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5일 수요일

독일 영토 내에서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딜레마

요즘은 Ingo Trauschweizer의 The Cold War U.S. Army를 읽고 있습니다. 책이 다루는 주된 내용이 냉전기 미육군의 편제와 교리 문제이다 보니 전술핵 사용 문제가 많이 언급되는데 간혹 동맹국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이 책의 125쪽에 실린 1961년 7월 14일 슈트라우스(Franz J. Strauss) 독일 국방장관이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회담했을 때 했다는 발언이 눈길을 끌더군요.

슈트라우스는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에 대해 맥나마라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1평방마일 당 210명의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고 핵무기 공격에도 취약합니다. 핵무기는 전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쟁을 억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기묘하고 이상한 존재가 되겠지요.”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의 독일은 자칫 잘못하면 판돈으로 걸어 놓은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날 각오를 하고서라도 도박을 해야 할 처지였는데 아마 핵무기 사용은 그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도박이었을 것 입니다. 썼다 하면 쪽박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바르샤바 조약군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 그대로 딜데마 중의 딜레마가 아니었을 지.

슈트라우스와 맥나마라의 회담 녹취록은 나중에 한번 입수해 보고 싶습니다.

2009년 7월 14일 화요일

약간의 불만

조폭선생, 일본 극장가 접수


저는 나카마 유키에는 좋습니다만 '고쿠센'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싫습니다.

고쿠센 극장판을 찍는다는 소문이 들릴 때 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뭐, 이렇게 툴툴거리긴 해도 어떻게든 구해서 보긴 하겠죠;;;;

'트릭'의 속편이나 나와줬으면 싶은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고;;;;

한미동맹에 대한 김대중의 시각

하드를 정리하다가 작년 8월 10일의 일요진단 특집에서 복사한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날 일요진단 특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 초정해서 국내외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파일을 찾은 김에 그 부분을 인용해 보죠.

김대중 : 우리는 한미관계건 한일관계건 모든 것은 우리 국익 중심으로 생각해야 됩니다.우리가 국익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군사적으로 안전해야 합니다.

군사적으로 안전하게 우리를 도와줄 나라는 미국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은 아주 중요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미한다는 것은 우리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죠.

그러나 미국만 따라가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하고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국, 러시아, 일본하고도 반드시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4대국 관계를 잘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호체제, 이것을 당분간 하되 머지않아 6자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동북아안보기구가 생길 겁니다.

그러면 남북이 합친 6자 중심으로 안보기구가 생기면 거기에서 4대국도 같이해서 자기들이 의무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협력할 것입니다.그런 것을 내다보면서 당분간은 그런 체제가 올 때까지는 미국하고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나라하고도 좋게 지내야 합니다, 절대 나쁘게 지내면 안 됩니다.그건 우리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요진단(2008.8.10), KBS1

제 개인적인 감상은 생략;;;;

2009년 7월 12일 일요일

당혹감

밥벌이용 원고를 교정하는 중 배가 출출해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라면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밖에는 폭우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군요.

배가 고파 일 할 의욕도 안 나는데 냉장고도 썰렁합니다.

이것 참;;;;


ps1. 이런 날은 뜨끈 뜨끈한 순대국에 술 한잔 해야 하는데 말이죠.

ps2. 이런 날은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도 나름 괜찮습니다.

ps3. 블로그에 쓰려고 계획해둔 글이 몇 건 있는데 본업에 밥벌이도 해야 하다 보니 계속 밀리는 군요. 예고편이라도 때리면 의무감에서라도 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ps4. 밥벌이용으로 하는 일이라도 특성상 아주 재미있는 자료가 많이 굴러들어오는데 '업무상 기밀'이라는 딱지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별로 심각한 내용도 아닌 자료들인데 대외비라니 그것참...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국회도서관

인터넷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 많은데 특히 돈이 있다고 해도 물량이 없는 경우는 꽤 난감합니다.

그런 경우 국회도서관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국회도서관 검색창에 입력하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Jan Glete의 Navies and nations도 괴이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재고를 찿기 힘든 물건인데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도움을 받은 경우입니다. Glete의 다른 저작들은 가격이 황당한 경우는 있어도 인터넷에서 못구하는 수준은 아닌데 요상하게도 Navies and nations는 헌책도 찾기가 어렵더군요.

아마 국회도서관 만큼 납세자를 즐겁게 해 주는 정부기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나를 분노(?!?!)하게 한 것들...

분노(?!?!)할 일이 두 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조조로 본 트랜스포머.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인간들에게 할애해서 거지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주인공의 부모는 뭐하러 출연시킨 것인지.

그리고 악당 두목인 폴른이 부활한 프라임에게 순식간에 썰리는 것도 황당하더군요. 아 이거 너무 허무하잖습니까. 한 5분 이상은 치고 받고 싸워야지.

스트레스 풀려다 스트레스를 몇 배로 더 받았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터미네이터가 이것 보다 훨 나은듯....

화가 치솟아 영화 끝나자 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나오면서 중간 중간 에필로그를 보여주긴 하던데 전혀 당기지 않더군요.

두 번째는 점심에 먹은 버거킹 스태커.

전형적인 사진빨에 속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진에는 매우 큼지막하고 푸짐하게 나와 있는데다 가격도 다른 것 들 보다 비싸서 기대를 하고 주문했는데...

스태커 더블이라고 나온게 롯데리아의 천원짜리 버거들 크기더군요.

게다가 세트로 먹는데 감자가 없습니다!!!!!

아니. 햄버거 세트에 감자가 없다니! 가격은 와퍼세트보다 더 비싼데!

이미 트랜스포머를 보고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는데 버거킹에게 마무리 일격을 받았습니다.

이놈의 버거킹은 늘 속으면서도 새로운 낚시가 나오면 걸리고야 마니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따로 없습니다;;;;;

짜증이 나니 일도 잘 안되더군요.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외장하드를 하나 샀습니다

경제난으로 책을 사지는 못하고 카메라로 찍기만 하다 보니 전에 산 외장하드가 금새 다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1테라 짜리 외장하드를 하나 구매했습니다.


연결해 보니 내용물은 히다치 제품인데 꽤 시끄럽고 진동도 조금 심한 편 입니다. 그래도 이걸로 1테라의 여유 공간이 늘어났으니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겠군요.

현재 이것 말고 필수적인 자료만 넣어 다니는 80기가 외장하드와 500기가 짜리가 하나 있는데 500기가에 있는 자료를 새로 산 1테라 짜리로 옮기고 500기가 짜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어떤 자료를 얻게 됐는데 이게 용량이 상당하더군요. 외장하드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 바쳐야 할 판입니다.

그러고 보니 500기가 짜리를 산게 딱 1년전 이었습니다. 아마 빠르면 올해 안에 1테라 짜리를 하나 더 사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최근의 논쟁에 대한 단상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 들 중 상당수가 이글루스 분들이실테니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논쟁에서도 역시나 '팩트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멋진 발언이 나왔습니다. 당연하죠. 팩트는 일부일 뿐입니다. 그거 누가 모릅니까?

문제는 '팩트'라는게 '기본'이라는 거죠. '기본적인' 논리를 구성할 정도의 '팩트'는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그냥 망상 아닙니까. 기본도 안된 주장을 하면서 '팩트가 다냐!'라고 포효하면 제3자로서는 당혹스럽죠. 그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딱히 논리를 뒷받침 할 만한 '팩트'가 없으면 그냥 인정하면 될 일 입니다. 세상이 무너질 듯 광분하는 모양이 보기 좋지는 않죠.

인터넷에 목숨걸 일도 없을텐데 왜 그리 넷 상에서의 '명성'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ps. 논쟁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던져주는 재미있는 글 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건 확실히 긍정적인 면이로군요.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데자뷰? - (4)

sonnet님의 ‘가카론(論)’을 접하니 예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스탈린은 각 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탈린은 거의 모든 회의를 주관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했다. 스탈린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국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거의 모든 정치국원은 동시에 각 부의 구성원이기도 했기 대문에 행정부처의 회의가 끝난 뒤 정치국 회의가 열리는 것이 관례화되었으며 이 회의는 다섯명(스탈린, 보즈네젠스키,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말렌코프) 이외의 국원들도 참여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정치국과 각 부처는 스탈린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협의 체제로 기능을 했다.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에 대한 핵심 문제의 결정권은 스탈린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수없이 많은 부차적 문제에 개입했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242-243

이 이야기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시다면 당신은 한국인 입니다.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릴레이] 독서론

[릴레이] 독서론 - sonnet님


저는 딱부러지게 정리하는 데 소질이 없다 보니 제가 생각하는 '독서'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란 일종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 입니다.


가장 많이 쓰는 기능은 오락(?)이 되겠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하는 독서는 여름날의 여행 다음으로 즐거운 일 입니다. 특히 일요일이나 연휴 기간에 밀린 빨래나 방청소를 끝내고 소설이나 비사(秘史)류의 논픽션을 읽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그리고 읽는 것 만큼이나 책을 사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경제적인 부담이 조금씩 커진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요즘 돈 안들어가는 취미를 찾는다는게 쉬운것은 아니지요. 인쇄소에서 바로 나와 접착제 냄새를 풍기는 새 책 부터 누군가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했던 헌 책 까지 모두 사 모으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새 책 한 꾸러미가 도착할 때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경험을 하신 분들이라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유용한 기능은 생각을 가다듬는 도구라는 점 입니다. 생각이 막혀 답답할 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발견하고는 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기도 하고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점을 깨닫기도 하면서 조금씩 생각의 틀이 넓어진다고 느낍니다. 또 다른 사람의 좋은 문장을 통해 저 자신의 표현력을 다듬기도 합니다. 물론 재주가 부족해 독서의 효율은 낮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받는 분들께서 부담되지 않으신다면 진화심리학과 생물학 쪽으로 즐거운 서평을 올려주시는 漁夫님과 유익한 조언을 주시는 B군님께 바톤을 넘겨보고 싶습니다. 굽신굽신^^;;;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떡밥춘추 감상

얼마전에 自重自愛님을 통해 이글루 역사밸리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떡밥춘추TM'를 한 부 입수했습니다. 한 부 생겼으니 리뷰를 바로 올렸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이제야 올리게 됐습니다.

내용은 재미있었는데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판형이 조금 크지 않은가 하는 것 입니다. A5 정도 판형에 약간 두툼했으면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2호도 출간된다니 기대가 됩니다.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관대한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의 관대함(???)을 엿볼수 있는 일화 하나입니다.

기묘하게도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대부에 동의한 뒤 중국이 이것을 환불하는 문제와 환불 방법에 대한 문제는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환은 이루어 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기 도입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했으나 어떤 경우에는 스탈린이 그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스탈린은 중국이 인민군 2개 사단(1950년 초 북한군에 합류한 2개의 조선계 사단과는 별도로)에 장비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련이 전쟁 중 공급했던 64개 사단 분량의 장비 가격 중 20개 사단 분의 가격을 면제해 주었다. 중국은 나머지 무기에 대한 비용은 분할해서 지급했다. 모든 차관은 연간 10억 위안의 비율로 상환되어 1965년 말에는 모두 청산되었다.

중국 공군의 항공기들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4월 21일)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그 후 인민해방군은 (총 22개 중) 10개 전투기사단을 교대로 전쟁에 투입했다. 초기에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군의 장비에 MiG-15가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는 MiG-9 전투기만을 판매하는데 동의했다. 중국측이 구식인 MiG-9 전투기는 미군의 최신예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침내 스탈린에게 까지 알려지자 스탈린은 중국에게 372대의 MiG-15를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사실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땜빵 포스팅입니다.;;;;;

2009년 6월 8일 월요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군 교육 문제

뉴욕타임즈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증강 문제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Erratic Afghan Security Units Pose Challenge to U.S. Goals

사실 이 기사는 미국이 1945년 이래로 꾸준히 겪어왔던 이야기들의 재탕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교육시켜왔습니다. 한국과 같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던 반면 베트남과 같은 끔찍한 실패도 있었지요. 이라크의 경우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미국 고문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여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낮은 교육수준, 유능한 현지인 장교의 부족 문제 등등.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교육은 같은 이슬람권이었던 이라크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지만 사정은 더 나빠 보입니다.

이라크는 중동국가 치고는 양호한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후세인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국가와 군대체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초기에 저지른 삽질만 아니었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안정화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보다 사정이 더 열악한 곳 입니다. 소련의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역대 군사고문단 활동 중 아프가니스탄이야 말로 최대의 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러나 저러나 뉴욕타임즈가 인터넷 기사를 유료화 해 버린다면 정말 재앙일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이상 공짜로 읽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2009년 6월 7일 일요일

救職의 決斷!

통계는 어떤 문제에 대해 긴 글 보다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아래의 표는 1961년의 육군 장교 전역 통계입니다.


이 통계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가

윤민혁님이 댓글에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표를 하나 더 올립니다. 1962년도의 육군 장교 전역에 대한 자료는 제게 없어서 1960년의 통계만 올립니다. 1960년 또한 4ㆍ19로 인한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해 입니다. 1960년의 통계 또한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감군 계획에 따라 1960년도에 감축할 장교의 숫자입니다. 재미있게도 4ㆍ19이후 원래 예정에 없던 장군 전역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관급과 위관급에서도 원래 계획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교가 전역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9년 6월 5일 금요일

서동만 교수님 별세

슬픈 소식입니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 별세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05년에 출간된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의 저작비평회였습니다. 북한 자료를 이해 하는 문제 부터 대북 정책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군요. 저작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제 어설픈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 주신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가시는군요.

서동만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퍼레이드용 군대

1949년 8월 19일,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육군부 계획작전국(Plans and Operations Division)의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는 광복절 기념식에 대한 로버츠 준장의 짤막한 감상이 실려 있는데 꽤 의미심장합니다.

(광복절도) 다른 “중대한”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열병식은 굉장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치 베테랑 군인들 처럼 보였습니다. 장비, 군복, 차량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열병식을 하는 것 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As is usual on these “critical” days, nothing happened.* The Army parade was a knock-out. They looked like veterans – equipment, uniforms, vehicles all spotless. If they can only fight as well as they parade, we are “in”.

로버츠 준장이 볼테 소장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는 내용.

미국인들은 한국군 장교들이 겉치레를 중시하고 위세를 부리는데 신경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고문관들의 불평 중 하루 종일 훈련은 하지 않고 대대 전체를 동원해 사열준비만 하는 경우도 있는걸 보면 한국 장군들은 사열식 페티쉬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죠.

박정희가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해 사열식을 하는 등 요란한 전역행사를 했던 걸 보면 정말 한국 장군들은 폼 잡는걸 너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2009년 5월 31일 일요일

devil effect

정치 관련 포스팅들을 읽다 보니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면, 후광 효과와 정반대되는 '악마 효과(devil effect)'도 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이기적이라든가 하는 두드러지가 안 좋은 특성 때문에 다른 특성들도 실제보다 더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실제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고 더 우둔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한번은 어느 미성년자 강간 사건에 배심원으로 출석했다가 악마 효과의 극단적인 예를 보았다. 나와 함께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사람 하나가 피고인 심의를 시작하면서, “저 사람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는 저 자의 죄를 찾아야만 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후광효과의 영향을 받을 때는 자신들이 편견에 치우쳐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 한다.

스튜어트 서덜랜드(Stuart Sutherland)/이재진 옮김, 『비합리성의 심리학(Irrationality)』, 교양인, 2008, 47쪽


우리나라에도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하나 있죠.


“저 사람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는 저 자의 죄를 찾아야만 해요”


이제 가카에게 남은 선택은?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재활용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I hope that it can be impressed upon the Department that here we are not dealing with wealthy U.S. educated Koreans, but with early [sic], poorly trained, and poorly educated Orientals strongly affected by 40 years of Jap control, who stubbornly and fanatically hold to what they like and dislike, who are definitely influenced by direct propaganda and with whom it is almost impossible to reason.

- Lt. Gen. John R. Hodg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Vol.8,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630

세월이 흐르고 교육수준은 높아졌건만 근본적인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는 듯한 느낌.

참 난감하죠.

쩝;;;

2009년 5월 25일 월요일

무안단물?

6년전 빈의 벼룩시장에서 샀던 Division Das Reich 3권의 제본이 일부 뜯어지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산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본이 뜯어지니 약간 기분이 나쁘더군요. 적당한 접착제를 찾아 서랍을 뒤지다 보니 그 이름도 찬란한 "Made in Germany"가 붙은 Uhu 본드가 나왔습니다.


붙여보니 꽤 잘 붙더군요.^^


길바닥에서 사온 책 중 제본이 망가진 책이 조금 더 있었는데 모두 Uhu 본드로 붙여버렸습니다.


냄새가 별로인 점을 제외하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안단물이 따로 없습니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대박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직후,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의 전쟁포로국에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2월 3일 현재까지 관할 수용소와 전선의 임시수용소에 19만6515명의 포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내 : 86,894명
전선임시수용소 내 : 78,951명
보건인민위원회 소속 병원 내 : 11,995명
수용소,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 8,477명
수용소, 이송 중 탈진 또는 질병의 결과로 사망한 자 : 10,198명

이 밖에 각 전선군 및 야전군사령부의 집계중인 보고에 따르면 1만6천명의 포로가 내무인민위원회 관할의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 중 16,059명의 포로는 노동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 2,448명
부사관 18,243명
사병 66,203명

장교 : 장군 4명, 대령 23명, 중령 31명, 소령 68명, 대위 330명, 중위 141명, 소위 625명, 사관후보생 1,078명, 상선단 장교 6명, 기타 간부 141명

이 밖에 돈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전선군 관할지역의 포로 중 장교가 2,500명이고 이 중 장군이 24명 입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öhr 1943-1953, Bechtermünze Verlag, 1996/2000, s.38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 번으로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가 전쟁이 시작된 뒤 1년 반 동안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장군은 여섯배!

그야말로 대박 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스탈린 동지도 꽤나 흐뭇하셨을 듯.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Men on Iron Ponies 라는 단행본이 출간됩니다

아마존 뉴스레터를 받았는데 Matthew Darlington Morton이라는 저자의 Men on Iron Ponies라는 단행본이 나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목과 저자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예전에 읽은 박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Men on Iron Ponies는 2004년 Morton이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입니다. 군사 분야로 센스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논문이 미국 기병대의 기계화를 다룬 것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긴 한데 이미 논문을 가지고 있는지라 책이 출간되더라도 구매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Morton의 논문은 플로리다 주립대학 전자도서관에서 전문을 공개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링크 : Men on "Iron Ponies," The Death and Rebirth of the Modern U. S. Cavalry


예전에 유사한 주제를 다룬 Through Mobility We Conquer: The Mechanization of U.S. Cavalry가 출간 되었을 때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이 책이 비치되어 김이 샜던 기억이 떠오르는 군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경제 사정을 감안해서 책을 사야 되지만 실제로 재미있는 책이 나왔는데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배가 아픕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불황의 한 가운데에 있으니 입맛만 다시는 수 밖에요.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장하준에 대한 단상

sonnet님이 지난 4월 3일에 있었던 SBS 시사토론을 해설과 함께 요약해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onnet님이 인용하신 토론 내용을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토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SBS시사토론: 이창용-장하준(sonnet)


저 또한 다른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창용이 장하준에 대해 우세한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봅니다. 사실 지난 정권에서 장하준이 명성을 떨치다 보니 이 어린양도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국가의 역할’을 모두 돈 주고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장하준이 SBS 시사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니 장하준이 그의 저작들에서 보여준 취약점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창용은 꽤 설득력 있는 사례들을 들고 나오는데 장하준은 왜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질 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장하준이 들고 있는 사례들은 대공황 이전의 세계를 설명할 때는 적절할지 몰라도 대공황 이후의 세계를 설명 하는데는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경우는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장하준은 선진국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주로 19세기와 1차대전 이전의 20세기의 사례를 들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선진국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위상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결과 대공황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된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장하준의 저작들은 재미있긴 하지만 선진국의 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오늘날의 세계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 입니다. SBS 시사토론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됩니다.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봉하마을에 가서 보물찾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뉴스를 보던 중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보이더군요.

盧 "명품시계, 아내가 버렸다" (연합뉴스)

봉하마을 어디인가에 1억짜리 시계가 굴러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봉하마을에 가는 분들은 보물찾기를 해 보는 것도 좋겠군요.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경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지난번에 슈타인호프님이 쓰셨던 ‘한국 군경의 총기 교체(1946~1951), 그리고 최후의 빨치산이 가졌던 총’에 엮어서 씁니다. 지난 번에는 한국전쟁 직전 육군의 소총 부족 문제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국립경찰의 총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죠.

먼저 아래의 표를 보시겠습니다.


출처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이 표는 1949년 말 미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반기보고서(Semi-annual Report)의 부록에 실려있는 도표를 참고로 한 것 입니다. 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느끼실 겁니다. 네, 제주도와 철도경찰의 무장 현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가 참고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본에는 이상하게도 제주도 이하가 잘려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표의 내용으로 돌아가지요.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경우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도 나와 있듯 빨치산이 38식 소총을 많이 보유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에 동원된 경찰이 대량의 38식을 보유했던데 있습니다. 전북과 전남의 경우도 경북 보다는 적지만 역시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의외인 것은 경찰이 보유한 소총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미제 카빈이라는 점 입니다. 빨치산을 다룬 회고록이나 소설 등을 읽다 보면 일본제 소총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후방의 경찰이 사용한 총기는 일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실제 통계를 보면 카빈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빨치산 토벌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일제 소총 보유량이 많고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경찰은 미제 카빈의 보유량이 압도적이라는 점도 역시 의외입니다.

이 밖에 경기도 경찰과 강원도 경찰의 경우 경상도와 전라도 경찰은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은 50구경 중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는 7정, 강원도는 4정을 보유하고 있군요. 다음으로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 경찰이 가장 많은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서울과 경기도 보다도 더 많은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피의 책(The Book of Blood)

오랜만에 소설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상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장르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다 보니 소설을 돈 주고 사는 경우도 매우 드문 편 입니다.

며칠 전 저녁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조금 쌓인 포인트로 어떤 책을 사는게 좋을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가 탄 가장 앞의 칸이 텅 비었고 반사적으로 작년에 재미있게 봤던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이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블로그에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의 영화판 이야기를 했을 때 이준님이 원작 소설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 일도 있고 해서 번역판이라도 구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그날이 되어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국어판 피의 책을 샀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적었습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원작 단편집은 분량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책의 표지 윗 부분에 Book of Blood ‘Best Collection’이라고 인쇄되어 있더군요. 단편 몇 개를 골라서 번역한 것이라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서 피의 책(The Book of Blood), 미드나잇 미트트레인(The Midnight Meat Train), 피그 블러드 블루스(Pig Blood Blues),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Sex, Death and Starshine), 스케이프고트(Scape Goat)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좋은 번역의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소설의 경우는 재미있게 읽히도록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서 번역도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어판을 읽지 않았으니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만.

미드나이트 미트트레인을 읽으니 영화판과 다른 사소한 점이 몇 가지 있던데 원작의 주인공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더군요. 영화판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자를 추적하다가 점차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식성의 변화를 통해 나타냈는데 원작 소설의 주인공은 그냥 평범한(?) 식성의 소유자입니다. 단편 소설을 장편 영화로 각색하면서 늘어난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내용의 변화를 준 셈인데 꽤 훌륭한 각색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준님이 예전에 설명해 주신 것들이라서 대략적으로 알기는 했지만 직접 읽는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 스케이프고트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헤브리디스 제도(Hebrides) 어딘가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이 풍기는 분위기는 클라이브 바커가 제작에 참여한 게임, 언다잉(Undying)의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엉뚱하긴 하지만 한국 작가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공포 소설을 쓰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더군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단편들도 있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Mission Accomplished???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백악관, 워싱턴
1948년 8월 15일.

친애하는 하지 장군.

남한에 합법적 정부를 건설함으로서 장군에게 부여된 어려운 임무가 완결되었습니다. 귀관의 임무는 크나큰 성공으로서 완료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정권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된 것은 우리 정부가 그렇듯 귀관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귀관은 박해 받는 민족이 자유를 되찾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관은 미합중국 군대를 지휘해 한국을 잔인무도한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장군이 담당한 이 불행한 나라의 국민들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자유 선거를 치렀습니다. 해방된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에게 부여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매우 막중합니다.

장군은 자신의 수완, 솔선, 외교적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들을 극복했으며 미국과 한국 국민은 장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 입니다.

해리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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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House, Washington,
August 15, 1948

My dear General Hodge

The Achivement of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completes the difficult task that was assigned to you. Your mission has been accomplished with outstanding success.

As the government of this area is turned over to the Korean people, it must be very satisfying to you, as it is to our Government, to know that you have been largely instrumental in restoring freedom to a persecuted nation.

You led United Stataes troops to liberate Korea form the tyranny of a ruthless conqueror. The people of your area of this troubled country have held a free election in which a remarkably high percentage of the qualified voters participated. How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destiny rests with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a free people.

By your skill, initiative and diplomacy you have overcome seemingly insurmountable obstacles and you have earned the gratitude of the people, both of the United States and of Korea.

Very sincerely yours.

Harry Truman

August 17, 1948, Press Release on Replacement of Commanding General, US Armed Forces in Korea,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TS Sec. IV & V Box 22 (Folder #2)

그러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2009년 5월 7일 목요일

Back to the Source 배너를 달았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캠페인이 시작됐습니다.

이름하여 Back to the Source!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가 횡행하는 요즘 참으로 훈훈한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9년 5월 5일 화요일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의 조선 관련 서술

또 책 이야기 입니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The Asian Military Revolution : From Gunpowder to the Bomb라는 책을 대출했습니다. 저자인 Peter A. Lorge는 머리말에서 화약무기의 개발이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어떠한 군사적 혁신을 가져왔는지를 고찰하겠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 인상이 약간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주요 내용을 살짝 훑어본 수준이지만 다루는 시기가 9세기에서 19세기 초 까지 인데다 공간적 범위도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라서 서술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에 대한 기술이 극도로 적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화약무기 도입과 활용에 대한 내용은 2장의 Japan and the wars of unification과 3장의 The Chinese military revolution and war in Korea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 지는 정도 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다룬 제3장 조차 명나라 군대의 화약무기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의 화약무기 사용은 해전과 관련해 다루어 지는 수준입니다. 2장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조선 수군의 대규모 화포 운용이 일본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3장의 경우는 임진왜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절반 정도의 내용이 원명교체기 화약무기의 사용과 명나라 시기 왜구의 창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에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와 조선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썩 서술의 밀도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조선군의 활동은 주로 수군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첫 번째 승리인 옥포해전과 조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와 화약무기의 대규모 사용이라는 서술만 있을 뿐 조선의 화포 개발이나 운용에 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거북선이 철갑선인지 아닌지 논쟁이 진행 중이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조선 육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육군이 대규모의 화약 무기를 운용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의 분량상 조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술이 너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원사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Samuel Hawley의 단행본인 The Imjin War : Japan’s sixteenth 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cuer China와 Kenneth M. Swope의 Crouching Tigers, Secret Weapons : Military Technology Employed during the Sino-Japanese-Korean War에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2장에서 일본어를 모르는 Noel Perrin이 일본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유포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특별히 잘못된 서술은 없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술을 보면 Lorge도 Perrin과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Lorge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거나 국내의 연구들을 활발히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최소한 군사편찬연구소의 저작들이라도 영역해서 외국에 소개한다면 한국 군사사에 대한 외국의 이해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강바닥에 삽질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일을 하는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한국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환빠 장군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라는 긴 제목과 제목에 걸맞게 두툼한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당장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펼쳐보니 역시나 환빠 도서였습니다.

모든 환빠 서적들이 그러하듯 책의 내용은 대부분 정신을 안드로메다 탐사를 보내는 수준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군사안보 문제를 환단고기에 엮어 내는 괴악한 감각의 소유자가 썼다는 점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희한한 취향을 가지셨는지 하도 궁금해서 저자의 약력을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195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14기), 이학사, 보병육군소위
1962년 미 특수전학교 유학
1965년 보병학교 유격학부 교관
1966년 주월 맹호부대 전사(戰史) 장교
1970년 독일군 참모대학 유학

(중략)

1985년 육군본부 작전참모장
1987년 육군 제1군단장
1988년 제1야전군 부사령관
1993년 국가안보회의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후략)

헉.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만 밟은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환빠의 거성 중 한 분인 고(故) 박창암 장군도 미 특수전학교에 유학하신 경력이 있으시지요. 미 특수전학교 교관 중 아틀란티스나 무우제국에 심취한 사람이 없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목차도 환상적입니다. 일부만 살펴보죠.

제 1절. 하느님과 으뜸신의 창세(創世), 개천(開天)시대
1. 하느님과 으뜸신의 우주 만물 창조
2. 광의의 우리민족(동아시아 諸民族) 형성과 발전
3. 평지평원원주민족 최초국가 환웅의 신시(神市)
4. 우리민족(국가)의 국가안보전략사상(사) 태동
5. 환웅천왕의 천명사상(天命思想)과 신정(神政)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기독교+환단고기 세계관을 기초로 여기에 군사학을 뒤섞어 이 괴작을 완성했습니다.

본문 자체가 매우 난감하기 그지 없는데 ‘동아시아 종주민족’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일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책이 기반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지금으로부터 대략 일만년 전 황해바닥(당시로부터 대략 BC4000년에 이르기 까지 황해는 육지였다)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열도의 평원 평지에는 유전인자를 같이 하고 농경생활(일부 북부에서는 반농반목도 하였다)이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동일민족이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 역사활동(석기시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BC300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구상의 대홍수를 비롯하여, 계속된 과우기(寡雨期)를 맞이하면서 황해가 조성되고 대륙과 반도와 열도가 생겨났다.(어떤 이는 이미 1만년 전에 황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럴 때 특히 황해바닥 평지민족은 동서남북방향의 구릉고지로 이주하였는데 오늘날의 한반도와 왜열도에는 당시에는 환경조건이 여의치 않아 당분간 원주민 그대로 소수의 조상들이 비교적 조용하게 그러나 나름대로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굳이 분류한다면 이들이야 말로 순수한 평지 평원의 원주민 이었다.

(중략)

그후 또다시 우리 원주민족의 한 고향, 즉 옛날 우리의 서언왕이 주름잡던 徐帝國이 번성하던 지역, 회대(淮垈) 지방의 초(楚)나라에서 항우와 유방이 그곳 주민들과 궐기하여 한(漢)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오늘까지 대륙의 그 우리 흡수동화민족을 이름하여 한민족(漢民族)이라 한다. 따라서 이 한민족은 바로 조상을 공동으로 하는 광의의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대륙의 우리원주민족적 성향이 강한 이 황해안 지대에 우리의 백제, 신라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전통적으로 주(周)시대에도 허용되었던 원주민 종족들의 종묘사직의 보존, 제사모시기와 함께 우리 평지평원원주민족 특유의 문화와 습성을 국시(國是)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특히 대륙에서 백제보다 북방인 낙랑지역에 자리한 고구려는 이 시점에서 원주민족성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우리 원주민족의 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서방민족이나 유목민족에 의한 민족적 식민이나 국가적 합방에 의한 혼혈과정을 비교적 경험함이 없이 평원평지원주민족의 혈통과 문화전통을 계속 유지해 왔던 역사지리적 안보환경을 가진 우리민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명실공히 우리 종주민족에 의한 우리 종주민족국가로서 새로운 민족부흥의 역사를, 이후 900여년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된다.

문영일,『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7), 187~189쪽

;;;;

넵. 살짝 할 말이 없습니다.

황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 민족의 기원 평원평지 문명이야기는 무슨 아틀란티스 이야기 같군요. 이 세계관을 가지고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를 리메이크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Weinberg의 Hitler's Foreign Policy 개정판을 찾던 중...

Gerhard L. Weinberg가 쓴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의 개정판, Hitler's Foreign Policy 1933-1939: The Road to World War II를 읽어야 할 일이 생겨서 서울 시내의 도서관 중 개정판을 갖춘 곳이 있는지 찾아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검색해 본 도서관 중 개정판을 갖춘 곳은 전혀 없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대 도서관이 구판을 비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 다른 대학들은 Weinberg의 저작 중 World at Arms나 World in the balance의 한국어판인 「히틀러의 오판」정도만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화여대의 경우 1994년에 나온 구판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곳들이 소장한 구판의 경우 1970~80년대에 나온 것들이라 상태가 좋지 않을텐데 개정판을 구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2005년에 나온 개정판의 경우 하드커버가 좀 비싼 편이라 그동안 사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읽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조금 난감하군요. 급박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뭔가 궁금한게 생겼는데 확인할 길이 없으니 엄청나게 찝찝합니다.

잡담 하나. 확실히 연세대학교 도서관은 쓸만한 책이 많습니다. 도서관 상호대차를 할 때 이곳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시사IN 85호 특집과 오늘자 한국일보 사설

시사IN 85호는 커버스토리로 ‘촛불 1년 무엇을 남겼나’라는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특집 치고도 매우 많은 분량을 촛불 1년 기획특집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미네르바 인터뷰’라던가 보수주의 논객들의 촛불 1주년 좌담회 등 흥미로운 기사가 많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제 개인적으로는 작년 촛불시위의 의의에 대해서 정리가 덜 된 상태인데 한 가지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 입니다. 그 방법이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매우 거칠게 표출된 것 도 사실이지만 시민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촛불시위로 촉발된 정치적 관심이 투표 참여 등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로 제대로 전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물론 촛불 시위 과정에서 근거 없는 주장이 횡행하고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이 표출된 사례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시사IN 85호의 특집 기사 중에서 ‘보수주의자 3인 방담 : 촛불이 진보의 성찰 기회 날렸다’라는 대담은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대담에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대변인 변철환, 공정언론시민연대 사무처장 최홍재, 미디어 워치의 변희재(;;;;) 등 세 사람이 참여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최홍재의 지적 중 ‘광우병 대책회의’가 쇠고기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나 진보 진영이 촛불 시위의 성과에 고무되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네르바 박대성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알맹이가 없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박대성의 해명 몇 가지는 꽤나 미심쩍습니다. 특히 미국 금융계에서 일했다는 거짓말을 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자전수필의 내용을 따라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 처럼 만화책 주인공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백기가 분량의 논문 자료를 가지고 공부했다고 자랑을 하면서 검찰이 모든 자료를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정말 거짓말 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국일보 이야기로 넘어가서…

오늘 자 한국일보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이 꽤 재미있는 글을 썼는데 노사모와 박사모를 모두 연예인 팬클럽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노사모에서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을 듯 싶은데 제 생각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의 평가가 적절한 듯 싶더군요.

하지만 오늘 자 한국일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신문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신문 엑스포’라는 사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지난번에 혹평한 동아일보 사설, ‘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와 마찬가지로 신문이 팔리지 않아 힘드니 신문 좀 읽자는 내용이지만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 사설은 좌빨신문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치졸한 중상모략 까지 했지요;;;)

잡담 하나. 1주년을 맞아 다시 촛불을 들자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다시 촛불을 드는 것은 무익한 역량의 낭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의 촛불 시위도 2개월 만에 동력을 소진하고 탄력을 잃었는데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가 불확실한 이 시기에 무리해서 판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갑자기 대중 참여를 촉발할 새로운 사건이 생길수도 있겠습니다만…

잡담 둘. 시사IN의 이번 특집 기사 중 여대생 사망설을 유포해 구속된 ‘또랑에 든 소’라는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아직도 여대생 살해가 은폐 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진실 규명을 위해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도 이 정도면 가히 정신병 수준입니다.

2009년 5월 1일 금요일

모 기관의 어떤 자료집과 경제

술자리에서 모 기관에서 수십년간 내 오던 어떤 자료집의 최신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신판에서는 '경제' 관계 내용이 중점적으로 서술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미확인 이지만 '가카'의 기업인 시절 '활약상'에 대한 내용도 제법 포함될 모양이더군요.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간만에 모형을 만졌습니다.

어제 원고를 마감해서 넘겼습니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주던 물건을 처리하니 마음이 홀가분해 지더군요. 오늘은 책을 읽고 예전에 만들어 둔 모형들을 칠했습니다.


사진으로 찍으니 실제 색 보다는 좀 밝게 나온 것 같군요. AFV클럽에서 발매한 이 티거 I 후기형은 만들때 전차장 큐폴라의 손잡이를 날려 먹어서 대충 비슷한 다른 손잡이 부품을 붙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505중전차대대 형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궤도가 말랑말랑한게 한편으론 좋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불안하더군요. 그냥 타미야처럼 반조립식으로 된 궤도를 넣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타미야 티거 I은 세트로 3호전차 N형을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 말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티거도 한 대 있는데 그것은 다른 3호전차와 함께 503중전차대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4호전차는 티거 두대를 칠하고 남은 걸로 칠했습니다. 사실 장포신 4호전차 보다는 단포신을 선호하는데 당분간 제품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듯 싶으니 이정도로 만족해야 겠습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만약 한국에 거대한 화교 공동체가 존속하고 있었다면?

요 며칠간 이글루스를 뜨겁게 달군 '전라도 떡밥'을 보니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청년층이라 하더라고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도 지역감정 문제가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만약 다른 민족집단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할 경우에도 전라도 차별이 심했을까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구 중 한명이 지적하기를, 다민족 사회의 경우 사회 내부의 갈등을 가장 만만한 소수집단에 발산하곤 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전라도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도 대신 두들겨 팰 더 만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그렇다면 상당한 규모의 화교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화교가 그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물론 화교 사회가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다면 그 특성상 경제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했을 테니 전라도 차별과는 다른 양상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사실 한국의 전라도 차별은 흑인차별에 가깝고 동남아시아의 화교는 유태인에 가깝죠. 물론 경제적으로 별 볼일 없는 오늘날의 화교는 흑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외국인 이주자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외국인 이주자들이 별로 반가운 입장은 아닙니다만 적개심까지 불태울 필요는 있는가 싶더군요. 전라도를 대체할 새로운 샌드백이 등장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기술의 진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대략 7~8년전(1986~87년) 이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명과 매릴랜드 베데스다(Bethesda) 소재 육군 개념분석국(Concepts Analysis Agency) 국장이었던 밴다이버 3세(Edward B. Vandiver III)와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육군에서 기획(planning) 및 예산편성(budgeting)을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전투 모델 중에서 실증된(validated) 것이 없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모델은 실제 세계의 경험을 안정적으로 모사할 수 있어야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증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모델을 활용한 계획이나 예측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에드 밴다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모델에 입력할 현대 제병협동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세부적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그는 오늘날 사용할 모델이 묘사할 미래의 전쟁에는 대량의 전차가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확보할 대상으로는) 많은 수의 전차가 투입된 전투를 선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만약 중동에서 벌어진 1973년 10월 전쟁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의 데이터를 입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벌지전투는 어때요?”

공동저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밴다이버는 그것이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밴다이버는 그날의 대화에 대해 잊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 제안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게 말하자면, 몇 달 뒤 이 제안서는 밴다이버에게 보내졌고 승인되었으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리 회사는 나중에 공식적으로 “아르덴느 전역 시뮬레이션 데이터 베이스(The Ardennes Campaign Simulation Date Base)” 약자로 ACSDB로 알려진 작업에 들어갔다. 2년 뒤 ACSDB는 공식적으로 밴다이버의 개념분석국에 납품되었다.

ACSDB는 약 39메가바이트의 데이터가 포함된 엄청난(massive)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는 1944년 12월 16일에서 1945년 1월 16일의 32일에 걸친 기간 동안 약 100개의 부대에 대한 매일 매일의 세부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포함된 부대는 1개의 독일군 집단군, 4개의 독일군 야전군, 8개의 독일군 군단, 35개의 독일군 사단, 3개의 독일군 여단과 그외의 소규모 부대, 2개의 연합군 집단군, 2개의 미국 야전군, 6개의 미군 군단, 42개의 미군 사단, 미군의 소규모 부대, 1개의 영국군 군단, 2개의 영국군 사단, 2개의 영국군 여단, 독일공군 부대, 영국공군부대, 미국 육군항공대 부대가 포함되었다.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p.xv-xvi

사실 웃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웃기더군요;;;; 80년대 중반의 39메가바이트라면 확실히 엄청난 용량인데 이걸 21세기에 읽자니;;;;

전자제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은 정말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 정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기술이라서 실제로 와 닫는 정도가 높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말하길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 지는 관심이 없다

몇 등을 하는지만 관심 있을 뿐이다.

동감.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1942년 8월 28일, 스탈린그라드의 대공황

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의 Stalingrad는 참전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투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는 내용입니다.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은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작전 중심의 딱딱한 내용을 선호하긴 합니다만) 내용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한 62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시기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 오던 1942년 8월부터 독일군이 시가지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펼친 11월 중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격작전 이후의 내용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위 공세에 대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반격능력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 체험 위주의 서술이어서 소련 시절에는 검열 등의 문제로 논의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전장에서의 비겁행위라던가 독일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와 닫는다고 할 수 있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오던 1942년 8월 말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황사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942년 8월 28일, 전후 모든 소련의 역사서술에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일이 일어났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의 피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게이 자차로프는 당시 시내의 레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독일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기능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유지되었다. 그런데 8월 28일에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도 없었고 의사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원 원장이 우리를 돌봐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의 직원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병원 바깥의 불안한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창가 쪽으로 갔다. 우리는 엄청난 혼란을 목격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집단적인 광란에 빠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상점과 건물들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했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도데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시가 텅 비었어’, ‘ 공무원들이 모두 사라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놈들이 온다!’

우리는 창 밖으로 계속해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운송수단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가족이 말 한마리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거리를 지나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모두가 스탈린그라드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동무들을 병원에서 이송할 것이오! 이 도시는 포기되었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모두 불러모았다. 백 명 정도가 병원에서 나왔다. 우리는 시가지를 따라 볼가강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갑자기 여러 대의, 아마도 열 다섯 대에서 스무 대 정도의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독일 비행기들은 병원 쪽으로 가서 연속적으로 병원에 폭탄을 투하했다. 아마도 병원에 남아있던 환자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격이 있기 직전에 빠져 나온 것 이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순간 조용해 졌다.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기력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밤이 되어야 볼가강을 도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지휘관 알렉세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제군들, 보급품을 구해야 겠네’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인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식량을 가져 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우리는 일반 상점으로 갔다. 상점들은 모두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과자, 꿀, 빵, 소시지 같은 각종 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식량을 구한 뒤 강변으로 다시 집합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뒤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탱크 생산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호한 결심을 내린 일부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집단적인 공황이 단호한 저항 의지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살아 남았다.”

발렌티나 크루토바는 이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상점들은 그냥 열린 상태로 방치되었고 수천명의 사람들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스탈린그라드가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의 피난 사태를 촉발한 것은 스탈린그라드 경찰과 민병대가 갑자기 시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Michael K. Jones, 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 Casemate, 2007, pp.59~61

전쟁 이야기에서 제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러한 집단 공황상태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당사자가 된다면 그건 진짜 고역이겠죠. 그런 사태를 제 생전에 겪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1945년 독일이 붕괴될 무렵 동부 독일의 이야기나 1975년 베트남 붕괴시의 이야기도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요즘도 가끔씩 읽는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같은 책은 전체 내용이 이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요.

너무 노골적이잖아!

일하다가 잠시 인터넷을 하는 중인데 이런 재미있는 사설을 봤습니다.

[사설]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

그래도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 일간지인데 사설 치고는 너무 천박하군요;;;; 대놓고 배고프다고 악을 쓰는게 안스럽니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겠지만 정론지 행세를 하려거든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지요. 그게 싫으면 그냥 정식 옐로페이퍼로 나가던가.

일 때문에 피곤해서 머리도 멍~한데 이런 사설을 읽으니 정말 안드로메다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타블렛을 샀습니다.

이런 저런 작업에 쓰기 위해서 타블렛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대로 쓸만해 보입니다. 가끔 인식이 잘못되기는 하는데 크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더군요. 지도를 편집하거나 편제표를 그릴 때 써보려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아 어렵군요.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