해서 적을 괴롭히는 경우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주의 법칙은 오묘한지라 무능함으로서 적을 괴롭힌 특출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가 던진 떡밥을 덥석 집어 물고 전쟁에 뛰어들 때 까지만 해도 쓸모있는 바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골치거리가 되고 맙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출전을 결심한 이유로는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갈수록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거둔 야전 사령관들에게 영광과 명예가 집중될 것도 우려했다고 설명되지요.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기차편으로 프랑스의 주력군인 라인 야전군(Armée du Rhin) 사령부가 있던 메츠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라인 야전군은 전쟁 초반에 포위되어 버리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샬롱 야전군(Armée de Chalons)에 합류해 스당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 후의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스당 전투지요.

나폴레옹 3세가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구상한 신속한 전쟁 종결은 물 건너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인 비스마르크는 무능한데다 인기도 없는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면 그대로 프랑스 제정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샬롱 야전군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8월 25일에 바이에른의 레오폴드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이건 우리에게 크나큰 골치거리가 될 게요.”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까지 빨리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도망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이 인기 없는 황제는 약간의 센스는 있었는지 항복 직후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의 장기화였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에 이기긴 했는데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군은 프랑스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이건 결국 독일과 프랑스간에 갈등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트루먼도 인정한 일본인의 근성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배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부분이 떠올라서 올려 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겪었던 끔찍한 인명손실과 일본군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때문에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경험은 일선 부대 뿐 아니라 대통령인 트루먼 조차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7일에 시작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매우 고되고 희생이 컸다. 우리는 진주만과 바탄반도의 패전 이후 긴 여정을 거쳤다. 우리의 군대는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와 동부 태평양으로는 하와이 제도로부터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도서 방어선들을 향해 싸워나갔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적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군의 인명손실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 본토에 가까워 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단호하고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아직도 4백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또한 일본은 본토의 최종방어를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태평양의 아군은 일본 본토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손실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해졌다.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미국인 수십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Harry Truman, Memoirs - Year of Decisions(Doubleday&Company 1955), p.414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영국인 교사 일단은 위기를 모면

곰인형 덕분에 요단강을 건널 위기에 처했던 영국 교사가 수단 대통령에 의해 사면 받았다고 하는 군요.

Sudans Präsident begnadigt britische Lehrerin

그런데 이제 수단 대통령 각하가 대신 욕을 먹게 생겼군요. 이제 이 양반에게 애도를.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곰 인형이 사람을 잡는다!

워싱턴타임즈에 아주 난감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Militants demand teacher's death

사연인 즉슨 영국인 여교사가 애들에게 곰인형의 이름을 무함마드로 짓도록 해서 수단인들이 분개했다는 군요. 분노한 무슬림들이 이 여교사를 처형하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하고 있답니다.

푸아. 광신도들이란. 이슬람은 도통 호감이 안가는 종교입니다.

낚시의 왕국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낚시의 사회가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질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로 나뉘는 형국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낚시질에는 점잖아야 할 언론사들까지 끼어들고 있지요. 게다가 소위 메이저 신문들도 어떻게는 더 많은 사람을 낚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낚시나 일삼는 언론들끼리 서로의 낚시질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메이저 언론들에 반대하는 인터넷 언론들도 낚시질에는 환장을 하지요.

오늘 소개할 인터넷언론의 낚시질 피해 사례는 친일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영훈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 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중략)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62~166쪽

우리 사회의 낚시질은 대책이 없습니다. 더 우울한 것은 낚시에 낚이는 사람들에게는 낚이고 싶은 심리가 내재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정한 낚시에 꾸준히 낚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낚이고도 떡밥만 입맛에 맞다면 낚시질도 옹호하는 붕어들입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 틀리다고 악을 쓰는 사회는 정말 우울하고 재미없는 사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군요. 자신의 입맛과 다른의견은 아예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정도로 꽉막힌 사회에 무슨 발전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나마 낚시질을 자제하는 언론이라고는 한국일보 정도 밖에 없는 것 같군요.

2007년 11월 29일 목요일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 Earl F. Ziemke

현재는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어 과거의 위용이라곤 찾아 보기 힘든 러시아군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군대는 소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되던 소련군의 붉은광장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전율을 느끼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특히 소련군대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군대였던 독일군을 실력으로 격파한 사실상 유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지는 압도감이란 단순한 통계 이상의 것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기 소련군대는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었고 특히 그 군대의 기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연달아 패배했던 군대가 불과 2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일어섰다는 점은 대단한 매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냉전시기 창군 초기의 소련군에 대한 서방측의 최고의 연구는 에릭슨(John Erickson)의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이었습니다. 이 책은 분량이나 서술의 치밀함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건이었고 걸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저작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이 책은 현재로서도 비교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든 걸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출간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공개된 수많은 1차 사료들은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러오기도 했으니 이런 점들을 수용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해 진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짐케(Earl F. Ziemke)의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대폭 반영해 쓰여진 창군부터 독소전 초기까지의 소련군의 역사를 다룬 저작입니다. 이 책은 짐케가 구상한 독소전 3부작의 가장 앞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저작입니다.
특이하게도 짐케의 3부작은 그 마지막인 Stalingrad to Berlin이 먼저 나왔으며 그 다음으로 2부인 Moscow to Stalingrad가 나왔습니다. 짐케는 원래 1부에 해당하는 독소전 계획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룬 저작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독일측의 시각에서 서술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대량의 소련측 1차 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 계획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즉 기존의 저작들과 달리 소련의 시각에서 독소전 초기까지를 다루는 책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결국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짐케의 이 책은 소련군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저작이 되어 버렸는데 그 덕분에 에릭슨의 연구와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에릭슨의 저작 또한 창군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두 저작이 다루는 시기 또한 겹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면 짐케의 저작도 매우 훌륭하지만 에릭슨의 저작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짐케의 입장에서 수십년 먼저 나온 에릭슨의 저작을 당연히 의식하고 썼을 텐데 결과는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짐케의 저작은 분량이 에릭슨의 저작보다 적은데다가 내용의 배분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 맞는 느낌입니다. 특히 붉은군대의 창군과 적백내전에 대한 서술이 풍부한데 비해 20~30년대의 발전과정은 다소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총 21개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가 1917~1921년 시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1922~1939년까지의 시기는 9장부터 14장까지에 불과합니다. 물론 1917~21년은 붉은군대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또한 붉은군대의 군사교리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경험이 축적된 시기이니 만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서술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맞는 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출간된 만큼 이 저작은 시기적인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출간된 시기가 늦은 만큼 최신의 연구성과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요. 특히 독소전 발발 직전 소련의 준비태세와 동원에 대한 설명은 에릭슨의 저작보다 뛰어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독소전 초기의 전황에 대한 기술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의 반응은 다른 저작에서도 많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에릭슨의 저작에 있는 풍부한 통계가 이 책에는 없다는 점 입니다. 물론 이 시기의 통계자료야 글랜츠나 다른 연구자들의 저작들에 많이 들어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쉽긴 하더군요. 통계와 도표가 없다보니 꽤 복잡한 소련군의 편제개편을 글로만 이해해야 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책의 뒷 부분에는 전쟁 이후 소련의 독소전쟁에 대한 시각 변화에 대해 정리를 해 놓았는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흐루쇼프 시기 스탈린의 격하운동과 맞물린 새로운 역사해석에 대한 부분이 좋습니다. 전반적으로 부록이 매우 부실한데 이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2004년까지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대폭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에릭슨의 저작 보다 적은 편이니 읽는데도 부담이 적은 편 입니다. 에릭슨의 저작은 너무 방대하다 보니 베게로 쓰기에도 불편하지요.

2007년 11월 26일 월요일

승리의 총재님

기호 8번 허경영



경부운하 따위는 버로우!


총재님은 바이칼호다!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키티호크의 홍콩 입항 거부가 달라이 라마 때문?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China's Naval Rebuff Could Be Reply to Dalai Lama's Medal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중국에게 티벳 문제가 민감한 줄은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필요까지야..

지름신 앞에 장사없다 - 레이건 행정부 시기 국방예산 증액에 따른 문제점

에. 오늘도 날림 번역으로 때우게 됐습니다.;;;;

요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우국충정에 넘치는 많은 분들께서는 신무기만 잔뜩 들여오면 군사력이 알아서 강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승하하신 미리견 황제 레이건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던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미군은 레이건 폐하의 이런 관심에 힘입어 1980년대에 신무기를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좋기만 했을까요?

합참은 국방예산의 증액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와인버거는 군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예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콜린 파월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것은 마치 2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았고 네트를 치우고 테니스를 치는 것 같았다. 합참은 즉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요구한 내역은 국방예산을 대략 9% 정도 증가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합참은 국회나 행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고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군은 베트남전 직후의 반군정서 때문에 교체하거나 개량할 수 없어서 노후화된 장비를 대규모로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은 마구잡이로 '질러대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군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존스 장군은 이런 대규모 증강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장기적이고 꾸준한 예산 증액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스 장군은 와인버거에 의해 예산이 통제 불능으로 폭증하는 것에 반대해 '실질적인' 국방예산 증가를 주장했다.
신형 장비, 그리고 특히 값비싼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인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군사력 증강은 사실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력 구조나 전쟁 준비상태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도 없었다.

결국 존스 장군의 우려는 얼마가지 않아 현실로 구체화 되었다. 1983년 회계연도에 국방예산은 물가상승률 보다 25%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에 국방부의 예산은 두배로 폭증했다. 그러나 예산의 대부분이 신무기를 구매하는데 소비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갈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레이건 행정부가 6320억 달러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부었지만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육군 부대는 1980년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런 문제는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전구 부사령관인 로슨(Richard L. Lawson) 장군은 1985년 의회에서 “대대급 야전기동과 비행훈련시간, 군함의 기동훈련은 불충분한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중략) 일부 탄약, 특히 공대공미사일과 해군의 탄약, 특수 탄약의 재고량은 규정량 이하로 감소했으며 이 때문에 전쟁 수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5년에 이르자 국방부가 안게된 예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게 되었다. 존스 장군과 합참의 여러 관계자들이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합참과 군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넌(Sam Nunn) 상원의원은 와인버거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국방부가 예산 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기존에 승인한 신무기 도입계획에 소요될 1500억에서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충원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며 신무기를 도입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회와 대립하는 와인버거의 행태는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국회와 대중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그럭 저럭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국회의원들은 타협을 거부하는 와인버거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건이나 와인버거가 아니라 의회가 나서서 국방부의 예산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은 군사력 유지와 이미발주되었지만 아직 지불은 되지 않는 신무기 도입을 동시에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들 마저도 우려를 나타낼 지경이었다. 공화당측은 '레이건 행정부의 첫 1년에 국방부가 얻어낸 연간 9%의 국방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3~4% 수준의 예산 증액을 이끌어 내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국방예산을 늘리는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가 7년간 장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했을 때 그는 '1982년 회계연도에 1807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을 1987년 회계연도에는 2740억 달러로'늘렸다. 와인버거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퇴임을 한 덕분에 그가 마구잡이로 "질러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예산 문제를 손보는 것은 1987년에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임무가 되었다. 칼루치는 의회가 국방예산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와인버거와 같은 대립적인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와인버거와 달리 신무기의 생산과 도입 시기를 늦추면서 예산을 절감하려 했고 국방예산 증가율을 낮추려 했다. 실제로, 칼루치가 1988년 2월 상원에 출두했을 때 그는 국방예산 증가율을 2%로 낮췄다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와인버거가 3320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한데 반해 칼루치는 2990억 달러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상원은 3000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 노력이 끝나갈 무렵, 국방부는 대통령이 약간 도움이 된 정도라고 생각했다. 합참은 MX 미사일, B-1 폭격기, 트라이던트 미사일, 그리고 새 항공모함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1985년 10월 1일, 베시(John W. Vessey Jr.) 장군을 대신해서 합참의장에 취임한 크로우(William Crowe Jr.) 제독은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무분별하게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비록 행정부 초기 예산의 일부가 적절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군은 예산 사용에 있어 현명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 후하게 책정된 국방예산은 국방부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던’ 시기였다. 국방부가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산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우리가 5년 뒤에는 이 정도의 예산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예산이 있을 때 일단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써야 하는가? 그리고는 결정이 이뤄졌다. - 그래. 지르자! 예산이 들어오는 동안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써 버리자! 그래서 국방부는 예산을 써 버렸고 예산이 모두 현명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5년이 지난 뒤 더 이상은 많은 예산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있을 때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체계적인 군생활을 거친 군인들은 예산이 증액되던 초기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가 군대를 심각한 문제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한 해병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병항공대 사령관 핏맨(Charles H. Pitman) 중장은 '만약 누군가 내일’ 해병대가 앞으로 3~5년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내부개혁을 한 뒤 좀더 나은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싸울 것이다. 만약 해병대가 현재의 3-5년 예산안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경우 사업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그들의 직원들을 내 눈 앞에서 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내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예산의 문제는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레이건이 퇴임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국방부의 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970년대와 같은 구제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것 이죠. 육군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더 축소되었고 해군은 군함들을 퇴역시켜야 했으며 공군은 비행단 규모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것은 군대의 전투수행태세가 악화된 것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국방예산이 현재 보유한 장비들을 운용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국방예산에 관한한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n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275~278

2007년 11월 24일 토요일

카이텔이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샤이러는 그의 기념비적인 걸작인 ‘제 3제국의 흥망’의 에필로그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방청기를 실어놨습니다. 샤이러는 그가 지켜본 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짤막하게 기록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카이텔에 대해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짤막하게만 넘어가더군요. 당시의 다른 증언이나 기록을 보면 카이텔은 군인답게 사형판결에 대해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사형되기 전에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매우 짧고 간결하지만 카이텔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946년 10월 3일

이것이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구나.

나는 14일 내로 판결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것 같다… 나의 운명에 대한 긴 판결은 내가 재판관들 앞에서 내가 나의 소신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줬다. 재판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한 발언들을 단 한마디도 후회하거나 번복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질문과 모든 경우에 대해서 항상 진실만을 말했다. 나는 지금은 물론이고 미래와 역사 앞에서도 떳떳하다.

Walter Görlitz, Generalfeldmarschall Wilhelm Keitel – Verbrecher oder Offizier?, Verlag S.Bublies, 1961, 1998, ss.489~490

이것만 보면 전형적인 확신범의 태도같습니다.

그런데 카이텔 또한 "역사가 나를 평가해 줄 거얌~"하는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군요. 네. 그나마 현실의 패자가 얻을 수 있는건 별 가치도 없는 미래의 평가 뿐이지요. 그러나 이를 어쩌나요. 현재의 역사 또한 카이텔에 대해 별로 우호적이진 않으니 말이지요.

2007년 11월 22일 목요일

쥐 한마리

제가 사는 조그만 동네에서 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전 까지 통합신당에 있던 시의원 한명이 한나라당으로 옮겨 갔더군요. 지난 경선에서 정동영을 지지하며 열심히 돌아다니던 양반이라 최소한 대선이 끝날때 까지는 붙어 있을 줄 알았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배를 갈아 탔습니다.

에. 뭐 배가 가라앉을 때 쥐들이 먼저 튄다는 말도 있고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좀 요상한 배를 탔다는 느낌입니다. 그 양반은 전형적인 정치자영업자라 다음번 시장선거에 나온다는 이야기도 도는데 만약 그 양반이 한나라당 간판을 달고 시장 선거에 나온다면 꽤 흥미롭겠군요.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제 3세계 인민들을 바라보는 스탈린의 시각

전세계 근로인민의 보호자이며 스승이신 강철의 대원수께서 극동 소국의 정치인 두 명을 친히 접견하고 가르침을 주셨을 때의 일화라는군요…

(전략)

더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좌익진영 내부의 분파투쟁은 격화되었다. 반대파는 사람들에게 좌익진영의 지도층, 그 중에서도 먼저 박헌영의 명성을 실추시키기 위한 성명서와 격문, 팜플렛을 뿌렸다. 공산당과 인민당 그리고 신민당을 통합시킨다는 노선은 반대파 집단의 각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들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전후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반대파의 문건을 분석해 볼 때 통합에 대한 반대파의 저항은 원칙적인 동기가 아니라 대단히 개인적인 야심적인 동기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동기들의 한 가지 논거 즉 그러한 통합지시가 외부에서, 스탈린에게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나는 남편(필자인 샤브시나 꿀리꼬바의)의 얘기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1946년 7월 남편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위원장이었던 Т. Ф. 스찌꼬프로부터 얼마 동안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 있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끄바로 날아갔다. 남편이 배석한 회담석상에서 여러가지 것이 논의되었다. 스탈린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고압적인 것 같았고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는 듯 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스탈린에게서 비공개적으로 이 회담에 대해 전해들은 남편과 우리가 놀란 것은, 좌익정당들의 통합에 관한 부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혹은 노동당을 표방하면서 가까운 장래의 과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아마도 그런 문제에 준비를 못한 듯한 조선의 동지들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무심코 말했다.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우리가 이 문구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본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록이 정확하게 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남편에게 캐물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였다. 인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무시도, 비록 우리와 가까운 나라라 할 지라도 엄연히 다른 나라의 내부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특징적인 것인가!

(후략)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인물 회고 :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185~186쪽

강철의 대원수에게 조선의 인민들은 장기의 졸에 붙은 먼지 한 조각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이런!

Statcounter에 로그인을 해 보니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가 엄청난 히트(???)를 쳤습니다. 천하무적의 독일국방군도 저런 멍청한 삽질을 했구나하는 점이 상당히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모양이군요. 이 포스팅 덕에 지난주 월요일에는 거의 400명 가까운 분이 이 재미없는 블로그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단순 클릭은 거의 1000회 가까이 나왔습니다.

어디서들 오셨나 보니 윤민혁님의 "화이트데스"와 "Joy SF"란 곳에서 많이 오셨더군요. 오호. 링크의 위력이란!

이거 속편으로 1939년 붉은군대가 폴란드에서 저지른 삽질을 올려봐야 겠습니다.

2007년 11월 13일 화요일

영국 해군의 팔레스타인 검역 작전

쓸데 없이 책값이 비싼 Frank Cass에서 나온 The Royal Navy and Maritime Power in the Twentieth Century를 읽는 중 입니다. 돈이 궁한지라 지금 다니는 학교에 신청을 했더니 바로 사주더군요.

역시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이와 유사한 종류의 책들이 그렇듯 개론적인 내용들을 종합해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요약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익숙한 내용들이 많더군요. 그렇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는 어려운 글들도 같이 실려 있다는 점은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Geoffrey Till이 쓴 “Quarantine Operations : The Royal Navy and the Palestine Patrol” 입니다. 말 그대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해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하는 유태인 난민들을 단속하기 위해 벌인 검역 작전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입니다. 이 시기를 다루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경우 꽤 많은 시각들이 밀입국 하는 유태인의 시각으로 사태를 보고 있는지라 이를 단속하는 영국 해군의 시각에서 쓰여진 점은 상당한 매력이 있더군요.

Till이 지적하는 영국의 가장 큰 문제는 1차 대전 이후의 유태인에 대한 탄압, 특히 나치의 유태인 대량 학살로 시오니즘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여론이 높아졌다는 것 입니다. 이미 3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드는 유태인 문제는 영국의 중동 지배에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지요. 여기에 히틀러가 기름을 부어줬으니 영국으로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발 때문에 유태인의 이주를 제한하려 노력했지만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유태인들을 막는 것은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정보기관은 영국을 엿먹이기 위해 유태인들의 밀입국을 지원하며 유태인들에게 영국의 검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지요. 프랑스가 아닌 다른 유럽국가들도 굳이 영국을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나가는 유태인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영국의 새로운 큰형님이 된 미국은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미국의 유태인들은 선박을 지원하면서 유태인들을 열심히 실어 날랐다지요.

영국 해군은 1945년 10월에 공식적으로 유태인 검역 작전을 시작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해군 감축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에 필요한 병력을 증강합니다. 이 임무가 시작될 당시 영국 지중해 함대는 14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6척이 1946년 초 까지 유태인 검역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1948년에 유태인 검역작전이 중단될 때 까지 영국 해군은 이 임무에 순양함 10척, 구축함 20척, 프리킷 9척, 소해함 11척, 기타 소형함정 20척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중해 전체를 담당하기에는 검역작전에 투입되는 군함의 수가 너무 적었고 유태인들은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검역 작전 초기에 유태인들은 아주 간단하게 영국의 봉쇄망을 뚫었는데 그것은 한번에 여러척의 선박을 출항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자고로 숫자 앞에 장사 없다지요. 영국은 부족한 군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영국 공군을 초계 임무에 증강했고 이것은 검역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꽤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습니다. 선박 검역 임무들이 다 그렇듯 유태인을 실은 선박들은 영국 해군이 검역을 위해 승선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했습니다. 1947년의 엑소더스호 사건에서는 사망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유태인들은 영국군이 선박에 오르지 못하도록 뜨거운 기름을 뿌리고 그래도 올라탈 경우 숫적으로 불리한 영국군들을 포위하고(!) 쇠막대기나 칼 같은 물건을 휘둘러 댔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중국 어선 단속하는 한국 해경의 고난을 연상케 하는 군요. 이런 근접전에서 영국 해군이 쓰는 리-엔필드 소총은 너무 길어 불편했고 그 결과 검역임무에는 기관단총이 대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휘두르는 무기를 방어하기 위해 방패도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영국 해군은 선박에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사다리 등을 만드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보통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핵심 인물들만 분리해서 제압할 경우 선박내의 저항은 쉽게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난민들이 정규군에게 조직적으로 저항하는건 무리겠지요.

Till은 검역작전에 투입된 병력을 고려하면 영국 해군의 검역임무는 전체적으로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육지의 영국 육군이 죽을 쑨 것과 비교하면 말이지요.

도킨스의 유쾌한 글쓰기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대충 약을 챙겨 먹고 친구 한명과 채팅을 했는데 중간에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 번역 문제에 대한 이이갸기 나왔습니다. 제 친구의 지적은 고유명사에 대한 번역이 잘못된 것이 많다(예를 들어 “china”를 “중국(China)”으로 번역하는 것)는 것 이었습니다. 친구가 말하길 개인 블로그나 일기장이 아닌 이상 돈 받고 하는 번역이 이런 건 큰 문제가 아니냐고 지적하더군요.(찔리더군요;;;;;)

마침 도킨스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점심을 먹고 눈먼 시계공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도킨스의 여러 에세이에서 나타나듯 도킨스는 대중적인 글에도 능숙한 대가 중의 대가입니다. 여러가지 재미있는 비유를 동원한 그의 해설은 이해하기도 쉽고 즐겁지요. 쉽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도킨스의 대중적인 글 쓰기는 대중과의 소통을 고민하는 전문가들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이 양반의 글쓰기를 보다 보면 이 사람이 학부 시절에 썼던 노트나 다른 글들을 보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런 글발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겨나진 않았겠지요. 도킨스의 글쓰기 진화과정을 추적해 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도킨스의 대중적인 저작 중에서 눈먼 시계공을 가장 좋아합니다.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에 사용된 비유들이 가장 재치 넘치고 재미있는 것 같더군요. 물론 "만들어진 신"이나 이 밖에 종교를 비판하는 다른 에세이들도 흥미롭긴 합니다만 전투적인 성향이 있는지라 마냥 즐겁지는 않거든요. 이 책에서 사용된 여러 비유들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돌고래와 조기경보기를 비유하는 것이나 동물의 점진적인 진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DC-8의 개량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아주 유쾌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압권은 원숭이의 타자치기가 아닐까 싶더군요. 여러 모로 유쾌한 책 입니다.

2007년 11월 11일 일요일

베트남 전쟁과 미군 내 흑인의 비율 증가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처음으로 징병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끝난 뒤 군대의 감축과 함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시된 징병제는 전후에 잠시 폐지되는 듯 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로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평시 징병이 시작된 것 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징병제도는 상당한 명분이 있었고 미국인들도 대개는 여기에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나 도조는 분명히 때려잡을 명분이 넘쳐나는 악당들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 이후에도 흐루쇼프나 마오 주석 같은 대인배들이 계속해서 출현했지만 이들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난 양반들은 아니었지요. 가끔 크레믈린이 스푸트닉 발사 같은 요상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평화는 유지되었습니다.

세상이 비교적 잘 돌아가니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요. 미국의 징병제는 지방의 징병위원회의 자율성이 강한 편이어서 현역 판정 기준이 약간 고무줄자였고 여러가지 이유로 징병 연기나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있거나 대학생일 경우 연기가 되거나 면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병역을 회피하거나 미룰 수 있었으니 결국 미군이 가용한 병역자원의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무렵부터는 징병제 폐지 운동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곤궁하니 미군으로서는 머리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이전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인력자원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바로 흑인이었습니다.

미국이 처음 징병제를 실시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흑인은 가치있는 병력자원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병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영광이라는 정서가 남아있던 무렵이니 흑인에게 군대에 갈 영광을 주는게 이상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무렵부터 슬슬 병력자원의 부족 문제가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1966년에 징병 기준을 낮춰 연간 10만명을 더 입대시킨다는 Project 100,000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의 영향으로 50%를 넘던 흑인의 현역 부적격 판정은 1966년 이후 30%대로 낮아졌습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새로 바뀐 기준에 의해 현역으로 입대한 인원은 240,000명에 달했는데 이 중에서 41%가 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군대내의 흑인 비율은 점차 높아졌습니다. 1965년에 흑인은 육군 병력의 9%에 달했는데 1968년에는 13%로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지원병과 달리 징집병들은 전투 병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교육수준이 낮은 흑인의 경우 대개 보병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병력 비율에 비해 사상자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체 미군 중 흑인은 11%에 불과하지만 전사자의 비율에서는 22.4%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지요.

이런 궁색한 상황에 대해서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빈곤층들은 마침내 조국의 방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술과 생활 방식등을 배워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며 …. (중략) 이렇게 해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것 입니다.”

George Q. 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07

놀랍게도 어느 순간 미국의 병역은 시민의 자랑스러운 권리에서 빈민구제사업으로 전환된 것 입니다! 우와 세상에!

결국 병역 자체가 권리에서 귀찮은 부담으로 전락하면서 사회의 최하층이 이것을 부담하게 된 셈입니다. 맥나마라의 발언과는 달리 전쟁에 참여한 빈곤층들은 사회에서 쓸만한 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사회로 돌아와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

한국의 차베스 빠돌이들이 바라는건 이런걸까?

Police shot in rally against Chavez

아주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겠지요. 이 기사에서 다음 구절이 특히 인상 깊습니다.

On Wednesday, hooded Chavez supporters shot at least two anti-Chavez students at a university in a clash that erupted after thousands marched through the capital calling for the vote to be postponed, witnesses and hospital officials said.

차베스가 기를 쓰고 전인민의 무장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요즘도 몇몇 대학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차베스를 배우자는 뻘짓을 하던데 이 친구들이 제발 보수적인 언론들에도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귀가 너무 한쪽으로만 솔깃하면 좋지 않지요.

2007년 11월 8일 목요일

초기 불교의 지지기반은 고급 카스트?

읽은지 오래된 책을 다시 읽는 것은 꽤 재미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나는데 그 느낌은 참 재미있지요.

지금은 차크라바르티(Uma Chakravarti)의 “고대 인도사회와 초기불교”를 읽고 있는데 꽤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차크라바르티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 불교의 주된 후원계층과 지지기반은 바라문과 크샤트리야 같은 상위 카스트였다는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을 읽다 보면 하위 카스트들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불교의 지지기반이 하층민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팔리어 경전에 언급되고 있는 재가신자는 175명이라는데 이 중에서 바라문이 76명이고 크샤트리야는 22명인데 천한 계층은 불과 11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꽤 의외더군요.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느낌이 꽤 새롭습니다.

2007년 11월 7일 수요일

나를 낚은 이 한권의 책 - Sledgehammers : Strengths and Flaws of Tiger Tank Battalions in World War II

좋은 역사책(또는 역사와 관련된)의 조건 중 하나는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썼느냐와 독창성 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거의 전자에 의해 규정되지요. 99% 이상의 A급 저작들은 탄탄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집니다. 간혹 인문학 분야에서 2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지는 책들이 쓸만한 경우도 있긴 한데 그 경우는 대개 역사철학 같은 관념론적인 분야가 대부분 입니다. 그리고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지는 책은 설사 재미가 없더라도 최소한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지는 책 들은 다른 이들의 연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코 창의적인 시각이 나올 수 없으며 재미마저 없을 경우 아예 쓸데가 없습니다.

C. W. Wilbeck이 쓴 Sledgehammers : Strengths and Flaws of Tiger Tank Battalions in World War II 라는 물건은 바로 위에서 규정한 거의 쓸데가 없는 책입니다. 게다가 더욱 슬픈 것은 제가 바로 이 형편없는 책에 낚인 피해자 중 하나라는 것이죠. 사실 이 책을 찍어낸 Aberjona Press는 쓸만한 군사서적을 몇 권 낸 곳이기 때문에 출판사를 믿고 샀는데 뒤통수를 심하게 맞은 셈 입니다.(아마존의 리뷰는 별 5개인데 절대 믿지 마십시오)

이 책은 실질적으로 내용의 거의 대부분을 W. Schneider의 Tiger im Kampf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독창성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형편없는 저작입니다. 이 책의 모든 통계 자료들은 Schneider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 들 입니다. 그리고 이밖에 약간의 2차 사료들이 보조적인 역할로 사용되고는 있습니다만 별로 특기할 만한게 없습니다. 책 전체가 기존의 저작들을 짜깁기 한 것이다 보니 건질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책의 수준은 잘 쓰여진 인터넷 게시판의 글을 모아 놓은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아까운 종이를 낭비해 가며 찍어낼 물건은 전혀 아닌 것이죠.

제가 혹평했던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 라던가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는 최소한 1차 사료를 기반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전체적인 요지는 동의할 수 없더라도 참고할 만한 내용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Sledgehammers는 구제 불능으로 형편없는 저작이며 여기에 낚인 본인을 저주하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결론은 좋은 역사책은 1차사료에 기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가 되겠습니다.

2007년 11월 6일 화요일

TOTO의 Live in Amsterdam 듣는 중 입니다.

CD를 정리하다가 찾았습니다. 아. 역시... 제가 가진 CD는 몇 장 안되는데 정리하다 보니 만만찮은 짐입니다. CD를 정리하게 CD꽂이라도 하나 사야 겠네요. 새삼 LP를 수집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워 집니다.

현재 Africa만 계속 반복해서 듣는 중 입니다. 중독성이 제법이군요.

2007년 11월 3일 토요일

킹덤

역시나 국내의 평론가들은 “미국 만세다” 아니면 “아랍인들을 무능하게 묘사했다”는 등 부정적인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비난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 영화의 도입 부분은 꽤 재미있게 잘 만들어 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에서 911테러까지의 역사적 사건 전개를 압축적으로 정리하고 지나가는데 마치 잘 만든 브리핑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특히 세계 1위의 산유국과 세계 1위의 석유 소비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를 그래픽으로 묘사한 것은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배경 설정을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은 괜찮은 방식 같습니다.

국내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후반부에 FBI의 수사요원들이 일당백의 총잡이로 돌변하는게 약간 깨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총격전 장면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도로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기습을 받은 뒤 그대로 그들의 근거지까지 추격해 벌이는 마지막 결전은 매우 박진감 넘치고 신납니다. 그리고 상영시간이 두 시간도 안되니 만큼 피곤하더라도(???) 주인공들이 수사도 하고 총도 쏘는 쪽이 역할을 나눠 더 많은 등장인물을 출연시키는 것 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동의했듯 영화 후반부의 총격전 장면은 압권입니다. 여주인공인 제니퍼 가너는 남자들이 돌격소총이나 카빈 종류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MP5를 사용하는데 이건 여성임을 고려한게 아닌가 합니다. 제작자가 총기 매니아인 마이클 만이니 충분히 그럴 듯 싶더군요. 영화 막판에 주인공들이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 테러범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재미는 있더군요.

사우디인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하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사우디인들은 미국인들이 없으면 기초적인 수사도 못하고 피의자에 대한 고문이나 하는 등 한심하게 그려지고 있긴 한데 만약 사우디인들이 미국인들 없이도 수사를 잘 하는 것으로 묘사되면 주인공들이 개입할 여지도 없어지니 영화 자체를 만들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담으며 끝납니다. 결국 석유로 인한 미국과 사우디의 괴이한 관계는 계속해서 엉망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유치한 해피엔딩으로 때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후하게 평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10월 22일 월요일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 출간과 관련해서

6월에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 출간이 연기됐다는 글을 하나 썼었는데 여기다가 이 책의 번역을 담당하신 진중근 대위님이 댓글을 하나 달아 주셨네요.

Blitzkrieg - Legende 한국어판의 출간이 조금 더 연기될 것 같습니다

아이쿠. 그런데 진대위님이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면상과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모르실지도.(진대위님, 이 어린양의 정체는 전에 몇 번 뵈었던 윤모입니다.)

한국어판이 나오면 모두 한권씩 질러서 진대위님 싸인이나 받아보지요. 흐흐흐.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독일 국방군의 연령별 징집현황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을 하나 쓰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습니다. 마우스가 고장나서 왼쪽 버튼이 잘 안먹히고 오작동을 가끔씩 하는데 이것 때문에 본문 전체 드랙 + Del + Ctrl S 콤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이쿠.

별로 긴 글이 아니긴 합니다만 같은걸 또 쓰자니 지겨워서 재미있는 통계자료로 때워볼까 합니다.

아래의 표 두개는 Rüdiger Overmans의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222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전쟁 시기에 따른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226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각 군별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1. 시기별 징집 연령대

첫 번째 표가 흥미로운 점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나이 40이 넘은 노땅들이 대규모로 징집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00년생 이상의 남성의 대부분은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이전에 징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전쟁 후기로 가면서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도 징집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Overmans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 초에 징집된 나이 많은 병력들은 후방 부대나 예비부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선부대의 전투병력으로 빠졌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 2. 각 군별 징집연령대

두 번째 표는 각 군별 징집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원 수 옆의 백분율은 각 군의 전체 징집 인원에서 해당 연령대가 어느 정도의 비율인가를 나타냅니다.
이 표가 재미있는 것은 해군의 경우 육군과 공군에 비해 1900년 이전 출생자와 1921년 이후 출생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입니다. 공군은 연령 비율이 어중간한 편이며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1906~1920년 출생자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순수 전투병력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것이 육군인지라 인력배치가 육군 중심으로 된 것 같습니다.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세계적 대인배 허경영 총재

모당의 대통령 후보가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뒷구멍으로 추진하다가 나라망신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아. 정말 통탄치 않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고작 이정도의 소인배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한반도에 세계적 대인배가 한 분 계십니다.

말 안해도 다 아실 그분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2001년 1월 18일부터 28일까지 내가 미국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당선 축하파티에 초청되어 워싱턴에 가서 부시대통령(사진 참조)과 부통령, 그리고 상하원의원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미국 공화당과 한국 공화당과 자매결연도 맺었었다.


그런데 그때 미국의 고위 공직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략)

“미국이 진정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거대한 미국과 맞서서 싸우며 자기 민족을 살리겠다고 몸부림친 민족주의자 반미주의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월맹의 호지명, 그리고 허경영 총재 당신 같은 민족주의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는 미국이 변해가고 있음을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여야와 자민련까지도 고어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고 지지를 했었는데 나는 표범상인 부시가 염소상인 고어를 이기고 대통령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부시에게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여야의 국회의원 20여명이 워싱턴의 호텔에 머물렀지만 그들은 결국 부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10판), 도서출판 새나라, 2000, 2002년, 313~314쪽

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뭔가 꼬여가고 있다!

수령님은 서울을 '해방'할 때 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슈티코프의 아래 전문은 슬금슬금 불길한 기운이 나타날 무렵의 요상한 분위기를 잘 잡아낸 것 같습니다.
암호전문 405809호
평양발, 전송 1950년 7월 2일 04시 00분; 수신 1950년 7월 2일 05시 47분
1950년 7월 2일 05시 55분 소련군 총참모부로 재전송(무선)
긴급

핀시(스탈린) 동무께
362호

미국의 전쟁개입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립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군사작전, 특히 서울의 해방이후 인민들의 분위기는 엄청난 정치적 열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해방지구의 인민들은 인민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으며 인민군을 돕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고 있습니다. 인민위원회, 사회-정치 조직 등 권력기관들이 해방지구에서 속속 설립되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생산과 상업활동이 재개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인민군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빨치산 봉기가 시작됐으며 현재 남한군의 후방 지역에서 빨치산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미국의 선전방송의 확산과 미국 비행기들의 남북한 인구밀집지대, 공업지대, 군사시설에 대한 잦은 공격으로 인민들의 정치적 경향은 다소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후의 승리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해방지구의 인민들(중 소수)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군의 지도부(김일성, 박헌영, 박일우, 김백, 최용건, 강건)는 현재의 복잡한 군사-정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남한의 전역으로 공세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으며 이점과 관련해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자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제게 보병, 전차, 해군 부대들을 추가로 편성하는데 대해 의견을 구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조선 전체에 징병제를 실시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일부, 김두봉과 홍명희는 조선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으며 김일성에게 소련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물어보도록 요청했습니다.(김일성이 제가 김두봉과 홍명희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참여한 우익과 중도파 인사들은 정부의 조치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해방지구에서의 동원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김일성에게 소련정부는 그의 무기 및 탄약 원조 요청에 대해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현재 북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은 양호한 편이며 인민군의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423호 / 슈티코프
1950년 7월 1일
수신인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베리야, 말렌코프,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2007년 10월 14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2)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위의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도데체 이 출판사의 책이 어느정도 수준이냐? 하는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에 귀한 돈을 낭비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샘플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과학 기술 수준이 그렇게 높고 훌륭하다면 왜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서구 사회의 일반적 수준보다 낮은 것일까?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과학 기술과 소비 생활의 현격한 격차. 독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북한 주민들의 소비 생활 수준이 낮은 것은 바로 미국의 각종 제재조치와 경제봉쇄 때문이다.

(중략)

일부 독자들은 북한의 과학 기술이 그렇게 우수하다면 기술의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면 경제난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난을 해결한답시고 과학 기술을 수출할 경우 미국은 주변국의 전력을 탐색하듯이 북한의 사정에 통달하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다. 만약 백두산 1호, 백두산 2호의 정보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미국은 이에 대한 방어 기술을 실제로 개발할 지도 모른다.

이 경우 북한으로서는 지금까지 유지하였던 군사적 우위를 한 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다.

전영호, 최한욱,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도서출판 615, 2006 pp.115~117

시리아 관련 소식

뉴욕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Analysts Find Israel Struck a Nuclear Project Inside Syria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번 건으로 승상께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신듯 보입니다.

Behind closed doors, however, Vice President Dick Cheney and other hawkish members of the administration have made the case that the same intelligence that prompted Israel to attack should lead the United States to reconsider delicate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over ending its nuclear program, as well as America’s diplomatic strategy toward Syria, which has been invited to join Middle East peace talks in Annapolis, Md., next month.

Mr. Cheney in particular, officials say, has also cited the indications that North Korea aided Syria to question the Bush administration’s agreement to supply the North with large amounts of fuel oil. During Mr. Bush’s first term, Mr. Cheney was among the advocates of a strategy to squeeze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n hopes that it would collapse, and the administration cut off oil shipments set up under an agreement between North Korea and the Clinton administration, saying the North had cheated on that accord.

2007년 10월 13일 토요일

이것은?


국회도서관에 가는 길에 이런 걸 봤습니다. 흠. 뭐하자는 수작일까요?

나를 낚은 이 한권의 책 -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

우마왕님이 쓰신 글을 읽고 나니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놈.


서평은 책을 살 때 선택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만 언제나 만족할만한 기준이 되지는 못 합니다. 특히 일반독자의 서평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GI Offensive in Europe : The Triumph of American Infantry Divisions, 1941~1945”라는 문제의 서적도 아마존의 독자서평을 보고 혹해서 산 책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책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 같은 제 3세계 후진국에서나 볼법한 싸구려 애국심을 학술적인척 하면서 팔아먹는 아주 고약한 책이 되겠습니다. 상국에서 조차 이런 저급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Peter R. Mansoor는 서문에서 Dupuy, van Creveld 등의 군사사가들이 주장한 독일국방군의 전술적 우수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독일군의 전술적 능력은 미군의 그것보다 우수했는가? 정말 미군은 행정적으로만 우수한 “회계사 군대”였고 독일군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졌는가?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외칩니다.

“나의 GI는 이러지 않아~”

그렇다면 정말로 Mansoor의 GI는 그러지 않았을까요?

Mansoor의 책을 읽고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나지가 않습니다. 아니 주장을 했으면 증명을 해야지 이게 뭐하자는 짓이란 말입니까!

물론 Mansoor의 연구가 아주 형편없는 저질은 아닙니다. 그의 연구는 상당한 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읽을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전혀 내놓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즉 미군이 독일군 보다 종합적인 전투력에서 우수했다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Mansoor의 글을 읽으면 미군의 전투력이 꾸준히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독일군이 전성기였을 당시의 전투력을 능가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 입니다. Mansoor가 들고 있는 많은 전투사례들은 독일군이 그야말로 붕괴 직전의 빈사상태에 이른 1944년 겨울과 1945년의 것들이니 제대로 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특별히 시간이 남아돌거나 돈이 남아돌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내용들은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른 훌륭한 저작들에 다 나와있으며 인용하는 자료들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정작 주장하는 핵심에 대해서는 변죽만 울리고 있으니 좋은 책이 되긴 처음부터 글러먹었다고 해야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